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셉

늘 형통한 삶을 위하여 (창 39:1-6) 이길호 목사 8/23/09

은바리라이프 2009. 9. 11. 11:58

늘 형통한 삶을 위하여 (창 39:1-6) 이길호 목사 8/23/09
   

 

 

 

1960-70년대에 힛트한 팝송 가운데, The Mamas & the Papas가 부른 “California Dreaming”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e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 on such a winter's day.”
“가로수 잎들이 누렇게 변해 떨어지고/ 하늘이 잿빛이 되는 차가운 겨울/ LA에 가면 따뜻하고 안락할 텐데/겨울날에는 캘리포니아를 꿈꾸네/”  
그리고 우리의 선배들이 일제시대에 열심히 불렀던 “나의사랑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고기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맨타인/ 이 노래는 서부 개척자들의 눈물이 어린 노래인데, 이 노래는 캘리포니아를 상징합니다.  
캘리포니아는 “골든 스테이트”로 불리는 주, state 입니다.  그 만큼 부유하고, 풍요로움의 상징이었습니다.  IT 산업의 본부인 실리콘 밸리도 있고, 헐리우드도 있고, 베버리 힐즈도 있고, Rich & Famous 들이 사는 산타 바바라도 있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이 풍부한 주 입니다. 미국 내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State 이었습니다. GDP를 개별국가와 비교할 때  2008년에는 세계 8위의 경제규모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260억불에 이르는 재정적자로 인해, State 전체가 Bankrupt 상태입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의 성공과 형통은 모두 한계가 있고, 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은 앞으로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주장합니다.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되는 대전환시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미국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자 Time Magazine는 “Can China Save the World?“ 중국이 세계를 구할수 있는가? 제목과 더불어, 하늘 높이 쏟아 오른, 상하이 시내의 Sky Line 사진과 함께 특집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상징하는 판다 1마리가, 펌프를 가지고 쪼그라든 지구에 바람을 넣고 있는 그림도 실었습니다.
타임지는 “미국이 과거 세계 강대국이었던 영국을 대체한 것처럼, 이제는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려 한다’며 전세계가 이미 “중국 주도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China will replace America as the dominant world power in the near future.”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아시아의 힘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외교전쟁을 펴고 있다. 미국  힐러리 클린턴 미국무장관은 취임직후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를 첫 해외 순방을 나서면서 “미국이 아시아로 돌아왔다(We are really back)”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유럽 연합, EU도 아시아에서 자기들의 위상을 차지 하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권력을 잡고, 명예를 얻고, 힘을 가진다고 해도 그리고 이 모든것들은 언젠가는 다 사라져버리는 힘과 영광입니다.
오늘 성경은 세상의 영광과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함, 진정한 성공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광은 세상에서 많이 소유하고, 많이 성취함을 의미하지 아니합니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노예 상태에 있습니다. 총리가 되고 난후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참된 성공, 진정한 형통함은 무엇인가요?

1. 늘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잘못된 감정에서 자유함을 얻어야합니다.

