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상에 있어서의 사랑의 위치 연구
-그의 서신들에서 활용된 공동체 보존윤리로써의 αγαπη 개념의 고찰을 중심으로-
임 명 빈
Ⅰ. 서 론
1.문제 제기
바울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몇가지 중요한 교리가 있다. 그것은 기독론,교회론,구원론,종말론 등이다. 그중에서 바울사상의 핵심은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교훈가운데 핵심은 교회다” 라고 말한 Ridderbos의 생각은바울신학에서 교회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해준다.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모든 언급속에 교회에 대한 토론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바울의 수많은 서신이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추된 것으로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공동체를 지배하는 원리이며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들이 지체로써 모인 무리이다.(고전10:17)따라서 바울이 제시하는 신자의 윤리적 행위는 단독으로 선이나 악을 선택하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체속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신자들의 윤리적 행위는 항상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형제들로 이루워진 공동체 전체의 덕을 이루기 위하여 선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하는 데 있다.(고전8:9,10:33)“바울의 기독교 윤리란 공동체 생활 윤리”라고말말한 니이버(H.R.Niebuhr)의 말이나, “바울의 윤리가 공동체의 윤리라는 것은 이 윤리가 교회 공동체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성을 전제한다는 것을 뜻한다.” 라고 말한 Wendland의 말은 바울 윤리의 특징적 모습 중 하나가 공동체를 보존키 위한 윤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사용한 몸의 비유는 주님과 함께하는 교회의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비유는 지체로써의 모든 신자들의 일체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교회의 각기 다른 구성원들은 각자 상이하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나타나고있다. 그리고 이 통일성은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전적으로 십자가에서 유추된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있었기에 교회가 존재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신 목적은 구원받은 개개인의 고립이 아니라 그분께 속하고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모든 신자는 하나로 통일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십자가 공동체이다. 십자가가 공동체 가운데 제시하는 가장 큰 윤리적 성격은 사랑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는 사랑이다.사랑의 윤리는 기
독교의 한 중심자리를 점유하고 있다. 사랑은 특별히 기독교 케리그마의 내용인 예수의 삶과 고난 그리고 죽음의 의미로써 흔히 사용되는 ‘복음’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용어이다. 바울이 복음을 ”십자가의 말씀“(고전1:17-18)과 일치시킨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공동체 윤리로써 가지는 역동적인 위치와 중요성은 바울신학에서 매우 커다란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교회라는 테두리안에서 증명해 가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인은 지금까지 바울의 신학에서 교회론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의 신학 전체에 깔려 있는 사랑의 윤리에 대해 언급하였다. 문제는 그의 교회론과 사랑의 관계성이다. 본인은 바울의 교회론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본다.사랑은 교회를 보존하는 윤리이다. 사랑이 없이는 공동체의 형성도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이 둘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의 교회론과 사랑의 개념을 연결하는데 충분한 교량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기 위한 윤리로써 제시된다. 문제는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본 논고의 목적이며 과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훈과 생애가 어떻게 바울에게 전달되었으며 바울의 그의 사랑을 어떻게 공동체 보존 윤리로 체계화 하였는가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성경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구약에서 특히,호세아는 위대한 사랑의 예언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호
6:6,14:4) 신약에서는 7957절이라는 전체 절수 중 291절(37%)이 사랑에 대한 절수이다. 그중 바울은 127절을 사용하여 신약의 사랑중 43.6%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의 전반에 사랑의 신학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사랑은 바울의 윤리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고 그의 신학의 전체 구성 요소이다’ 라고 말한 화이틀리나 “사랑은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핵심이다” 라고 말한 헌터의 주장은 본인의 생각과 일치한다.
본연구는 바울의 사랑의 개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기인했다고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윤리라고 전제한다.그리고 이 공동체 보존 윤리로써의 사랑은 바울이 일관성있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여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적용하는데서 기초되었다고 본다. 바울사상에 있어서 사랑의 개념은 그의 서신들속에 광범위하게 나타나 있으므로 본 연구는 그의 서신 전반을 Text로 하되 특히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바울서신의 진정성에 대해 진보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에베소서,골로새서,데살로니가후서,디모데전후서,디도서의 바울 저작여부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이 바울적이고,서신내용의 사건이 바울생존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며 무엇보다도 서두에서 저자가 바울자신임을 언급한 점을 볼 때 본 논문은 13개 서신 모두를 바울서신으로 간주하는 보수주의 계열의 입장에서 논문을 전개코자한다.
