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주변세계
정치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 민족은 분열되고 무력했다. 고대세계의 대제국들(이집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시리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유대는 이미 바빌론 포로시대(BC 586~538)부터 정치적 독립을 잃었고, 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 초기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BC 3세기)하에, 그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BC 2세기)에, 마지막으로 로마의 지배하에 있다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AD 70). 오직 짧은 기간 동안만 유다 나라가 존재했다. 제사장 가족인 마카베오 가문은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후 통치했다(BC 168~165). 그러나 그들의 통치는 내적 분열과 격렬한 왕권쟁탈로 끝나게 되었다.
BC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에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의 영토를 연안도시들과 데카폴리스(중앙 트란스요르단)의 도시연방들을 제외한 유대 지방으로 한정시켰다. 몇 개의 다른 작은 지역들(겐네사렛 호수 북쪽의 갈릴리 내지, 사해 동쪽의 베레아)은 유대인들에게 남겨졌다. 파르티아가 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것을 이용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BC 44) 이후 변화하는 권력상황에 교묘히 적응하면서, 헤로데 1세(BC 37~2 재위)는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의 왕'이 되었으며 유대 땅을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통치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건설계획들을 세우고, 도시들을 설립했으며, 다른 방식들로 헬레니즘화(즉 그리스 문화를 강조하면서)를 촉진했다. 또한 솔로몬 성전을 화려한 양식과 엄청난 규모로 재건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 성전 재건은 BC 20년에 시작해, 티투스가 AD 70년에 파괴하기 몇 년 전인, AD 64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헤로데의 죽음 이후 헤로데 가문의 통치를 폐지해달라고 로마에 요구했으나, 로마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에게 땅을 분할했다. 가장 중요하고 큰 부분인 예루살렘·사마리아·남(南)유대·이두매를 포함한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AD 6년 폐위)에게 주어졌다. 그의 영토는 군사·과세·사법 업무를 관할하는 통치자(총독)하에 로마 행정권으로 통합되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믿고 행정과 사법의 제한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유대의 총독'이 된 본티오 빌라도는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다스렸다(AD 26~36). 그는 이 이유로 해임되었고 헤로데의 두 아들의 통치는 더 오래되었는데, 필립보(BC 4~AD 34)는 겐네사렛 호수의 북서쪽 비유대 지역을 다스렸고, 헤로데 안티파스(BC 4~AD 39)는 갈릴리와 변방 베레아를 통치했다.
예수가 자라고 사역한 갈릴리는 다시 유대화되는 과정에 있었지만 외국 이주민들의 정착으로 완전히 특성이 바뀌어 유대인들의 경멸을 받았다. 이 지역의 문화와 문명은 특히 헤로데 안티파스의 통치하에 개별 도시들, 대토지 소유자들을 헬레니즘화했지만, 아람어를 쓰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예수 시대에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저항하는 중심지로 알려졌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는 주로 비성서적 자료들, 특히 요세푸스의 저작에서 주로 발견되며 단지 몇몇 내용만이 복음서에서 언급된다. 로마 통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일정하지 않다. 제사장들과 귀족들은 순응했지만, 숨어서 저항하거나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다.
종교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여러 집단들로 구성되어 분열된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공관복음서들의 기록에 나타난 바리사이파는 대부분 예수의 적대자들의 표본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격분하여 그를 감시했고, 처음부터 그를 없애려고 했으나, 거꾸로 그들 자신들이 예수로부터 '자기 의'를 내세우는 위선자들이라고 호되게 공격당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바리사이파와의 논쟁들은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복음서들에서 '바리사이'는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위선자'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자료들은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① 후기 해설자들은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정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바리사이파는 집단으로 복음서에 소개되었지만 실제로는 연합된 집단이 아니었다. 예수가 바리사이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대한 산발적인 언급들이 있는데(루가 7 : 36, 11 : 37, 14 : 1), 그들이 수난 전승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② 후기 본문들에서 바리사이파는 대부분 예수와 대조되는 자들로 소개된다. 그에 반해 더 오래된 전승은 예수의 적대자들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③ 마태오는 AD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교들 사이의 날카로운 갈등을 반영하는데, 그때 바리사이주의라는 신학적으로 협소한 명칭이 유대교 재건과정에서 나타난다. 이 후기의 모습이 〈탈무드〉 전승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예수 시대에까지 투사될 수는 없다.
