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사도행전 자료

빌라도의 재판에 있어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들

은바리라이프 2010. 7. 24. 00:44
빌라도의 재판에 있어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 교회 목사 박찬희, 교회사 이야기 http://lord.kehc.org)

 


목 차

1. 논의에 앞서

2. 사건의 개요
1) 공회는 왜 예수를 체포했는가?
2) 빌라도의 재판

3. 정치적 상황

4. 빌라도의 재판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들
1) 본디오 빌라도
2) 정치적 타협
3) 판결의 끝에 선 두 인물
4) 바라바의 放免
5) 십자가 처형과 罪名의 문제

5. 처형 이후
1) 빌라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2) 바라바는 어떻게 되었을까?

6.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 문제

7. 빌라도의 이와 같은 판결이 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삽입되었을까?

8. 나가는 말


1. 논의에 앞서

 

공관복음서들의 말미에 등장하는 예수는 그가 그토록 지향했던 예루살렘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접하고 있다. 그의 예루살렘에서의 행적은 그의 수난 곧 제자의 배신과 체포, 공회에서의 재판,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 수난, 처형으로 기술된
다.
예루살렘의 지도층은 예수의 제자중의 한사람의 결정적인 제보로 예수를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도시에 체류 중이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를 넘겨주었다. 예수가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십자가형은 유대인의 사형방식이 아니고 로마식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는 두 심문, 두 재판이 평행 되게 기술되어 있다. 기독론적 관심에 의하여 기록되어 있는 이 두 가지의 재판 광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공회는 당시 사형선고권을 가지고 있었는가? 만약 가지고 있었다면 어떤 범위 내에서인가? 공회가 예수를 로마인들에게 내어준 이유는 무엇인가? 공회가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었는가?. 공회가 최소한 언도는 내릴 수 있었지만 그것은 로마총독의 승인을 얻어야하는 것인가? 결정적 판결은 로마총독에게만 위임되는가?
그러나 복음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대답보다 기독론적 관심에 기울어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공관복음서의 견해가 공회도, 빌라도도 예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1) 공회에서의 재판(마26:57-68, 막14:53-65, 눅22:54-55, 63-71, 요18:12-14, 19-24)
2) 빌라도의 재판 (마27:1-2, 막15:1, 눅23:1-2, 요18:28-32)
그러나 이 모든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예수에 대한 두 가지의 재판(공회와 로마법정) 중 빌라도의 재판에 관하여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의 문제에 대한 고찰을 다루기로 한다. 그의 재판을 목도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사건의 개요

 

1) 공회는 왜 예수를 체포했는가?
유다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들의 이해관계, 곧 예수가 성전의 권위를 무너뜨림으로 성전종교의 뿌리를 흔들어 놓을 뿐 아니라 성전중심의 경제 질서를 파괴한 것 때문이었다. 로마와의 야합을 통한 이와 같은 질서의 유지를 거부하는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소요를 유발하고 로마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인물로 기소하고 있는 것이다.

 

2) 빌라도의 재판
예수는 성전 당국자들과 공회원들에 의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졌다(막15:1). 총독은 점령군을 책임지고 있으며 법과 질서의 문제에 민감하였기에 만일 그가 예수에 대한 기소내용의 정치적 성격을 반란으로 확신할 수 있다면 예수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에 의해서 처벌되야 한다. 빌라도는 그의 관점에서 정치적인 질문을 던졌다.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막15:2). 이 질문은 '예수가 황제의 권한에 도전하면서 정치적인 권력 장악을 기도했고 로마의 법과 질서에 危害를 가했는가?'에 대한 빌라도의 관심의 표명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분명한 可否를 밝히지 않는 모호한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관심이 로마제국에 대한 정치적 대결 따위가 아니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되돌리는 삶의 회복일 뿐임을 강조하는 침묵의 언어로 대신했다. 그는 기소된 것처럼 빌라도가 생각하는 왕이 아니었고 총독은 예수에 대하여 이상히 여겨(15:5) 바라바 대신 예수의 석방을 제안한다.(15:6-10). 그러나 예수를 체포하고 유죄판결을 주도했던 성전 당국자들은 바라바를 석방하도록 군중들을 선동한다(15:11-15). 빌라도는 그 압력에 굴복해 예수에게 정치적 형벌인 십자가형을 언도한다.

