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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마시는 커피는 힘이 세다

은바리라이프 2010. 2. 17. 14:08

당신이 마시는 커피는 힘이 세다
박동욱 기자   January 13, 2010

브랜드가 얼굴을 대체하다
퇴근길에 손수 기른 깻잎이나 콩, 상추를 펼쳐놓고 파는 동네 어르신을 심심찮게 만난다. 생산자와의 직거래인 셈이다. 얼굴을 보고 믿고 구매한다. 이미 많이 사라진 5일장 방식이다. 전국 곳곳에 대형마트가 등장하면서 브랜드와 무슨무슨 인증 마크가 이 얼굴들을 대체했다. 신뢰의 대상이 인간에서 브랜드로 옮겨갔다. 점점 생산자와 직접 하는 거래가 어색하고 구차해졌다. 브랜드나 인증 마크가 없는 거래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나, 시장에서 말로 보증하는 국산을 신뢰해도 되나. 속 편하게 대리인이 나서 가격도 흥정해주고 품질도 깐깐하게 따져주는 데 익숙해졌다. 대형 유통업체가 힘센 대리인을 자처했다.

물건이 나라 밖에서 들어올 경우, 운송도 운송이지만 얼굴도 모르는 외국 생산자를 통제하고 신뢰하려면 유통업체의 역할이 불가피하다. 대리인은 덩치가 클수록, 힘이 세서 생산자를 강력하게 통제할수록 더 매력적이다. 그만큼 가격이 내려간다. 품질을 보증하고 가격을 최대한 낮출 수 있는, 글로벌 유통업체는 소비자로서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생산자가 불행할수록 소비자가 행복해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격을 낮추되 자기 몫은 포기할 수 없었던 글로벌 기업이 생산자를 더욱 빈곤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아동과 여성을 적극적으로 투입하자 착취가 하나의 생산 구조로 정착했다. 여기에 환경 파괴와 각종 자원 남획을 부추기면서 지구는 점점 고갈되어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저렴한 가격과 양질의 제품이면 만족하던 (주로 서구의) 소비자는 구매에 새로운 평가 기준을 도입한다. 이른바 윤리적 소비(ethical consumption)를 하기 시작하는데 제품의 생산 및 유통, 심지어 홍보까지 전 과정에 걸쳐 세밀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아동 노동이, 여성의 노동 착취가 있었는지, 환경 파괴적인지, 독재 정권의 치부에 도움을 주는지 등 지금까지 두드러지지 않았던 항목들이 소비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소비하거나 불매하는 것이 하나의 운동이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28쪽 “지갑을 열되 윤리적으로” 참조). 공정무역(fair trade)은 이러한 현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공정무역은 얼굴 있는 거래의 회복을 꾀한다. 아무리 싸고 질 좋은 제품일지라도, 가령 퇴근길에 만나는 할머니를 착취해서 거둬온 것이라면 달갑지 않을 터이다. 그 중심에 커피가 있다.

공정무역으로 다시 얼굴을 마주보다
커피가 공정무역을 대표하는 상품이 된 것은 전량 수입이며, 국내 소비 규모가 크고 꾸준한 이유도 있지만, 특별히 다국적 기업의 폭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대표적인 상품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소농들이 이웃에 있었다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을 일들이 유통업자들이 세워놓은 칸막이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되자 생산자와 소비자를 서로 등 돌리게 만드는 대리인 대신, 공정한 대리인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소비자 운동으로 이미 터를 다진 단체들의 브랜드가 새로운 가능성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YMCA의 피스커피와 아름다운가게의 아름다운커피가 공정무역 커피를 대표한다. YMCA가 2005년 11월 동티모르산 커피를 판매하면서 공정무역 커피가 소개되었고 아름다운가게가 2002년 아시아지역 수공예품을 공정무역으로 수입하면서 국내 최초로 공정무역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두레생활협동조합과 아이쿱 한국생협연합회, 여성환경연대 등이 국내 소비자운동을 기반으로 공정무역의 확산을 이끈다.

국제구호에도 공정무역을 응용하다

공정무역의 또 다른 가능성은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구호 및 선교 현장에서 발견된다. 올해 8월부터 기아대책은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의 커피를 들여와 판매하고 있다. 익투스 선교회의 제안으로 시작해, 기아대책과 익투스 양쪽 모두에 속한 현지 코디네이터가 생산자조합과의 고리 역할을 한다. 공정무역을 앞서 국내에 소개한 단체들이 소비자운동에 방점을 두었다면 기아대책은 현지의 필요에 반응하는 측면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 공정무역이 주목받기 전부터 구호 및 선교 현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도왔고 공정무역이 무르익으면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은 현지 활동가와 선교사들이 공정무역 대상으로 다양한 품목을 제안하고 있지만 국내에 들여와 팔았을 때 수익이 날 만한 상품은 아직 손에 꼽을 정도다. 기아대책이 다른 국제원조단체와 달리 구호와 BM(Business Ministry)을 같이 하기 때문에 공정무역을 기존 사역에 ‘응용’할 수 있었다. 기아대책은 국제원조단체지만, ‘행복한 나눔’ 54개점을 운영하는 데서 볼 수 있듯 아름다운 가게와도 닮아있다.