마카베오 시대에 생겨난 바리사이파('분리된 자들') 운동은 다양한 계급과 직업을 지닌 평신도로 구성된 종교적 연합을 형성했다. 그 목적은 하느님의 참된 이스라엘을 실현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도 토라(율법)를 엄격히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기도와 금식의 실천, 의식적 성결 등의 개인적인 의식 명령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포함한다. 바리사이파의 경건에서는 또한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망, 죽은자의 부활교리, 이교의 세력을 멸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하게 될 다윗적인 메시아에 대한 소망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에서 바리사이파와 예수의 관계에 대해 일치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가르침의 내용에서 공통점들도 있다. 예를 들면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마르 12 : 25~27),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경건에 대한 비판적 진술들이 그것이다. 예수의 많은 말씀은 랍비 전통과 유사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 의와 참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이상을 주장할 때 예수가 거부했다는 것과 그들의 '장로들의 전승'을 하느님의 명령과 대조되는 인간의 전승으로 예수가 인식했다는 것, 세리와 죄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 등을 살펴볼 때 그가 그들을 공격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예수의 견해들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에 대항하도록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으로 유력하지 않았던 바리사이파가 처음부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마르코의 복음서〉3장 6절에서 말하는 것과는 반대임).
예루살렘의 제사장 계급에 속했던 사두가이파는 바리사이파보다 백성들 사이에서 권위가 없었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학파로서, 그들은 부가된 '전통들'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새 교리를 거부했다. 사두가이파는 위계적 전통을 중시했으며 정치적 상황에 쉽게 적응했다. 그러나 성전파괴(AD 70) 이전 예수 시대에 미쳤던 그들의 영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바리사이파와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그들은 최고의 종교적·법적 권위인 산헤드린에서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마의 통치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파국적 결과와 성전파괴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율법학자들은 복음서들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모세의 율법에 헌신하는 에즈라 시대(BC 5세기) 이래의 후기 유대교에서 그들은 가장 존경받는 교사계급을 형성했다. 유대 생활의 모든 종교적·도덕적·사회적·법률적 문제들에 대한 율법의 규범적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율법학자는 신학자와 법률가의 역할을 담당했다. 예수 시대의 율법학자 중에는 바리사이인들이나 제사장들 외에도 사두가이인들과 열심당이 있었다. 그들은 보수를 받지 않았고 토라를 설명했으며 일상생활을 위한 지침을 주어야만 했다. 학교에서 오랫동안 세심한 훈련을 받은 그들은 율법학자의 위치에 맞게 학자의 긴 옷을 입고(마르 12 : 38), 존경스럽게 ' 랍비'라고 불렸으며(마태 23 : 7), 회당에서 명예로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특히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바리사이인들과 율법학자들이 함께 모이는 전형적인 방식은 복음서 저자들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데, 그때 회당에서 가르침을 주관한 자들은 바리사이파였다. 그러나 그 이전인 예수의 시대에는 율법학자들이 더 중요한 집단이었다. 예수가 자주 '랍비'와 '교사'로 불리기는 했지만 그가 이 직업의 구성원이었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발전에서 혁명적 집단인 열심당이 종교적·정치적 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대 민족에게는 비극이었다. 바리사이파의 소극적 저항에 더이상 만족하지 않고 그 집단으로부터 많은 지지자들을 모은 열심당은 신정정치의 이상과 율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첫번째 행동은 시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유대의 인구조사를 명령했을 때 일어났다. 처음에는 산발적인 개별행동에 불과했으나 반란은 곧 확산되어 군대 형태를 갖추었고 마침내 1차 유대 반란(AD 66~70)을 부추겼다. 성서적·비성서적 자료들은 열심당의 창시자로서 가말라 출신의 갈릴리 율법학자 유다를 거명한다. 예수 시대에는 그 투쟁이 아직 절정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열심당은 로마군을 급습하여 광야에 은신처를 둔 채 게릴라 전을 수행했다. 그에 따라 로마는 예루살렘을 엄격히 통제하고, 많은 순례자들이 도시에 모이는 유대 절기에는 군대를 강화하여, 소요가 예상되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동을 취했다. 이 상황을 통해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사건들을 조명할 수 있다. 열심당의 목표는 신정정치의 실현, 약속된 메시아 통치, 이교도 정부의 분쇄 등이었다.
