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 카톨릭의 기원
3세기까지도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로마교회가, 중세기를 장악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되고, 지방 교회의 일개 장로에 불과했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되어 중세기를 호령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 후의 신성 로마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콘스탄틴 황제(AD 306-337)와 유스티니안 황제(AD 527-565)는 교황권을 양육하여 중세기의 주인으로 성장시킨 사람이다.
312년 10월 27일 콘스탄틴황제가 꿈과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가"를 힘입어, 적수였던 막센티우스황제를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이긴 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313년 3월에는 「밀란의 칙령」이 반포되어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및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고(AD 313), 사법상의 특전도 베풀어져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로 성직제도는 졸지에 타락하여 성직매매가 성행했고, 민중의 호응과 인기를 얻기 위해 교회의 문지방은 낮아질대로 낮아져 세속과 이교(異敎)의 물결이 넘쳐 들어왔다.
예배는 극도로 이교화하였고, 321년 3월 7일에는 아직도 콘스탄틴황제가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페르샤의 태양신 미드라(Mithras)의 예배일인 일요일에 휴업하라는 포고가 내려졌다.
이러한 틈새에서 국가의 비위를 맞추며 꾸준히 정치적 기반을 굳혀 온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이러한 종교정책을 열렬히 환영하며,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기에 안간 힘을 썼다.
326년 콘스탄틴황제는 선동죄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는 황후 파우스타 (Fausta)의 라테란 궁전을 로마교회 감독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주어 공관을 삼게 했다.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플로 옮기게 되자,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교권을 확장하게 됐다.
375년 이제까지 로마황제들이 공식명칭으로 쓰고 있던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그리스도인인 그라시안(Gracian) 황제가 비로소 포기하자,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던 로마교회 감독은 즉시 이를 채택하여, 자신의 칭호로 삼아 오늘날까지도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고 있다.
476년 서로마가 망한 뒤, 로마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미지로 군림하여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했다.
496년 게르만 민족의 강자인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켜, 로마교회의 양자로 삼음으로써 중세기 동안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했다.
특별히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교회 감독으로 하여금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로마의 잃어 버린 통치권을 되찾고, 이전의 통일된 대제국을 이룩해 보려는 목적으로 황제는 로마교회의 영항력을 십분 이용하려 했다.
유스티니안은 493년 아리안주의(Arianism) 게르만 민족으로 하여금 이탤리 반도와 로마교회를 위협해 온 헤루리를 정복하고, 534년에는 같은 이유로 반달족을 정복했다.
533년에는 로마교회 감독을 "세계교회 머리"로 공식 인정하고 이 사실을 534년에 그의 법전에 편찬했다.
538년에는 아직도 이탤리 반도와 로마교회 감독의 지상권에 도전하는 마지막 아리 안주의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마침내 교황권을 중세기의 권좌(權座)에 앉혀 놓았다.
그 뒤를 이어, 서유럽의 실력자가 된 프랑크왕 피핀(Pepin 741-768)은 왕위를 찬탈한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준 데 대한 감사로, 로마교황을 적극 후원하여, 754년에는 롬바드에게서 빼앗은 동로마제국의 영지를 교황에게 주어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써, 로마교회는 이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피핀 왕의 아들 챨스 대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곤경에 빠진 로마교황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원한 뒤,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성 베드로 사원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역사적인 신성 로마제국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막을 내리기까지 1,000여년 간 교황권의 성실한 보호자 구실을 했다.
십자군을 일으켜 알비젠스, 왈덴스등 개혁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허스와 제롬을 불사르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편의와 힘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이었다.
