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않은 자의 복수가 낳은 파멸
박찬욱의 <올드 보이>
![]() |
무비씨 : 마침내 이 영화 <올드 보이>를 다루어야 할 차례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키노씨 : 여기는 스포일러 따위를 우려해야 할 자리가 아니고, 이 영화가 개봉된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돼가고 있으니 편한 마음으로 대담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무비씨 : 역시 ‘복수극’이라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야겠지요?
키노씨 : 게다가 ‘근친상간’의 테마가 결합돼 있습니다.
무비씨 : 세간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의 연장선에서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펼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키노씨 : 복수라는 테마와 근친상간이라는 테마가 비중만 다를 뿐 전작에 이어 <올드 보이>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은 어쨌든 사실이니까요.
무비씨 : <올드 보이>에서는 근친상간이라는 테마의 비중이 아주 높습니다.
키노씨 : 극 구조상으로도, 반전의 충격 효과라는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무비씨 : <복수는 나의 것>은 제목 자체부터가 성경에서 따온 말이라 그렇지만, <올드 보이> 역시 주제가 복수이니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키노씨 :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테마는 사랑과 은혜지만, 복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범죄가 형제살인 아닙니까. 그것도 결국은 복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망신시킨 동생한테 형이 복수를 한 거지요.
무비씨 : 복수야말로 인간이 저질러온 유구한 범죄라 할 수 있겠군요.
키노씨 : 하나님께서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준엄하게 언명하신 것도 결국은 그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복수는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인 셈입니다. 그 결과는 예외없이 항상 공멸(共滅)입니다.
무비씨 : <복수는 나의 것>에서나 <올드 보이>에서나 다같이 복수의 종말이 처참한 비극으로 설정돼 있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겠나 싶군요.
키노씨 : ‘근친상간’도 ‘복수’만큼이나 기독교적인 테마입니다. 굳이 십계명의 일곱 번째 항목인 ‘간음하지 말찌니라’를 끌어다대지 않더라도 성경 곳곳에서 근친상간의 테마가 출몰함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비씨 : 그 또한 인간이 저질러온 유구한 죄악의 하나겠지요.
키노씨 : <올드 보이>의 충격적인 반전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습니다만, 그것이 근친상간과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는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셈입니다.
무비씨 :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종류의 근친상간이 나오는데, 하나는 남매간의 것이고 또하나는 부녀간의 것이지요?
키노씨 : 언뜻 생각하면 섬뜩하리만큼 불경스러운 소재인 듯하지만, 성경은 그보다 한층 더 충격적인 근친상간의 사례를 제시해놓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그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 대목에 나옵니다.
무비씨 : 롯과 그의 두 딸의 이야기 말씀이시로군요.
키노씨 : 천사의 도움으로 지옥같은 소돔 성을 탈출한 롯은 두 딸과 함께 산 속의 굴에 은신합니다. 어느 날 큰딸이 작은딸한테 그러지요.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그리고는 그 말 그대로 이틀 동안 두 딸이 차례로 아버지와 동침하여 잉태하고 급기야 각기 아들을 낳습니다. 큰딸의 아들은 ‘모압’으로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고, 작은딸의 아들은 ‘벤암미’로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명백히 부녀간의 근친상간입니다.
무비씨 : 차이라면, 똑같은 죄악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사건으로, <올드 보이>에서는 복수의 기원으로 각각 설정돼 있다는 점이겠군요.
키노씨 :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복수를 감행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른다는 뜻이니까요. <올드 보이>의 진정한 주제는 이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무비씨 : 하긴 복수 자체가 인간적인 교만의 소산이니까….
키노씨 : 단순하게 파악하면 이 영화는 자신의 행위가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은 채 누군가가 함부로 유포시킨 소문으로 깊이 상처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우진)이 그 소문을 낸 당사자(오대수)한테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피상적으로는 고의적이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의 태도, 다시 말하면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에 대한 그 심리적 도덕적 무신경이 죄악의 일종으로서 문제가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따지면 상처를 입은 사람의 태도도 상처를 입힌 사람의 태도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무비씨 : 어째서지요?
키노씨 : 더 깊은 기원을 따질 수도 있지만, 일단은 이우진의 죄가 먼저 있었습니다. 요컨대 오대수는 전혀 무고한 사람한테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의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대수가 이 사건을 기억조차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대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정작 문제는 이우진의 태도입니다. 그는 이미 있었던 자신의 죄는 생각지 않고 자신이 입게 된 상처에만 얽매입니다. 그리고 무섭고 처절한 복수를 결심하고 감행하지요.
무비씨 : 기독교적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잡아나간다면 이우진의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하겠군요.
키노씨 : 물론 오대수의 죄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적인 차원에서는 이우진의 태도가 훨씬 더 문제적입니다. 15년 동안 이유도 모른 채 감금돼 있는 동안 복수를 결심하고 풀려나온 뒤 복수를 감행하기는 오대수도 마찬가지지만 실상 그는 이우진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대수는 전혀 복수를 하지도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당하기만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도 오대수의 몫이 돼 있습니다.
무비씨 : 그가 감금돼 있는 동안 집필한 ‘악행의 자서전’이 바로 그것이지요?
키노씨 : 심지어 그는 이우진 앞에 무릎을 꿇고 처절하게 사죄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 혀를 자르기까지 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겉으로는 우리 누구나가 흔히 무심코 저지르게 될 위험성이 있는 오대수의 죄악에 초점을 맞추는 척하면서 정작은 이우진의 죄악을 역설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우진의 자살은 결국 심판인 셈입니다.
김정수/ 소설가·영화에세이스트 galadia@hanmail.net
'GG뉴스 > 문화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석, 가족들이 제사지낸다고 혹시 당신도... (0) | 2010.08.31 |
---|---|
엘 네카모트(복수하시는 하나님) (0) | 2010.08.28 |
복수(復讐)의 치유와 회복(2) (0) | 2010.08.28 |
복수의 치유와 회복 (1) (0) | 2010.08.28 |
복수의 치유와 회복 (0) | 2010.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