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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질투! 골육지친 사이에도 일어나는가? (상)

은바리라이프 2009. 9. 15. 21:37

여인의 질투! 골육지친 사이에도 일어나는가? (상)

1. 유대교와 이슬람의 불가 양립성


1) 사라와 하갈

자식이 없어 고민하며 이러다가 대가 끊기는 것 아닌가 하고 초조해 하던 아내 사라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녀의 젊은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브라함이 팔십 육세 되었을 때
그 여종의 몸에서 첫 아들을 얻고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주어 끔찍이 사랑하였다.
다시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그의 나이 구십 구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내년에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하여 아들을 주겠다고 하자 심지어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시큰둥하여 감지덕지하는 대신 이미 자기에게 준 큰 아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복 받고 잘 살기를 원한다는 이런 대답을 하고 있다.

이 때까지는 아브라함은 본처와 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자식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적자주의와 그에 반하여 장자주의에서 근원된 이슬람교가 역사상 갈등과 반목을 이렇게
계속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으리라.

통상적으로 아버지에게는 그가 아내에게서 태어났든 첩의 몸에서 태어났든지 간에 자신의
첫 아들인 경우 그에게 더 많은 기대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인데
하물며 그의 아내 사라가 그의 나이 백살이 되던 해 아들 이삭을 낳아주었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은 14년간 자신의 유일한 혈육으로 기대를 모아왔던 큰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깊은 관심을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그 어머니 하갈에 대한 사라의 질투로 첩
하갈과 그의 몸에서 난 장자 이스마엘을 함께 내어 보내어 따로 살게 하였지만…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사라와 하갈의 얘기를 더듬어 보면 창세기 16장에 인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의 씨앗을 잉태시키는 동기가 대를 이어 갈 자손을 두고자 하는 여인의
단순한 욕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아들이 태어나게 되자 비록
종의 신분이었던 하갈이지만 그리고 그 여주인의 허락과 배려에 의해 주인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되고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식을 배게 되었지만 아직 뱃속의 아기를 낳기도
전에 부어 오른 배를 잔뜩 내밀고 하갈은 부어 오른 배만치나 남자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보이기라도 하듯 여주인 사라를 저만치 눈 아래로 내려다 보듯이 깔보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준 여인과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 사이에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여인들간의 사랑 싸움 즉 남자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이 자리 잡기 시작
하고 이에 따른 질투와 시기가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오기 시작하는 일이 생긴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라의 번뇌와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만치 컸던
것이다. 이 보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과 율례를 받았을 때에
보면 종이 낳은 자식도 그 주인에게 속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남편의 씨를 배었다
하더라도 엄연히 자신의 종의 신분인 하갈이 일단 임신을 하게 되자 신분의 문제가 아닌
남녀간의 사랑을 매개한 복잡한 양상이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지게 된 것이니, 사라의 고뇌
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을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세기 16장 1절-6절

이 때에 보면 아직 자식이 하갈의 배속에 있고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기에 자식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든지 아브라함이 하갈을 무턱대고 두둔하고 보호하기보다는
마치 가정의 평화가 더 중요하다는 듯이 선선히 본처 사라의 처분에다가 하갈을 맡기고 있다.

주인 아브라함의 자기에 대한 한결 같은 사랑과 믿음을 본 사라는 하갈을 향하여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요망하게 군다고 학대하기 시작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도망을
가다가 브엘라헤로이라는 샘물 곁에서 목을 축이는 하갈을 만난 하나님의 사자가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셀 수 없을 만치 수가 많을 것이라는 축복을
하면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설득을 하자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와 기한이
차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 아브라함의 가슴에 첫 아들을 안겨주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사자의 약속을 가슴속에 깊이 담고 아들을 키우며 여전히 종의 신분
으로 주인 내외를 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이스마엘이 동생 이삭을 데리고 놀리는 것을 본 사라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당장 그 여종과 그 아들을 쫓아내라고 닥달을 하자 크게 근심하고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들을 내어 보내면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과 안심을 시키자 할 수 없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고 내어 보낸다. 그 길로 무턱대고 방향도 없이 집을 떠나왔지만 가도 가도
끝 없는 브엘세바 사막 길을 헤매다가 물도 떨어지고 목이 타 죽을 지경에 이르러 하갈은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땅 바닥에 주저 앉아 방성 대곡을 하고 만다.
이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의 눈을 밝히고 샘물을 보여주니 그가 일어나 가죽부대에
물을 가득 담아 아이에게 먹였다는 기록이 성경 창세기 21장에 자세히 나온다.