따라서 카톨릭은 초대교회를 계승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초대교회를 핍박하고, 이방종교를 흡수한 혼합종교이고, 정치적 후원으로 성장하였으며, 권력과 금력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세상적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카톨릭의 비 성경적 교리 역사
큰 바벨론인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온갖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서 그 모습을 갖추어 왔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1. 루시안이 장로를 사제라고 처음으로 부름---2세기
2. 시프리안이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를 만들어 냄---3세기
3. 죽은 자를 위한 기도---A.D. 300
4. 십자가 형상을 만듦---A.D. 300
5. 촛불---A.D. 320
6. 천사, 죽은 성인들, 형상 숭배---A.D. 375
7. 미사가 매일 드리는 예식이 됨---A.D. 394
8. 에베소 공회를 통해 마리아를 높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로 부르기 시작---A.D. 431
9. 사제들이 특별한 옷을 입기 시작---A.D. 500
10. 최후의 도유(치유를 위한 의식)---A.D. 526
11. 그레고리 1세가 연옥의 교리 확립---A.D. 593
12. 예배 때 라틴어 사용---A.D. 600
13. 마리아, 죽은 성인들, 천사들에게 기도---A.D. 600
14. 최초의 교황(보니파스 3세)---A.D. 610
15. 교황의 발에 입맞춤---A.D. 709
16. 프랑크 왕 페핀이 교황에게 세속 권력을 넘겨줌---A.D. 750
17. 십자가, 형상, 유물 숭배 인정---A.D. 786
18. 소금, 기름을 섞은 물에 사제가 축성해서 성수로 만듦---A.D. 850
19. 성 요셉 숭배---A.D. 890
20. 추기경 대학 설립---A.D. 927
21. 교황 요한 13세가 종(鐘)에 세례를 베품---A.D. 965
22. 교황 요한 15세가 죽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선언함---A.D. 995
23. 금요일과 사순절 금식---A.D. 998
24. 미사가 점차 희생제사로 발전하고, 참석이 강요됨---11세기
25. 사제들의 독신생활---A.D. 1079
26. 은둔자 베드로가 묵주 사용(이교도의 관행) 도입---A.D. 1090
27. 베로나 공회 때 종교재판소 제정---A.D. 1184
28. 면죄부 판매---A.D. 1190
29. 피터 롬바르트가 일곱 가지 성사 확정---12세기
30. 이노센트 3세가 화체설 확립---A.D. 1215
31. 이노센트 3세가 죄를 하나님이 아닌 사제의 귀에 들리게 고백하는 의식(화해의 의식) 제정---A.D. 1215
32.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성병 숭배 제정---A.D. 1220
33. 발렌시아 공회 때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금지되고 금서 목록에 포함됨---A.D. 1229
34. 영국의 사이몬 스톡이 성의를 만들어 냄---A.D. 1251
35. 콘스탄스 공회 때 평신도들은 영성체 때 잔은 받을 수 없게 됨---A.D. 1414
36. 플로렌스 공회 때 연옥이 교리로 확정됨---A.D. 1439
37. 트렌트 공회 때 교회의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됨---A.D. 1545
38. 트렌트 공회 때 외경도 성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됨---A.D. 1546
39. 교황 피오 4세가 만든 신조가 원래의 사도들의 신조 대신 공식 신조로 채택됨---A.D. 1560
40. 교황 피오 9세가 마리아의 무염시태(죄없이 잉태됨)를 선언함---A.D. 1854
41. 교황 피오 9세가 "유설표"를 공표하고 바티칸 공회가 인준함, 로마 카톨릭 교회가 승인하지 않는 종교, 양심, 언론, 과학적 발견의 자유를 정죄함, 교황이 세상 통치자들의 세속 권세 위에 권위를 가졌다고 인정함---A.D. 1864
42. 바티칸 공회를 통해 믿음과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교황의 절대무오류성 선언---A.D. 1870
43. 피오 12세가 마리아의 몽소승천 선언---A.D. 1950
44. 교황 바오로 6세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 부름---A.D. 1965
3. 교황제도
카톨릭은 교황을 가르켜 베드로의 사도직분을 계승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며, 전체교회의 머리이고, 거룩한 아버지며, 무오한(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교황의 교시를 성경보다 높게 생각한다. 그러나 교황에 대한 이러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 예수님,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다.
교황은 인간에 불과하며 역사상 많은 부도덕한 일(살인, 신성모독, 치부, 성직매매, 술취함, 간음, 동성연예, 근친상간)을 자행해 왔다. 중세시대 때에는 왕을 능가하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예수님이 제시한 섬기는 지도자 상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교황 세르기우스 3세(A.D. 904~911)는 살인을 통해 교황직을 얻었고, 여자와 관계해 불법으로 사생아를 낳았다.
교황 요한 12세(A.D. 955~964)는 성적으로 문란해 교황청에 창녀들을 불러들였고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했다. 주교 50명이 성베드로 성당에 모여 교황을 절도, 성직매매, 위증, 살인, 간음, 근친상간으로 고소했으나, 교황 요한 12세는 오히려 추기경과 주교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팔과 코와 귀를 자르는 보복을 하였다.
교황 요한 15세(A.D. 985~996)는 교회 재정을 자기 친척들에게 나누어 줘 부패한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교황 베네딕트 8세(A.D. 1012~1024)는 공개적으로 뇌물을 주고 교황직을 산 부도덕한 인물이다.
교황 베네딕트 9세(A.D. 1033~1045)는 대낮에 살인과 간통을 자행했고, 순례자들을 강탈하다가 추방당했다.
교황 이노센트 3세(A.D. 1160~1216)는 종교재판소를 창설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백만명 이상 살해했다.
교황 요한 23세(A.D. 1410~1415)는 주교와 사제로 구성된 37명의 증인에 의해 음행, 간통, 근친상간, 남색, 성직매매, 도둑질, 살인죄로 고소당했고, 300명의 수녀들을 겁탈하였다. 바티칸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자기 형제의 아내와 변태 성행위를 자행하였고, 수백명의 처녀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결혼한 여자들과 간음을 행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리었다.
교황 비오 2세(A.D. 1458~1464)는 육욕에 빠지는 방법을 가르쳤고, 많은 사생아의 아버지였습니다.
교황 바오로 2세(A.D. 1464~1484)는 비싸고 호화로운 왕관을 쓰고, 궁전에 많은 첩을 두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A.D. 1471~1484)는 교회 직분을 경매로 팔아 전쟁자금을 충당했고, 친척들에게 치부한 돈을 나누어 주었으며, 어린 조카 8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사치스럽고 화려한 잔치를 종종 열었다.
