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사도행전 자료

예루살렘

은바리라이프 2010. 5. 12. 23:39

예루살렘 지명의 역사

 

고대근동의 역사기록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서기전 1900년경 이집트 문서에서였다. 대부분의 이집트 학자들은 서기전 1900년경 기록된 저주문서(execration text)에 나타난 상형문자 표기인 ‘아우샤멤(3wš3mm)’을 예루살렘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이 단어에는 도시를 나타내는 한정사 대신 지역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어서 이집트인들이 예루살렘을 한 지역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기전 14세기에 기록된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에서는 아카드어로 ‘우루샬림(Urušalim)’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기전 701년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침공 기록에는 ‘우르살리무(Ursalimmu)’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지명 ‘예루샬라임(םילשׁורי)’은 우가릿 신화에 등장하는 새벽과 여명의 신, 샬렘과 관계가 있으며 ‘샬렘 신의 기초’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이 ‘여부스’로 불렸다는 사실은 이집트 및 고대근동의 자료에 그 지명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예루살렘이라고 알려졌으며 아마도 이 도시에 여부스라 불리는 민족이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칠십인 역(Septuagint)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어 표기인 ‘히에로솔뤼마(‘Ιεροσολυμα)’는 히브리어 지명의 음역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 도시의 ‘거룩성(히에로스)’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 배경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산악지대의 분수령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산악 요새로 개발되었다. 예루살렘은 연중 강수량이 500밀리미터 정도로 겨울곡식인 밀이나 보리를 충분히 경작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비록 동쪽으로는 유대광야가 이어지지만 북쪽의 베냐민 산지, 남쪽의 베들레헴, 그리고 서쪽의 쉐펠라 등 예루살렘은 농사와 목축이 가능한 살기 좋은 지역에 속해 있다. 다윗 성이라 불리는 최초의 예루살렘은 기드론 골짜기 위쪽의 해발 700미터 높이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솔로몬이 건설한 성전은 해발 743미터의 완만한 봉우리에 위치해 있으며 히스기야 시대부터 확장된 서쪽 언덕은 해발 773미터에 달한다. 예루살렘의 지리적 위치의 결정요인은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한 기혼 샘이다. 해발 645미터 지점에 위치한 기혼 샘은 석회암 지역의 바위굴 속에서부터 품어 나오는 전형적인 카르스트(karst) 샘으로서 계절에 따라 하루에 최소 200 톤에서 최대 1000톤 가량의 물이 솟아 나온다. 다윗 성은 북쪽의 성전산(temple mount) 부분을 제외하고는 동쪽의 기드론(Kidron) 골짜기와 서쪽의 티로포에온(Tyropoeon: 치즈 제조자) 골짜기, 그리고 남쪽의 힌놈(Hinnom) 골짜기 등 삼면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비록 면적은 작지만 힌놈 골짜기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야채농사가 가능하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지에서는 올리브, 포도 등을 가꾸는 과수원이 발달했었다. 하지만 밀, 보리를 재배할만한 골짜기 평야는 북쪽과 서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항상 이 지역을 통치해야만 식량자급이 가능한 상태였다.

주거역사

1. 가나안 시대(청동기 시대)

100년이 넘는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 다윗 성 지역에서만 동석기 시대부터 십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에 달하는 주거층이 드러났다. 예루살렘 최초의 주거 흔적은 다윗 성 지역의 바위틈에서 발견되었으며 동석기 시대인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본격적인 건물이 들어선 것은 서기전 3300년경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이며 이 시대의 무덤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성벽이 건설되어 본격적인 도시의 모습을 갖춘 것은 중기청동기 IIB시대인 서기전 1800년경부터이다. 중기 청동기 시대의 특징적인 키클로포스(Cyclopos) 양식의 이 성벽은 길이가 1미터가 넘는 큰 바위들을 이용해서 기초를 쌓았으며 성벽의 두께는 평균 2.5미터에 달한다. 다윗 성에서 기혼 샘으로 통하는 소위 ‘수문(water gate)’ 근처에는 망대의 기능을 위해 보강된 부분이 있다. 서기전 16세기 후기 청동기 I시대의 예루살렘의 주거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올리브 산의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교회 내에서 발굴된 수십 기의 무덤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후기 청동기 II시대인 서기전 14세기부터 예루살렘은 동쪽과 서쪽의 골짜기 부분에 대규모 축대를 쌓아 면적을 넓히는 등 매우 중요한 요새로 건설되었다. 당시 이 도시의 중요성은 예루살렘의 왕 아브디-헤파(Abdi-Hepa)가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텝 3세와 4세에게 보낸 6통의 아마르나 서신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철기 I시대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촌락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건물들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당시 이곳은 견고한 시온 성으로 불려졌고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삼하 5:6-7)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이를 반영하는 철기 I시대의 축대 등이 발견되었다.

