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렛 예수를 아는 데 필요한 주요자료들은 〈신약성서〉의 네복음서들이다. 처음의 세 복음서들, 곧 〈마태오의 복음서〉·〈마르코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는 문학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때문에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불린다.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마르코의 복음서〉를 활용한 듯하다. 그 형식과 내용에서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요한의 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보다 더 풍부한 신학적 해석을 담고 있으며, 세밀하게 살펴보면 훌륭한 역사적 정보들을 보존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두드러지게 불확실한 점은 연대이다.
마태오는 예수가 BC 5년 하반기 혹은 BC 4년 상반기에 있던 헤로데 대왕의 사망보다 최소한 2년 앞서 탄생한 것으로 본다. 루가는 예수의 탄생을 로마의 인구조사가 있던 무렵으로 본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인구조사는 AD 6~7년에 실시되었고 총독 퀴리니우스에 대한 봉기를 유발시켰다고 한다. 루가의 인구조사 부분은 맞지만 총독의 이름은 잘못된 것 같다. 예수가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때는 29~30년경인 듯하지만,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은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계기였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 사막의 금욕주의자로서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내다보면서 회개와 세례를 설교하였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그가 출범시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선구자라고 인정하였다. 예수는 그의 고향 갈릴리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를 생동적인 비유로 하였으며, 기적적인 치유도 베풀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공생애 마지막에 단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보다 더 잦았고 그의 공생애 기간이 1년 이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 기록이 옳을 가능성이 많다(루가 13:7도 이 사실을 암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음). 율법준수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바리사이파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민중이 그를 보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통치 당국의 공포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월절(BC 13세기에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에 예수가 개선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최후의 위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에게 배반당해 체포되고 심문을 받았다. 심문은 처음에는 산헤드린에서, 그다음에는 필라테 앞에서 진행되었다. 필라테는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였다. 필라테에게 제출된 고소의 내용은 반란교사죄였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이를 날조된 죄명으로 본다.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신앙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설교하였다. 그는 어떤 본문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본문에서는 이미 와 있는 것으로 말하기도 했다. 예수의 언행은 하느님의 최후 승리로 끝나게 될 하느님 나라 과정의 시작이라고 믿어졌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인정하였으나 정작 그가 이 호칭을 자신에게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예언자와 랍비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스스로 사용한 수수께끼같은 칭호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 칭호를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받을 고난을 언급하면서,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장차 맡을 재판관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사용하였다. 이 칭호는 〈다니엘〉(7:13)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환상에서 동물의 형상들과 대비되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자'는 외세에 의해 정복을 당했으나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 그 권리를 되찾게 될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그후 복음서 전승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초월적인 심판자라는 주제인 것 같다.
예수의 가르침은 암시적으로 혁명을 거부하면서도 기존질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폭력은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인 기적이 암시하듯이 예수의 활동이 열심당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지간에, 복음서들은 자기 역할에 대한 예수의 이해와 열심당 혁명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어두운 평가는 이처럼 혁명적 이상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회개의 복음은 각 개인과 사회가 깊이 더럽혀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악령의 세력 아래서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은 사랑과 긴급한 선교를 필요로 한다. 제자라면 심지어 원수까지 전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고, 재산과 세속적인 복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에게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창녀들, 동족의 미움을 받는 가혹한 세리들 등)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남을 헐뜯는 태도는 좋은 덕목이 아니었다. 국가는 어떤 점에서는 소원한 실체로 간주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과 시민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로마 황제의 권리들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요구를 이행하는 일과 양립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복음은 유대교 안에서 저항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는 초기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인 사울(사도 바울로:이 이름은 나중에 쓰여졌음)에 의해 이방인들의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울은 원시 교회를 박해한 열렬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소아시아의 타르소(다소)에서 태어난 사울은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예루살렘에 와서 루가가 "헬라주의자들"이라고 한 그리스도교 집단을 괴롭혔다. 이 집단의 지도자는 스데파노(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였는데 그는 예수가 타락한 예루살렘 예배를 정화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개혁자라고 생각했다.
바울로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배타적이고 특수한 유대교 의전들에 얽매일 필요없이 복음을 비(非)유대인의 세계로 전파해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견해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줄곧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통해 개종자들을 얻었으며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바울로는 교회가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확신하면서 온 인류를 향해 보편적인 선교를 펼치는 것이 곧 랍비적 보수주의에 대한 철저한 결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깨달았다.
몇 편의 무게있는 서신들이 보존됨으로써 바울로는 사도 시대(AD 1세기)에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남긴 유일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그보다 나이가 많고 헬레니즘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마찬가지로 그는 〈구약성서〉를 우의적(상징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예수가 안식일을 자유로운 관점에서 해석했듯이 그도 문자에 대한 영(靈)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최고의 구원행위인 동시에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사상에서 구원은 양심에 호소하는 도덕주의에 의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이 교리에서 바울로의 선구를 이룬 사람은 필로이다. 바울로는 이 교리에, 복음은 모세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자신의 논지를 연결시켰다.
이 논지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단의 지도 아래 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불러일으켰다. 62년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권위있게 대표했다. 야고보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서신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반율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들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베드로는 둘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모든 복음서들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12 사도들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어렴풋이밖에 알 수 없으나, 초기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바울로와 같은 시기(64)에 네로의 박해를 받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바울로의 신학에서 예수의 인간적 업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임무에 복종하고 충성을 다한 예수의 태도는 예수의 자기희생에 도덕적이고 구속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강조점이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이 복음서는 에페소스에서 씌어졌는데 교회와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 정통 그리스도교와 소아시아의 영지주의 분파들 사이의 논쟁 등 당시 그 지역에서 논란이 되던 문제들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 요한의 독특한 개성은 역사적 사건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재적인 구원 경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그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역사를 신앙에 이르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역사는 한 특수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들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범주이기 때문에, 요한은 이전에 존재했던 로고스가 예수 안에서 육화(肉化)되었다는 사상을 발전시켰고, 이 사상은 예수의 우주적인 의미가 헬레니즘 세계에 더 잘 인식되도록 도왔다. 고대 세계에서 신의 현존은 신의 영감이나 육화로 이해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이 신의 영감을 선택하였다면, 〈요한의 복음서〉는 육화를 선택한 셈이다. 이 2가지 유형의 그리스도론 사이의 긴장은 4세기 후반기에 안티오크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에서 최초로 첨예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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