 

3. 정치적 상황

 

로마의 식민지 통치 방법은 총독이 황제를 대리하여 통치하고 속주마다 왕을 인정하여 자치권을 주되 로마 황제의 승인으로 즉위하여 절대 복종하게 하였으며 세금을 거두어 자치권을 이루고 일정액을 로마로 보냈다. 당시 유대는 산헤드린 공회가 종교와 정치에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재판에 있어서는 사형의 최종 결정권이 총독에게만 부여되어 있었다.

 

4. 빌라도의 재판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들

 

1)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는 유다, 사마리아, 에돔을 다스린 로마의 총독(주26-36)이었다.. 그는 주후 26-36 사이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총독부 본부를 두고 시리아 총독(지금의 팔레스틴 전부의 명칭)으로 있었다. 그런데 유월절을 전후하여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으로 임시 사령부를 옮겨 놓은 때에 마침 예수의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 군대를 예루살렘의 헤롯궁으로 옮겼고 예루살렘에 황제 화상이 있는 군기를 꽂고 경배케 하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학살했다.

그의 출신성분은 기사 계급 혹은 중상류 계층 출신이다. AD 26년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하여 유대의 감독관으로 임명되기 전의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주(州)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군대를 점유했고, 사형 언도를 내리거나 집행 유예를 시킬 권한도 지녔다. 그는 또한 대제사장을 임명했으며 성전과 성전 재정을 통제했다. 그는 대제사장의 의복을 보관하고 있다가 대제사장들이 특별한 절기에만 입도록 하였다.


유대의 歷史家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들을 싫어하여 황제의 신상을 예루살렘에 설치하여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전 재정을 수로 건설에 사용하였고, 눅 13:1,2처럼 계속되는 폭동은 그의 그러한 행위에 대한 보복과 관계가 있었다. 그는 후에 불필요하게 사마리아인들을 많이 죽였으며, 이로 인해 AD 37년경 로마로 소환되었고 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세기의 저자 필로는 그를 완고하며 거칠고 고집이 세며 목적을 위해서는 뇌물, 폭력, 잔학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신약의 판단에 비추어 보면, 그는 원칙보다는 상황을 따르는 약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티베리우스 황제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가 예수의 십자가에 붙인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2) 정치적 타협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민란 방지를 목적으로 한 고도의 정치적 타협이었다.
그는 종교성이 강한 유대인의 도시 에루살렘에 진입할 때 로마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판을 선두에 세우고 들어옴으로써 유대인들의 극렬한 저항을 초래하였고 갈릴리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시설의 재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강제 몰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핵심계층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특히 갈릴리의 형편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첫째, 로마제국의 군사적 횡포와 경제적 착취 둘째, 헤로데 안티파스의 폭정 셋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지방인들의 차별주의, 특히 성전제도에 의한 경제적 압박 넷째, 도시의 부재지주들에 의한 토지독점과 그에 따른 노동력착취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의 반감과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상황하에서 유월절에 대대적 반로마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조짐으로 불안하던 때에, 가야바를 중심으로 한 무리들이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려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유대의 정치적 정세가 매우 불안하였던 만큼 이 시기에 예수를 반대하던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를 빌라도에게 고발함으로써 예수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총독직 유지를 위해 유대 지배층과의 원만한 관계가 무엇보다 필요했던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으며, 이런 정치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예수에 대한 재판은 속주의 리더그룹들의 요구에 맞추어 그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3) 판결의 끝에 선 두 인물
바라바(BARABBAS)라는 이름은 4복음서의 재판에서 공히 등장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다른 어느 곳이나 성서 이외의 다른 문헌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나 행적이 등장하지 않는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비록 그 유래에 대하여 논쟁 중에 있지만
아람어의 헬라어 변역임은 분명하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Abba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Bar Abba에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주장한다. 일부는 바라바의 아버지가 Abba라고 불리어졌다고도 말한다.
예수 당시에 개인적인 이름으로서 Abba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할 지라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는 당시에 그렇게 불리어지기도 했으나 그 이후에 개인적 이름으로서 Abba의 사용 증거는 전혀 없다. 또다른 학자들은 바라바는 Abba라는 단어가 존경받던 학자들과 랍비에게 사용되었음을 근거로 유명한 랍비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름에 'r'을 하나 더 추가하여 쓸 때는 '선생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Bar Rabba(n)으로부터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소수의 의견이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을 축약시켜 존칭으로 부르는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마태복음 27:16-17에는 'Jesus Barabbas'라고 불리어지는 흥미로운 상이한 표현이 있다. 전승되는 필사본이 빈약함에도 오리겐은 그 당시의 대다수의 필사본들은 full name을 포함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마태복음 안의 full name 만을 원자료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후대의 記述은 아마도 바라바라는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뿌리가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이 바라바와 함께 쓰인다는 주장은 난제가 아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은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다.


