영성/어거스틴

어거스틴의 “성서해석 방법”

은바리라이프 2010. 12. 23. 19:32

어거스틴의 “성서해석 방법”

 

 

 



1. 들어가는 말

기독교 교육론은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하나님의 도성과 더불어 위대한 저작으로 불려지고 있다.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육론”은 총 4권으로 이루어져있는데 1-3권은 396년에 완성되었지만 마지막 4권은 427년에 완성되었다. 앞의 3권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제 4권은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실들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1권과 2권은 성경을 적절하게 읽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예비적인 연구가 꼭 필요한 성속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학도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처방한 가르침. 3권은 오늘날의 해석학이라고 불리는 주제들, 즉 성경의 해석을 다루고 있는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초기 라틴어 저작이다. 4권은 기독교 교사가 경건의 진리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실질적 강해 지침서이다.) 본 발제는 어거스틴과 관련되 생애, 일련의 사건들을 전제로 하고 어거스틴의 성서해석에 대해서만 기술하도록 하겠다.


2. 서론

어거스틴은 성경을 연구하는데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원칙을 말하기에 앞서 미리 이 원칙을 접하고 보일 수 반응을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는 반대자들이다. 두 번째는 반대자들은 어거스틴의 성경연구 방법을 받아들여 응용해 봤지만 밝히려고 하는 점을 밝히지 못해 이 방법이 무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이미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방법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의 모호한 점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받아서 더 훌륭히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선생으로부터의 배움을 강조한다. 또한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거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 없이 알려 줘야한다고 강조한다. 해석의 원칙을 가르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읽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사람과 같다.


*어거스틴의 성경해석의 원칙(성경 해석자 사전)

어거스틴 주석의 첫 번째 원칙은 성경을 연구할 때 성경 본문을 70인역의 라틴어 역이나 70인역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치우친 언어 원칙이다. 어거스틴은 “히브리어에 나타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제롬의 열광을 과민하게 싫어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신앙과 신학의 모든 면에서 암브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암브로스는 필로와 오리겐이 이해했던 것처럼 70인역의 풍성한 의미를 어거스틴에게 확신시켰다.

어거스틴의 성경해석의 두 번째 원칙은 70인역 성경을 교회에서 인정받은 것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구약성경 기사와 예언들을 예수와 복음서들에 적용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또한 어거스틴은 성경을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로 구분하여 성경을 해석하였다.

어거스틴을 알렉산드리아나 안디옥 학파와 같은 뚜렷한 해석학파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성경 해석은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부들의 석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다른 라틴 해석가들, 심지어는 밀란의 암브로스와도 비교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그의 마지막 작품은 독창적인 성경해석가로 유명하게 하였다.“기독교 교리에 대해” 이 작품은 397년 첫 단락이 쓰여지기 시작하여 대략 어거스틴이 사망하기 3년 전에 완성되었다.

어거스틴이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직적에 쓰여진 티코니우스의 소론은 성경해석학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쓴 최초의 조직적인 논문이였다. 이 논문은 어거스틴에게 “기됵교 교리에 대해”의 저술을 중단하게 만들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주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427넌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독자들에게 유이갛게 티코니우스의 인용문을 요약하고 수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요약 설명하였다.



2.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육론”

-1권-

이 권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처음 부분은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의미를 표현하는 데 관한 것이다.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려면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이 어디에 담겨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 사물을 즐겨야 할 사물, 이용할 사물들, 이용과 즐김을 함께 할 사물들로 나눈다. 즐겨야 할 유일한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 즉 최고의 선이며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즐기지 못한다. 우리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더 나아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모두 이용해야 한다. 이용되어지는 사물들은 모두 하나남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1)성경을 해석하려면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며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하면서 해석해야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로 나눌 때 풍성해짐을 발견하고 의미를 해석하였다.