교황 이노센트 8세(A.D. 1484~1492)는 여러 여인과 성관계를 통해 16명의 자녀를 두었고, 자녀 중 몇 명은 바티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고, 교회 직분을 늘려 돈을 받고 팔았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투우 경기를 벌였다.
교황 알렉산더 6세(A.D. 1492~1503)는 추기경을 뇌물로 매수해 교황직에 선출되었고, 품행이 나쁜 자기 젊은 아들을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앉혔으며, 자기의 두 누이와 근친상간하고, 자기의 딸 루크레티아에게서 자녀를 두었다.
교황 레오 10세(A.D. 1513~1521)는 8세에 수도원장이 되었고, 13세에 추기경이 되었으며, 값비싼 유흥과 연회를 통해 술 마시고 흥청망청 놀았으며, 교황의 궁전에서 12명의 벌거벗은 소녀에게 저녁 시중을 들게 했다.
교황 바오로 3세(A.D. 1534~1549)는 전에 추기경으로 있을 때 자녀를 두었었고, 십대의 어린 조카 두 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가수와 무희와 어릿광대를 동원해 축제를 후원했고, 점성가를 불러 조언을 구했다.
*교황이 머리에 쓰는 관은 바빌론의 인어 모양의 신인 다곤과 같다.
반인 반물고기 모양을 한 바빌론의 다곤 신
삼중관을 쓴 교황 다곤신과 같은 모양의 관을 쓴 교황
*교황에 대한 카톨릭 내의 평가
교황만이 가장 거룩하다고 불릴 수 있으며…… 거룩한 군주, 지고한 황제, 그리고 왕중왕(King of Kings)이라고 불릴 수 있다. 교황은 그토록 큰 위엄과 능력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동일한 심판을 구성할 수 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한 바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발해진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Pope", Ferraris, Ecclesiastical Dietionary).
우리(주: 교황들)는 이 땅 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Pope Leo XIII, Encyclical Letter, June 20, 1894, The Great Encyclical Letters of Leo XIII, 304).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상권을 뜻한 것으로 성경에서 그에게 돌려진 모든 명칭들은, 교황에게도 마찬가지로 돌려진다(Bellarmine, on the Authority of Councils, bk. 2, ch. 17).
세 관으로 꾸며진 이 삼층관을 받으소서. 당신은 군주들과 제왕들의 아버지이며, 세계의 주교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임을 생각하소서. 주의 명예와 영광이 영원하실 지어다(경향잡지, 14).
4. 마리아 숭배
천주교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했고, 죽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자 여왕이고, 하늘의 문이며 그녀를 통해서 용서받는다고 한다. 또한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인간에 불과한 마리아를 예수님의 자리에 앉힌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교리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이방종교의 여신숭배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카톨릭은 사탄 숭배국가였던 바빌론 종교의 우상과 풍습을 그대로 수입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빌론은 성경(창 10:1~9)에 나오는 니므롯이라는 강력한 사냥꾼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니므롯이란 이름은 '그가 반역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대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물이 된다. 니므롯은 아내 세미라미스와 아들 담무스를 두고 있었고, 온갖 악행과 사탄숭배를 자행하였다.
니므롯이 죽었을 때 그의 몸은 여러 조각으로 잘려져 여러 지역으로 보내졌다.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이 태양신이 되었고, 아들 담무스로 환생하였다고 주장했다. 니므롯이 태양신이 되었기 때문에 불과 촛불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니므롯을 나타내는 다른 상징물로는 태양, 물고기, 나무, 기둥 등이 있다.
또한 세미라미스는 담무스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잉태된 구원자라고 했고, 자신도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바빌론 지역에 흔히 있는 모자상(母子狀)은 여신 세미라미스가 자기 아들 담무스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빌론 풍습은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가 여러 곳에서 모자상이 발견된다.
중국 사람들은 아기를 팔에 안은 여신을 '싱무' 즉 '거룩한 어머니'라고 부른다.
독일 사람들은 팔로 아기를 안은 처녀 '헤르타'를 숭배했다.
인도에서도 크리쉬나 아기를 안은 어미 데바키를 숭배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이집트 최고의 신 호루스를 안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방의 여신을 숭배해 예레미아서에 보면 하늘 여왕에게 분향했다고 나온다(렘 44:17~19).
바빌론과 이집트 등 세계의 고대 종교에 나타나는 아기를 안은 여신 | |||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 |||
부활해 승천하는 마리아 |
마리아에게 경배하는 교황 |
십자가에 못 박힌 여인(마리아는 아님) |
십자가와 함께 있는 마리아(로마) |
A.D. 313년 로마 교회가 국교화 되면서 이방종교가 금지되었으므로 이교도들은 그들의 여신숭배 사상을 교회 내에 가져왔고, 로마 교회는 교세확장을 위해 이를 용인하였다. 점차 이교도들의 여신 숭배는 마리아 숭배로 옮겨가게 되었다.
