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마태는 어떤 사람인가?

은바리라이프 2010. 7. 6. 10:32

마태는 어떤 사람인가?


강유중목사 총회신학교교장
85년 02월 01일

마태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타이오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누가복음 3장25,26절에 있는 마타티아스 라는 말에서 축소된 것인데,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마태는 알페오의 아들로서 처음에는 사람들에게서 천대를 받는 세리였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약 변하여 복음의 전도자,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그 사람됨이 그 나변에 있었는지?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몇가지 생각해 보고저 합니다.

1.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함

마태복음 10장 3절을 보면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라고 12제자의 이름을 쓸 때 다른 제자들은 이름만 썼지만 자기 자신의 이름을 쓰는 차례에 와서는 자신의 신분을 밝혀"세리 마태"라고 썼습니다. 그는 "레위"라는 본명 하에 로마 세무서의 부수제 청부인으로서 다메섹과 포에니 항구 사이를 지나 다니면서 무역하는 길인 갈릴리 바다의 가버나움에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가바이"라고 하여 세금을 받으러 다니는 자가 있었고 "모케소"라고 하여 세관에 앉아 관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어떻든 둘 다 세금으로 사복을 채우는 자로서 무엇이 제일 나쁘냐?"고 할 때 "산에서는 곰과 사자요, 시가에서는 세리라"(Theocritus)고 할 만큼 백성에게서 냉대를 받았습니다.
이런 세리 중의 한 사람인 마태였지만 그리스도의 은헤를 확대키 위하여 그가 죄인인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그의 카다로구에서 나타내었습니다. 범인들은 자신의 신본 여하가 어떻다는 것을 나타내기를 그렇게 원하지 아니합니다. 더욱이 자신의 신분이 저열하고 낮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기의 결점과 약점, 부끄러움을 나타내기 싫어하는 범인의 본성일진대 마태도 그랬어야 했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세리 마태는 자신의 저열한 신분을 똑똑하게 나타내었습니다.

"나는 세리 마태"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었다는 것을 부끄러움이 없이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구요?그것은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죽기전에 자기 신분 여하를 솔직하게 고백했고, 바울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여러분의 신분은 무엇이었습니까? 강도? 살인자?부랑자? 싸움꾼? 거짓말쟁이? 사기꾼? 우상숭배자? 바람둥이? 욕쟁이?....? 아 - 그 무슨 신분이었던지 간에 솔직하게 부끄러움 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고백하는 여러분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다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고 불러 주실 것 입니다. 천주교 성당에서는 교인들이 신부에게 자기의 무서운 죄를 고백한다고 합니다. 고해성사라고 하는 것이지요! 신부 앞에서도 자신을 고백도 하거든 하나님께 자신을 감출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고백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읍시다.

2.부르심에 곧 따름(마9:9)

"예수 거기서 떠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쫓으니라"

예수님은 세관에서 마태를 불렀습니다. 세리 노릇하는 그 자리에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그 부르심에 아무 이유나 조건없이, 변명 불평없이 곧 순종했습니다. 범인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법입니다.그래서 습관과 인습된 자리에서 벗어나기가 대다히 힘듭니다. 그러나 마태는 나를 좇으라,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일어나 좇았습니다. 곧 순종했습니다.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직장 이상의 직장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장래를 보장하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여기에 마태의 마태다운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씀의 위력과 마태의 결단성 있는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 직장, 체면, 장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아간 마태, 계속성 있게 좇아 갔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주저 방황하는 자 누굽니까? 십자가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무엇하려고요? 내가 죽었기 때문에 살려 주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떼를 살려 주신 것과 같이.

3. 영광의 잔치를 베품(마9:9-13).

마태는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천하고 보잘것 없 세리인 자신을 주께서 불러 주셨으니 그 심정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감사만극했을 것입니다. 이 기쁨을 이길 수 없어서 그는 큰 영광의 잔치를 베풀어 자기가 받은 은혜와 감사의 만분지 일이라도 표시하고저 했던 것입니다. 지당한 일입니다.

자신이 천한 죄인인 것을 알면 알수록 주님의 부르심이 감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배가 고파본 일이 있습니까? 배가 고플수록 밥 한 릇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죄를 인식하고, 죄인인 것을 알면 알수록 죄에서의 구원을 감격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된 죄의식에서 메시야의 구원에 얼마나 감격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얼마나 상한 심정으로 십자가를 대하고 있으며, 얼마나 예수의 공로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마태가 영광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또한 그와 같이 있었던 사람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기회를 갖게 했습니다. 누가빠고음 5장 29절은 이 일에 대해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라고 했고, 마가복음 2장 15절은 "그의 집에 낮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 이 있어서 죄를 좇음이러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지게 하려는 노력이 이 집회를 성공리에 대성황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받은 은혜의 가치를 느끼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저 하는 마태의 위대한 태도의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주고서야 처음 알 수 있는 주님의 참 사랑! 참 은혜! 이 잔치 석상에 마태 뿐이었다면.. 아닙니다. 보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음식보다도 세리의 죄인, 즉 병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를 통한 형제에의 사랑과 전도열은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의 잔치 석상에 많은 사람을 뫼시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마태는 그 때부터 일평생을 주와 같이 보내면서 주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을 보면 "이르시되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베드러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및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예수의 사후에도 그는 구를 따랐고, 마지막에는 유다에서 전도했고 또 에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유세비우스 H.E.3:24).

세관에서 떠난 마태는 주님을 따르고,좇고, 또 순종하다가 골고다까지, 십자가까지 따랐던 것입니다. 한 평생 변함없이 순교의 제물로 바쳐질 때까지 따르고 또 따랐던 것입니다. 세리 마태! 그러나 주님의 사도 마태! 그리고 순교자 마태! 아 - 얼마나 영광그러운 제자 마태입니까! 이 마태의 생애를 오늘 우리 중에서 누가 배우겠습니까?누가 제이의 마태가 되겠습니까? 이름 그대로 "여호와의 선물" 마태! 누가 이 마태이겠습니까? 다같이 마태여야 하겠습니다. 20세기의 마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