본 연구는 크게 다섯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첫째부분은 바울이 제시한 사랑의 배경에 대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본 연구에서 사랑과 중요한 관계성에 있는 바울의 공동체형성과 요구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바울이 생각한 공동체의 이상이 무엇인지 제시코자한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와 그 문제의 배경에 자리한 공동체 파괴 요소등의 새로운 상황을 점검하고 바울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사랑의 윤리를 제시했는가 살펴볼 것이다. 율법,플라톤주의,그노시스등의 문제에 직면한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십자가의 신학이 제시하는 사랑의 윤리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둘째부분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사랑의 위치에 관한 연구이다. 사랑의 윤리가 지체들간의 일치와 화해 그리고 봉사와 연합이라는 성격에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이며, 모든 윤리를 해석하고 완전케하는 윤리의 완성이며, 십자가 신학이라는 기독교 해석의 중심적 위치에서 사랑의 위치를 연구할것이다.
셋째부분은 사랑과 유사한 개념을 Text에서 찾아 일치점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화목,섬김,겸손이라는 세가지 윤리를 사랑과의 관계에서 비교할 것이다.이 개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하는데 사랑이라는 개념과 유사개념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온 것이 사랑의 개념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지체로써 공동체의 구성원간에 요구되어진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과 하나님의 화목.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겸손이라는 개
념 역시 공동체를 보존하는데 요구되는 중요한 원리이다. 따라서 사랑과 세가지의 개념은 매우 유사한 부분이 있으며 이것을 연구하는 것이 4장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내포하고있으므로,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성을 4장에서 연구토록 하겠다.
넷째부분은 바울의 사랑의 근거를 찾는 일이다. 하나님 사랑. 예수의 사상. 그리고 사도요한의 사랑에서 근거를 찾으려 한다. 하나님 사랑과 예수의 사랑은 바울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신학에서 새로이 정립하고 있다. 요한의 사랑은 바울의 사랑과 유사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따라서 세가지 종류의 사랑을 바울의 사랑이라는 바탕에서 조명해 보는것은 큰 의의가 있다.
본 연구의 방법은 해석학적 방법으로 바울의 서신들에서 그가 사용한 사랑의 개념을 종합 분석 해석하므로 그의 사랑의 이념을 정립해 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학적인 방법이란 성서 신학적인 주석 방법을 이야기한다.학자들의 주장보다는 text자체에 사용된 사랑의 의미와 용도를 공동체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종합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코자 한다. 따라서 본연구는 그의 서신 전반에 쓰인 αγαπη의 개념을 종합적으로 주석하고자 시도하였다.
Ⅱ.바울 윤리에 있어서 αγαπη 의 배경.
1. 바울의 공동체 이상
지중해 연안의 바울이 지나간 지역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생겨나고 강화되어 배가되기 시작했다.이것은 그의 신중한 정책의 소산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가 되게 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이 회심한 사람들의 삶속의 영향을 미쳐 서로간에 개인적인 친숙한 관계가 형성하도록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평케 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한데 묶어주는 것이었다.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의 영역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롬15:7) 하나님과의 화평은 다른 사람과의 화평을 수반하는 것이며 이것은 복음전도의 특징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빌4:2.3) 성령안에서의 연합이란 다른 사람과의 연합을 포함한다. 왜냐면 원래 성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통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고후13:14,빌2:1,엡4:3) 복음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따라서 바울은 그의 영향으로 생겨난 공동체가 사랑과 연합이 수반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발전되기를 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음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공동체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다른 사람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 바울이 의도한 공동체는 무슨 공동체인가? 그는 공동체를 σωμα(몸)에 비유한다. 물론 바울은 교회를 여러가지의 비유를 통해 묘사하지만 몸으로써의 공동체는 그가 제시한 공동체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해준다. 이 몸으로써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연합과 다양성’이다.