2. 왕정시대(철기 II시대)

이스라엘 왕정시대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에는 본격적인 왕궁과 신전 등이 건설되었다. 특별히 이곳에서 발견된 원(原)-에올리아 식(Proto-Aeolic) 기둥머리는 사마리아, 므깃도, 하솔, 라맛-락헬에서 출토된 것과 마찬가지로 왕궁 건축에만 사용되는 장식으로 밝혀졌다.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은 북쪽의 상부 도시와 남쪽의 하부 도시로 구분되었으며 상부도시는 왕궁과 창고를 지닌 요새, 즉 ‘다윗 성’으로 불렸으며 하부 도시는 일반 주거지로 개발되었다. 다윗 성은 역대기에서는 오펠(Ophel) 요새로 표현되기도 한다(대하 27:3; 33:14). 솔로몬 시대에 다윗 성 북쪽의 바위 언덕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그 사이의 낮은 부분을 채웠고 이를 밀로(Millo)라 불렀다. 이스라엘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가 1980년대 후반에 발굴한 두께가 1.4미터에 달하는 성문 구조는 다윗 성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성문인 동시에 밀로궁의 한 부분일 가능성도 있다(왕상 9:15). 서기전 721년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남 유다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예루살렘도 서쪽으로 그 면적을 확장시켰다. 특히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벽을 보강하고 장기간 포위에 대비하여 지하급수시설을 완비하였다. 서쪽 언덕에서는 히스기야 시대에 건설된 두께가 7미터에 달하는 성벽이 65미터나 발견되었으며 발굴자 아비가드(N. Avigad)는 이를 ‘넓은 성벽(Broad Wall)’이라고 명명하였다. 다윗성 발굴 지역 중 ‘G 구역’으로 불리는 곳에 위치한 공문서 보관소로 보이는 한 방에서는 모두 51개에 달하는 불라(bulla: 도장자국)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에서는 ‘사반의 아들 그마리야’라는 이름도 있어서 왕정시대 인물의 역사성을 확인하게 되었다(렘 36:11).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파괴된 흔적은 예루살렘의 여러 발굴 지역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넓은 성벽 근처의 ‘이스라엘 망대(Israelite Tower)’에서는 화살촉이 발견된 두껍게 쌓인 파괴 층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의 지하급수시설

예루살렘의 지하급수시설은 유일한 수원지인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의 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워렌 수직통로(Warren's Shaft), 실로암 수로(Siloam Channel), 그리고 히스기야 터널(Hezekiah Tunnel) 등 모두 3종류에 달한다.

1. 워렌 수직통로

워렌의 수직통로은 1867년 예루살렘 탐사 임무를 수행하던 영국 공병대의 찰스 워렌이 처음 발견하였다. 전체 구조는 지상에서 54미터 길이의 경사진 터널을 통해서 밑으로 내려간 다음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12.3미터 높이의 수직통로가 기혼 샘의 물길과 연결되어 있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워렌 수직통로는 원래 파여진 자연 동굴과 바위틈을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성서학자들은 워렌 수직통로는 바로 요압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타고 올라갔던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찌노르)’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삼하 5:8; 대상 11:6). 하지만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므깃도, 하솔, 게셀, 기브온, 이블르암)의 경우에서와 같이 워렌 수직통로는 서기전 10세기 왕정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2. 실로암 수로

실로암 수로는 기혼 샘의 물을 저지대의 힌놈 골짜기에 저장하기 위해서 건설된 400미터 길이의 수로이다. 실로암은 원래 히브리어 ‘실로악흐(חולישׁ)’의 그리스어 음역이며 물을 ‘흘려 보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실로암 수로 중 일부는 바위를 파서 만든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수로의 중간 부분에는 여러 군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근처의 밭으로 물이 공급되도록 하였다. 실로암 수로의 단점은 바로 이 수로가 성 밖에 위치해 있어서 전시에 예루살렘이 적군에 의해 포위당할 경우 물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기혼 샘의 물을 성안의 실로암 저수장까지 흐르도록 바위를 파서 터널을 만들었다.