A.D.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는 마리아 숭배를 카톨릭의 공식 교리로 채택하였다. 에베소는 고대로부터 처녀와 어미의 여신 다이아나를 숭배하던 도시였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에베소 거민들은 스스로 여신 우상을 파괴하기도 하였다(행 19:24~27).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기도해 주는 중보자라고 하나, 그 역할은 예수님의 역할이다. 요일 2:1, 딤전 2:5, 눅 1:46~47 참조.
하나님과 나를 이어주는 중보자(Mediator)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
단순한 사람이 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마리아 자신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했다. 권세가 하늘에 닿는 카톨릭은 이와 같이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교리도 거리낌 없이 추가한다.
카톨릭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했고, 평생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1854년 교황 피오 9세가 선언한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이다.
카톨릭은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해 하늘 여왕이 됐다고 가르친다.
몽소승천 교리는 A.D. 1951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선언되었다.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는 고대 이교도들의 여신 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천주교는 로사리오라고 불리는 묵주를 기도할 때 사용한다. 그런데 이 묵주는 불교에서 쓰는 염주와 다를 바 없고, 고대로부터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기구이다. 수세기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염주를 사용해 알라신에게 기도했다.
B.C. 800년 경 페니키아 사람들은 원형의 염주를 이용해 여신 아프로디테를 숭배했다.
* 묵주 기도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십자가를 잡고 성호경을 한 다음 십자가에 친구하고
2. 사도신경을 외운다.
3. 다음 묵주알을 잡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4. 다음 세개의 알을 차례로 넘기며 각각 성모송을 한다. 각각에서 다음을 묵상한다.
1) 천주 성부의 지극히 거룩한 딸이신 마리아
2) 천주 성자의 평생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
3) 천주 성령의 지극히 정결한 짝이신 마리아
5. 다음의 묵주알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영광송을 한 후, 묵상 주제인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신비 1단을 외운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6. 묵주알 10개를 넘기면서 성모송 10번을 하는 동안 신비 1단의 내용을 묵상한다.
7. 다음 알을 잡고 영광송과 구원경을 바치면서 1단을 마친다.
8. 이어서 신비 2단을 외운 뒤,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 1번과 성모송을 10번을 하면서 2단의 내용을 묵상하고,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다.
9. 같은 방법으로 3단, 4단, 5단을 바친다.
10.마지막 5단의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 뒤 성모찬송을 바치고 십자가에 친구하면서 끝낸다.
완전한 로사리오에는 성모송 53번, 주기도문 6번. 성체송 5번, 성체 묵도송 5번, 영광송 5번, 사도신경 5번이 포함되어 있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성모송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보다 9배나 더 한다.
그리고 이렇게 주문 외듯이 같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은 이교도적인데,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교도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로 생각함이라"(마 6:7).
5. 카톨릭 성직계급과 고해성사
신부님에 대한 호칭이 서양에서는 Father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쓸 수 있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술 더 떠서 신부(神父)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외에는 종교적으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9)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공동번역).
로마 교황을 나타내는 Pope란 단어도 아버지라는 의미의 단어를 조금 바꾼 것에 지나지 않다.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이방종교인 미트라교에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들을 아버지(Father)라고 불렀다. 또한 미트라교 사제의 우두머리는 로마에 살았는데, 그는 '아버지들의 아버지'(Pater patrum)라고 불리었다. 성경의 사사기에도 이교도의 사제를 아버지라고 부름이 나타나 있다(삿 17:10).
천주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부정한다. 속죄는 선행과 기도와 고해성사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죄 사함의 권리는 예수님께만 있고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을 수 있는데도, 카톨릭은 죄 많은 인간인 신부에게 죄를 고백해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카톨릭에서 교황 다음 가는 직분으로 추기경이 있는데, 성경에는 추기경이라는 직분이 없다. 추기경은 원래 로마 이교도들의 성직으로 추기경을 의미하는 Cardinal은 돌쩌귀(문을 여닫기 위해 경첩과 같이 쇠붙이로 된 물건)를 의미하는 라틴어 Cardo에서 유래되었다. 추기경은 원래 문과 돌쩌귀의 신이던 야누스(Janus)를 모시던 사제였다. 추기경은 붉은색 옷을 입는데 이는 이교도 카디날 사제들의 붉은 옷과 같으며, 바빌론 왕들도 붉은 옷을 입었다.
카톨릭의 교권체제는 이교도들의 대승원장(Pontifex Maximus)을 수장으로 하고 승원장(Pontiffs)들이 그를 보좌하는 제도와 비슷하며, 이같은 제도는 바빌론에 있었던 승원장 공회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교도들은 제사를 드리기 전 사제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추기경(Cardinal)과 주교(Bishops)와 사제(Priests)이고, 이를 로마 카톨릭에서 그대로 수용했다.
신약시대에 성경에 명시된 교회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감독과 목자(목사)와 장로는 같은 직분입니다)와 교회 실무를 담당하는 '집사' 뿐이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라고 했고, 장로는 양떼를 먹이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모범을 보이라고 했다(벧전 5:1~3).