2)사물은 무엇이며 부호는 무엇인가?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부호(sign)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그 사물 자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이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부호가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3)이용과 즐김은 어떻게 다른가?
타향에서 방랑하며, 고향을 떠난 생활이 행복하지 않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고향까지 가려면, 육로로 가든 수로로 가든 교통 기관이 필요하다. 그런데 통과하는 지방의 산천이 아름답고 여행 자체가 상쾌해서, 마음이거기에 매혹되어, 이 여행을 끝내고 싶지 않고, 애용해야 할 수단들을 도리어 즐기게 된다. 이런 가짜 기쁨에 빠져 우리는 고향의 진짜 기쁨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죽은 인생에 처한 우리의 모습이다.

4)어떤 성경 해석이 사랑을 육성한다면, 비록 그 해석에 과오가 있더라도, 그것은 해롭거나 거짓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해석자는 시정을 받아야 한다. 성경이나 성경의 일부를 이해하노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의 사랑을 육성하는 데 이바지하지 않는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직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사랑을 육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석을 하는 사람은, 설령 그 곳에서 원저자가 표현하고자 한 정확한 뜻을 붙잡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을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석이라면, 그의 해석은 해로운 것이 아니며, 기만 행위라는 비난은 면한다. 기만에는 거짓말을 하겠다는 의도가 있으며 세상에는 계획적으로 속이는 사람이 많지만, 속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7)잘못된 해석은 위험하다.
원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뜻을 경솔하게 채택하는 사람은 그 뜻과 조화시킬 수 없는 발엄들을 발견하는 때가 많다. 만일 이 발언들이 옳고 확실하다면, 그가 다른 구절에서 얻은 의미는 옳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만일 그가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면, 부지 불식간에 성경이 성가시게 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고후 5:7), 성경의 권위기 흔들릴 때에는 믿음도 비틀거리기 때문이다. 믿음이 비틀거리면, 사랑 자체도 식는다. 믿음에서 떨어진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에서도 떨어진다.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고 또 사랑한다면, 선한 일을 실천하며 도덕을 열심히 지킨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대상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모든 지식과 모든 예언은 이 세 가지, 즉 믿음, 소망,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2권-
이제 부호를 논한다. 우선 부호에 대한 정의를 내린 후에 부호를 자연적인 것과 관습적인 것 둘로 나눈다. 여기서는 관습적 부호만을 논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수효가 많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성경 해석가는 주로 말과 관련이 있다. 부호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곤란을 제거하기 이해서는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며, 여러 가지 번역을 비교하고 문맥을 주시해야 한다.


1)부호의 본성과 종류
사물들은 다른 것에 대한 부호(sign)인데도, 사물 자체로서만 고려하라고 말했는데 이와 같이 부호를 논하려는 지금은 사물을 그 자체로서 무엇이냐에 유의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호라는 사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유의해야한다. 부호는 우리의 감각에 주는 인상을 초월해서, 그 결과로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다른 것을 주입한다.

그런데 부호에는 자연적인 것과 관습적인 것이 있다. 자연적인 부호는 그것을 부호로서 사용하겠다는 의도나 욕망이 사람에게 없는데도, 어떤 다른 것을 알려 준다. 반대로, 관습적인 부호는 생물들이 그 마음에 있는 느낌이나 깨달음이나 생각을 될 수 있는 대로 서로 잘 알리기 위해서 교환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부호들도 사람을 통해, 즉 성경 저자들을 통해서 주셨다.

