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

은바리라이프 2010. 12. 22. 15:05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

 

 

성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3가지 다른 견해

 성화의 정의에 대해선 이 정도로 끝내고 다음으로 가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성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청결하게 하고 순결하게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차적으로 일치시켜가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상이한 견해들의 핵심이 있으며 세가지 주된 그룹으로 분류되는 사상이 있다.

 

 첫째로 내가 온전주의자(perfectionist) 견해라고 묘사하는, 어떤 형태로든지 이 세상 속에서 온전한 크리스천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견해가 있다. 나는 정확을 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언어로 묘사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이 순간에 여러분은 무엇이 온전함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상이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에 무관하게,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온전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이 첫 번째 그룹이 갖는 사상의 내용과 분파들을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을 시도해보자. 그들 중에는 크리스천으로부터는 죄가 온전하게 제거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정원에 들어가서 잡초를 보고 잡초의 보이는 부문만이 아니라 삽으로 잡초를 뿌리까지 파 내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화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온전하게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들은 한 해 또는 십 년의 기간 동안에 훨씬 많이 할 수 있으나, 온전함이란 당신이 이 순간에 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온전함의 슬라이딩 스케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를 들면 유명한 Charles G. Finney과 그의 동료, Ezra Mayhem과 같은 소위 미국의 Oberlin School에 속하는 이들에 의하여 주장된다. 그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 웨슬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크리스천 남녀가 주어진 순간에 죄로 알고 있는 죄를 고의로 짓지 않는 것이다. 존 웨슬레에 따르면,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죄를 범할 수 있으나, 이미 죄라고 일고 있는 죄는 고의로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간과 순간의 상태이다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당신은 다음 순간에 범죄할 수 있으나 당신은 이 순간에는 온전하다. 그리고 그것은 죄라고 알고 있는 죄에만 해당된다. 웨슬레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모르고 죄를 짓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나중에 당신에게 알려 질 것이고, 그리고 당신이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순간에 그 죄를 당신은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온전하다. 그러므로 성화는 온전함을 의미하지만 절대적인 온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들은 죄로부터 온전하게 씻김을 받은 정결한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성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죄라고 알고 있는 죄 그리고 마음 먹고 짐짓 지은 죄로부터의 씻김을 받은 마음을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달리 표현한다. 여기서 나는 다시 성화를 ‘온전한 사랑’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하는 존 웨슬레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크리스천들은 죄인지 모르고 범죄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연약하며 많은 면에서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면, ‘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온전하다 할 수 있는가?’ 그는 만일 그들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생활과 행실에서 비록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다. 그들은 그 순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다 들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나중에 더욱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에 있어서는 그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웨슬레는 순간 순간에 있어서 온전함과 성화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의 특징은 성화는 순간적으로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화를 열망하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화를 간구하면, 그분께서 성화를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화를 순간에 눈깜짝하는 사이에 받을 수 있다. 온전주의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를 즐긴다: ‘당신이 칭의를 받을 때에 당신의 성화도 받아야 한다.’그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전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험적인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소위 반작용의 법칙(the principle of counter-action)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17 및 18세기에 널리 퍼졌으며, 이직도 인기가 있다. 이 견해는 죄의 제거는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하게 죄의 제거를 가르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패배하기 위하여 일생을 통한 투쟁을 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법칙이 있다. 이들의 가르침은 로마서 8:2를 기초로 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그들은 말한다. 그렇다 ‘죄는 신자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리고 믿음으로 그분에게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죄지음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크리스천 속에는 죄의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것을 없에는 반작용을 하고 남을 정도로 더 크다. 그리고 많은 예화들이 사용되었다.

 

 Evan Hopkins 목사가 그러한 예화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 유명한 두 개를 소개한다: 첫째는 부지깽이 예화이다. 부지깽이는 차갑고, 까맣고 단단하다. 그러나 이 부지깽이를 불 속에 넣으면 어떻게 변하는가? 빨갛게 되고, 뜨겁고 말랑 말랑해 진다. 그것을 불에서 꺼내면 다시 차갑고, 까맣고 단단해 진다. 이것이 이 학파의 성화에 관련한 가르침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당신은 빨갛고, 뜨겁고 말랑 말랑하다; 당신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전과 똑 같은 상태로 되돌아 간다.