2) 하갈의 우물 ?성천(聖泉) 잠잠

하지만 무슬림들이 하는 얘기는 약간 다르다. 아브라함의 아내(첩이 아님) 하자라(하갈의
무스림식 이름)가 장사하러 고향을 떠나간 남편 아브라함을 기다리기 위해 어린 이스마엘을
데리고 홍해를 바라보며 메카 언덕에 서 있었다고 한다.

사막의 땡 볕 아래서 남편을 기다리는 중 마실 물도 떨어지고 물릴 젖도 나오지 않자 아이를
떨기 나무 아래 두고 언덕과 아이 사이를 무려 일곱 번이나 오가며 남편을 기다리랴 아이를
보살피랴 허기와 갈증을 이겨내랴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랴 기지맥진 하여 절망하고 있을 때
천사로부터 이스마엘이 동동거리는 발꿈치 아래 모래를 파 보라는 계시를 받고는 손으로
죽을 둥 살 둥 얼마큼 팠더니 신비의 물이 솟아나와 물을 아기에게 먹이고 자신도 배가
부르도록 실컷 마셨더니 메말랐던 젖도 나오게 되어 이스마엘에게 젖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사히 돌아온 아브라함을 만나 샘을 크게 파고 사람도
마시고 양과 낙타가 마시기에도 넉넉한 물이 나와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을을 이루게 되어
메카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의 내용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몇 가지 의문 점이 있어 잠깐 짚어보고자 한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준 때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된지 십 년이 지났다고 창세기 16장 3절에 기록하고 있다.
즉 장소가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과 사우디의 메카 땅이라는 엄청난 거리의 상거가
있다. 그리고 21장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바란 광야에 살았다고 하고 있다. 그 보다 훨씬
뒤의 사건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면서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싸우는 대신 그 곳을 피하여 돌아가고 있는데 그 곳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넓은 땅 홍해 쪽에 면한 메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무슬림들은 메카 순례시에 하자라처럼 일곱 번을 오가면서 순례를 행하고 이 우물은
잠잠이라는 성천으로 불리우면서 순례왔던 무슬림들이 고향으로 가져가는 가장 귀한 선물이
바로 이 샘물이다.

또 최초의 제단 건축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했는데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두 부자(父子)가
중건하였다는 카바신전에 대한 경배와 탑돌이는 마호멧 훨씬 이전부터 시행되어온 의식이라
고 한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은 성경의 창세기 기록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깊은 연구과제를
안겨준다고 볼 수 있겠다.


3) 적자주의와 장자주의

유대교는 성경 구약의 기록대로 철저히 적자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반면 무슬림들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장자로 인정한다.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자, 서자설이 이슬람에서는오히려 장자, 차자설로 바뀌고 있다.

성경에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팟죽 한 그릇에 샀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당시의
유대 전통 사상에서 보면 장자의 축복권은 단순히 팟죽 한 그릇에 사고 팔 수 있는 그런
가치로 평가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의 여러 군데서 언급되고
있듯이 장자 즉 태의 처음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슬림들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 즉 다른 말로 하면 유대교의 하나님의
신에 해당하는 알라 신이 택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자설에 의하여 이슬람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유대교나 기독교는 이슬람에서 파생되어 갔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우 오랜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적서(嫡庶)의 개념을 사회적으로 가르는 전통
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무슬림들의 장자권 주장 보다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서 차별주의에
더 익숙해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사라가 여자의 질투의 본성을 깨닫고 아예 아브라함에게 자기 몸종을 부쳐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과 더 나아가 9.11 테러나, 아프가니스탄,
이락 크 전쟁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