3. 히스기야 터널

히스기야 터널의 전체 길이는 525미터인데 비해서 터널 양쪽 끝의 고저 차이는 겨우 32센티미터로서 기울기가 0.06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시공되었다. 히스기야 터널은 특히 실로암 저수장 부분에서 발견된 실로암 비문을 통해서 오늘날의 터널 공사와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파 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중간에서 만났을 당시의 광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혼 샘과 실로암 저수장 사이의 직선거리가 315미터에 불과한데 적들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525미터나 되는 구불거리는 터널을 건설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히스기야 터널은 기존에 물이 흐르는 바위 틈새를 따라 건설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터널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정확하게 중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실로암 비문

서기전 701년의 앗시리아 침공

실로암 비문은 서기전 701년 앗시리아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비하여 히스기야가 행한 일련의 방어전략 공사 중의 하나인 지하수로 터널 벽에 기록된 것이었다. 서기전 701년 산헤립이 앗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을 때(왕하 18:13-16; 대하 32:1-8), 비록 성서에는 히스기야가 지하터널을 팠다는 기록은 없지만 “성밖의 샘들을 막고 흐르는 물줄기를 차단했다”는 구절(대하 32:3-4)을 통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당시 예루살렘의 지하급수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수원지인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전체 길이가 525미터에 달하는 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의 수준 높은 토목공사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터널의 출발지인 기혼 샘은 도착지인 실로암 못 보다는 오직 32센티미터밖에 높지 않아서 전체 터널의 평균 기울기는 0.06퍼센트에 불과하다. 이 밖에도 터널과 관계된 가장 신비로운 두 가지 의문점은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리로 315미터인데도 불구하고 구불구불하게 파여져 525미터나 되며, 어떻게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첫 번째 의문에 관한 구약학자들의 답은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었던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 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될 때 지질학자인 단 길(Dan Gill)의 정밀 조사 결과 이 터널지역이 원래 4만 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즉 히스기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파다보니까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고 당연히 도중에서 양쪽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실로암 비문의 발견

실로암 비문은 1880년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하던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히스기야 터널의 실로암 쪽 출구에서 안쪽으로 10미터 들어간 지점의 왼쪽 벽, 즉 동쪽 면에 바닥에서 1.5미터 지점에 기록된 이 비문은 모두 6줄에 200자의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돼 있었다.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만인 1890년 한 도굴꾼이 이 비문을 터널 벽에서부터 떼어 내는 과정에서 비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현재는 23개의 글자 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인에게 팔렸던 이 비문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 당국에 의해 압수되어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관됐고 오늘날까지 그곳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의 히브리어 전문과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תא םבצחה םפנמ] דועב .הבקנה .רבד .היה .הזו .הבקנה [רבד] (1)

ק .שׁא .לק .ע[משׁנ בק]נהל .תמא .שׁלשׁ .דועבו .וער .לא .שׁא .ןזרגה (2)

ה .םיבו .לא[משׁ]מו ןמימ .רצב .הדז .תיה .יכ .וער .לא .אר (3)

וכליו .ןזר[ג] .לע .ןזרג .וער .תרקל .שׁא .םבצחה .וכה .הבקנ (4)

[א]מו .המא .ףלאו .םיתאמב .הכרבה .לא .אצומה .ןמ .םימה (5)

ם]בצחה .שׁאר .לע .רצה .הבג .היה .המא .ת (6)

(1) 굴착 [공사], 굴착 공사는 다음과 같다. [인부들은] 도끼를

(2) 서로 [마주쳤다]. 아직 3아마(큐빗)를 더 파야함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부르는 사람의

(3) 목소리가 들렸다. 왜냐면 암벽의 오른쪽과 왼[쪽에] 틈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굴착

(4) 당일에 인부들은 맞은편 동료 쪽으로 파 들어갔다. 도끼와 도[끼가] 서로 겹쳤다.