2)부호들 가운데서 말(단어)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이 서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각, 청각, 감각들에 따른 부호를 사용한다. 또한 눈짓, 손짓, 사물을 이용하여 생각을 전달한다. 그러나 말로서 귀를 통해 전달되는 부호는 이것들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성경에서 비유적 표현 때문에 뜻이 모호한 것은 그만큼 쓸모가 있다.
성경에는 애매 모호한 구절이 많아서, 부주의하고 성급한 독자들은 뜻을 혼동하며 오류를 범한다. 어떤 구절은 비슷한 해석조차 짐작할 수 없음 어떤 표현은 어두컴컴하게 덮여 있어서 뜻을 알아낼 수 없다. 이것은 사람들이 교만을 버리고 노력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일이라고 믿는다. 성경은 경탄할 지혜와 우리의 행복에 대한 배려로, 성경에 평이한 구절들을 두어 우리의 굶주림을 구하며 모호한 구절들을 두어 우리의 식욕을 자극한다. 모호한 구절들에서 발굴되는 의미나 아주 평이한 다른 말씀에 나타난 것이나, 같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4)모르는 부호를 없애려면 언어,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알아야 한다.
고유한 부호들에 대한 무지를 없애기 위한 최상책은 언어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번역자들이 많고 서로 다른 점이 많아서 의문이 생길 때에 성경 원문을 참고하려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아멘, 할렐루야, 리가, 호산나 등등 히브러어 단어들이 번역없이 나온다. 그중 아멘과 할렐루야와 같이 특히 거룩한 권위를 가진 말들은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보존된다. 그러나 다른 두 단어와 같이 외국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어떤 나라 말에는 다른 나라 말에 해당하는 숙어가 없는 단어가 있는데 “리가, 호산나”와 같은 마음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시하는 감탄사가 주로 그런 말이다. “리가”는 놓나 사람이 지르는 소리요, “호산나”는 기쁜 사람이 지르는 소리이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번역들이 서로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는 원래의 언어로 알아두어야 한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셀 수 있으나 라틴어 번역은 무수히 많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 헬라어 사본을 얻은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말을 안다고 생각되면, 그 지식이 아무리 빈약하더라도, 제각기 감히 번역에 착수한 것이다.

여러 번역가들은 각각 자기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표현하려고 한 그 생각 자체를 알려면, 반드시 원문을 보아야 한다. 아주 유능한 번역가가 아니면 원저자의 뜻에서 벗어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은 사물에 대한 지식인데, 약한 사람일수록 그런 지식보다 부호에 대한 지식이 있는 체하려 한다. 이런 지식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어렵다. (번역 성경중에는 70인역과 이탈리아역이 가장 우수하다.)

5)비유적인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사물에 대한 지식이 다 필요하다.

비유적인 부호들에 관해서도, 그 부호들을 모르기 때문에 앞길이 막힐 때에는 일부는 언어에 대한 지식으로, 일부는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뜻을 밝힐 수 있다. 예수님이 흙에 침을 발라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이야기에서 실로암 못이라는 말에는 비유적인 뜻이 있다. 성경에는 기자들이 설명하지 않은 히브리어 이름이 많은데, 그것을 설명 할 수 있다면, 성경에 있는 수수께끼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명으로는 아담, 하와, 아브라함, 모세등 그리고 지명으로는 예루살렘과 시온, 시내산, 레바논, 요단 등 우리가 모르는 것들의 뜻을 설명했다. 이런 고유 명사들을 연구하고 설명하면, 성경에 있는 비유적 표현들의 뜻이 뚜렷하게 되는 때가 많다.

사물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도 비유적 표현의 뜻을 모호하게 만든다. 성경은 자주 비유로서 동물이나 광물이나 식물에 대해 언급하는데, 우리가 그 특성을 모르는 때와 같다. 뱀은 공격을 받으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몸 전체를 노출시킨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이것은 뱀과 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마1:16) 주님의 명령을 해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는가? 바꿔 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박해자에게 내어 주며, 우리 몸을 구하려고 하나님을 부인해서 몸으로 믿음을 말살하지 말라는 것이다. 혹은 뱀은 묵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 힘을 얻을 때에 아주 좁은 구멍으로 나간다고 하므로, 우리도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엡 4:22) 사도의 교훈과 뱀의 지혜를 본받으라는 말씀은 잘 일치되고 있다. 아울러 세상 사람들이 가진 지식도, 유익하면 멸시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6)역사는 어느 정도까지 도움이 되는가?
과거의 연대에 대해서 우리가 얻는 지식은 어렸을 때에 교회 밖에서 배운 것이라도 성경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올림픽 연대나 집정관들의 이름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기록을 밝힐 때가 많다. 주님께서 탄생하시며 수난당하신 때에 어느 집정관들이 재직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은 46세에 수난하셨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한 연수는 46년이라고 했고, 주님은 성전이 자기의 몸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2:19-21) 조금이라도 의심을 던지는 자료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위해, 복음서와 세속 역사를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다.