예수님도 니골라당을 경계하라고 했는데, 니골라는 정복한다는 의미인 나카오(Nikap)에 어원을 둔다(계 2:6). 카톨릭의 대주교(archbishop), 대사제(archpriest) 등에서 'arch'는 지도자 또는 선생이란 뜻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선생(master)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셨고,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 하셨다. 또한 교회에서 큰 자는 오히려 형제를 섬겨주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상하관계는 있을 수 없으며, 개신교에서도 목사와 성도는 주님을 모시는 한 형제이다.
"또 너희는 선생이라고도 불리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한 분, 곧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라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3:10~11).
6. 우상 숭배
그리스도인 감독(司敎)들은 이전에 희랍과 로마의 다른 종교의 숭배자들이 그들의 상상적인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였던 종교의식들과 제도들을 조금씩만 고쳐서, 그리스도교 예배에 끼어 넣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교도(異敎徒) 대중들로 하여금 이런 의식들은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전래(傳來)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바뀐 것이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순교자들도 이전에 자기들의 신들이 경배받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예배되고 있는 줄로 안다면, 그들이 더욱 쉽사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틴 황제가 자기 조상의 종교를 포기하자마자, 곳곳에 으리으리한 성전들이 서게 되어, 여러가지 그림들과 우상들로 단장되었는데, 이것들은 외관으로 보나, 내면으로 보나, 이교 신들의 신전과 흡사한 것이었다(J. L. Von Mosheim, Ecclesiastical History, I, 369).
실제로 8세기에 이르러서 카톨릭교회들은 각종 성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것들에 입맞추고, 기도하고, 분향하고, 절하는 일이 지나쳐, 오히려 우상을 섬기지 않는 회교도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조롱을 받는 등 그 퇴폐함이 극에 달했다.
보다 못한 동로마 황제 레오 3세(Leo III)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등은 종교회의를 열어 우상 숭배를 금하고 교회당에서 이를 제거할 것을 명하고 강제로 부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 3세(Gregory III)는 우상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동서(東西)교회 간에 장기간에 걸친 논쟁과 분쟁으로 들어섰다.
심지어 로마교회의 일각에서는 "하나님은 성만찬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들어 놓은 우상(偶像)에도 임재하신다. 그려지거나 묘사되지 아니한 그리스도는, 실제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주창하기에 이르렀다(Qualben, 153, 153).
이것이 그 유명한 성상 파괴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인데 우상에 대한 로마교회의 견해는 지금도 그 때와 변함이 없으며, 지금의 바디칸 성 베드로 성당에도 395개의 성상과, 44개의 제대(祭臺)가 차려져 있다(경향잡지, 22).
a) 오벨리스크 숭배
이집트 오벨리스크 바티칸 베드로 성당의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고대 종교의 상징물로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신화에서 유래됐는데 여신 이시스의 남편 오시리스의 성기를 의미하며 또한 태양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명백한 이교도들의 상징물이 로마 바티칸 성당 앞마당 한 복판에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이 오벨리스크는 모조품이 아니라 이집트에 있던 고대 유물을 직접 가져온 것이다.
A.D. 37~41년에 로마 칼리굴라 황제는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바티칸 언덕의 원형경기장으로 가져왔다. 헬리오폴리스는 고대 이집트 태양 숭배의 근거지였다. 바티칸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24m이며, 기초까지 합치면 40m이고, 무게는 무려 320톤이나 나간다.
A.D. 1586년에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령으로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으로 옮겼다. 많은 사람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일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이 오벨리스크를 옮기다가 떨어뜨려 깨뜨리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폰타나라는 사람이 책임을 맡고 45개의 감아 올리는 기계와 180마리의 말과 800명의 작업대원을 이끌고 과업을 수행했다.
1586년 9월 10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벨리스크는 운반되었고, 성공적으로 세워지자 수백개의 종소리와 대포 함성이 울려 퍼졌고, 군중은 환호성을 올렸다.
교황청은 이집트 우상 꼭대기에 십자가를 안치함으로써 신성 모독적인 일을 자행하였다.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후 교황은 미사를 거행하였고, 작업대원과 말들에게 복을 선포하였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 주위에는 24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이런 건축양식은 이교도들의 신전설계에 사용되는 것이다.
b) 태양 숭배
성병(聖餠, host, 미사에 쓰이는 빵) 성체 헌사대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이방종교인 미트라교에서는 태양을 숭배했다.
이러한 태양 숭배의 영향을 받아 성찬에서 쓰이는 성병(聖餠)도 동그랗게 만들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종교에서도 사제들이 태양신에게 둥근 빵을 재물로 드렸습니다.
성병(聖餠)에 새겨진 IHS는 이집트의 삼위일체신 Isis, Horus, Seb을 의미한다.
성체를 모시는 성체 헌사대는 좀 더 적나라하게 태양 햇살까지 표시되는 문양을 가지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중앙 제단에는 뱀처럼 꼬인 기둥 사이에 빛이 들어 오는 태양 형상이 있다.
