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와 라헬 2 (창30:1-24)
이성은 신앙을 향해 늘 심한 투기현상을 보인다. 인간의 갈등과 인류의 역사는 신앙과 이성의 투쟁사이다. 이성의 고집은 사단의 생각을 낳을 뿐이다. 이성의 산물은 가장 객관적임을 자랑하나 영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성의 업적과 승리는 대단한 것처럼 보이나 그 결과는 진화론과 공산주의가 그렇듯 매우 초라할 뿐이다. 그러나 신앙은 초라해 보이지만 그 결말은 항상 아름답다. 이성은 신앙으로서 비로소 온전케 되며, 신앙은 상급과 함께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게 한다.
(강해)
지난 시간 우리는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비추어 풀어보았습니다. 오늘도 계속하여 본문에서 신앙과 이성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주제가 왜 그리 중요합니까? 그것은 매일 우리 마음속에서 전개되는 마음의 싸움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역사 속의 모든 진리 전쟁이 바로 이런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분명히 수립하지 않으면 구원까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진리로서는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계속하여 신앙과 이성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8. 이성은 신앙을 향해 늘 심한 투기현상을 보입니다.
1-2절에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했습니다.
라헬이 자식을 갖지 못하자 자식을 가진 형을 투기하는 장면입니다. 이해는 됩니다. 라헬이 얼마나 속상하고 고통스러우면 죽겠다고 했을까요? 그리고 야곱이 노를 발한 것을 볼 때 라헬이 남편을 얼마나 괴롭게 했으면 그랬을까요? 본래 남자들은 감성이 무디지 않습니까? 무딘 남자들이 화를 낼 때는 보통 괴롬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드라마 대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을 때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성의 일이 꼭 그래요. 이성이 신앙을 투기해서 자꾸만 나서기 때문에 여기서 불신앙이 나오고 여기서 인간의 고통이 나옵니다. 그 정도가 바로 라헬이 야곱을 괴롭게 하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마음에 이성이 침투할 때 심한 갈등과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 역시 신앙과 이성의 투쟁사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계는 신앙과 불신앙의 싸움이요, 또 창조론과 진화론의 싸움입니다. 신학계에도 믿음신학과 이성신학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못 믿겠다, 창조도 못 믿겠다, 이적도 못 믿겠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예수도 못 믿겠다. 이런 신신학의 주장이 나옵니다. 더 나가게 되면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예수다, 내가 보혜사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것은 완전한 사교집단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서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으쓱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마음에 가장 큰 이단의 소지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마음 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진리 싸움에서부터 승리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10:4-5) 한다고 하면서 6절에서는 신앙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가서 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단사설을 주장하는 사람을 어찌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야곱의 말대로 사람의 방법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을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9. 이성의 고집은 사단의 생각을 낳을 뿐입니다.
3-6절입니다. 3절에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그래서 빌하가 낳은 첫째 아들이 단입니다.
6절에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는 ‘나에게 공의를 베푸시려고’의 뜻입니다. 여기에 라헬의 착각이 나타나는데 즉 라헬은 빌하가 아들을 낳자 이름을 단이라 짓고 자기가 행한 일이 정당한 것이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이방풍속이 지배하던 시대라 할지라도 여종을 통해 자식을 낳는 것이 정당합니까?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단 지파를 보세요. 나중에 단 지파는 이교를 따르다가 12지파에서 제외되었고 성경 여러 곳에서 사단의 예표가 됩니다.
이처럼 많은 이성의 산물들은 모두 스스로 가장 정당하고 가장 객관적임을 자랑하지만 사단의 도구일 뿐입니다. 철학의 논리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관적으로 수긍이 갈지라도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수용하지 않습니다. 가령 지구는 존재한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느껴도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없다 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철학자들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자기들의 학문에 정당하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있다 없다, 지구는 있다 없다, 사람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등등 온갖 주장들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고전1:21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성의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학문의 틀에 가두려고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단의 주장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대치되는 이성의 생각이라면 속히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9. 이성은 자기 업적을 자랑하지만 매우 초라할 뿐입니다.
7-8절에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여기 빌하가 낳은 라헬의 둘째 아들을 “경쟁함”이란 뜻의 납달리라고 지은 것은 이 일로 형을 크게 이기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친자도 아니고 여종의 아들일 뿐이요, 수효로도 레아보다 훨씬 적으니 얼마나 초라한 자위입니까?