7)자연과학은 어느 정도로 성경 해석을 돕는가?
지리와 동식물과 광물 기타 물체들에 관한 글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런 지식은 성경의 난해한 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것들은 부적이나 미신적인 도구로서 유용하다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이며 자유로운 지식과 구별해서 유용하다는 것이다.

별들에 대한 지식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상에 대한 묘사다. 그러나 성경에는 별에 대한 말씀이 아주 적다. 달의 운행은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기 위해서 매년 사용하며,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천체들이 떳다가 지는 것이나 운행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이 천문 지식은 그 자체는 미신이 아니지만, 성경 해석에는 거의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무익한 일에 주의를 쏠리게 하므로 도리어 해롭다고 하겠다. 또한 별들에 대한 지식은 점쟁이들의 심히 해로운 과오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무시하는 편이 더 유익하고 합당하다.

8)기술이 성경 해석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
이 방면은 사람이 노력한 결과다. 의학과 농업과 항해술 같은 것이다. 또는 무용과 달음질과 씨름과 같이, 행동 자체에 대한 지식이 있다. 이 모든 지식을 가진 사람은 과거를 미루어 미래를 추측한다. 이런 기술이 있는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연결한다. 우리는 이런 기술들에 대해서 피상적인 지식이라도 속성으로 얻어 둘 필요가 있다. 그 기술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성경에 이런 기술들에 관련된 비유적인 말씀이 나올 때에, 그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9)논리학의 이용 가치와 허위에 대하여
이것은 우리 지성에 관계된 것이며, 주로 추리법과 수에 관한 것이다. 추리법은 성경의 각종 난문을 탐구하며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우리는 논쟁을 좋아해서는 안되며, 상대편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유치한 짓을 해서도 안된다. 소위 궤변이 많아서, 거짓된 논리이면서도 바른 것 같기 때문에, 둔한 사람뿐 아니라 영리한 사람도 방심하다가는 속게 된다. “나는 당신이 아니오” , “나는 사람이오” , “그러므로 당신은 사람이 아니오” 처음에는 부분 부분은 맞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람을 논리로서 함정에 빠트리게 된다. 성경은 말재주만 부려미움을 받는다“(집회서 37:20)고 하면서 남을 속이려는 것이 아닐지라도, 진지한 목적과 양립하지 않을 정도로 말을 장식할 때에도, 그것을 궤변이라고 부른다.

10)수사학과 변증법
이 기술들은 배운 사람은 어떤 의미를 확인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의미를 표현하는 데 이용해야 한다. 이런 기술들을 배워 이용함으로써 얻으려는 목적이 따로 있으며, 이런 기술의 복잡하고 어려운 원칙들을 배우는 것보다 그 목적을 직접 얻는 것이 더 쉬운 경우가 있다.(걷는 법을 가르치는 법) 영리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것들에 의해서 진리를 깨닫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들을 통한 논쟁이나 의견 형성을 이루기 보다 진리를 알려주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11)이교도들이 한 바른 말은 우리가 모두 이용해야 한다.
소위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들, 특히 플라톤파가 한 말이 바르고 우리의 신앙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채택해서 이용해야 한다. 이교도들의 학문에는 그릇되고 미신적인 공상, 그리고 불필요한 노고의 무거운 짐이 붙어 있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도하에 그들과 결별할 때에, 마땅히 그것들을 기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에는 진리 탐구에 유용한 교양도 포함되었고, 훌륭한 도덕적 훈계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광산은 도처에 있다. 단지 이도교들은 그것들(음,금)을 부당하게 귀신숭배에 악용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의 불행한 관련을 정신적으로 끊고 떠날 때에, 그들의 금은을 취해서 복음 전파 사업에 이용해야 한다. 즉, 금생에서 필수적인 사회 생활에 적합하게 만든 각종 문화도 기독교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12)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태도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에, 끊임없이 명상해야 할 말씀이 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0) 애굽에서 아무리 많은 보물을 가져 나왔을지라도,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는 출애굽의 사건이 모든 면에서 활용 가능한 예로 사용되어진다.)


