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사도행전 자료

본티오 빌라도.

은바리라이프 2010. 7. 24. 00:17

본티오 빌라도.

 

?~AD 36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 로마의 유대 총독(26~36).
예수를 재판하고 그에게 십자가형을 내렸다.
그의 생애에 관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필라테는 삼니움족의 폰티이 씨족 출신인 로마 기사계급이었다고 한다(폰티우스라는 이름은 여기서 생겨난 것임). 그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총애를 받던 세야누스의 도움으로 유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세야누스의 보호만 믿고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모독하여 그들의 적개심을 샀다. 이를테면 예루살렘 전역에 황제의 초상을 걸어놓고 경배드리게 하는가 하면 이교의 상징이 새겨진 주화를 찍어냈다. 세야누스가 몰락한(31) 뒤로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더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그의 약점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합법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게 했을 수도 있다(요한 19 : 12). 사마리아인들은 그가 게리심 산에서 자신들을 공격한 사건(36)이 발생하자,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게 그를 고발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로마로 소환 명령을 받고 잔혹행위와 탄압을 저지른 혐의로, 특히 적절한 재판절차 없이 사람들을 처형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4세기의 불확실한 전설에 따르면 필라테는 39년 칼리굴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인물 자체에 대한 판단은 거의 전적으로 후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문헌을 근거로 추리해볼 수밖에 없다. 주요자료는 요세푸스의 글과 〈신약성서〉이다. 요세푸스의 언급은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에 따르면 필라테는 의지가 강하고 엄격하며 권위주의적인 로마 지도자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합리적이고 실제적이었으며 어떤 사건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에서 그쳐야 할지를 아는 인물이었다. 예컨대 요세푸스는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유대인의 율법을 폐지하고'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누려온 특권을 줄일 생각으로 필라테는 자기 군사에게 예루살렘에 병영을 차리도록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기장(旗章)에 황제의 초상을 부착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유대인들이 필라테가 있는 카이사레아에 와서 항의시위를 벌이자, 그는 물러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꺼이 죽겠다는 태세를 보이자 그는 부하들에게 황제의 초상을 철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요세푸스는 필라테가 "그들의 굳은 결심에 마음속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추론하면서 그의 성격의 장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그는 연약하고 동요하기 쉬운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만약 축제일에 그가 바라바 대신 예수를 풀어주더라도 군중들이 똑같이 기뻐할 것인가(마르 15 : 6 이하) 하고 필라테는 고심하다가 연약하게 굴복하고 만다. 그의 아내가 자기의 꿈 이야기를 그에게 전하자(마태 27 : 19) 필라테는 자기의 책무를 포기하고 황제에게 떠넘긴다. 제4복음서에서 필라테는 예수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받아들인 것으로 묘사되며(요한 19 : 7~11) 예수가 자칭 '유태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19 : 21). 필라테의 성격과 인품을 알려주는 지침이라는 점에서 〈신약성서〉는 분명히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탄생기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점차 이방인들 사이에 세력을 넓혀나가면서 로마 당국자들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는 의도가 집요하게 깔려 있다.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결국 필라테와 그의 부인은 개종했으며, 특히 부인은 동방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