1)몸비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제일 처음 ‘몸’으로 기술한 것은 고린도전서의 후반부에 나온다. 비록 전반부에 그리스도인 각자를 그리스도의 ‘지체들’ 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고전6:15) 이 첫번의 두 언급은 성격상 매우 신비스러운 것으로 바울이 ‘주의 만찬’에 대하여 논할 때 나온다. 그 언급들은지체들간의 연합이 단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이루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몸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말한다.(고전 10:17)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예함으로 하나가 될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지체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연합해야 함을 말하며, 그 전후 구절들은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지체간에 연합된 공동체는 바울이 바라본 공동체의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고 그 사랑때문에 타자를 사랑하는 것은 바울이 바라본 공동체를 지탱하는 윤리이다. 바울은 또한 ‘서로 기다림으로’ 그들의 연합을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고전 11:33)공동체에 많은 지체가 있다는 사실이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주장한다거나 공동체안에 파당을 형성하는 일을 빚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단결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2)몸비유 : 후기
바울의 후기글에서는 그의 ‘몸’비유에 어떤 진전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로써 기술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공동체들이 직면하게 되는 상이한 환경에서 기인된다. 헬라,유대 및 동방에 수많은 근원으로부터 들어온 종교적인 관념들이 합동해서 그리스도인들의 구역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방의 관념은 다양한 우주의 능력들이 하나님을 접촉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자들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이런 능력을 가미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위협을 다루며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고(골 1:16)그분은 죄,율법 및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어떤 우주의 세력까지도 제압하였다고 설명한다. (골 1:20) 바울은 또 예수는 단순히 다른 것처럼 신성을 빙자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이 거하시고’ (골 1:19) ‘하나님의 형상이요 뛰어나신분’ (골 1:15)이라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인 ‘몸의 머리’시라고 기술함으로써 몸의 개념을 다시 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온 지체의 연합을 묘사한다. (골 1:19) 즉 그는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차원에서 뛰어나심이 다시 재확인되고 우주적인 능력들과 교회위에 뛰어나심이 특별히 언급된다. 그리고 후에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는 사역의 결과로 교회안에 존재하게 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새로운 연합을 언급한다. (엡 2:16, 3:6)후에 그는 은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은사의 다양성이 성도들로 ‘봉사의 일을 하도록’ 또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엡 4:12, 15:16)이것은 머리에까지 자라는 몸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더욱 더 완전히 일치되고 지체간에 연합해야 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바울이 공동체 이상으로 제시한 몸의 비유는 그리스도를 몸의 생명뿐 아니라 연합의 원천으로 보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다양성 속의 연합, 연합에 따르는 相互依存性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합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수직적 사랑에 기인한 수평적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공동체의 새로운 상황
바울이 공동체를 ‘몸’으로 말할때 그는 몸안에서의 불일치의 가능성에 대응하여 그 틀을 제시한 것이다. 언급한대로 교회안에서의 연합은 인식되어야 할 잠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정해야만 하는 실제인데, 바울은 분열 가능성이 있거나 현존하는 분쟁에도 아랑곳없이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고전 1:10, 롬 15:15, 빌 2:1, 골 3:12-14, 엡 4:3)고린도전서 1장의 내용으로 볼 때 고린도교회에는 분쟁이 발생헀고 이것은 공동체내에 편당으로 발전했다. 로마와 골로새에서도 편당이 생겨날 위험이 있었다(고전 11:18, 롬 16:17-20, 골 2:16:29)바울에게서 편당이라는 말은 교회들 사이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공동체안에서의 분열을 뜻한다. 그는 말하기를 이 편당은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거나 서로 돌아보는 것이 부족한 결과로 생겨나며(고전 1:12, 11:21)이것은 육신에 속한 일이라고 진술한다.(갈 5:20)
전술한 바와 같이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를 말하면서 지체간의 일치와 연합을 제시하게된 것은 공동체의 여려 문제에 직면하면서 부터이다. 고린도전서는 특별히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바울은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시작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에 의해 시작한다.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에게 분쟁이 있다는 것이니”(1:11) 너희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함을 들었으니...“(5:1), “ 너희의 쓴말에 대하여는 ..” (7:1) “처녀에 대하여는...”(7:25),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8:1), ”너희가 교회에 모일때에 너희중에 분쟁이 있다함을 듣고...“(11:18)..., 이와같은 흥미있는 진술에서 보는바와 같이 이미 교회는 분쟁,음행,결혼,우상제물,헌금...등의 문제로 파괴되고 있었다.