-3권-

모호한 부호를 논한다. 모호한 부호는 직접적이거나 비유적이다. 직접적인 부호인 경우에는 모호한 원인이 구두법이나 발음이나 명확하지 않은 단어에 있으며, 해결 방법은 문맥에 주목하거나, 번역들을 비교하거나, 원어를 참조하는 것이다. 비유적인 부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을 경계해야한다. ①문자적인 표현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②비유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표현이 문자적인가 또는 비유적인가를 판단하는 원칙을 정한다. 우선 일반적인 원칙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순결한 생활이나 올바른 교리와 부합하지 않게 될 때에는, 그 표현은 비유적인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다음에 비유적인 것임이 증명된 표현들을 해석하는 원칙들을 정한다. 여기서 가장 일반적인 원칙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려하지 않는 해석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이다. 도나투스파의 티코니우스가 말한 원칙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1)구두법에 주목해서 모호한 점을 제거하는 법
문자적인 말이 성경의 뜻을 모호하게 만들 때에는, 우선 구두법이나 발음에 잘못이 없는가를 보아야 한다. 따라서 어떤 구절을 읽을 때에 구두점이나 발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다른 분명한 구절들과 교회의 권위에서 얻은 신앙 규범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읽는 법이 두 가지 이상이며 신앙과 조화되는 때에는 전후 문맥을 참고해서 어느 구두법이 문맥과 일치하는지를 결정한다. 이단자들의 구두법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이 계시니라.”(창1:1) 그 다음 문장은“이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창 1:2)라고 한다. 이것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만든 구두법이다. 그러나 신앙규범은 이런 구두법을 배척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등성에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읽으라고 지시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느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두 번째는 어느 쪽으로 읽어도 신앙과 상치되지 않는 것으로 문맥을 따라 결정해야한다. 이것은 읽기에서 한 문장이 다른 문장으로 연결될 때 생략되거나 바뀌어도 내용이 변질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성경의 비유적인 표현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련한 노예 상태다.

비유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의문은(문자는) 죽은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 3:6) 사도의 말씀이 예이다. 비유적인 표현을 문자적인 것같이 해석하면, 그것은 육적인 해석이 된다. 영혼의 속성으로 영혼을 동물보다 우수하게 만드는 것은 지성인데, 문자적인 의미를 맹목적으로 고집함으로써 그 지성을 육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짓이다. 문자를 해석을 따르는 사람은 비유적인 말을 문자적인 말로 인정해서,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을 따라 2차적인 뜻(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

3)상징들에 예속된 사람과 예속되지 않은 사람
부호를 이용하거나 숭배하면서 그 부호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부호의 노예가 되었다. 반대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부호의 효력과 뜻을 알고 이용하며 존중하는 사람은 그 눈에 보이는 무상한 부호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호들이 모두 가리키는 실제를 경배한다.

4)비유적 표현을 식별하는 방법
비유적인 표현을 문자적인 것 같이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에 앞서 유의해야할 다른 원칙이 있다. 우선 어떤 표현이 문자적이냐 또는 비유적이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확실히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생활의 순수성이나 교리의 건전성과 일치 할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을 비유적 표현이라고 결정할 수 있다. 생활의 순수성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교리의 건전성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은 각종 죄에 대해서 그 고유한 죄성에 비추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관습에 비추어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나라나 자기 시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면 죄에 아무 비난할 것이 없다고 여기며, 동료들의 관습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칭찬하거나 인정할 가치가 없다고 하는 때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청주으이 습관에 반대되는 일을 명령하거나, 거기 반대되지 않는 일을 비난하면 사람들은 동시에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비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사랑뿐이며 비난하는 것은 정욕뿐이다. 성경은 과거와 미래와 현제에 대해서종통 신앙을 주장할 뿐이다. 과거를 서술하며 미래를 예언하며 현재를 묘사한다.