(5) 물이 수원지로부터 연못까지 1200아마(큐빗)를 흘러갔다.

(6)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의 머리 위로 100아마(큐빗)였다.

윌슨(C. Wilson)과 워렌(C. Warren)의 예루살렘 지하탐사

런던의 ‘예루살렘 수질개선 협회’

예루살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이 도시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영국의 한 모임에서부터 출발했다. 1864년 5월 런던에서 개최된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연례모임에서 물의 오염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안의 전염병 발생의 심각성이 논의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수질개선 협회’가 결성되었다.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에 기혼 샘이 있기는 하지만 성문으로부터 가파른 경사를 한참 걸어내려 가야하고 그나마 여름철 건기에는 수량이 부족해 모든 주민이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집집마다 바위 바닥을 파서 지하 웅덩이를 만들고 겨울철의 빗물을 저장했다가 여름철 건기에 사용하곤 하였는데 문제는 한번도 청소하지 않은 이들 지하 물 저장소의 오염으로 인한 전염병의 발생이었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모두 성안의 좁은 공간에 모여 살다보니까 일단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퍼져나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유럽인들의 선교활동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마침 영국의 대도시에서는 콜레라 같은 수인성 전염병을 상하수도 정비를 통하여 어느 정도 퇴치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연히 수질 개선의 묘책을 떠 올리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쪽의 베들레헴 근처에 위치한 ‘솔로몬의 연못’이라 불리는 수원지로부터 수로를 설치해서 물을 끌어오는 방법이었다.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의 파견

이러한 수로 공사를 위한 지형조사와 측량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영국 공병대의 윌슨 대위는 1864년 10월초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측량을 시작했다. 예루살렘의 지하 수로공사는 영국공병대보다 2천년이나 앞서 이미 서기전 2세기 하슈몬 왕조시대부터 건설되었기 때문에 윌슨은 성전 산 지하에 있는 고대의 물 저장소와 수로들을 따라서 성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10개월에 걸친 성공적인 탐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의 측량탐사’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골고다의 성묘 교회와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 등에 대한 자세한 평면도와 단면도가 등장하며 건축학적인 분석도 시도되었다. 또한 그는 헤롯 궁전에서 성전 뜰로 향하는 교량의 받침대를 발견했고 오늘날 이 부분을 ‘윌슨의 아치’라 부른다.

팔레스타인 탐사재단(Palestine Exploration Fund)

마침 1859년에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항하여 성서와 교회의 권위를 지키려는 신앙적 운동에 휩싸인 영국은 윌슨의 성공적인 예루살렘 측량 소식에 힘입어 전문적인 성지 탐사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65년 5월 12일 런던에서 ‘성서를 조명하기 위해 성지의 고고학, 지형학, 지질학, 지리학, 자연사, 풍습과 전통들에 대한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를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탐사재단’이 설립되었다. 비록 윌슨이 최초로 예루살렘의 지하를 파고 들어가 발굴하였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토된 것 같은 화려한 박물관 전시용의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이 재단은 단순한 지형조사보다는 중요한 성지에 대한 발굴을 목적으로 1867년 또 한 명의 영국 공병대 장교인 워렌 대위를 파견했다. 워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발굴하여 솔로몬 성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골고다의 성묘교회가 과연 신약시대의 성벽 밖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성전산은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바위의 돔’이 서 있는 이슬람교의 삼대 성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발굴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워렌과 그의 일행이 성전 산의 남쪽 축대 지하를 파고 내려가 성전 쪽으로 향하는 거대한 통로를 발견하였는데 돌에 부딪치는 그들의 연장소리 때문에 발각되어 기도하던 아랍인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를 한 적도 있었다. 할 수 없이 워렌은 성 바깥으로 나가서 성전 산 축대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을 파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수직으로 24 미터 정도 파 내려간 뒤 성전 쪽으로 수평으로 파 들어가 비로소 신약시대 성전의 축대 기초를 조사할 수 있었다.