고대의 태양 숭배 문양 바빌론의 태양 수레바퀴 오벨리스크를 중심한 해시계
바벨론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제단에도 이러한 형태의 금으로 만든 태양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건축가들이 신전에 태양 문양을 새기는 관습이 있었는데, 태양신이 악령을 쫓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람들은 커다란 수레바퀴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고, 태양신이 수레를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도 바알과 태양신과 달과 행성에게 분향하던 제사장이 있어 요시아 왕이 이를 개혁한 적이 있다(왕하 23:5).
바벨론의 벨 신전에서는 8개의 살을 가진 태양신을 상징하는 수레바퀴가 발견되어 현재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 있다.
이와 유사한 수레바퀴 문양이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에도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버젓이 새겨져 있다.
카톨릭의 성화 속 인물의 머리 주위의 밝은 원과 수도승의 로마식 둥근 삭발도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
이 밖에도 찬란한 제복, 촛불, 종, 향, 음악 등이 모두 이교도의 풍습과 관련되어 있다.
c) 우상숭배 금지를 제거한 카톨릭 십계명
바티칸 성당은 온갖 우상으로 불교의 사찰(寺刹)을 방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로마교회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5)는 둘째 계명을 달가와할 리가 없고, 첫째 계명에 포함되었다는 애매(曖昧)한 이유를 붙여 삭제(削除)해 버렸다.
이와 같이 우상 숭배에 관한 둘째 계명이 삭제됨으로써, 한 조항이 모자라게 되자, 다른 사람의 아내나, 종이거나, 혹은 소유를 막론하고 탐심을 갖지 말도록 명한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결국 아래와 같은 천주(天主) 십계(十誡)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2.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 맹세를 발하지 말고,
3. 주일을 지키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를 변경)
4.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5. 사람을 죽이지 말고,
6. 사음을 행하지 말고,
7. 도적질을 말고,
8. 망령된 증참을 말고,
9.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10.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 [천주교 교리, 제1권, 제28절.]
천주교의 중요 성당과 수도원을 채우고 있는 인간 해골 - 체코의 천주교 성당. |
보석 등으로 치장하여 보관된 성자의 유골 (스위스의 천주교 수도원에서) |
스페인의 성당에 있는 불사조(Phoenix는 프리메이슨 상징) |
7. 종교 개혁과 기독교 박해
a) 종교 개혁
유물과 교회 직책, 면죄부를 파는 일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의 큰 사업이었다.
교황 보니파스 8세는 A.D.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였고, 성 베드로 성당까지 순례를 하는 사람에게 면죄를 허가했다.
그 해에 이백만명이 로마로 몰려 들었고, 성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두 사제는 돈을 갈퀴로 긁어 모았다. 교황은 이렇게 모은 돈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많은 성과 저택을 구입함으로써 로마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은 많은 도시와 땅을 소유했고, 교회에 강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카톨릭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해 준다는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중세에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은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육적 쾌락을 위해 죄를 용서하는 문서를 팔았다.
마틴 루터 당시에는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했기 때문에 교황은 돈을 모으기 위해 더욱 면죄부 판매에 열중했다.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도시를 방문해 교황의 공식 인가서와 교황의 깃발을 내 걸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긁어 모은 돈은 큰 쇠금고에 넣었다. 돈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돈이 상자 속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고통 당하는 영혼은 연옥에서 구원 받습니다."
부자들은 별 무리가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조상과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이에 루터는 면죄부를 비롯한 카톨릭의 모순을 지적한 95개 반박문을 캐슬 교회 문에 못 박았다.
면죄부가 엉터리라는 가장 큰 증거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이라는 연옥이라는 영계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아직까지도 돈을 받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
b) 기독교 박해 (종교 재판)
중세시대에 카톨릭의 타락과 모순에 대항하여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카톨릭에 의해 이단자로 정죄되어 참혹한 고문과 희생을 당했다.
A.D.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는 '박멸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내려 카톨릭과 카톨릭의 영향권에 있는 권력자들이함께 이단자를 고문하고 화형할 것을 지시했다.
고문대를 사용하여 손과 발을 묶고, 밧줄을 감아 사지를 잡아 당겨, 사지가 떨어져 나가며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고문. |
'철갑처녀로 알려진 이 고문기구는 속이 비어 있는데 안에 칼들을 꽂아, 안에 갖힌 사람이 꼼짝 없이 칼에 둘러 쌓여 온 몸이 베임을 당하게 하는 고문. |
참혹한 박해
그들은 집게로 손톱을 뽑아냈고, 남녀 성기를 불로 지져댔으며, 큰 롤러에 송곳을 달고 개신교도 위에서 굴렸으며, 고문기구로 손 마디와, 다리와 발가락을 뭉겠다.
또한 희생자의 옷을 벗긴 뒤 줄로 팔을 등 뒤로 묶었고, 도르레를 사용하여 몸을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신체 부위의 관절이 떨어져 나가게 했다.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귀와 입에 끓는 납을 부어 넣었고, 눈을 빼거나, 살점이 튀도록 채찍질을 하거나, 긴 못이 박힌 낭떠러지에 던져 넣었다.