5)명령과 금지를 해석하기 위한 원칙
어떤 문장이 명령인 때에는, 즉 범죄나 죄과를 금지하거나 조심스러운, 또는 친절한 행동을명령할 때에는 그 문장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나 범죄나 죄과를 명령하는 것 같을 때, 또는 조심스럽거나 친절한 행동을 금지하는 것 같을 때에는 그 문장은 비유적인 것이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범죄나 죄과를 명령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한 비유다. 그 뜻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우리를 위하여 그의 육신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감사히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6)도나투스파인 티코니우스의 원칙론을 검토함
티코니우스는 “원칙론”이라는 책을 써서 일곱 가지 원칙을 설명하고, 그 원칙들은 열쇠와도 같이 성경의 무호한 점들을 열어 줄 수 있다라고 했다. 이 원칙들을 주의깊게 검토하면, 성경의 숨은 뜻을 케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성경 말씀들을 이 원칙들로 전부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도나투스도 자신이 여러 가지 모호한 점을 설명할 때에 그의 원칙들은 하나도 이용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 원칙들에 해당되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코니우스는 이 원칙들을 추천하면서 그것만 잘 알고 응용하면 율법, 즉 성경에 있는 비유적인 표현들은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중요시했다.

6-1)티코니우스의 첫 번째 원칙.
첫 번째 원칙은 주님과 그의 몸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머리와 몸, 즉 그리스도와 교회를 때로는 한 사람으로 알리는 것은 안다. “그러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라.”(갈 3:29)는 헛된 말씀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한 사람이며, 곧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말씀이 머리에서 몸으로 옮기고 또 몸에서 머리로 옮기면서도 사람은 변함이 없는 것을 볼 때에, 어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한 사람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6-2)티코니우스의 둘째 원칙.
둘째 원칙은 주님의 몸의 이분법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부적당하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그와 함께 영원히 있지 않을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참 몸과 섞인 몸, 또는 참 몸과 가짜 몸, 또는 이와 비슷한 것에 대한 원칙이라고 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양쪽이라고 한다. 그물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일시 섞여 있기 때문이다.(마 13L47,48) 교회의 좋은 부분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암흑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사 42:16) 그리고 선한 부분과 섞여 있는 나쁜 부분에 대해서 그들은 “물리침을 받으리라”고 첨가하신다.

6-3)티코니우스의 셋째 원칙.
셋째 원칙은 약속들과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했는데, 영과 문자에 관한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칙은 은혜와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 원칙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쓸 원칙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중대한 문제다.

6-4)티코니우스의 넷째 원칙
넷째 원칙은 종(種)과 유(類)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한 도시는 여러 나라로 구성된 큰 사회의 한 부분이므로 도시는 종이요 국제 사회는 유라고 부른다. 논리학자들은 부분과 종을 세밀하게 구별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자세한 구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이 성경에 있을 때에는, 한 도시가 아니라 한 지방이나 종족이나 왕국이 문제가 될 때에도 물론 응용되는 원칙은 같다. 예컨대 예루살렘이나 두로와 바벨론 같은 이방 도시에 대해서만, 그 도시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나라에 더 잘 해당하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하는 말씀은 모든 나라의 경계를 넘어 전세계에 더 적합할 때가 있다.

성경은 분명 어느 점까지 종에 대해 말씀하다가, 그 점에서부터 유로 말씀이 넘어갈 때에 독자는 조심해서 유에서 더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것을 종에서 찾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6-5)티코니우스의 다섯째 원칙.
다섯째 원칙은 시간에 관한 것이다. 이 원칙에 의해서 성경에 분명히 표현되지 않은 시간의 길이를 추측하거나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적용한다. 즉, 제유(synecdoche)라는 어법과 올바른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다. 제유는 부분을 전체로 보기도 하고 전체를 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예컨대 주님께서 산상에서 세 제자 앞에서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며 옷이 눈같이 희어진 사건에 대해서, 마태복음 17:1절에서는 엿새 후에 있었다고 말하고 누가복음 9:28에서는 8일 후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가지 숫자는 이대로는 다 옳을 수 없고, 8일 후라고 한 사람은 주님이 예언하신 날의 나중 부분과 예언이 성취된 날의 앞의 부분을 온전한 이틀로 계산해야 하며, 엿새 후라고 한 사람은 이 이틀 사이에 있었던 온전한 날들만을 계산했다고 해야만 그들의 말이 맞을 것이다.