1-3,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이라”  “the LORD gave him success in everything he did,”
하나님께서 요셉이 하는 일마나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형통이란, success , 성공을 말합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해서 성공하고 형통한 자가 된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요셉은 자기의 인생을 어렵게 만든 형들을 미워하지도 아니하였고, 한이 맺힌채 살지도 아니했습니다. 주안에서 평안히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된 삶이요, 형통한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마땅히 미워야 할 사람을 용서하고, 당연히 화를 내어야 할 시간에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바로 성공한 사람이며, 형통한 사람입니다.
1절에 요셉이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말은,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갔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지켜주고, 자기를 사랑해 주어야 할 형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이일을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가슴 아프고, 속이 상하고, 한 평생 한이 맺히는 일입니다. 형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다니 이것이 말이되나요? 노예로 한번 팔리면 일생 노예입니다.  그 자손도 노예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고, 가슴이 터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한맺힌 인생을 살지 아니했습니다.  
요셉은 과거의 감정을 깨끗하게 잊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노예 생활 속에서도 온전히 자유한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미래가 없는 노예생활이지마는, 요셉은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실하게 성실하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도 우리와 비슷한 평범한 인간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었겠는가요? 형들에게 한이 맺힌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요? 이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되어”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became a successful man,”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한 사람이 되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할때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 분노, 등 모든 잘못된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난후에 형들이 요셉 앞에와서 머리를 숙이면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창세기 50장을 보면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오히려 원수같은 형들을 위로하면서, 내가 당신들에게 팔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사명자로 애급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하고 복된 마음들을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속에도 미움, 시기, 낙심, 분노, 허무함, 고독, 외로움, 등 많은 잘못된 감정의 노예속에 사는 경우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감정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유대 사회에 전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한 천사가 광야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두 나그네와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헤어질 때가 왔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천사인데 지금 헤어지는 시간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러니 한가지씩만 소원을 말하라.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욕심쟁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심술쟁이입니다. 아주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원을 들어주겠는데 먼저 말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리고 두번째 사람의 소원은 첫 번째 말한 사람이 말한 것의 두 배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 모두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내가 받는 것 두배를 받으니 상당히 배가 아픕니다.
그래서 서로 신경전을 벌리면서, 누가 먼저 소원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가야하는 데 빨리 말하라고 재촉을 합니다. 그러니까 욕심쟁이가 심술쟁이의 목을 쥐면서 " 이녀석 빨리 말해. 말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 그리고는 숨을 못 쉬게 목을 조였습니다. 그러나 심술쟁이가, “그래, 그렇다면 말하지. 나는 눈이 두 개가 필요 없거든요. 눈 하나가 없어지고 애꾸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게 소원입니다" 했습니다. 그 순간 심술쟁이의 목을 조르고 있던, 욕심쟁이의 두 눈 다 없어지고 소경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가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이유들이, 하나는 끝없는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질투이라는 말입니다.
과도한 욕심과 아니면, 시기, 질투 때문에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이러한 나쁜 감정이 없나요? 욕심과 시기와 질투, 탐심 이러한 나쁜 감정이 우리의 마음속에 사라졌다면, 우리는 참된 평안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얼마전 한국의 재벌 그룹의 형제끼리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친형제끼리, 삼촌과 조카사이에, 집안내에 생긴 분란입니다. 이들에게 돈이 없어서 생겨난 싸움이 아닙니다. 먹을 것과 입을것이 없어서 생겨난 싸움이 아닙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생겨난 싸움입니다.  싸움의 시작은 재산권에 대한 조그마한 각서 한장에서 시작이 되어 나중에는 큰 분쟁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러나 따져보면 오래전부터 피를 나눈 형제 사이에 생긴 욕심과 미움,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유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노이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감정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한평생 불행하게 살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감정을 주안에서 잘 극복하면, 주안에서 늘 형통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부정적이고 잘못된 감정은 마치 마음속에 있는 독소와 같고, 마음속에 존재하는 악취가나는 쓰레기와 같은 것들인데, 이것들을 모두 깨끗하게 정리해야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2. 늘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나가야 합니다.

