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예수 이야기와 예수에 대한 신앙

은바리라이프 2009. 9. 8. 15:55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예수의 결정은 그의 이야기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이 사건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의 많은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수난 전승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 따라서 수난 전승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관점과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천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려는 것이며, 〈구약성서〉 예언자들과 〈시편〉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본문에서 끌어낼 수 있다.

예수는 아마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밝아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마지막 결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기 위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 그는 자신과 유대 통치자들과의 깊은 갈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성전정화 이야기는 예수가 이 갈등을 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유형화한 후기 전승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의 유일한 동기로 거기서 죽어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시 부활하려는 의도를 든다(마르 8 : 31, 9 : 31, 10 : 32~).

예수 수난의 외면적 과정을 구성하는 가장 좋은 실마리는 그의 십자가 처형이다. 그것은 그가 형을 선고받았고 정치적 반란자로서 로마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모든 기록은 그가 금요일에 죽었다는 데 일치한다(마태 27 : 62, 마르 15 : 42, 루가 23 : 54, 요한 19 : 31).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날은 니산 월(3/4월) 15일(유월절 첫째날)이었다. 그러나 요한에 따르면, 그것은 전날(유월절 양이 도살되고 축제가 시작되는 저녁)이었으며, 예수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는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고 그 이전의 것이었다. 이러한 날짜매김에는 각각 신학적 의도가 들어 있다. 즉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로 표현되어야 한다든지(공관복음서), 예수 자신은 양들이 도살되는 시간에 죽은 참 유월절 양으로 보여야 한다는(요한) 것 등이다. 역사적으로 요한의 날짜매김이 신빙성이 있으며, 니산 월 14일(4. 7)이 예수가 죽은 날로 간주되어야 한다.

복음서들이 사건의 사실들을 제시하는 방식에 따르면, 예수는 실제로 최고 유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마르 14 : 55~). 한편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고 그를 석방하려는 헛된 노력들을 했으나 결국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마르 15 : 22~). 이 내용에 대한 역사적인 신빙성은 의심스럽다. 첫째, 마르코와 마태오에 따르면 유대 최고법정은 예수가 성 목요일 밤에서 금요일 사이에 체포된 후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렸으며 그에게 신성모독자로 사형선고를 내렸다(마르 14 : 64). 그후 그들은 또 한 차례 예수를 신문하여 빌라도에게 이른 아침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마르 15 : 1). 루가는 오직 한 차례의 신문만 기록하면서 아침에 했다고 전한다(루가 22 : 66). 그러나 그는 예수의 형선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루가 22 : 71).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대제사장 가야파와 안나스가 예수의 신문에 관여한다(요한 18 : 13~). 둘째, 모든 복음서 내용에 대해서 어떤 증언이 제자들에게 정확한 보도를 주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셋째, 유대 산헤드린의 사법권이 논쟁이 된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유대 정부는 사형을 선언해야 하는 경우와 심각한 종교적 모독(신성모독)의 경우에 돌로 치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재판은 축제기간중에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표현에 대한 가장 강한 반론은 그것이 유대적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방식(즉 성서적 증거와 예수의 메시아성 및 하느님의 아들됨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신앙고백의 근거)에서 유형화된다는 것이다. "네가 축복받은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마르 14 : 61)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은 유대적 관점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칭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유대주의를 지닌 후기 교회에 대한 논쟁을 반영한다. 또한 복음서들은 유대인들을 희생하여 빌라도를 면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비성서적 자료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자료는 예수가 반란자로 체포되었고, 비공식적으로 신문당했으며, 그 당시에 예루살렘 사회에서 유력했던 산헤드린의 친로마 제사장들과 사두가이인들에 의해 정치적 반란의 지도자로 빌라도에게 넘겨졌다고 말한다. 성전정화와 성전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언적 묵시적 말씀(마르 14 : 58, 요한 2 : 19, 사도 6 : 14 참조)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던 바리사이인들이 그 음모에 연관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수난 설화에서 제사장·장로·율법학자들과 같이 분리된 집단으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수난 이야기에서 다른 장면들을 여기서 분리하여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예수 수난의 신학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상당히 교화적이고 예배의식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예수 죽음에 대한 성서의 표현들은(특히 그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데서) 서로 다르다. 예수가 〈시편〉 22편의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외치고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오직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뿐이다. 회개하는 도둑과 반항하는 도둑 사이의 구별은 오직 〈루가의 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이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아버지,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로,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다 이루었다"로 다르게 나타난다. 각각의 이 내용들은 로마 백부장의 증언, 즉 "진정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마르 15 : 39)처럼 예수와 그의 이야기에 대한 중요한 표현이다.

 

 

예수 이야기와 예수에 대한 신앙

 

예수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선교와 이야기를 무의미하게 했는가? 다시 말해 그는 실패하여 과거에 묻혔는가?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가 되었는가? 예수의 유대인 적대자들에게와 같이 빌라도와 로마인들에게는 더이상 아무 문제도 없었고 결정은 내려졌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고, 그들의 희망은 참담하게 어긋났다(루가 24 : 13~). 〈신약성서〉 본문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대답은 예수가 죽은 이후 부활한 예수의 현현(Ⅰ 고린 15 : 3~)과 성령 안의 그에 대한 현존체험에서 주어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에 대한 모든 실천적·신학적 표명은 부활 체험으로부터 자랐다.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증언과 공동체가 있던 어디에서나 그들은 부활한 주님을 믿고 인식하는 데 연합했다(Ⅰ 고린 15 : 11).

