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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1000년의 비밀] 가야인 융화시키며 많은 인재 얻어

은바리라이프 2009. 9. 21. 18:55

[신라 1000년의 비밀] 가야인 융화시키며 많은 인재 얻어
금관가야 구형왕의 후손 김유신, 삼국 통일에 큰 기여

신라와 가야는 오랜 기간 경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가야는 풍부한 철을 해외에 수출하는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하며 신라보다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신라가 왕을 중심으로 나라의 힘을 모아 부강한 나라로 성장한 것과 달리, 가야는 작은 나라가 모인 연합 국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신라가 가야의 작은 나라들을 하나씩 공격해 532년에는 금관가야를, 562년에는 대가야를 멸망시킴에 따라 가야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가야인도 신분·출신 따지지 않고 등용
멸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대체로 정복한 나라에 끌려와 노비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가야인이 신라에 끌려왔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가야인을 노비로 삼기보다는 자유롭게 농사를 짓도록 해 주었습니다.
노비로 삼으면 가야인들이 신라에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야인이 반발심을 갖게 하기보다 신라에 충성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법흥왕은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뒤, 금관가야의 구형왕과 왕비ㆍ왕자들에게 ‘진골’이라는 높은 신분의 벼슬을 내려 주었습니다. 신라에는 당시 사람들을 성골ㆍ진골ㆍ6두품ㆍ5두품ㆍ4두품 등으로 구분하는 ‘골품’이라는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품제는 신분에 따라 벼슬을 할 수 있는 최고 직위와 집의 크기, 사용할 물건까지 정해진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였습니다. 왕 - 귀족 - 중인 - 평민 - 노비 등으로 나누어진 고려보다 더 세분화된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진골은 최고의 신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성골의 경우 왕실 가족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차지할 수 있는데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은 이후에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김유신의 무덤. 김유신은 가야 왕족 출신으로,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했다. 김유신의 무덤을 장식하고 있는 12 띠. 오른쪽이 용의 신, 왼쪽은 양신이다.
전진 기지에 배치돼 백제·고구려 공격 막아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에서 진골 신분을 얻고, 높은 벼슬을 하며 신라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구형왕의 큰 아들 노리부는 579년 진평왕 때 신하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상대등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전통 귀족들을 모조리 제치고 가야 출신이 상대등이 된 것은 신라가 그만큼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출신을 따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한편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은 신라가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553년 백제 성왕을 죽인 신라 장군이 바로 김무력이었습니다.
신라는 충주에 제2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중원경을 설치, 영토를 확장하는 전진 기지로 삼았습니다. 이 때 진흥왕은 중원경에 가야 사람들을 많이 배치해 이들로 하여금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는 역할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야금의 명인인 우륵도 중원경에 살았던 것입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고구려ㆍ백제와의 경쟁에서 한 발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가야 사람들이 신라에 큰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면서 얻은 최고의 보물은 나중에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이 595년에 낳은 김유신입니다.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 바로 가야 구형왕의 증손자였던 것입니다.
만약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가야 사람들이 신라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또 김유신이 신라가 아닌 가야의 부흥을 위해 일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신라의 삼국 통일도 없었겠지요. 신라가 장차 삼국 통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가야 사람들이 힘을 보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