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예수의 생애와 사역

은바리라이프 2009. 9. 8. 15:53

예수의 생애와 사역

 

탄생과 가족

예수의 생애와 그가 활동한 지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단지 윤곽만 파악할 수 있다. 비성서적 자료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 15년(루가 3 : 1), 즉 AD 28~29년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상당히 정확하게 활동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탄생 시기와 장소는 불확실하다. 〈마태오의 복음서〉 1·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초기시절이 헤로데 1세 때와 정권의 교체기(BC 4)였고, 〈루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AD 6) 있었던 유대의 첫번째 인구조사와 연결시킨다. 또한 BC 8년경에 행해진 인구조사에 대한 역사적 증거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많은 자료는 탄생 연도를 BC 7~6년으로 추정한다(BC와 AD의 사용은 중세까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음). 예수의 탄생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전승은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구약성서〉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그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마태오의 복음서〉 2장에서 베들레헴은 부모가 본래 살던 곳이었으며 그들은 자녀들을 위협하는 위험 때문에 이집트를 갔다가 나자렛으로 옮긴다. 그에 반해 〈루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부모가 실제로 나자렛에 살았으나 예수를 다윗 가족 출생지의 호적에 올리기 위해 잠시 베들레헴에 머문 것으로 나타난다. 두 전승이 각각 고유한 방식대로 그가 탄생한 장소를 지정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아성이라는 신학적 주제의 전설적 변형으로 판단해야 한다.

〈마태오의 복음서〉 1장과 〈루가의 복음서〉 3장의 상당히 다른 계보들에서 메시아(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교리를 내포한다.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계보적 사고를 위한 유일한 〈신약성서〉의 증거이다. 그러나 두 본문은 조화될 수 없다. 그들은 본래 예수의 선조들에 대한 일치된 전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메시아성을 계보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구약성서〉의 70인역(그리스어 번역)을 사용하여 유대 그리스도인 집단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본문들은 역사적인 자료들로서는 무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교리)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동정녀 탄생이라는 후기의 사상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계보적 증명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 전승도 역시 오직 두 자료(마태 1, 루가 1)에만 기록되었으며, 본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것도 아니었다. 바울로, 요한 및 나머지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 생각에 친숙하지 않다. 〈마태오의 복음서〉 1장에서 예수의 기적적 탄생이 언급되고 〈루가의 복음서〉 1장에서는 더 자세히 설명되는데, 이 전승은 하느님과 성령의 창조적 능력을 말해주며,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로부터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동기가 예수에게 적용되었고, 이차적으로 〈이사야〉 7장 14절(70인역에서 히브리 단어 alma, 즉 '젊은 여인'이 '처녀'로 번역됨)의 메시아 약속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과 연합되었다. 매우 오래된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고향은 갈릴리 지방의 나자렛인데, 이곳은 그리스 도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대인 거주지였다고 한다(마르 1 : 24, 10 : 47, 14 : 67, 16 : 6).

예수의 가족으로는 형제 4명과 몇 명의 누이가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서 언급된다(본문에는 교리적 동기를 드러내기 위해 그들을 이복형제나 사촌들로 만들 근거가 없음). 가족의 이름은 어머니 마리아(미리암), 아버지 요셉과 형제들은 야고보(야곱)·요셉·유다·시몬(구약 족장의 이름들)이다. 예수의 이름은 히브리 이름인 요수아, 즉 '여호와가 도우신다'의 그리스어 형태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서 예수 혹은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다고 언급한다.

가족의 이후 역사에 대한 몇 개의 단편적인 정보가 있는데, 아마 일찍 죽은 것 같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누이들은 처음에는 그의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마르 3 : 31~35). 그러나 마리아는 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으로 언급된다(사도 1 : 14). 그의 형제 야고보는 베드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유다의 편지〉의 저자가 다른 형제의 이름을 존경하여 이름을 취했던 것처럼, 〈야고보의 편지〉 저자도 야고보의 이름을 취했다. 4세기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따르면, 갈릴리에 살고 있었던 유다의 손자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윗의 자손들'이라는 이유로 소환되었으나 정치적인 위험이 없으므로 석방되었다.

