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셉

창세기 054: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37:1-36)

은바리라이프 2009. 9. 12. 18:45

창세기 054: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37:1-36)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창 25:23, 롬 9:12)이라는 하나의 큰 원칙이 창세기 37장 이하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제부터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족장 야곱에게 열두 명의 아들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사울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뽑으실 때에 선지자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이,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이새의 막내아들이자, 여덟 번째였던 목동소년 다윗이었습니다. 다윗 왕에게도 많은 아들들이 있었지만, 그를 대신해서 왕이 된 아들은 네 번째로 알려진 솔로몬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 8절에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였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혈통이나 서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약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받게 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오늘 우리는 요셉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곱의 삶을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하나님은 꿈을 꾸는 자를 들어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의 특징은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그 꿈이 허황된 것이든, 실현가능한 것이든, 바람직한 것이든, 옳지 못한 것이든 아무튼 꿈을 꾸는 자들은 가족과 친인척과 이웃들에게 큰 부담을 안길뿐 아니라, 때로는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꿈 많은 사람들 주변에는 돈 문제로 파산하거나 가정이 깨진 경우들도 많습니다. 물론 꿈꾸는 사람들 가운데는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있고, 또 이런 사람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야곱의 가정에 분란이 일어난 것은 꿈이 많은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꿈으로 인해서 형제들 간에 분열이 생겼고, 형들은 요셉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야곱이라고 해서 마음이 편할 리 없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란 영화를 보면, 알렉산더의 휘하 장수였고, 알렉산더가 죽은 후 이집트를 차지하여 톨레미왕조를 세웠던 톨레미의 고백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알렉산더는 우리가 죽었어. 말없는 동조로.... 우리는 그의 꿈을 믿지 않았지. 그의 꿈은 인종간의 교류와 그리스와 야만민족간의 화합이었는데, 그런 이상(理想)이 실현가능하다고 믿는 이는 우리들 가운데는 없었어. 꿈을 좇는 사람들은 주변을 힘들게 하지. 그들이 죽지 않으면 우리가 지쳐 죽기 때문이야.”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를 죽게 한 것은 술이나 열병이었다기보다는 그를 죽게 방조한 휘하의 장수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알렉산더의 이상(理想), 곧 인종간의 교류와 그리스와 야만민족간의 화합이란 꿈이 실현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현가능하다해도 자신들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져야하는 것이고, 따라서 알렉산더의 꿈이 실현되게 되면, 8년 넘게 알렉산더를 쫓아서 전쟁터를 누비며 생사를 넘나들어야했던 자기들로써는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피해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알렉산더가 죽도록 말없이 동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를 이어서 열방의 패권을 쥔 산자들로서 역사를 그렇게 기록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알렉산더가 열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하라고 서기관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는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심지어 열심당원들까지도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서 품은 거룩한 뜻을 실현하려했던 예수님을 죽이려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선한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할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자기 욕심에 이끌려 사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 주변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선한 꿈을 꾸는 예수님과 같은 분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다는 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인심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따라서 요셉이 형들로부터 죽음에 가까운 능욕을 당하듯이 선한 꿈을 꾸는 사람들도 때로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꿈꾸기를 좋아했습니다. 막내나 다름없는 요셉은 형들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언젠가는 형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말겠다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창세기 37장 7-10절에 보면 요셉이 꾼 꿈이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야곱의 아들들이 밭에 나가 곡식을 묶을 때에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입니다. 또 다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이 꿈으로 인해서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샀지만, 요셉의 꿈은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극심한 가뭄에서 7-80명이나 되는 많은 식구들과 수많은 가축들을 죽음에서 구해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았던 요셉이 만난 하나님은 '우물 속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나의 고난을 통해서 가족을 구출해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요셉이 믿음의 청년이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야곱이 자식들을 편애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들을 편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마음속에 소원을 두시고 그 소원을 이뤄지게 하신 것은 그가 믿음의 청년이었고, 꿈을 좇는 성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이 그가 거둔 성공의 밑거름이었던 것입니다.
17세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적지 아니한 연령입니다. 유대인들은 13세 이상을 남성으로 간주하였고, 17세면 장가를 들었을 나이지만, 족장시대에는 장가가는 나이가 늦었으므로 요셉에게는 부인이 없었습니다.
이때의 요셉도 다른 형들과 더불어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마냥 철부지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2절에서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레아와 그녀의 아들들이 빠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레아의 여섯 아들들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안전하게 지키려고 했던 르우벤이나 요셉을 상단에 팔아넘기자고 제안한 유다가 다 레아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총애를 받게 된 데에는 네 가지 정도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늦게 본 자식이란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은 4-50대만 되도 손자손녀를 보게 되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았습니다. 부모들은 막내를 유난히 귀여워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사랑스럽게 생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요셉이 라헬의 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야곱이 다른 여성들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을 뿐 아니라, 불임여성이었습니다. 요셉은 사랑하는 라헬이 어렵게 낳은 아들이므로 야곱에게는 각별하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앞의 두 가지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인데요, 요셉이 총명하고 정직했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성실하였을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다른 형들의 과실을 못 본척하거나 형들과 타협하거나 그들의 나쁜 행실을 따라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자질을 자주할 만큼 강직했습니다. 17세의 나이면 어린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요셉의 행실을 그저 철없는 아이의 행동으로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넷째는 다른 무엇보다도 요셉에게 꿈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목동의 한 사람으로서 무명인으로 살다 죽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세우고 일으킬 원대한 꿈의 계승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꿈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고, 이삭에게도 있었고, 야곱에게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전해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자주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해가지고 나면 전 가족이 큰 텐트 안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민족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추측하건데, 요셉의 꿈은 야곱이 들려준 조상들의 이야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깊게 연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열두 형제들 가운데서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가장 마음에 두고 심사숙고 했고, 그 꿈을 키워갔으며, 아버지 야곱처럼 그 꿈을 쟁취하려 했던 것입니다. 형들의 과실을 고자질한데는 이런 요셉의 성품과 맞물려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택해서 이집트로 보내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요셉이 주인공이 되고 다른 형제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있어서 들러리였던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꿈을 꾸는 자에게 함께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위로 열형들이 즐비하게 줄서있는 상황, 나이 차이까지 엄청나게 나서, 아버지뻘인 형들의 틈에서 요셉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형들에게 절대 지지 않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믿음이 있었고, 성실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꿈이 있기에 요셉은 절대 적당하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철부지 요셉이어서 형들의 과실을 고자질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혈통이나 서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있다는 성경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을 자들의 계보는 혈통이나 서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믿음과 그 사람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성도님들이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