이 믿음이 표현하는 형식과 이념은 다양하다. 가장 오래된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그가 신적 주권을 갖게 됨을 의미했고, 복음서에서 다양하게 연관시키듯이 빈 무덤 발견 전승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부활한 사람이 40일간 땅에서 걸어다녔고 그후 하늘에 올랐다는 이론은 오직 〈사도행전〉에서만 발견된다(1 : 3). 그래서 부활의 메시지의 분명한 성격과 부활 내용의 애매한 성격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문제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복음서 전승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다. 이것 없이는 예수의 단 하나의 말씀과 행동, 그의 수난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성서〉 전승은 과거의 모습으로서의 예수의 기억을 보존하거나 단지 예수가 누구였는가를 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현재 누구인가를 선포하고자 한다.

많은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이 예수의 메시아 의식, 즉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메시아' 같은 특수한 칭호와 연결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믿음도 오직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그리스어)로 묘사하며, 유사한 종류의 수많은 다른 칭호가 발견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질문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은 예수가 메시아였고 '지금도 메시아'라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그의 '의식'과 내적 발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예수의 세례·시험·형상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체험된 기록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에게 하나 또는 몇 개의 그러한 칭호들을 적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칭호들이 그의 설교와 사역에 상당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예수가 그의 선교와 활동을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의 여명에 연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자기 이해를 전통적 칭호를 통해 표현했다는 것은 다른(그리고 의심스러운) 문제이다.

이 문제의 토론을 위해서는 3가지 관찰이 중요하다. 첫째, 공관복음의 진정한 본문들에서, 예수는 결코 자신의 신분을 그의 가르침의 특수한 주제로 삼거나 그의 지위인식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둘째, 후기 교회의 신앙이 그리스도론적 본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추정할 수 있다. 셋째, 예수를 메시아, 다윗의 자손,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라고 말하는 본문 어디에서나, 그가 이러한 칭호들을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사용했다는 어떤 지시도 없다.

예수가 어떤 전통적 칭호들을 자신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당시 청중들은 오직 정치적 혹은 민족적 의미에서 메시아 또는 다윗의 자손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예수의 의도와 충돌한다. 또한 배타적 칭호인 하느님의 아들은 비유대교적인 헬레니즘 세계에서 설교하는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후기 청중들에게는 이해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결론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에게만 사용하는 (신적) '주'라는 표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가 자신을 일컬은,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한 문장(마르 10 : 45)만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 그리스도 교회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는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문제로 좁혀진다. 이 개념은 주권의 칭호이다. 이것은 유대 묵시사상에서 나오는데, 평범한 인간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 끝날에 구름을 타고 올(다니 7 : 13~) 세상 심판자의 신화적 모습을 의미한다. 예수의 초기 말씀(마태 24 : 27, 마르 13 : 26, 14 : 62)은 사람의 아들을 종말론적·미래적 의미에서 항상 3인칭으로 말하지만, 어떤 본문들은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마르 8 : 38, 루가 9 : 26, 12 : 8~). 2개의 다른 말씀군(群)은 그를 완전히 다르게 말한다.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그의 수난·죽음·부활만을 말하며(마르 8 : 31, 9 : 31, 10 : 33~), 다른 하나는 땅에서의 권위있는 사역과 방랑에 대해 말한다(마태 8 : 20, 11 : 19, 마르 2 : 10~28). 둘 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유대인 청중은 이 말씀들에서 묵시적인 사람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사역과 죽음을 회고해볼 때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두 말씀군은 오직 후기 교회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초기 말씀군만이 아마도 진정한 것으로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앞으로 올 사람의 아들에 대해 말했다면, 그 말은 그에 대한 제자들의 충성이 마지막 심판 때 인정되고 확인될 것이라는 약속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묵시적 언어와 개념으로 말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상적 인격과 심판자의 모습과의 관계는 반성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 전승은 수정의 과정을 통해 없어졌고, 후기 교회의 신앙이 전통의 형성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구원에 대한 부활 이후의 말씀에서, 종말론적 '여기 그리고 지금'은 뗄 수 없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속하고 그 안에서 실현되어가고 있었다. 불신앙과 의심에 직면하여,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단지 일어났던 대로 제공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결정적·구속적·궁극적인 행위와 말씀으로, 세상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역사로 해석했다. 신앙으로 예수에게 부여된 주권에 대한 모든 칭호들은 시대의 전환점, 구원의 개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과 현존이 예수 안에서 도래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복음서 전승은 역사적 예수를 신화적 그리스도로 대치하지 않았고, 예수의 말씀·사역·방식(주권과 초자연적 특성에 대한 칭호가 없음)에서 비밀히 암시된 그리스도론을 명시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전승에 적합한 질문은 발전과정 속에서 나자렛 예수에게 무엇이 일어났었는가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왜 그를 확고히 붙잡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질문과 복음서들의 대답을 수용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며, 이것은 역사적 탐구의 한계를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