워렌 수직통로(Warren's Shaft)

그는 또한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으로 이어지는 길이 525미터의 지하 수로를 조사하다가 기혼 샘 부근에서 수직으로 뚫린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전시에 성 바깥의 기혼 샘을 이용할 수 없을 경우 성안에서 물을 길을 수 있도록 터널을 뚫은 지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통로는 ‘워렌의 수직통로’로 불리며 서기전 1000년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요압이 몰래 올라갔던 지하 ‘수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예루살렘 당국의 반대로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대규모 수로공사는 좌절되었지만 영국의 공병대가 파견한 두 장교는 예루살렘의 정확한 측량과 발굴을 통해 성서시대의 예루살렘을 드러낸 최초의 고고학자들로 인정받게 되었다.

유다 왕들은 어디에 묻혔는가?

오늘날 순례자들은 시온 산에 위치한 다윗의 무덤을 방문하지만 이것이 3000년 전의 무덤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래 그 곳은 서기 2-4세기에 건설된 교회 건물이었고 십자군 시대부터 다윗 왕의 기념 묘로 숭배되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다윗의 무덤을 찾는 작업은 1851년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파리에 있는 포병박물관의 한 큐레이터가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왔다가 ‘왕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한 바위굴 무덤에서 입구를 막고 있던 둥근 돌을 굴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깨진 석관 뚜껑을 갖고 나와서 다윗 왕의 관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럽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은 이집트의 경우와 같이 다윗을 비롯하여 모두 23명에 달하는 유다 왕들의 무덤 중 하나라도 찾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는데 다윗의 무덤이라는 소식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헬레나 여왕 가족묘지

당시 드 쏘씨(Félicien de Saulcy)는 ‘여왕’이라 기록된 석관을 발견하고는 이를 시드기야의 왕비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드 쏘씨가 발견한 무덤은 나중에 전형적인 신약시대의 가족무덤으로 밝혀졌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해 바로 이곳에 당시 유대교로 개종했던 아디아베네(Adiabene) 왕국 출신인 헬레나(Helena) 여왕이 묻혔고 그녀의 가족 무덤으로 화려한 장식과 함께 건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열왕기서에 의하면 다윗은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고 하는데 드 쏘씨가 발견한 무덤은 성밖에 한참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다윗의 무덤이 될 수는 없었다. 나아서 느헤미야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윗의 무덤이 성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프랑스의 고고학자 라이몽 베이(Raymond Weill)는 1913-4년 다윗의 무덤을 찾기 위해 성의 남쪽 부분을 집중적으로 탐사하던 중 바닥을 파서 만든 여러 개의 바위굴들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서 베이는 길이가 15.7미터 폭이 2.4미터에 달하는 가장 큰 동굴을 다윗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굴이 도무지 무덤 같은 구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서기전 10세기의 무덤이 아직 한 군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내부 구조를 알 길은 없지만 여러 고고학자들의 지적대로 베이의 무덤은 그 구조상 창고나 물 저장소의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이 곳은 후대에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과연 누가 왕들의 무덤을 감히 훼손시킬 수 있었겠는가?

에꼴 비블릭크 지하 묘지

이러한 상황에서 제 3의 왕들의 무덤이 1970년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오늘날 ‘에꼴 비블릭크(Ecole biblique)’, 즉 ‘프랑스 성서와 고고학 연구소’로 더 잘 알려진 성 스테판 수도원 구내에 있으며 1885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지만 신약시대의 무덤 정도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바르카이(G. Barkay)와 클로네르(A. Kloner)가 재발굴한 결과 이 가족무덤은 전형적인 서기전 8-7세기의 무덤으로서 다섯평 정도의 전실을 중심으로 일곱 개의 묘실이 둘러져 있고 한꺼번에 20여 구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큰 규모였다. 시신 안치대 밑에는 모두 네 개의 유골 보관소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유골을 한 군데 보관하는 풍습은 고대 이스라엘의 바위 굴 무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가족무덤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시신들이 안장되다 보니까 안치대에 있던 기존의 유골은 그 밑에 파 놓은 유골 보관소에 담아 놓아서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이는 바로 ‘유다 왕들이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열왕기서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좋은 예이다. 열왕기서에는 다윗부터 아하스 왕까지는 다윗 성안에 묻혔고 그 이후의 왕들은 성밖에 장사지낸 것으로 나타나는데 오늘날 다윗 성에는 여러 채의 집들이 있어서 다 발굴할 수 없기 때문에 다윗 왕의 무덤은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에꼴 비블릭크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유다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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