예수는 가정과 회당에서 교육받았으며(성서 공부, 율법에 대한 순종, 기도, 메시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한 기대 등) 예루살렘의 순례에 참가했다. 경건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듯하며, 그가 신학적 교육을 받았음은 그의 가르침과 '랍비'(선생)라는 명예로운 이름에서 밝혀지는데, 그 시대에 랍비라는 칭호는 훈련되어 임명된 율법학자라는 직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초기생활과 내적 발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알려진 것은 〈루가의 복음서〉 2장 40~52절(성전에서의 소년 예수)에 유일한 설화가 간직되어 있고, 위경들이 전설의 형식으로 예수의 어린시절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사역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동, 그에게 예수가 세례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역사적 근거이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 저자는 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 : 1)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동시대적 배경의 서술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묘사된다. 그리스도교 구원 역사에서 그의 위치는 선구자 혹은 개척자이거나 〈요한의 복음서〉에서처럼 예수의 증인이다. 요세푸스는 그를 단순히 도덕 교사로, 그의 세례를 단순한 의식적 씻음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회개하라고 하면서 임박한 마지막 심판의 예언자로 광야에 등장했고, 소멸시키는 진노(마태 3 : 7~, 루가 3 : 7~)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더 전능하신 분의 불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도록 회개하려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금욕적 유목민 같은 옷, 음식, 제도, 전통적 종교장소, 세속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의 활동장소(유대 광야와 요르단 스텝 지역)는 종말론적 설교의 열정과 인습적 경건에 대한 그의 공격을 예시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마지막 날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만난다는 오래된 예언자의 약속과 일치한다. 역사적으로 이 모든 모습은 메시아로서 예수에 초점을 맞추는 그리스도교인의 시각에서는 즉각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복음서들의 전승은 세례 요한의 역사를 소급하여 해석했다. 예수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가 처음에는 요한의 운동에 속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가 세례받은 내용은 복음서에서 '에피파니(현현) 이야기'로 유형화되었고, 이것을 예수가 메시아로 임명되는 것으로 다룬다(마르 1 : 9~11). 요한에 의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에로의 부름은 예수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요한을 예언자들 위에 놓았으며 그를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불렀다(마태 11 : 7~ 11). 그는 자신의 사역에서처럼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를 보았고,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했다(마르 11 : 27~33). 여기에서 문맥의 경향은 예수를 메시아로 선언하며 세례 요한을 예수를 섬기는 더 낮은 자로 보려고 한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와 회개에로의 부름(마태 3 : 2, 4 : 17 참조)에서 예수와 세례 요한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세례 요한의 투옥 이후 바로, 예수는 성인(루가 3 : 23)으로서 광야보다는 갈릴리 고향 마을들에서(간헐적으로는 이웃 마을들에서) 독립적인 공적 사역을 시작했다. 그의 사역의 실제 영역은 겐네사렛 호수의 북서연안지역(베싸이다·코라진·가파르나움)이었다. 예수는 백성들을 광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그들의 거주지에서 찾았고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참여했으며, 요한처럼 금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마태 11 : 18). 그는 유랑하는 설교자로서 그들 가운데서 일했고(마태 8 : 22), 카리스마적인 기적을 행했으나 요한처럼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준 이미지는 상당히 특이하다. 그는 회당에서뿐만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호숫가에서, 길에서 가르쳤다. 그를 둘러싼 무리에는 이상한 사람들(여인, 어린이, 불경건하거나 불결한 자로 여겨진 사람들)이 있었다. 더욱이 그의 가르치는 방식은 놀라웠다. 그는 성서를 잘 알고 존중했으며, 여기저기서 그것들에 호소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성서로부터 끌어낸 것이 아니다. 그대신 그는 하느님의 실재와 그의 뜻의 정당성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항상 제시했고, 거룩한 본문과 전승들의 기존 구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인습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의 전제없이 청중들을 이해시켰다. 그의 은유·비유·잠언은 성서신학의 전통적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신 일상 경험과 청중의 이해에 직접 호소했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고유하고 명백하고 단순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그의 행동 방식과 일치한다. 복음서들은 이것을 많은 분리된 장면에서 묘사한다.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존경받는 자와 버려진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이 모든 만남에서 예수는 선입견에서 떠나 상황을 지배한다. 그는 논쟁에서 그를 어렵게 하려는 적대자들의 시도를 누그러뜨렸고, 그 주위에 모여든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자들과 함께했다.

공관복음서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물론 비난이 없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이 운동은 아직은 '교회'라고 불려질 수는 없다(이 개념은 후기 전승에서 처음으로 나타남). 그의 말씀과 운동을 확장하기 위해 그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가족과 생업의 모든 끈을 결연히 포기하고(마태 10 : 37~, 마르 8 : 34~, 루가 14 : 26~), 그를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마르 1 : 17, 루가 5 : 10)가 되려는 그의 제자들을 불렀다. 그의 말씀들은 극단적으로 날카로우며 제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숨기지 않는다(루가 14 : 25~33). 그는 출신과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부르며 임명하고, 특별한 사람들로 선택한다. 그들 중에는 어부들(안드레아·베드로·야고보·요한)·세리(마태오)·열심당원(시몬과 가리옷 유다)·농부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12명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제자들을 임명하고 설교하며 귀신을 내쫓는(마르 3 : 14) 권위를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제자훈련은 랍비들처럼 '훈련'과 함께 끝나는 과도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 중 누구도 충분한 공부 후에 '스승'(마태 23 : 8)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제자들을 부르는 내용들이 일반적으로 후기의 전승에서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로 유형화되었고, 개별적인 장면들이 이야기의 본 줄기에 첨가되었을지라도 갈릴리에서 예수가 사역하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회상은 분명히 본문들에 보존되어 있다.

갈릴리 기간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되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유대와 예루살렘에 가서 수난을 당한 오직 1차례의 여행만을 언급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1년을 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활동과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수난으로 나누는 편집적 측면과 신학적인 의도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몇 가지 이유들로 학자들은 공관복음서의 구성이 〈요한의 복음서〉의 구성보다 더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3번의 유월절 절기를 지냈으며(요한 2 : 13~23, 6 : 4, 11 : 55), 1번의 수코트(초막절, 요한 7 : 2)와 1번의 하누카(봉헌절, 요한 10 : 22)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만 2년을 넘는 기간이다. 그러나 요한이 독립된 전승에 근거하여 기록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의 시간 지적은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서 예수의 사역 장면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여기서 중심지는 예루살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