무엇이 일치와 연합을 추구해야 할 공동체를 깊이 분열 가운데로 빠트렸는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간의 일체를 허물어 뜨린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소들은 헬라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그노시스(Gnosis)등의 영향이었다. 이것은 공동체가운데 은밀히 침투된 새로운 상황들로서 바울은 이것들과 대적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1) 헬라주의-플라톤 주의
바울이 속해있던 유대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교로써 헬라적인 관심들과 표현양식들의 영향이 전체적으로 침투되어 있었다. 바울은 헬라주의적 기반에서 장성해서 히브리적 사상을 이루어 기독교적인 인간으로 변화했다. 바울의 교훈에는 분명히 헬라주의적인 근원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불트만도 바울이 헬라문화와 접촉하였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헬라사상의 ερωs개념을 거부한다. 니렌에 의하면 ερωs신비가 플라톤 신비의 중심이다. 플라톤의 ερωs개념은 소유욕적 사랑,인간의 하나님께 향하는길,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다. 플라톤의 ερωs 사상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독교의 αγαπη적인 사랑과 일치하지 못하였다. 바울이 당시 헬라철학의 주요 도시중의 하나인 다소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의 메세지에서 ερωs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모든것을 배설물로 여겼기’ 때문이다.(빌3:17-18) 즉 바울은 자기중심적인 헬라철학의 ερωs를 버리고 이타적인 하나님 사랑인 αγαπη를 강조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3:5에서 αγαπη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그당시 교회에 좋지않은 영향을 끼쳤던 ερωs적 개념을 거부한것이다.
이 αγαπη는 소유욕적이 아니라 희생과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빌2:6-8)이 아가페는 ‘십자가의 아가페’이다. 바울은 이런 아가페가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기를 원하였다.
2) 유대주의 - 율법
유대주의가 기독교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바울 역시도 히브리 종교의 영향하에서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히브리 종교가 주는 기독교에 대한 율법의 영향을 끊임없이 거부한다. 바울은 생활의 지도를 위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배격하지 않지만 ( 3:31, 9:4, 7:7, 12:14) 율법에 대한 해석학적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다.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함으로써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그리스도의 시대를 출발시켰다.바울은 성령의 은사인 (갈5:22)사랑의 윤리가 (고전13:1-13) 본질적으로 율법의 성취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부여한다. (갈5:14, 롬13:8-9) 그래서 바울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5:14)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의 요구이다. 이 율법의 실천이 “서로의 짐을 진다”,“사랑을 통해 서로 종이 된다”(갈5:13)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이런 율법의 실천으로서의 αγαπη는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원리였다.
3) 영지주의 - 지혜
바울이 고린도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말(고전2:2)은 그가 고린도의 지적인 풍토를 염두에 두었음을 시사한다. 고린도인들이 최신의 지혜만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최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특징을 강조하였다. 이 고린도 교회의 지식있는 자들은 A.D 2 C 에 번창한 다양한 영지주의 학파의 영향을 받은자들이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서신을 통해 적어도 고린도가 영지주의의 씨가 자라기 매우 좋은 토양임을 알수 있다. 그들의 지식은 계몽이 덜 되었다고 생각되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무시하고 음식이나 성문제와 같은 문제에 있어 미숙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을 현혹하는등 공동체의 파괴와 문제를 가져 왔다.
그러나 바울은 음식을 먹는것이 양심이 부자유한 그리스도인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러한 문제는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웃을 고려한다. 그는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지식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친교도 강화될수 없다고 보았다. 사랑의 흐름은 마음속에서 넘쳐 이웃에게 전달된다.“이 사랑은 모든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13:7) 그 본질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고전13:5)것이다.
