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셉

창세기 046: 쟁취할 수밖에 없었던 야곱(창 30:1-43)

은바리라이프 2009. 9. 12. 18:40

창세기 046: 쟁취할 수밖에 없었던 야곱(창 30:1-43)

야곱은 유태인의 민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인간성이란 면에서 보면, 야곱은 그다지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인물인데, 창세기 저자는 왜 다른 인물들보다 야곱을 더 많이 소개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야곱의 삶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삶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척박한 삶의 현실을 전투적으로 바꿔가는 그런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성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야곱은 쟁취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항상 빈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제몫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생으로 태어났고, 얻은 것 같으면서도 항상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싸워서 제몫을 만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형보다 늦게 땅에 첫발을 디딘 것처럼 주변국들에 비해서 그 출발이 상당히 늦었던 민족이었습니다. 세상에 늦게 나온 만큼 제몫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입성 후에 차지한 땅들도 타민족이 쓸모없어서 버려둔 불모지였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아무개의 발꿈치를 잡다’라는 관용구에서 나온 이름인데, 남에게 해를 끼쳐 이익을 취한다는 이름입니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를 붙잡고 씨름을 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천사를 놓아준, 그러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 받은 이름입니다. 누구하고든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야곱, 에서하고도 싸워야 했고, 이삭과도 싸워야 했고, 라반과도 싸워야 했고, 심지어 하나님과도 싸워야 했던 야곱이었습니다. 싸우지 않고서는 제몫을 차지할 수 없었던 야곱은 오늘의 유태인의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14년을 무보수로 일했습니다. 이후 라반에게 정상적인 보수를 받고 재산을 형성하기 위해서 미신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플라타너스나무의 연한 가지를 꺾어 그 가지의 껍질의 일부만을 돌려가며 벗겨 줄무늬가 있는 막대사탕처럼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물구유에 세워놓아 양떼가 물을 먹으로 왔다가 교미할 때 알록달록한 가지를 봄으로써 새끼를 밸 때 그 무늬의 영상이 스며들게 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야곱의 이런 노력들을 하나님께서 가상하게 보셨을까요? 야곱은 부인을 네 명이나 얻었고, 그들로부터 열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얻었으며, 그가 낳은 열두 명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이뤄 이스라엘 민족을 이뤘으며, 거부가 되어 가나안 땅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방랑자에다 빈털터리나 다름없었지만, 나중엔 70여명의 식솔을 거느린 거부로 발전하였듯이, 이스라엘 민족 또한 1878년간이나 남의 나라에서 방랑하였지만,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대한민국보다 두 배나 더 잘사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총칼을 손에 들고 이웃 아랍연맹과 생사를 건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6장 5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을 “유리하는 아람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떠돌이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다른 나라 땅으로 유랑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삭도 불레셋의 그랄 지방에 가서 오랫동안 살았으며, 야곱도 에서의 보복을 피해 외삼촌 라반한테 가서 하란 땅에서 무려 20여 년을 살았습니다. 요셉도 자기 뜻과는 관계없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 집을 떠나 이집트에 가서 살다가 거기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이들 족장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이방 땅에 얹혀살면서도 이방인들에게 유익을 끼쳤다는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압과 암몬 족속의 탄생에 크게 기여한 공로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닥쳐온 임박한 멸망을 막아보려고 하나님께 매달린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결국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하지만 아브라함의 중재기도 때문에 롯과 그의 딸들은 구원을 받게 되고, 롯과 두 딸들에게서 암몬과 모압이란 두 민족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그랄 지방에 가서 흉년을 피했던 이삭도 그곳에서 거부가 되어 떠나면서 블레셋과 영구 불가침평화조약을 맺고 팔레스타인평화조약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됩니다.
야곱은 아람 사람 라반의 집을 크게 번영하게 한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라반의 집을 경제적으로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요셉도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흉년의 때에 이집트인들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족장들은 우리 성도들이 이웃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잘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복을 받아 네 명의 부인과 열세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대부분 그들을 낳아 기른 어머니들이 지었습니다. 우리는 이 자식들의 이름에서 어머니의 한과 기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레아는 첫아들을 낳자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습니다.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었고, 아들을 낳자 그것이 자랑스러워 그 자식의 이름을 “야, 아들이다(르우벤)”라고 진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레아 자신이 첫아들인 ‘르우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레아의 괴로움을 ‘보살펴 주신(라아)’ 결과라고 믿어서 아들 이름을 ‘르우벤’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레아는 둘째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의 한을 ‘들어주셔서(샤마)’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들은 그 이름을 ‘레위’라고 했습니다. 야곱 가문에 와서 아들을 셋씩이나 낳았으니 이젠 남편이 다른 여자 넘보지 않고 자기하고만 ‘지내주기(라와)’를 바란다는 아낙네의 소원이 절절하게 담긴 이름입니다. 넷째 아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라(야다)”라는 뜻을 가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는 있었지만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석녀였습니다. 자기 몸종인 빌하를 통해서 자식을 얻고서는 그래도 좋아서 하나님이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려고(단)’ 아들을 주셨다며 그 이름을 ‘단’이라 했습니다. ‘단’에 대해서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를 지냈던 우지 마노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열두 부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주후 70년 이스라엘의 멸망이후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로 흩어졌는데, 지금까지 단 하나의 부족만 어디로 이동했는지가 미스터리란 것입니다. 그 ‘사라진 부족’(lost tribe)의 성이 ‘단(Dan)’인데, 고조선의 시조가 단군(檀君)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이 이스라엘 민족인 ‘단’부족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라헬의 몸종인 빌하가 둘째 아들을 낳았을 때 이제는 아들 많은 언니 레아도 부럽지 않을 뿐 아니라, 언니와의 ‘싸움(나프탈리)’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여 그 아들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언니 레아도 동생에게 지지 않으려고 몸종 실바를 통해 아들을 얻고서는 ‘복(갓)’을 받았다고 여겨 자식 이름을 ‘갓’이라고 지었습니다. 실바가 또 아들을 낳자 너무 ‘기뻐서(아슈레이)’ 그 이름을 ‘아셀’이라 했습니다. 이번에는 레아는 다섯 번째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몸종인 실바를 남편에게 준 ‘값(스카리)’을 받은 셈이 되었다하여 그 아들을 ‘잇사갈’이라고 지었습니다. 레아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아들을 하나 더 낳고서는 이만하면 남편 야곱이 다른 아내들보다 자기를 더 ‘자랑스럽게 여겨 주리라(자발)’는 기대에서 그 이름을 ‘스블론’이라고 지었습니다.

