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는 사르밧 과부와 기도하는 엘리야
사르밧 과부는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절망했다. 그 여자는 얼마 남지 않은 가루통의 가루와 기름 조금으로 떡을 만들어 믿음으로 엘리야에게 주어서 가루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불러온 믿음의 여인이었다. 그 과부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아들이 죽으면 보통 ‘이제 절망이다! 끝이다!’ 하고 생각한다. 죽은 아들이 다시 살 것이라는 믿음을 전혀 갖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 원망했다. 엘리야에게 나와서 말하기를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하고 원망하며 정말 슬퍼했다. 그러나 똑같이 아이가 죽은 형편 앞에서 엘리야의 마음은 전혀 달랐다. 엘리야도 사르밧 과부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 과부보다 하나님 편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는 지금까지 자기가 보고 경험한 생각의 세계 속에 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소망을 가지고 그 아이를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사르밧 과부와 함께 있으면 그 과부의 울음소리, 슬퍼하는 소리 때문에 엘리야의 마음이 점점 더 상할 것 같으니까 아이를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려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그렇게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다시 살게 하여 주실 것을 믿는 믿음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물론 사르밧 과부도 기도할 줄 안다. 그러나 그 여자 생각에는 ‘어떻게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나? 이건 안 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원망과 슬픔이 터져나온 것이다. 반대로 엘리야는, 그 아이가 죽어서 슬픈 상황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사르밧 과부는 ‘가루통에 얼마 남지 않은 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면 가루통에 다시 가루가 생길 것’을 믿는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믿음의 한계는 거기까지였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은 갖지 못했다. 사르밧 과부는 자기 생각의 세계 안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지만, 자기 생각의 세계 밖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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