예수가 열심당에 속했다거나 관련된 운동을 창시했다는 주장은 18세기에 대두되어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예수가 로마 정부만이 취할 수 있는 형벌인 십자가 처형을 당했으며, 그 십자가형은 대부분 반란자에게 행해졌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 덕분에 사면받은 바라빠(마르 15 : 15)와 같이, 이 당시에는 반란자에 대한 관용어인 '강도들'로 언급된다. 이것은 유월절에 열심당의 반란이 계획되었고, 반란은 피로 진압되었으며, 예수가 실제로 이 반란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했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예수의 메시아적인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마르 11)는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된다. 후자는 로마에 동조하는 유력한 제사장 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된다. 또한 예수가 게쎄마니에서 잡혔을 때(마르 14 : 47) 한 제자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연관시킨다. 후기의 그리스도교 전승은 변증적이며 신학적인 이유들로 그 사건의 참된 역사적 상태를 인식할 수 없도록 변경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시들은 보존되었는데, 예를 들면 '여우' 헤로데(루가 13 : 32)와 난폭한 세속 통치자들(루가 22 : 25)에 대한 예수의 비판적 말씀들, 그의 제자인 시몬이 열심당(루가 6 : 15, 사도 1 : 13)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열심당에 속했다는 가정을 지지할 충분한 근거들은 없다. 그가 로마에 의해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열심당원으로 잡혔고 국가의 적으로 고발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그가 실제로 열심당원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열심당원이라는 가정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논증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정치적·민족적인 특성이 없고, 어떠한 인간적인 행위도 아닌 하느님 홀로 그의 왕국을 건설하며(마르 4 : 26~29),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푼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분리주의자 에세네파는 아마도 쿰란(사해의 북서쪽 해안) 공동체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 1947년 많은 그들의 사본(사해문서)과 후대의 그들의 거주지가 발견됨으로써 세례 요한과 예수가 이 분파로부터 나왔거나 적어도 그들의 가르침에 상당히 의존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분파는 바리사이파와 같이 BC 2세기에 예루살렘의 관제 제사장들과의 갈등에서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전통을 유지했고, 율법을 강하게 실천했다. 쿰란 공동체의 특성으로는 유대의 남은 자들과 함께 외부세계로부터의 수도원적 은둔, '어둠의 자녀들'과 대조하여 '빛의 자녀들'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방식, 엄격한 조직과 훈련, 묵시적 기대(극적이고 변혁적인 사건들과 함께 역사 속에 하느님의 개입을 기대함) 등이다. 사해에서 발견된 새로운 본문들이 복음서의 예수 전승과 개별적인 유사성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쿰란 분파와 세례 요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가 민족 전체에 대해 말한 종말적인 회개의 말씀은(그의 세례는 단 한번 행해진 세례였음) 에세네파의 정기적인 정결예식과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예수의 사역 범위, 구원의 말씀, 모든 궤변에서 자유로운 하느님의 뜻 이해, 사랑의 계명, 죄인들 및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과의 교제 등은 에세네파의 견해들과는 정반대이다
'성경주석강해 > 복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의 말씀 (0) | 2009.09.08 |
---|---|
예수의 생애와 사역 (0) | 2009.09.08 |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메시아 왕국)에 들어가는 방법 (0) | 2009.08.19 |
[스크랩]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신약성서의 자료들 (0) | 2009.07.25 |
[스크랩] [단상] 두 렙돈의 진실 (0) | 2009.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