티코니우스가 올바른 숫자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존중하는 숫자들을 의미한다. 즉 일곱, 열, 열둘, 그 밖에 숙독하는 사람이 곧 알게 되는 숫자들이다. 이런 숫자들은 항상 형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때가 많다. 예레미야가 말한 70년은 영적으로 해석할 때에, 교회가 외인들 사이에 나그네로 있는 기간 전체를 의미할 수 있다. 또한 제곱수를 만들어 열에서 백, 열둘에서 백 마흔 넷을 만들 때에도 전체를 의미한다. 계시록에서는 백마흔넷을 사용해서 성도 전체를 의미한다.

6-6)티코니우스의 여섯째 원칙.
여섯째 원칙을 티코니우스는 소급 반복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잘 주의하면 성경의 난해한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 기록이 사건이 발생한 순서를 따른 것 같거나, 사건이 계속된 것 같을 때에, 사실은 이야기가 무언중에 이전으로 돌아가서, 빠뜨린 것을 순서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이해하고 이 원칙을 응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 해석하게 된다.
“주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주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창 2:8-9)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뒤에 이야기한 일들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동산에 두신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 즉 하나님이 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자기가 지으신 사람을 두셨다는 사실들을 간단히 말한 다음에, 이야기가 과거로 돌아가서(소급 반복해서) 빠뜨린 것, 곧 동산을 창설하신 이야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각종 나무들ㅇ르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15)고 한다.

6-7)티코니우스의 일곱째 원칙.
일곱째 원칙은 마귀와 그의 몸에 관한 것이다. 마귀는 악인들의 머리며 악인들은 이를테면 그의 몸으로서, 그와 함게 벌을 받아 영원한 불로 갈 운명이다. 마치 그리스가 교회의 머리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 되어 그와 함께 영원한 나라와 영광을 받을 운명인 것과 같다. 따라서 주와 그의 몸에 관한 처음 원칙에 따라 우리는 성경이 같은 한 주격에 대해서 하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즉, 어느 부분은 머리에 대한 것이며 어느 부분은 몸에 대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이, 이 마지막 원칙도 마귀에 대한 말씀이 어떤 때에는 그 자신에 관해서 그의 몸에 관한 것 같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의 몸을 구성하는 것은 명백히 길에서 떠난 자들뿐 아니라, 실제는 그에 속하면서도 일시 교회 안에 섞여 있으면서, 세상을 떠나든지 또는 최후의 키질로 겨와 낱알을 가를 때까지 간다.



*나오는 말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거스틴의 성서해석 방법에 관한 책들을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해석되진 반역서를 읽은 기분이 들었음을 밝힌다. 그 이유는 첫째 책들의 문구가 너무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짧은 문장들 끼리 한문단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주제로 말하고 있음을 종종 경험했다. 두 번째로는 전체 내용이 산파식 문답법으로 전개되면서 산만하면서도 중요하고 생각해 봐야만 하는 몇몇 구절들로인해 해석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는 어거스틴의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서이외에 그의 여러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이미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발제자의 능력으로 인해 그 내용을 충분히 학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서술에 있어 예화가 무척 적으면서도 때때로 설교식 기술이 되어있음으로 인해 전체 흐름의 맥을 잡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어거스틴의 성서해석은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힘들다. 우선 그는 성경의 해석함에 있어 전적인 영감설을 부인한다. 성경은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성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한 것들을 사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단, 그것들이 성서를 올바르게, 미신적이지 않게 한다는 전제하에서 요청하고 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우선 원어와 원뜻에 충실할 것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황과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사물과 성서해석에 있어 사물을 바로 파악할 것과 부호(sign)를 모호하지 않게 명확히 할 것을 강조한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성서해석의 방법은 실제로 지금 우리가 현장에서 주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면서도 많은 부분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무지함으로 성서해석에 임하고 있다는 생각을지울 수 없었다. 성서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성서의 사실과 의미를 바로 발견하고 올바른 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참고도서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교육론”,  김종흡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도널드 K.맥킴,  “성경 해석자 사전”,  강규성-장광수 역, C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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