소비자 측면에서 보면, 평소 기부와 베풂에는 익숙하지만 물건을 돌려쓰고 조합으로 같이 활동하는 등의 소비자 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다수 기부자의 경우 이러한 기아대책의 융합모델을 통해 공정무역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일방적 베풂이 아니라 일상적인 소비로 세계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묶이는 경험을 새롭게 할 가능성도 생긴다(기아대책 인터뷰 참조).

커피로 교회의 담을 허물다
낯설지만 공정무역의 또 다른 가능성은 한국 교회다. 커피밀은 지역 교회가 카페를 열어 지역 사회와 접점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여기에 공정무역 커피를 공급한다. 교회가 커피를 통해서 가까이는 지역 사회와 연계하고 멀리는 저개발국의 노동자와 연계하는 모델이다. 아이러니하게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공정무역 혹은 나라 밖 저임금 노동자를 착취하는 글로벌 경제 구조에 무심했기에 미지의 공정무역 소비자군으로 남았다.

이러한 가능성은 공정무역을 이끌어가는 단체들에게 색다른 접근을 가능케 한다. YMCA나 아름다운가게와 접점이 없고 평소 생협에는 가지 않는, 대형마트를 애용하는 일반 소비자가 공정무역의 취지에 얼마나 동감할까. 소비자 운동에 이미 관여한 소비자는 공정무역을 빠르게 흡수했다. 평소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친환경과 나눔 정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에 공감도가 낮고, 공정무역을 따지기에는 삶이 너무 어려운 이들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현재 공정무역이 뜨겁지만 어쩌면 작은 찻잔 속 폭풍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 그런 면에서 공정무역 커피의 대형마트와 편의점 입점은 중요한 계기이며 공정무역이 지속가능한 무역과 소비 형태로 자리 잡을 것인지의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지난 14일 TV 홈쇼핑 최초로 공정무역 커피인 아름다운 커피가 소개된 점은 그래서 고무적이다(아름다운커피 인터뷰 참조). 하지만 힘겹게 입성한 대중시장에서 참패한다면 그야말로 마니아들의 소규모 시장에 머물 가능성이 크고, 기존 기업들도 윤리적 소비의 파급력이 미미한 것으로 판단하여 새로운 소비 운동을 한때의 반짝 흐름으로 냉정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소비자군을 찾아야 할 공정무역 진영의 절대절명의 목표 앞에 커피밀의 교회 소비자군 개척은 의미가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커피 소비가 공정무역 커피로 회전할 수 있다면 큰 우군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한국 교회가 사회 정의나 나눔에 인색하다는 그동안의 이미지를 역전할 기회를 스스로 찾고 있고, 교회가 지역과의 소통 접점을 간절히 원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현실성이 있다. 공정무역이 나라 밖 저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살리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은 이미 한껏 달궈지고 있다(커피밀 인터뷰 참조).

검은 눈물은 은혜를 입어야 한다

시장에서 성패가 판가름 날 때까지 당분간 커피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품이 공정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될 가능성이 높다. 분명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공정무역이라는 꼬리표가 소비 자체를 옹호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 굳이 구매하지 않아도 될 상품을 저임금 노동자를 돕는다는 미명 아래 사치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다(32쪽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사실까” 참조).

공정무역을 포함한 윤리적 소비가 또 하나의 ‘구별짓기’로 작동하는 일 또한 경계가 필요하다. ‘남과 다르게 사는 바른 나’를 드러내는 표시로 떠벌리고 다닐 수도 있다. 이는 동정심이나 우월감에 기초해 저임금 노동자에게 ‘적선’을 베푸는 마음으로 공정무역 상품을 구매하는 것만큼이나 저열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시던 커피를 버리고 공정무역 커피를 선택하는 것도 어렵지만, 제대로 된 이유로 공정무역 커피를 선택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더불어 기억해야 할 유혹은 문제를 수평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태도다. 윤리적 소비로 돌아서되 제대로 돌아서는 일이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심지어 공동체가 하나 되어 운동을 전개하거나 “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공동체의 변화를 꾀하면 곤란하다. 많은 운동가들이 사회 정의의 수직적 차원을 이해하지 못해 완전히 소진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많은 자유주의 교회들이 종교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사회봉사 기관으로 전락한 것은 수평적 차원에만 집착한 결과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수치스러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40쪽 “태초에 은혜가 있었다”기사 참조).

흔히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가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지경을 보여주리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다고 가정하는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들을 돌아본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떠야지 다른 마음은 신기루다. 그리스도인에게 공정무역이 표방하는 ‘공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생산자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공정한가, 그 마음에 합하는가’를 살핀다. 왜냐하면 세계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마시는 커피는 어그러진 세계를 그대로 품은 검은 눈물이다. 그 커피가,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 땅의 온전한 회복과 공정이 불가능함을 증명한다.  마시는 한 잔 한 잔마다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공정한 세계를 구한다면 커피는 제 힘을 회복할 것이다. 당신이 마시는 커피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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