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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은바리라이프 2010. 3. 8. 22:03

율법과 복음

 

이한오 (기사입력: 2010/02/12 13:13)


도올 김용옥 교수가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김용옥 교수는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여호와)가 유대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 조건으로 애굽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고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며,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연세대 김영진 교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구약이 신약을 위한 준비의 말씀’이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가르침도 깨닫지 못했다.”며 비판했다.(크리스천 투데이, 2007. 2. 16. 참조)

3년이 지난 지금 ‘논란’은 사라져도 ‘문제’는 남아 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 곧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율법과 복음을 평면적으로 비교하거나, 김용옥 교수의 지적대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과 맺은 계약을 신약시대 이후 보편적 인류도 그대로 전수하라고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을 문자적으로 이행하거나 믿을 필요는 없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만난 하느님이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논란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 남긴 말씀을 본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 말씀에서 ‘율법’이란 모세오경에 나오는 것으로, 김용옥 교수가 폐기해야 한다고 비판한 그 구약의 핵심이다. 그 율법은 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상으로 제사법과 성결법 그리고 사회법으로 구분된다.
제사법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에 대해 자세하게 규정한 것이고, 성결법은 주로 레위기에서 부정한 먹거리와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면서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알려준다. 또 사회법은 과부, 고아, 몸 붙여 사는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율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부족사회에서 왕정사회로 전개해가는 와중에서 제사법과 성결법은 강조된 반면 사회법은 점점 소홀히 다루었다. 솔로몬 시대에는 하느님의 성전보다 자신의 왕궁을 더 크게 지으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고, 신약시대의 율법학자들도 안식일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율법은 잘 지키면서도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돌보는 의무는 게을리했다. 이사야, 미가 등 많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비판하고 있는 내용도 바로 사회법을 위반하면서, 제사만 드리고 있는 위선적 행동에 대한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는 무죄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이것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사람을 단죄하는 율법학자들에게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사법과 성결법은 잘 지키면서 사회법을 잘 지키지 않은 율사들의 이중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전체적 정신을 살리기 위해 사회법을 더 잘 지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율법 속에 ‘예배’, ‘거룩’, ‘나눔’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있고,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런 관점으로 보면 구약의 율법이 특정 민족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필요도 없고, 또 “구약은 신약을 위한 준비의 말씀”이라는 바울로의 말을 녹음기처럼 반복하면서 공허한 방어를 할 이유도 없다.
율법과 복음, 구약과 복음으로 남아 있는 성서의 문자들이 곧 하느님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Word)은 인간의 ‘말들’(words)로는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 무리하게 연관성을 주장할 것도 없고, 언어적 세계 뒤에 계신 하느님의 깊은 뜻을 미처 다 살피지 못한 채 분리시킬 필요도 없다.
율법에도 예수님의 정신이 드러나고 복음에도 하느님의 뜻은 녹아 있다. 율법과 복음의 ‘효력’이 아니라 ‘뜻’을 물으면, 둘 사이의 간극은 극복되고 연속되고 통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