4-5,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은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진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요셉의 진실을 믿었고, 그의 능력을 믿어주었습니다.  
마침내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자기 가정에 총무로 삼았습니다. 주인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자기집의 master key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 만큼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능력 이전에, 요셉이라는 사람의 문제요, 인격의 문제이며, 그 사람의 성품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신임받는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바라보실때에 “맏음직 스럽다” 하시며, 주위의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면 믿을수 있다” 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셉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인데 어떻게 진실된 삶을 살수 있었나요?
혈기왕성한 젊은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시험을 계속했는데 요셉은 끝까지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나요?
요셉에게는 누가 보는 사람도 없고, 잔소리하는 부모도 없고, 타향에서 외롭게 살아나가면서 남모르게 육신을 즐기면서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 어려운 시험을 다 물리칠수 있었나요? 교육이나 수양으로 된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항상 하나님 앞에 살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눈길은 피할수 없다는 In the presence of God,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때에 우리는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양심도 믿을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합니다.
우리 한국 역사에서, 가장 정직하고 훌륭한 관료인을 말하면 항상 첫번째로 언급되는 사람이 세종대왕때에 18년간이나 영의정을 지낸 황의 정승을 말합니다. 황희정승의 유명한 일화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마당쇠와 돌쇠가 서로 옳다고 싸우다가, 주인어른께 물어보자 하면서 황희 정승에게 누가 옳은지를 물었습니다.  먼저 마당쇠가 이렇쿵 저렇쿵 하니, 황희 정승  '그래 니가 옳다'
그리고 돌쇠가  이렇쿵 저렇쿵 하니 말하니, 황희 정승  '그래 너도 옳구나'
그걸 보다가 마님이 마땅하지 못하여 “어른, 둘다 옳다고 하면 어쩌십니까? 잘잘못을 가려주셔야지요.”  황희정승 들어보니, “부인 말도 옳소”  황희 정승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았고, 그리고 쓸데없는 분쟁은 피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소한 일들, 별것 아니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원치아니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황희는 정승으로서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때에는 매우 엄격하였고,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고합니다.
그리고 황희는 50년 이상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매우 정직하고, 청빈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의정 시절, 세종 대왕이 미복 차림으로, 사전 연락 없이 황희의 집을 찾았습니다. 마침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종은 황희의 집을 들어서면서, 정승의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초라함에 이미 놀랐습니다. 방에 들어서서 보니 방바닥에 장판도 없이, 멍석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하다 만 밥상에는, 누런 보리밥에 반찬이라고는 된장에 풋고추 너덧 개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세종 대왕이 워낙 민망스러워 하는 황희를 보고는, "경은 등이 가려우면, 자리에 누어 비비기만 해도 되니까 참 편리하겠어" 하는 농을 하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황희정승이 온유하고, 정직하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훌륭하고, 선한 양심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 자체가 부패한 상태로 있으니, 언제 무슨 일을 생길지 아무도 장담할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믿었던 사람, 참으로 양심적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우리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쌓아왔던 명예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 양심, 수양으로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형통하고 복된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합니다.
사람은 언제 변할지 아무도 장담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에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선서를 하면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세상에 변하지 아니하는것은 말씀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느 사이트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아멘 넷)
한 무신론자가 숲속을 산책하는데 갑자기 큰 곰이 나타났습니다.  무신론자는 놀라 도망가다
넘어져 곰에게 붙잡혔습니다. 드디어 곰은 손을 들고 무신론자를 내리칠려고 했는데, 그 순간 무신론자는 "하나님" 하고 외쳤습니다. 소리치자마자, 그순간에 모든 시간이 정지되었습니다.
내리치던 곰의 손도 멈추었고, 나무위에 있던 새소리 조차 멈추었습니다.
갑자기 빛이 아래로 내려오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평생을 찾지 아니하다가, 지금 급하게 나를 부른것을 보니, 이제 내가 너를 크리스찬으로 여겨도 되겠느냐?"
무신론자는 고민하다 꾀를 내었습니다. "하나님 저보다는 저 곰을 크리스찬으로 만들어 주십시요!"
무신론자는 곰이 크리스찬이 되면, 틀림없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신론자의 기도가 응답되어 크리스챤이 되었는데, 곰은 무신론자를 내려 치려던 손을 내리고 두손을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소리내어서 "일용한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식사 기도한후 무신론자를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인간의 마음을 잘 묘사했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필요하면 하나님을 찾고, 그러나 문제가 사라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장하시기를 소원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하면 하나님을 적당하게 이용하면서 하나님을 나의 이익를 추구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현대 크리스챤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말로는 양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나의 욕심대로 살아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타락하여, 항상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언제나 나자신을 합리화 시킵니다. 나의 유익을 넘저 추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할때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실줄 분명히 믿습니다.

3.  복되고 형통한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합니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분명한 정체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지키며 살았고, 자기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오늘 본문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 때문에, 보디발 온 가정에 복을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것은 믿음있고, 진실된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회에 문제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여러분들의 가정에, 직장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이 국가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인 보디발이 “요셉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복을 주시는구나.
우리 농사가 저 사람 때문에 잘되는구나. 내가 하는 일이 저 사람 때문에 잘되는구나” 알았습니다.
요셉이 복의 유통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요셉은 시작도 좋았고, 과정도 좋았지만, 마지막은 더더욱 좋았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요? 처음에는 신앙 생활을 잘하다가 나중에 시험에 들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처음과 나중에 잘하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실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처음이나, 과정이나, 마지막 끝까지 잘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곧 형통한 삶입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초점은 탕자가 돌아온 그 다음날에 맞추고 있습니다. “Prodigal son the next day”
탕자가 돌아온 날에는 큰 잔치가 열었지만, 그런데 그 다음날에도 계속하여 찬치만 하고 있지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나 탕자로 남아 살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성숙한 아들로 살아나가야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인격과 품성이 성장 해야 합니다.  
우리도 언제나 초신자로서 살아서는 아니됩니다. 신앙이 날마다 성숙하고, 성장하여야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신앙 생활에서 꼭 성공하고, 형통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인생 마지막까지 형통한 삶, 성곡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1)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감정들을 모두 잘 정리 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발목이 잡히면  안됩니다.
2)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나가야합니다.
3) 나아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우리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항상 복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