'당신들은 어떤 예수를 원하는가? Abba의 아들인가? 혹은 메시아라 자처하는 예수인가?'
또한 마가복음에 원자료로 나타나는 'Jesus Barabbas'라는 full name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바라바는 폭동을 일삼는 살인자로 치부된 사람 중에 하나였고(막15:7 ; 눅23:19 ; 행3:14), 극악무도한 죄인(마29:18)이었으며, 강도(요한18:40)로 불리어졌다.

1세기 팔레스틴의 사회적, 역사적 연구에서 이러한 견해는 사회적 강도의 특성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연구되고 있다. 강도로서의 바라바는(막 15:27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양편에 있던 강도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해한다) 아마도 시골의 약탈자들 중에 하나로 속해 있었다. 이들은 로마정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강대한 건설을 추구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유명한 약탈자들이었다. 바라바는 예수재판 당시 로마권력에 의해 체포된 죄수였는데 관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유월절 사면의 일환으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석방되었다(막15:6-15).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선동으로 군중들은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했다(마27:20 ; 막15:11). 이것은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예수의 비저항적 방법보다 바라바의, 로마에 저항하는 물리적 방법을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유월절 사면에 대하여 성경 이외에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일반적 문제가 남아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큰 폭동의 발발을 주장함으로써 이 어려움을 풀려 시도하고 있다. 바라바 그 자신은 열심당의 열렬한 신봉자였다(Rigg,Maccoby,Davices).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대 세계에서 축제에 광범위하게 죄수를 석방하는 관습이 증명되었다(Merritt).
복음서는 고대 세계에서 유월절에 실시된 죄수의 집행유예 관습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복음서에는 바라바의 肖像이 희미하게 진술되고 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무흠하게 처형된 예수의 초상은 예리한 초점에 맞추어 진술되고 있다. 이렇게 두 인물을 대조적으로 기술한 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4) 바라바의 放免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자기가 관여해야 만 할 아무런 정치적인 죄목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유월절 축제에 백성의 희망에 따라 죄인을 방면하는 관례를 이용하여 바라바와 예수를 선택의 대상으로 제시한 것은 그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그를 예수와의 교환 조건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철저한 계산'은 무엇인가?
빌라도의 관심은 점령지의 '질서유지와 평온'을 통한 자신의 지위확보였다.
개역성경에서는 바라바를 '강도'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sustasiastw/n$막15장 7절)이라는 말의 의미는 바라바가 로마제국에 도전한 혁명주의자였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바라바는 당시 상황에 의하면 반로마운동의 한 부류인 젤롯당의 전사라는 해석이 맞다. 확실히 바라바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체포되었고 그는 로마의 법에 따라 십자가형을 당해야 하는 중대 죄목을 가진 자였다. 그러므로 바라바를 내세움으로써, 예수에 대하여 무죄평결을 내림으로써 예수가 정치범이었다는 가정 하에 황제로부터 혹시나 있을 지 모를(이는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면 황제의 친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군중들의 위협에서 알 수 있다.) 책임추궁을 면해 보려는 계산과 예수를 처형했을 때 정말로 예수가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로마의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자로 밝혀질 경우에 제기될 부담을 덜기 위하여 군중들로서도 선택키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되는 이와 같은 제안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두 명의 죄수에 대한 그의 판단의 문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문제였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판결 이후에 그의 손을 씻으며 예수의 '피의 代價' 곧 바라바를 석방한 이후에 올 자신에 대한 책임추궁을 군중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돌림으로써 이 위기국면을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5) 십자가 처형과 罪名의 문제
십자가 처형은 노예들에게 적용되는 형벌이었다(노예해방전쟁:Spartakus).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형벌이 금지되어 있었고 오직 참수형만이 허용되어 있었다. 즉 십자가형은 사형수를 差別하는 형벌이었다. 로마인들은 반란자들을 이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그들이 한갓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을 당해야 할 중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마가에 의하면 빌라도의 확신은 예수에 대한 무죄추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아내를 등장시켜 증언케 함으로써 입증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이 걸렸다..(마15:2, 요19:19) 예수의 罪名은 정치범죄 곧 국가 안보를 침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좌우 편에는 혁명운동에 가담하다 체포된 두 사람이 함께 처형되었다.
예수에게서 아무런 정치적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이와 같은 명패를 붙이는 것을 묵인했다. 예수에 대한 사형의 근거는 외형상 '폭동의 주모자'로서 그 격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처럼 로마제국의 십자가형을 받아 정치적 범죄자로 죽어가지만 동시에 그것은 역설적으로 예수가 지금까지 건설해 온 새 구원 조직이 유대교의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었음을 입증시켜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5. 처형 이후