종교 재판소에서 고문 당한 사람은 감옥에 벽의 쇠사슬에 묶였고, 피로 가득찬 고문실에 살고 있는 쥐와 해충의 먹이가 되어 죽어갔다.
종교 재판은 점점 대량학살로 이어졌는데 A.D. 1209년 베지에르라는 도시에서는 6,000명이 칼로 살육당했고, A.D. 1211년 라바우어에서는 10만명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학살당했다.
메린돌 대 학살에는 500명의 여인들이 창고에 갖힌 채 불어 타 죽었고, A.D. 1562년 오렌지 대학살에서는 교황 비오 4세가 이탈리아 군대를 보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A.D. 1572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만명의 성경대로 믿는 위그노 교도들(Huguenots)이 대학살 당했다. |
종교재판에 사용되었던 3가지 주요 고문방법을 보여주는 버나드 피카르트의 종교재판 고문실 |
나무에 묶여 화형 당하는 개신교도 |
교황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단(異端)을 징치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의로운 성도들을 고문하거나 죽였다.
다음의 몇 인용문들을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헌에서 발췌된, 공언하고 있는 박해의 정당성이다.
만약 교회의 어느 신자가 불신실하게 된다던가, 이단에 빠져들던가, 혹은 어떤 다른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이러한 교인은 그가 의존돼 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을 견책할 수 있는 권한 뿐만 아니라 교회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외적인 형벌로써 고통을 줄 수 있고 세속적인 권력에 의뢰할 수도 있다(Schouppe, A Course of Religious Instruction, 74, cited by Gane, 53).
화폐 위조범이나 다른 범죄자들이 세속적인 당국자들에 의해서도 즉시로 합당하게 사형에 넘겨지거든, 하물며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이야말로 즉시 파문(破門)할 뿐더러, 분명히 사형에 처해야 하지 않겠는가(St. Thomas Aquinas, Moral Theology, cited by Gane, 53).
영적인 검과 물질적인 검 모두가 교회의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검도 참으로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영적인 검도 교회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즉 하나는 사제(司祭)의 손에 의해, 다른 하나는 왕들과 병정들에 의하여 사용되지만, 사제의 뜻과 승낙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공공연히 이단임을 공언하고, 말이나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말하노니, 출교 뿐만 아니라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Lepicier, De Stailitate et Progressu Dogmatis, 211, 212, 194, cited by Gane, 53).
* 그러면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이단자는 누구인가?
이단자란 카톨릭교회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으로 가르치는 특정한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이를 고집스레 반대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믿을 것과 안 믿을 것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언하는 영세 받은 신자이다(M. 뮤럴,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설, 4권 1885년 판, 170, cited by A. J. Weaner, 성서 기초교리, 148).
이렇게 독선적(獨善的)으로 규정된 이단의 개념에 따라, 이단자로 정죄되면 행정을 맡은 시장이나 당국자들은 닷새 이내에 그를 나무에 달아 불태워 죽여야 햐며, 만약 당국자가 이를 지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그도 파문에 처해지고 이단자로 취급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카톨릭 백과 사전, "종교 재판소" 8권, 34, 성서 기초교리, 148).
* 이러한 제도 아래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이단들, 특히 성도들이 고통과 죽임을 당했는가?
스페인에서만도 종교재판에 의하여 고난 당한 사람들은, 산 채로 화형 당한 사람이 31, 912명으로 헤아려졌고, 소위 복종하도록 강요된 참회자가 291, 450명으로 계산되었다. 알비젠스인(Albigenses)들의 대학살에서는 백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교황 인노센트 3세가 1208년 알비젠스와 왈덴스인 박멸을 위해 일으킨 십자군 당시 제수이트(Jesuits)제도가 처음 확립된지 30년 동안에 900,000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당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알바 공(公·카톨릭신자)의 지시에 따라 36, 000명이 보통 집행자들에 의해 신속히 사형에 처해졌다는데, 알바 공은 이러한 행위를 자랑했다.
찰스 5세의 치하에서는 50, 000명의 프랑드르인들(Flanders) 지금의 벨기에의 서부, 네델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중세기 국가와 독일 사람들이 교수형과 화형과 산 채로 매장당했다(Guinness, Key to the Apocalyps, 92, 93, Albert Barnes, Notes on Daniel, 328).
세계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살상 행위로 꼽히는 1572년 8월 24일 의 바돌로매 (Bartholomew) 제일(祭日)의 대학살이 바로 로마 카톨릭교회에 의하여 저질러졌음을 세상이 알고 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프랑스의 어린 왕 찰스 9세의 섭정 태후였던 캐더린 (Catherine)은 강력해져 가는 개신교도들인 위그노파를 제거하기 위해, 위계(僞計)를 써서 그들을 한 데 모아 놓고, 졸지에 살상을 감행하여 남녀노유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위그노면 모두 죽여!'라고 외치며, 파리 시내에서만도 일주일 이내에 8,000여명을 죽였고 2달 동안 전국으로 확대한 살육을 통해 8만명 이상을 죽였음은 가공(可恐)스러운 역사로 기록돼 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러한 살육의 소식을 들은 교황청과 스페인 황실에서는 도덕적인 극악성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열광적으로 대환영했고, 로마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기념 메달이 발행되었다 ([교황권의 한 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J. A. Wylie, The History of Protestantism, vol. I, 16).