전혀 임신을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라헬도 태가 열려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요셉’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열한 번째의 아들입니다. 열만 해도 충분한데 거기다가 ‘덤으로 하나 더 주셨으니(야싸프)’라는 뜻으로 야곱이 그 아들을 ‘요셉’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고, 라헬로서는 이 아들 하나만 낳고 태가 닫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다른 아들을 ‘더 주시기를(야싸프)’ 원하면서 첫아들 이름을 요셉이라 지었습니다.

이렇듯 두 어머니가 지어준 아들들의 이름에는 어머니들의 한과 기쁨과 희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불임의 수치를 씻으려는 열정과 태가 열리고 생명이 출산되는 기쁨과 여러 아내들 사이에서 하나뿐인 남편을 차지하려는 정렬과 많은 자식들에게 젖을 빨리는 어머니가 되어 가문의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려는 소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았던 라헬은 ‘벤자민’ 출산과 동시에 죽어가면서 이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을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야곱은 그의 이름을 "나의 오른팔의 아들"이란 뜻으로 ‘벤자민’이라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보기를 원하는 내용은 레아와 라헬의 여종인 빌하와 실바가 야곱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으므로 이스라엘 지파의 어미가 된 사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종은 주인의 재산이었으므로 주인과 합법적으로 성적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며 주인의 아이를 낳게 되면 대접을 달리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처와 같은 권리는 없었으며 자유가 보장되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본처에게 아이가 없으면 첩이 낳은 아이가 상속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처에게 아이가 있는 경우에도 재산의 일부는 상속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종의 신분이었던 빌하와 실바가 낳은 아들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빌하는 라헬의 여종이었고 실바는 레아의 여종이었습니다. 라헬은 레아와 달리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에게 빌하를 첩으로 주었습니다. 레아 역시 투기로 인하여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이러한 라헬과 레아의 경쟁적인 행위로 인해 빌하와 실바는 야곱의 첩이 되었고 그의 자녀를 생산함으로써 신분이 바뀌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복된 언약에 참여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가는 이스라엘 지파의 어미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영광스러운 구속의 섭리를 이루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이름 없는 한 시골처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 자신의 현재의 신분이나 처지에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다산은 가문을 잇고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자식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여성의 위치가 결정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레아와 라헬은 자녀를 많이 낳아 우위를 점하려고 경쟁하였습니다. 그 경쟁의 수단으로 이용된 몸종들이 빌하와 실바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여주인들 대신 아이를 낳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어미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빌하와 실바처럼 신분이 변화된 자들입니다.

 

로마서 6장 17-18절의 말씀대로 본래 죄의 종이었다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이 고귀한 의의 종의 신분을 잘 수행해 나가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