라이첸스타인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바울의 논쟁적 색채가 있다고 지적하고 αγαπη가 Gnosis를 대립함을 말한다. 바울의 αγαπη찬양의 주제는“아가페는 Gnosis가 부분적(고전13:9)으로 하던것을 폐하지만 아가페는 언제까지나 영원하다”(고전13:8)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13:4)고 하였다
3. 공동체의 새로운 요구.
본인은 사랑의 배경이란 장에서 바울이 공동체의 이상으로 제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각 지체의 다양성과 연합을 살펴보았다.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발생한 새로운 상황들에 대해 살펴보았다.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동체가 요구하는 원리는 무엇이고 바울이 이 원리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이다.바울은 편당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교리에 대한 고백이나 포괄적인 윤리규정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의 지체들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용납되어진 것과 복음에 합당한 사랑과 연합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즉 그는 “십자가의 신학”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안에서의 일치를 새로운 상황에 부딪힌 공동체의 요구로써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고린도의 분파적 상황에서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만 보라”(고전2:2)고 하였다.
바울은 사람들을 서로 나누는 차이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것, 즉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괴리와 그분께 그들이 응답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출발했다고 뱅크스는 말한다.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을 알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여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된 구원을 함께 나눠 가진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서 지체가 서로 관계를 맺는데 어떤 차이점도 없다. 왜냐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수직적인 사랑을 선물로 값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는 국적의 차별이 없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하나이다. 사회적 지위의 차별도 없다. 종이나 자유자나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모두가 하나이고(갈3:28)모두가 한 성령을 받아들인 자며(고전12:3) 결과적으로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이 원리는 성적인 차이에도 적용된다. 남자나 여자나 다 예수안에서 하나이다. 이런 차별의 철폐는 상호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상호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사랑, 존경,화평,겸손,봉사,덕을 세우는 일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상호간의 관계를 상호대명사를 사용함으서 해석하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롬12:10)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롬12:6)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롬12:10)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 서로 같은 마음을 품으라”(롬14:19)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것처럼 여러분도 형제를 받아들이라”
(롬15:7)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16:16)등을 들수있다. 이런 상호간 관계성의 말은 결국 형제 사랑이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고 사랑이 공동체를 세우고 성장시켜 가는데 요구되어지는 원리인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다.
바울의 모든 신학사상은 결국 다메섹도상의 사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기점으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때 예수에 대한 믿음은 사랑으로 작용하는 믿음이 되었다. 이것을 불트만은 ‘사랑으로 작용되는 신앙’ 이 고 표현하였고 바클레이는 ‘사랑은 믿음의 원동력’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사랑의 믿음은 후에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복음의 케리그마가 되었고 이 원리는 바울이 세운 공동체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사랑의 요구, 이것은 바울당시 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요구였다. ‘기독교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동반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믿음은 사랑에서 출발한다’고한다Barth의 이야기는 바울의 이런 요구를 잘 반영한다.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는 언제나 예수의 십자가에 달린 몸과 연결되어야 한다.