이처럼 이성의 자만이 꼭 그렇습니다. 이성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커다란 승리를 자축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심히 초라하기 그지없다는 말입니다. 그 예로 진화론이 창조론을 이겼다고 얼마나 오만했습니까?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이 창조를 뒤엎는 증거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고 자만하고 오만하여 온 세상이 진화론을 진리로 알고 앞 다투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보기만 크게 이긴 것일 뿐 결과로 볼 때 그들의 이김은 심히 초라한 이김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스스로 인간을 원숭이와 아메바 그것도 모자라 물질의 한 부분으로 전락시켰고 여기에서 나치주의와 공산주의가 나오고 수억의 태아들이 불신앙의 낙태로 말미암아 죽었고 이것을 제외하고라도 약 1억3천만 명이 20세기 한 세기동안에 이들 무신론의 이름으로 전쟁에서 산화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성주의를 따르다가 예수 안 믿고 지옥에 떨어진 생명까지 합한다면 어찌 다 셀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신앙으로 살지 못하고 자기 생각 따라 살아왔다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망친 것입니다. 이처럼 이성의 승리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초라한 승리였을 뿐 신앙 없는 이성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나아가 성경진리도 학문의 옷을 입으면 초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학문으로는 기초와 뼈대는 잡을 수 있어도 무궁한 진리를 학문으로 다 객관화시킬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것 가지고 양식을 먹이려고 하면 틀리지는 않지만 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무수한 진리가 학문의 옷을 입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온전히 객관화시킬 수 있다면 학문의 업적도 크겠지만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10. 그러나 반면 신앙은 그 결말이 항상 아름답습니다.
9-13절의 내용입니다.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그래서 실바는 갓을 낳고 아셀을 낳습니다.
여기 실바가 낳은 “갓”은 ‘복됨’이라는 뜻이고, “아셀”은 ‘기쁨, 만족’이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어도 마음은 이렇게 고와요. 즉 레아는 라헬과 같은 일을 했어도 그 결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신앙과 이성이 그래요. 같은 것을 생각해도 그 결과가 달라요. 어찌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과 내 욕심으로 하는 일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자는 하늘의 상급이 있지만 후자는 죄일 뿐입니다.
그래서 롬8:6-8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같은 것을 생각해도 하나는 복과 영생의 생각이지만 하나는 사단의 생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위해서 힘쓰면서도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근심하실 거야, 혹시 이 생각이 내 어리석은 생각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중심에서 나온 생각이라면 그 자체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갓과 아셀처럼 복과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1. 이성은 성령으로라야 비로소 새롭게 됩니다.
14절에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의 큰 아들 루우벤이 합환채를 따왔습니다. 합환채는 노랗고 토마토 같은 열매가 맺는 식물로 임신촉진제입니다. 임신촉진제를 본 라헬이 가만있겠습니까? 라헬은 남편으로 합환채를 삽니다. 그래서 나중 라헬이 낳은 요셉을 기록은 없지만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합환채로 낳은 아들로 봅니다. 합환채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요셉이 합환채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리고 지하 감옥까지 낮아졌다가 갑자기 총리가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죄인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다가 하나님께서 높이심으로 부활하시어 하늘까지 높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합환채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이성도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로워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새 사람의 생각이 골3:10에 나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우리의 생각까지 변해야 합니다. 이 일을 말씀과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성경과 다를 때는 성경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혹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말씀하시면 들으십시오. 무슨 일에 다투고 나도 남자다 한 번 해보자고 마음을 먹을 때 성령께서 얼마나 사과하라고 역사하시는지 성령에 져서 순종할 때가 얼마나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말씀과 성령만이 우리의 이성을 새롭게 할 수 있어요.
이처럼 요셉을 낳은 라헬이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23절) 했듯이 우리의 생각까지 변해야 모든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름만 교인이지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불신자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지식과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 바꾸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12. 신앙은 상급과 함께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합니다.
17-21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사 그가 다섯째 아들 잇사갈을 낳고 또 여섯 째 아들 스불론을 낳습니다.
잇사갈은 ‘값, 보상’이라는 뜻이고, 스블론은 ‘거함’의 뜻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에게 상급과 축복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게 합니다. 그래서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진리를 묘사해 줍니다. 이성으로 죽도록 일해도 상이 없지만 신앙 안에서는 우리 인간의 공로 없지만 하늘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대단하지 않는 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상급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성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이성을 앞세우면 실패합니다. 이성은 신앙을 섬기고 돕는 그 위치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항상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신앙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삶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성극 > 요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헬과 레아 (0) | 2009.09.14 |
---|---|
레아와 라헬 (0) | 2009.09.14 |
[스크랩] 야곱의 재산 증식 (0) | 2009.09.13 |
이스라엘의 12지파 (0) | 2009.09.12 |
합환채 (0) | 2009.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