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입장에서 본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성찰
우리는 지난 20여 년간 평화통일 운동을 벌였지만 결정적으로 분단의 장벽을 깨뜨려 통일을 이루어 내지 못했다. 예수그리스도의 화해와 통일의 복음을 올바로 전하지 못한 죄책을 고백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지난 20년간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신학적 성찰과 함께, 남북 화해와 통일을 위한 많은 문서들과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회들과 교인들은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 운동을 외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분단 논리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며 북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바로 따르고자 한다면,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이야말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나라 '복음'의 핵심이며 민족이 멸망하지 않고 사는 유일한 길이다.
1)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면서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눅 19:44) 하고 탄식하면서,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동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보복하며 죽임으로써 결국 예루살렘과 성전이 로마제국에 의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불타고, 유대 민족 전체가 패망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오늘의 현실에서 남한도 강대국의 패권 논리에 동조하면서 동족인 북한을 비난하고 멸시하며 억압한다면, 저 유대 전쟁처럼 동족상잔의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고 민족 전체가 패망할 것이다.
남북 분단은 외세의 지배 요인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분단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은 분단 논리를 고착시키고, 분단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정치적 정적들을 매도하고 압살한다. 이 분단 체제와 법을 이용하여 무죄한 자들을 죄인으로 몰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하여 형제자매가, 동족이 서로 갈라져 싸우고 원수 아닌 원수가 됨으로써, 무고한 이들이 범법자가 되고 죽임을 당한다. 언제 어떻게 다시 전쟁으로 치달을지 모를 화약고로 작용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하루속히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이루어 내야 하는 이유다.
2) 남북 화해의 걸림돌 '6·25' 전쟁에 대한 문제
'한국전쟁'은 남북의 화해를 이루는 일에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한다. 소위 반공적 신앙 노선에 서 있는 사람들은 북이 무력으로 남침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 전쟁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가족사적 비극이나 고통을 부각한다. 북에서 피난 온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북의 체제를 상종할 수 없는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북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하느님나라의 실현처럼 믿는 사람들도 있다.
분단 논리를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한 독재 정권들은 '6·25'를 강조하면서 이 전쟁 개시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누구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민족적 비극을 겪게 되었는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남북한의 주민들, 지금까지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 남북한의 민중들, 수백만의 이산가족들의 고통과 비천한 처지에 대한 고려는 간과했다.
한국전쟁은 동족 간의 상호 학살과 도와주러 온 외세인 미국에 의한 학살이 가장 광범위하게 자행된 20세기의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의 근본 원인은 1905년 미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해 주고, 세계대전 후에도 조선의 자주독립을 거부하고 조선을 분할통치한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에 있다.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북한 주민이다. 어떤 경우에도 '6·25'를 민족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무고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기억하면서, 하루속히 남북의 화해와 하나 됨을 이루어 내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외세에 의존한 통일 문제 : 6자 회담의 문제점
1981년 11월 5일 비엔나에서 북과 해외 동포 기독자 대표 45인이 제1차 '조국 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 동포 기독자 간의 대화'를 하고, 합의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공동성명의 첫 번째 사항은 "우리나라는 자주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남북이 합의한 7·4공동성명 3대 원칙의 첫 항목도 '자주'였다. 자주, 평화, 민족 단결에 의한 통일이었다.
남북한 통일 논의는 우선적으로 피해 당사자이며 민족 공동체인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이루어 내야 한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 북은 아시리아에게로, 남은 바빌론으로 달려갔을 때 예언자들은 외세의 힘과 무력을 의존하는 것을 하느님을 배반한 '간음'으로 지칭하고, 외세에 의존한 민족 지도자들을 '창기'라고 비판했다.
소위 '6자'에 속한 강대국들은 모두 우리 민족을 침탈하고 지배했던 나라들이다. 한반도의 문제를 결정한 주요 회담들은 사실상 당사자인 남북을 제외한 채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 맺은 '밀약'이었다. 미국이 주도했지만 남북이 처음으로 공동 테이블에 앉은 '6자 회담'의 의미를 나름대로 평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한은 한반도의 문제를 다룬 소위 '카이로회담'과 '얄타회담'에 참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6자 회담'의 테이블에 합류하면서, 남은 나름대로 북을 위협하는 강대국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주변 강대국들보다 더 북을 위협하고 북에 대한 제제를 가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미 북은 '6자 회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명했다. 이제 북이 '6자 회담'의 틀로 나오게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4)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문제
소위 '북한 선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선교의 목표는 남북통일이라기보다는 민족 복음화"라고 주장하고, 북한 선교의 목표를 북한 교회 재건에 집중한다. 한기총은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북한에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창구를 일원화한다는 것을 첫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 목표는 소위 '복음'이라는 것을 내세워 선교 국가를 지배하려고 한 제국주의적 선교관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물어야 한다.