일찍이 인간 가운데 존재했던 어느 다른 제도보다도, 로마교회는 더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이 역사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진 개신교도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로마 교회의 허다한 핍박에 관한 기념물들이 지금은 너무나 없기 때문에, 그들에 의한 엄청난 희생자들에 대한 완전한 개념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상상력을 가지고서라도 희생자들의 고통을 적절히 인식할 수가 없음이 분명해졌다(William E. H. Lecky, History of the Rise and Influence of the Spirit of Rationalism in Europe, vol II, 35, 37).
로마 교황은 저희 신앙 때문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로마교회의 우상 숭배에 편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서를 높이 쳐들며, 저희 생명의 죽음도 불사하고 죄를 대항하여 피로써 항거한 5천만의 남녀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H. G. 게이네쓰, 시대의 임박한 종말, 204, 성서 기초교리, 152).
로마 교회는 이러한 대대적인 핍박의 수단으로 1179년에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최초로 그들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력으로 박멸하기 위해 십자군(十字軍)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십자군이 짓밟은 지역의 뒤처리를 위해 1229년 툴루스 종교회의(the Council of Toulouse)의 결정에 따라 악명(惡名) 높은 종교 재판소
(the Inquisition)를 개설한 것이다(Lenwick, 75).
주로 도미니칸 신부(修道僧)들에 의해 운영된 이 종교재판수는 비밀리에 기소되고 집행되는 무서운 살인 및 고문 기구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어 개종시키거나 죽음을 선사했다(Foxe's Book of Martyrs(London: The Protestant Truth Society, Inc.), 10-15).
처음에는 왈덴스인들과 알비젠스인들을 색출하여 박멸(撲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1542년부터 다시 예수회(Jesuits) 신부들에 의해 운영되어 개신교 박멸에 무서운 힘을 드러냈다.
<알프스여 증언하라!>
알프스 계곡들을 살펴 보라!
그리고 그 계곡들의 전설을 읽지 말고 그들의 역사를 읽으라.
지금은 달빛에 비쳐 은 빛으로 눈부신 백설(白雪)의 계곡,
그 아름다운 색조 위에 뿌려졌던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의 검붉은 핏방울들.
자유를 울부짖으며 계곡을 뛰어넘는 폭포들,
그것들은 지금 로마교회의 칼날에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한 많은 시체를 넘어 포효하느니,
물 길도 영롱하게 계곡을 내리달리는 강들이여,
그것들은 바디칸이 죽인 순교자들의 재를 실어 나르며,
그 시체 더미 위를 소리치며 흐르거라.
바위 틈과 계곡을 편답(遍踏)하라.
그것들이 위대한 영웅들의 행적을 증언하리라.
로마 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겨루어 왔던 진리의 요람,
그 장엄한 골짜기들,
너, 알프스야,
심판의 날에 목소리를 높이거라.
산들아, 삼림아, 거기 있는 나무들아,
영원한 언덕들아,
잠잠치 말고,
저주받은 도시의 피흘린 죄악을 심판날 하나님께 증언하거라.
1400년 알프스 프라겔라(Pragela) 골짜기에 은신했던 왈덴스인들이 로마 교회가 보낸 토벌군에 의해 기습을 받아 짓밟히고 살해당한 뒤, 피하여 도망친 사람들은 엄동설한에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수도 없이 얼어죽었다.
1488년 교황 인노센트 8세의 왈덴스인 박멸령에 따라, 프랑스 군대들이 알프스의 로이스(Loyse) 골짜기에 덮치자, 왈덴스인들은 굴과 동굴로 피신했으나, 입구에 불을 놓아 3, 000여명이 질식해 죽기도 했다.
이 모든 죄악은 알프스에 의하여 심판날에 증언될 것이다. 로마 교회의 이러한 핍박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1949년 로마에 있는 예수회의 기관지(La Civilita Cattolica)는 진술을 통해, 로마 교회는 그들이 소수일 때는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지만, 그들이 압도적인 다수가 될 때에는 종교적 차별을 실천한다고 역설(力說)했다.
전해져 오는 역사의 증언대로, "로마 교회는 자신들이 불리한 입장에서는 양처럼 온순하고, 동등한 처지에서는 여우처럼 교활하지만, 번성하게 되면 이리처럼 사나워진다"는 교훈이 새삼스러워진다(Rome is a lamb in adversity, a fox in equality, and a wolf in prosperity.) Gane, 54.
* 참고서적
천주교의 유래 (랄프 우두로우 저, 정동수 역, 말씀과 만남)
로마 카톨릭주의의 정체(랄프 우두로우 저, 안금영 역, 도서출판 태화,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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