 

1) 빌라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에 대한 재판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빌라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봉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이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이러한 그의 돌출적 행동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노여움을 샀다. 속주의 평온과 질서유지, 그로부터 얻어지는 세금의 징수 등 로마의 이익에 조금도 도움이 될 것 없는 이와 같은 행위는 권력투쟁의 혼미한 와중에서 이로 인해 기회를 포착한 시리아인 총독 비텔리우스의 고소에 의하여 황제로부터 소환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경쟁과 총독들간의 경쟁심에 의한 이와 같은 고소로 인해 빌라도의 10년 치세는 끝이 났으며 소환되어 로마로 가던 그는 실종되고 말았다.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빌라도의 실종 이후의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황제에 의한 살해이다. 황제의 관심은 식민지로부터 얻어지는 세금에 있었다. 그러므로 황제의 속주에 대한 통치는 지역의 정서를 인정하는 것, 종교적 관습에 간섭하지 않는 것, 일정 정도로 토착 지배층의 권위를 인정해 줌으로써 그들과의 결탁을 통한의 지지의 획득을 통해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러한 황제의 목적에 걸맞지 않는 가혹한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소요와 반란을 더욱 심화시키고 만 것이다. 이제 황제에게 있어서 빌라도의 효용가치는 끝이 난 셈이었다. 속주의 거류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그럴듯한 구실은 제국의 자비로운 통치와 배치되는 학살자 빌라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빌라도를 제거함에 있어서 빌라도와 친분이 있는 다른 총독들과 원로원의원들 그리고 여타의 많은 家臣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를 간단하고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로마로 소환되고 있던 빌라도에게 자객을보내는 일이었다.

둘째는, 이렇게 로마로 소환되어 가는 빌라도에게는 그리 많은 병사들이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권력의 암투에서 밀려난 초라한 제독에게서 이전의 군사적 권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에 배신자로 알려진 가리옷 사람 유다와의 대면은 그의 생을 마감하는 한 획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다는 예수가 체포된 후 공회에 나아가 이전의 밀약을 파기하고 스승을 자유케 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최후의 사형 결정권자인 빌라도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극심한 가책과 후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빌라도의 파면소식은 스승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담긴 복수의 기회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 열심당의 한 단원이었던 그는 가슴에 품고 다니던 칼(성서 기자에 의하면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칼을 준비하라고 했으며,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스승을 배신한 자신을 다른 제자들 혹은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가 危害할 것에 대비하여 지니고 있던 칼)을 사용하기로 작정하였다. 로마로 향하는 어느 한 길목이 복수의 장소로 결정되었다.
유다는 이제 그의 스승과, 동료 제자들과, 공회의 관원들과, 로마의 권력에게서 쫓기는 자가 되었고 그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은 아겔다마에서의 자결, 그 한 길 뿐이었다.