예수는 결코 제국주의적 선교관을 가진 적이 없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여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지으려고 한 적도 없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처음부터 자신의 선교 사명을 밝힌다. 그것은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멸시를 당하던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이름으로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토착민의 종교와 문화를 미신적인 것으로 매도하여 없애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제국주의적 선교관은 결코 예수가 명한 선교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된 선교의 제1차적 과제와 목표는 제국과 동족으로부터 이중·삼중의 억압과 위협을 당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북의 형제자매를 살리는 일이다.
5) '하느님나라'와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 문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나라는 죽은 이후에 가는 어떤 '공간'이나, 마음속에 내재된 어떤 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샬롬', 곧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의 역사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그것을 '갈라진 민족이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라고 선포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하느님나라의 현실을 보다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것은 인종·사상·계층·성별·종교적 교리와 모든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넘어서서, 보복심과 미움을 버리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용서'와 '사랑'의 나라다.
하느님은 선한 자들뿐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도 해와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시며, 똑같이 사랑한다. 아니, 오히려 죄인과 악인으로 규정당하는 자들을 불러서 아무 조건 없이 '죄인'의 멍에를 벗겨 준다. 예수는 유대 전쟁 당시 하느님의 율법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용하면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할 것과, "네 이웃은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보복을 조장하던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의 불의를 책망한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공동체 안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자신의 재산과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며 화평을 누리는 지(행 4:32-37)를 증언한다. 그러므로 하느님나라를 '자본주의'와 동일시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하느님나라'에 반하는 '악한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세운 어떤 이념이나 국가, 이데올로기는 모두 예수가 선포한 이 '하느님나라'에 비추어 언제나 새롭게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6) 평화와 투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 문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학적으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평화와 투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 하에서 한국교회는 세상과는 무관한 스토아적인 내면의 평화나 신적인 것과의 합일을 통해 얻는 '신비적인 평안'을 얻는 일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것도 구약의 예언자와 예수가 말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가 가져온 평화는 제국과 지배자들의 질서와 법 체제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약소국가와 약자들을 해방하는, 약자들을 위한 평화였다. 예수는 위선적인 종교와 율법주의에 빠져서 고난당하는 자들을 외면한 예루살렘의 지배자와 종교가들과 맞서 싸우며, 그들의 불의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예수는 약자를 억압하는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맞서 싸웠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렇게 예수는 억압받는 자들의 평화를 위하여 불의한 지배자들에게 '칼'을 던지고, '불'을 지르며, '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교회는 추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내적 평안으로 도피하지 말고, 제국주의자들의 거짓 평화에 맞서서, 불의에 항거하며 저들로부터 빼앗긴 약자들의 권리를 되찾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7) 오늘의 남북 경색을 풀고 참된 화해를 이루는 길
날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남북 경색을 어떻게 풀어내고, 참된 화해의 물꼬를 다시 터서 흐르게 할 것인가. 마태복음 5장 21-26절에는 "먼저 가서 화해하라"고 명한 예수의 말이 들어 있다. 예수는 누구에게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가. 예수가 말한 화해란 어떤 것일까. 당시 예루살렘의 지배 권력자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동족인 갈릴리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굶주리며 신음하던 갈릴리 사람들은 강도로 변하고, 유대 독립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적용해 갈릴리 사람들을 폭도와 살인자로 매도하여 로마에 밀고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내세우지만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고, 멸시하며 착취함으로써 형제의 마음에 한이 쌓이게 만든 사람들이야말로 '살인자'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위선적인 종교적 행위를 버리고 '시급히', 형제를 찾아가서 그들의 마음에 맺힌 한을 풀어 주고 용서를 구하며 착취했던 것을 한 푼도 남김 없이 되돌려 주라고 명한다.
남북 경색을 풀고 화해의 물꼬를 다시 흐르게 하려면, 동족을 멸시하는 말로 상처를 주고 멸시하고 정죄하며 압박한 남한 정권이 먼저 북의 형제자매를 찾아가서 사과하고, 마음에 쌓인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 강대국과 도모하여 북을 억압한 것을 회개하며 북에 대한 경제제재와 군사 제재를 풀어 주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죽어 가는 동족을 살려야 한다. 그때에만 비로소 다시 남북 경색이 풀리고, 참된 화해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최영실 / 성공회대학교 신학과 교수
'기독칼럼·논문·서적 > 기독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율법과 복음 (0) | 2010.03.08 |
|---|---|
| 다섯 가지 사과의 언어 (0) | 2010.03.03 |
| 조상공경 (0) | 2010.02.05 |
| 예수님은 교회에 무엇을 원하시는가 (0) | 2010.01.21 |
| 새로운 도시 그리스도인이 온다 (0) | 2010.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