Ⅲ.바울 윤리에 있어서 αγαπη의 위치
1.호교론적 위치
교회가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았고 그에게 속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사랑이다. 리델보스에 의하면 ‘사랑은 교회의 절대적 구성 요소이다’ 그 스도가 머리가 되신 몸이 세움을 받는 것이 사랑안에서이다.(엡4:15,16) 그 사랑안에서 신자들은 함께 뿌리를 박고 서게 된다.(엡3:17)이때문에 사랑은 온전히 매는 띠라 불리운다. 참으로 사랑은 그 자체안에서 교회의 연합을 이루게 만든다.(골2:2)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의 요청은 교회안에서 상호책임을 강하게 인식하게 하며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세우는데 효과를 가져왔고 교회를 성장하게 하였다. 바울이 사랑에 관해 기록할때 그는 거의 신자들의 상호적이고 서로 권면하는 사랑을 언급한다. 모든일 가운데 서로 덕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14:26,살5:11) 그러므로 바울의 아가페는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고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우는데 그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공동체를 파괴하는 신비적 개인주의의 모든 악행을 책망한다. 그는 교회안에서 이러한 악행이 계속됨을 염려하면서(고후12:20) 소위 악행의 목록들 가운데 그것들에 대해 거듭 경고하고 있다(엡 :31) 그는 이러한 악행이 교회안에서 어떤 특별한 신비적 환상 가운데 나타남에 따라 그것이 개인주의와 자아 지향적인 형태를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이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 대해 경고한다. 고린도전서8-10장과 로마서14장에서 강한자와 약한자에 대한 교훈 가운데서 바울은 자유와 사랑에 대한 독특한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는 먹는것과 마시는 것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게 될수 있을때 사랑에 호소하면서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적 남용을 책망한다. 즉 자유의 남용은 공동체의 연합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으로 섬기는 일들 가운데서(갈5:13) 행사되어져야한다. 즉 자유는 공동체 보존윤리인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한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안에 있는 각 가지 문제들 즉 분파문제(1:10-17), 도덕적 비행(5:1-13),소송(6:1-11),결혼(7:-
10),우상제물(8:1-13),예배(11:2-34),은사(12:1-14:10),교리(15:1-28)등의 제 문제를 사랑안에서 규합시키고있다.(13:1-13)
호교론적 위치에서의 바울의 αγαπη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 확고하게 다루어져 있다. 여기를 바울은 사랑을 교회와 연합시켜 덕을 세우게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는 몸의 유기적 연합으로부터 그의 주장을 전개한다. 이 교훈은 신자들의 개인적 은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12:31)고 말한다.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사랑에 대해 언급한다.(고전13장) 실상 은사는 몸의 지체로써 공동체에 존재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어떤 큰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몸과 어떤 연합도 이룰수 없다. 사랑은 개인주의적, 분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보존하며, 지체를 연합시키는 작업을 한다.
리델보스에 의하면 바울이 교회의 세움에서 가장 중요시 여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받았고,배운것처럼(골2:6,엡4:20-21)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고 그분안에 거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 세움은 다른 국면을 동반하는데 이것이 상호간의 일치와 사랑이라 하였다. 이것은 지식의 증거일뿐 아니라 성숙의 증거이기도 하다. 바울은 전체를 지향치 않는 지식을 경고하며 동시에 다른이를 섬기지 않는 지식을 거절한다. 이런지식은 교만케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다.(고전8:1)
공동체 중심적인 바울의 윤리는 그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낙스에 따르면 “바울에게 있어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크리스챤 공동체안에서 이루어지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그 밖에서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바울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총체적인 존재를 나타낸다고 보는것과 같이, 믿는자의 사랑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서의 믿음안에서 사는 총체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랑이 주는 공동체생활의 상호 인격적 관계를 중시한다. 이것은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인격적 관계는 “이 모든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4)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라”(엡4:16) “마음을 같이 하어 사랑을 가지고”(빌2:2-3)“사랑 가운데 행하라”(고전16:14)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 “사랑안에서 연합하여”(골2:2)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사랑을 통한 교회의 지속적인 세움은 단지 그 개인속에서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완전한 통일성 속에서, 그리스도안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한번 받았던바에 일치되게, 신앙과 지식이 증가되고 사랑과 상호교제속에서 완전하게 되는것을 의미한다. 따 서 사랑은 공동체가 전력해야 할 모든일들 중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2.기독교 해석의 중심
αγαπη의 개념은 기독교의 독창적인 것으로 αγαπη 개념을 떠나서는 기독교를
해석할 수가 없다. 니그렌은 “αγαπη는 기독교의 중심이고 근본동기” 라고
견제하고 “αγαπη는 기독교의 새로운 창조이고 기독교의 근원적 기초개념”이라고 하였다.바클레이는 αγαπη를 ‘새로운 성질을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였다.’고 하였다. 바클레이는 αγαπη에 대해 ‘새로운 성질을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 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졸리는 αγαπη 와 같이 중요한 기독교의 신약의 개념들이 신약이전의 작품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αγαπη가 그리스도인의 처음 만들어낸 단어라는 주장에 반박을 가한다. 이에 대해 풀레보도 졸리의 말에 동조하면서 ‘그러나 졸리가 본 사실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역사에 등장한 그리스도 사건의 독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기존 단어들에 새로운 의미를 주입시킨것’ 이라고 지적하였다. 분명히 신약의저자들은 당시 선교적 매체 용어로써 세속적 사랑 ερωs와 구별되는 αγαπη 라는 단어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용법으로 독특하게 사용하였다.니그렌에 의하면 αγαπη 는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의 전문용어를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αγαπη를 떠나서는 기독교가 존재할수없으며 αγαπη는 기독교를 해석하는 중심이다.