다른 하나의 예화는 구명대에 관한 것이다. 중력의 법칙은 무거운 몸을 물 속으로 가라 앉힌다, 한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수영할 줄을 모르면 가라 앉는다. 그런데 반작용의 법칙이 있다. 공기로 부풀린 구명대를 그 사람에게 입히면 어떻게 되는가? 그를 가라 앉게 한 법칙에 반작용이 일어난다. 그 사람이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명대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옛 법칙이 작용하여 그는 가라 앉게 된다! 그는 구명대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는 계속 바라보고 신뢰해야 한다. 그것이 전체적인 영적 상태이던, 특정의 죄이건 간에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 안에 거하며,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가 항상 승리하도록 지켜주실 것이다.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와 같이 이 가르침은 그것은 정상적인 경우, 경험으로 시작하여 과정으로 계속된다. 다시 말하면, 성화란 수령해야 하는 것이며, 순간에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나서는 그 경험 속에 거하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세 번째 가르침은 성화란 우리의 거듭남의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이며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지속되며 죽음을 지나서만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견해가 앞의 두 견해와 크게 다른 점은 이 견해는 성화를 칭의에 뒤이어 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다; 이 견해는 성화는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에 시작되어 우리의 육신이 최종적으로 영화를 입어 타락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로마서 8:22-23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는 것은 우리의 몸이 종국적으로 구속될 때인 것이다.

이 가르침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Holiness by Bishop Rile를 읽을 것을 권면한다. 이 책은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한 여러 가지 다른 아이디어와 이론들을 다루고 있다. 내가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다시 말하거니와, 이런 가르침들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들을 분파 의식을 가지고 검토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방위하며 다른 가르침을 비난 하는 자세로 읽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자주 말하지만, 나는 존 웨슬레에게 크게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성화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가르침 전부를 받아드리지는 않는다. 이것은 반드시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 중에는 있다. 그러나 나는 온전주의자들의 성화 및 거룩함에 관한 서적들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강조점들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그들의 저서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내 속에서의 성화가 진척되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간증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게 한 것을 감사 드린다.

그러므로 온통 성경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저서들을 읽자. 그리고 성경으로 가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냉정하게 그들의 가르침을 검토하여 이 문제에 관한 진리에 도달하도록 애쓰자. 우리들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복을 받아 풍부해지며, 우리들은 성화의 교리를 공부하는 데 시간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성화 – 하나님의 일과 우리 몫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의 목적은?

우리는 성화의 교리에 관하여 세가지 다른 견해를 생각해 보았는데 이제 더 직접적으로 해설하는 형식으로 이 주제에 접근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세가지 원칙을 매우 명백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그 세가 견해와 이론을 검증해야 한다.

신구약을 통해서 어디서나 발견되는 첫 번째 중요한 원칙은 성화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이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3 은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이것이 출발점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분께서 구약에서 하신 모든 일의 하나님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성화이다.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갈라디아 4:4)의 목적도 우리들의 성화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그 목적도,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도 우리들의 성화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것의 모적,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들이 성화이다.

 

우리들이 이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더 많은 증거를 원한다면 요한 17:17을 묵상하라: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떠나려 하실 때에 그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 하셨다. 주님은 무엇을 기도했는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19절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란 말씀은 주님께서 그분의 아버지에게 ‘ 저는 저 자신을 아버지의 처분에 맡깁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에게 하라고 하신 이 마지막 일을 위하여 제 자신을 구별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마지막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 상의 죽음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성화 되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2: 14)라고 말씀한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의 성화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성화 이하의 그 어떤 것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훌륭하게 읊은 시가 있다:

“그 분은 우리들이 용서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분은 우리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죽으셨다네.”    - Cecil Frances Alexander-

 그런데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십자가 상의 죽음을 용서에만 결부시키고 두 번째 부문은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고수해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성화는 구원의 모든 과정의 목적이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회피해야 할 분명한 위험들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첫째로 큰 위험은 이러한 여러 가지 구원의 과정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서로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는 위험이다. 우리가 항상 강조해온바, 성경 전체를 통하여 살피면 칭의 성화 등은 모두 함께 연결되어 있다. 그들 모두가 모여 하나가 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들은 느슨하게 연결된 연결되지 않고 조각조각의 가르침들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