 

2) 바라바는 어떻게 되었을까?
바라바는 죽음 앞에서 석방되었다. 그의 석방은 전적으로 예수의 덕분이었다. 만약 예수가 선택의 다른 한편이 아니었다면 빌라도는 그를 내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계산에 의하여 아주 다행스럽게도 바라바는 예수의 재판정 한가운데에 예수와 병행하여 서있는 것이다. 이 웅장하고도 긴박한 장면의 긴장은 바라바를 연호하는 군중들의 함성을 통하여 바라바에게 구원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서와 그 어느 문헌에도 석방된 바라바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설교의 강단에서라면 빌라도의 회심이 정당히 주장되겠지만 그 이외의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바라바는 열심당의 당원이었다. 그의 유대교적 신앙은 절대적이었으므로 그가 석방된 것은 오직 야훼에 의한 목적의식적 대관식이었다. 결코 예수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아니고 빌라도의 은총에 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죽어도 살아나는 야훼신앙의 현실화된 표상으로서 바라바는 자신을 의식했고 예수의 요단강 세례가 왕으로서의 대관식이 되었던 것처럼 그 자신의 석방은 혁명운동의 선봉장이 되는 취임식이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장에 바라바 역시 가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죽음을 본 것이 아니라 힘없이 죽어가는 초라한 예수를 바라보면서 '당신의 하나님 왕국 실현법은 틀린 것이었음이 이로써 증명된 것이오! 야훼는 당신과는 다른 방법으로 왕국을 실현할 것이오!'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갈보리 산에서 처형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석방된 그는 당분간 은거하면서 새로운 혁명운동을 조직할 구상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비록 경멸의 대상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사마리아가 제일 안전한 곳이었다. 바라바는 발길을 돌려 이제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으로 갈 것이었다. 혁명적 열정이 아직 식지 않은 곳, 아직은 산헤드린과 로마의 권력이 민중들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곳, 혁명의 불씨가 아직 남아있는 곳, 아직은 타협과 굴종이 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빌라도가 탈취하여 숨겨놓은 성전의 신성한 그릇들이 그리심산에 매장되어 있었다. 바라바는 이것을 되찾아야 했다. 선동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사마리아의 민중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중들은 그리심 산으로 몰려가기 위하여 무장을 하고 집결하였다. 이 일은 첩자에 의해 즉시로 빌라도의 집무실에 보고되었고 빌라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자기가 체포한 사람들 중에서 주도적인 인물들을 공개 처형하였다. 거기에는 이전에 예수재판 때에 석방되었던 바라바가 들어 있었다. 예루살렘의 갈보리에서 보았던 바로 그 십자가에 바라바의 거친 손발이 고정되었고 그의 왕국건설에 대한 理想은 또다른 혁명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6.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 문제

 

빌라도의 재판은 산헤드린 재판과 구조적인 병행을 이룬다. 곧 예수는 양쪽 모두에게서 심문을 당하고 정죄받고 그에 따른 치욕을 받는다. 이와 같은 병행되는 두 개의 재판을 기록한 마가의 의도는 유다 지배층과 점령세력인 로마제국이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직접적인 책임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 두 부류의 집단과 함께 유다 민중들(오클로스)의 예수에 대한 배신은 중요한 책임소재의 문제에 대하여 마가가 주목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관점이다.

 

7. 빌라도의 이와 같은 판결이 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삽입되었을까?

 

니케아 신조에 의하면 '사도신조'에서와는 달리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사'로 기술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는 빌라도 개인에게 혹은 유대교의 몇몇 주동자들에게 혹은 당시의 군중들에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문구를 신앙고백에 넣었다. 그것은 예수에게 고난을 준 주체를 보는 시각의 문제이다. 예수는 분명히 빌라도 치하에 재판을 받았고 공회의 정죄를 받았으며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로 내몰리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이 모든 일들이 神的인 동기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8. 나가는 말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假定이란 일면, 무모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역사가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긍정할 때에는,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여는 한에 있어서 시도할 만 하다.
本考는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시도이다. 예수의 재판에 대하여 그리고 그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에 대하여 남겨진 기록은 성서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고고학적 자료를 찾기 어렵다. 심지어 고대 근동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하여 원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요세프스의 글에서마저도 이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미미하다.
그러므로 이 글의 내용의 일부는 하나의 가설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설을 세우는 것은 우리에게 알려진 당시 역사의 場을 넓히는 한 시도임이 분명하다. 학문이란 때로는 모험적인 도전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 글을 맺으며 나는 이러한 類의 작업들을 감히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에 이르게 하는 모험들 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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