기독교 사랑의 독창적 기초는 ‘사랑의 개념이며’ 이것은 구약을 소급해 올라갔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중계명이 기독교 사랑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실상 구약에서 사랑의 계명은 많은 규범과 율법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에 와서는 율법의 전적요구의 요약으로써 최초로 지배적인 위치를 갖게된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로마서 13장 10절에 말하고 있는것이다. 기독교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웃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신약의 사랑은 훨씬 보편적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선민을 위한 사랑으로 제한적인 면에서 사용하지만 (신4:37,7:13,10:15,사 49:14,63:9, 램31:3, 습3:17,말 1:3) 기독교의 사랑은 무제한이다. 즉 보편적이고 포용적이다. 바울이 말한것 처럼 거기에는‘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예수안에서 하나이다’(갈3:28).기독교에 와서 사랑이 갖는 보편성없이 기독교를 이해하고 해석하는것은 불가능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αγαπη는 기독교 해석의 중심 사상이다.(비교 갈5:14.롬13:10)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윤리적 화합 즉 하나님의 비동기적 사랑에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에 의해서만 성립이 가능한다. 바울의 메세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인간 피차간의 사랑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차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형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건전한 관계일 수 없다. 퍼니쉬에 의하면 이웃사랑은 역시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기독교의 원리적 중심사상이요 기독교 윤리생활의 원칙이다. 그래서 퍼니쉬는 “우리는 바울이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한 모습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삶 전체의 내용과 양식으로 보고 있다고 결론은 내린다”고 하였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모든 삶의 원리를 지배하는 계명의 성취요 은사의 원리요 기독교 해석의 중심이 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αγαπη에 의해서 해석된다. 그에 의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단일화되었고 바울은 이것을 선교를 위한 대전제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롬16:17.갈5:22.빌3:9) 바울이 사용한 믿음은 구약에서 처럼 사람에게 속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이었다. 믿음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행위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αγαπη였다. 그러므로 이αγαπη를 받아들이는것이 믿음이다. 다른 어떤 사건에서도 믿음은 일어날수 없고 다만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편에 보여주신 절대적이고 유일한 αγαπη의 행동이며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사건이다.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사랑을 가능케하는 믿음’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사랑은 기독교의 2대요소이다. 이들은 분리운동과 연합운동을 한다. 바울은 πιστισ 모티브를 그의 구원론의 출발점으로 한다.(엡2:8)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동기이다. 그러나 사랑은 구원의 삶을 유지하게 한다.그는 사랑의 송가 결론부분에서 ‘그런즉 믿음,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말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모두가 영원하지만 바울의 αγαπη는 믿음과 소망을 초월한다. 왜그럴까? 핀들레이에 의하면’ 믿음과 소망은 개인적인것에 관계되고 있는 반면 사랑은 전 기독교 사회를 포괄하고 있기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라고말한다. αγαπη사상은 기독교신학의 기초이므로 영원한 것이다.
