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셉

레아의 찬양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16:55

레아의 찬양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야곱의 첫날 밤 사건

도 그 중 하나 입니다.

 

첫 날밤 신부가 바뀐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에서에게 서 장자의 축 복권을 빼앗고, 도망자의 몸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해 가던 중,하란 땅에 도착하여 우물가에서 물을 먹고 있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양떼를 몰고 우물가로 온 사촌 여동생인 라헬를 보는 순간 야곱은 첫 눈에 반해 버리고 맙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 고용계약을 맺게 되는데, 고용 조건은 7년 동안 무임금으로 노동을 하되, 7년이 지난 후에 라헬과 결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연애가 얼마나 뜨거웠으면 7년의 긴 세월이 며칠이 지나간 것처럼

금방 지나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7년을 기다린 결혼식이 거행 되었고, 첫 날밤을 맞게 됩니다.

꿈 같은 첫 날밤을 보내고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함께 첫 날밤을 보낸 신부가 그토록 사랑하던 라헬이 아닌 레아 였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야곱이 가진 목자로서의 능력을 높이 산, 교활한 외삼촌, 라반의 술수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당시 하란 지방의 풍습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라반의 변명은 그의 교활함을 나타내는 말에 불과 합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속은 것입니다. 자신이 형과 아버지 에서를 속였듯이……

 

사건의 개요상으로는 야곱이 외삼촌에게 크게 속은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에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7년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연애하였던 사랑하는 라헬을 어떻게 야곱이 알아보지 못하고 레아와 첫 날 밤을 보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네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당시 풍습에 따라 신부의 얼굴과 몸을 가린 긴 옷을 입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는 신혼 방이 어두워서.

세 번째 이유는 야곱이 잔치에서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네 번째 이유는 라반의 계획에 흔쾌히 동의한 레아의 연기가 뛰어나서.

 

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야곱이 첫날 밤 라헬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로 제시하기에는 먼가 부족합니다. 7년 동안 보아 온 라헬의 모습을 긴 옷을 입었다고, 어두워서, 술에 취해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야곱의 행동도 이해 하기 힘들지만 두 자매의 행동 역시 이해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7년 동안이 몇 일처럼 지나갈 정도로 뜨겁게 연애하던 연인과의 결혼을 아무리 아버지의 권유가 있다 하더라고 라헬이 어떻게 언니에게 신랑을 양보(?)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동생을 향한 야곱의 사랑과 열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언니 레아가 어떻게, 동생 대신 신부로 변장을 하고 야곱과 첫 날밤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까요?

몇 마디 대화만 나눠도 목소리를 야곱이 알아 차릴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생의 자리를 차지한 언니 레아의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은 정말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며 12지파의 아버지가 되게 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혼 중 하나인 야곱의 결혼을 이렇게 허술하게 기록한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성경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경기록의 관점은, 구속사의 중심이 될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들이 어떤 가족사를 통하여

태어나게 되고, 어머니가 서로 다른 12명의 형제들이 한 가정에서 성장 하며 미움과 갈등, 경쟁, 사랑과 용서 등을 경험하면서 12지파의 조상이 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함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상한 첫 날 밤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라 해석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상한 첫 날밤 사건에 관해서는 이 후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야곱, 레아, 라헬을 만나

자세하게 물어 보기로 하고 이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야곱의 가족사를 통하여 12지파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

 

2917절의 기록을 보면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 에는레아는 눈에 총기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또 다른 번역에는 레아의 눈매가 부드러웠다 라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레아가 라헬만큼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박색도 아니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어떻게 한 부모 아래서 미인과 박색의 딸들이 같이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키도 몸매도 많이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첫 날 밤 야곱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으로도 증명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긴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대로 레아에게서 6명의 아들과 딸 디나가 태어납니다.

여성적 매력이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293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 하였더라

첫째 아들  루우벤(보라 아들이다)

둘째 아들  시므온(하나님께서 들으셨다)

셋째 아들  레위 (연합하다)

이 세 아들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레아가 얼마나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데, 레아의 삶의 목적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에 있는 것 같은 표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짓는 과정을 보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라헬을 향해, 진정한 아내는 바로 나다라는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세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는데도 남편 야곱을 자신을 사랑한 것 같지 않은데 대한 절망감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성경 어떤 기록에도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환경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야곱은 라헬 만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네 번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레아가 그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유다.” 직역하면  찬송히브리어로야다입니다.

 

창세기에는 찬송이라는 단어가 6번 기록 되어 있는데요. 9:26. 14:20. 24:27. 24:48. 29:35. 49:8. 이 그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모두찬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9장과 14장의 기록을 축복한다(blessed)’ 로 번역하고 있고 24장 이후에는찬송(praise)’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RSV(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는 처음 네 단어에는 축복한다(blessed)’를 그리고 29장과 49장에는 ‘Praise’ 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서는 처음 네 단어는바락(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마지막 두 단어 즉 2935절과 49 8절은야다(찬송)’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고 네 번째 아들 유다를 낳을 때까지 레아에게 어떤 영적인 변화가 있었는지 성경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영적 상태가 변했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삶의 목적이던 그녀가 넷째 아들을 낳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은 영적 변화의 체험이 없이는 설명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바라보지 않고 영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리한 해석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찬양의 지파인 유다 지파는 야곱의 예언대로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49:8)’  이스라엘의 찬송이 되었고, 찬양의 지파에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온 인류가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찬양의 중심 인물이었던 다윗 왕도, 찬양대를 앞세워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을 물리친 여호사밧 왕도 모두 유다 지파의 왕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해 고통하며 기도했던 레아를 사용하셔서 찬양을 받으시고 그 찬양의 지파를 통하여

인류 구속 사를 쓰셨습니다.

 

진정한 찬양은 고난 중에 드리는 찬양입니다.

다윗의 찬양이 그렇고, 여호사밧의 찬양이, 바울과 실라의 찬양이 그렇습니다.

 

이 부족한 종의 찬양도 그렇습니다.

이 땅을 섬기면서, 기도도, 찬양도 할 수 없었던 절망적 상황을 많이 만났었습니다.

선교사역을 더 이상 감당 할 수 없어 귀국을 생각하던 그 고난의 때를 지나던 중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찬양을 시작하였는데 한 곡, 두 곡 찬양이 선포 되면서 심령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 감격, 눈물, 그리고 감사......

 

고난 중에 함께 하시고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