3.종말론적인 삶의 윤리
교회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공동체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근거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이 기대에 의하여 그의 삶이 결정된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것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 사는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부터 그리고 그의 주권을 위해 살아야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타자를 위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종말론적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할 때 존재가능하다. 바울은“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하였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은 명백히 종말론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 새로움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오실때 성취되는 단어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시고자 원하는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사43:19). 신약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새 이름과 (계2:17) 새 노래(계5:9)를 주실것이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것이다(계21:5) 따라서 이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 구원에 대한 계시의 영광스러운 종말이며 성경적인 완전한 구속사의 으뜸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을때 가능한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베푸신 사랑안에 거하는 일이다.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그리스도안에서 새것이 되었다는 종말론적인 진술은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Ladd는 말하였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은 더 이상 구시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롬12:2) 하나님께서는 선한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였다.(엡2:10) 새로운 창조안에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이 없고 모두가 하나이다.(엡2:15)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린 새사람이 되었기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새로운 삶은 어떤 삶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이다. 바울은 참된 생활이 없는 곳은 아직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곳이며 “속이는 정욕을 따라 사는 썩어진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옷입지”(엡4:22)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를 옷입는 삶,즉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다. 그럼“그리스도를 옷입는 삶”, 즉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은 어떤 삶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새로운 시대에서의 삶 즉 종말론적인 삶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자기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 자기부정과 인내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와같이 제시된 참된 모방의 삶을 사는것이 바로 제자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바울의 삶의 윤리인 사랑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오신”(엡5:25-27,4:16) 예수의 목적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며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9,10) 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으로써의 αγαπη 에 기인되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인 공동체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윤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Ⅳ. αγαπη와 유사개념의 관계
바울의 사랑은 3중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수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사랑,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요청한다. 물론 이웃의 개념에는 원수사랑의 개념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동체간 지체의 실천적 행위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전개하고자 한다.바울은 하나님과의 종적관계에다 인간의 횡적관계를 긋고 있으며, 선행적인 하나님의 종적사랑이 인간과의 만나는 지점에 인간과 인간간의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의미로써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생한다. 그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 인간에게 전달될때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되어지는 윤리적 변화를수반한다. 따라서 리델보스가 새로운 순종의 영역의 핵심에서 사랑을 놓고 있는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이러한 사랑의 개념은 바울 교훈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3:4-7과 로마서 12:9-21에서 사랑은 여러가지 형태로 전개되고 있으며 일련의 분리된 권면의 형태로써 동일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랑과 동일한 권면의 형태로써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은 화목,섬김,겸손, 용서의 개념이다. 사랑이 공동체내에서 지체간의 윤리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처럼 위의 개념 역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적 성격은 규정한다. 화목,섬김,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다른 사랑의 표현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랑과 제 개념과의 관계성을 살펴봄으로 바울의 사랑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코자 한다.
1. αγαπη와 화목
신약에서 화해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즉 적대와 소원으로부터의 회복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능력안에서 역사된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화해는 십자가를 통해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다. 십자가를 통한 화해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가져오지만 수평적으로는 인간간의 화평을 요구한다. 테일러는 ‘화해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안에서의 응답에 의존한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그것은 교회에서의 교제안에서 오고 다른 사람과의 개인적 단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속받은 신자는 공동체내에서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구속과 화해는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둘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지만 구속은 화해의 삶을 요구한다. 이 화해는 고백으로써가 아니라 생활로써 드러난다. 그래서 오멘은 ‘우리의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화해하는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의무와 규율에 대한 화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오멘에 대하여 테일러는 ‘우리의 현재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사랑의 법인 것을 알고 우리가 발견한 만물이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 화해되는 것이다.’고 한다. 파머 역시 ‘용서와 화해의 경험없이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참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하였다.
이와 같은 화해에 대한 교리는 공동체내에서 사랑에 근거한 화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되었기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써 당연히 요구되는 정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는 화해의 사역이 계속 행해지고 있는 교회안에서의 교제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되는 사람은 점점 더 그의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의해 결정된 인격적 질서위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때 그 사랑으로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파머는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비젼에 의해 날마다 유지되는 신앙생활이다’ 고 하였다. 따라서 화해는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보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복음은 화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렇지면 바울의 신학은 어떠한가? 그의 화해론의 근거와 내용은 무엇이며 이것이 공동체를 보존하는 사랑의 윤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것이 본장의 주제이다. Ladd가 말한 것처럼 화해정신은 바울사상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이 본질적이며 핵심적인 교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 ‘화목’이라는 말은 (καταλαγη의 의미에서) 사회적-사교적 영역에서 유래한 말이고(고전 7:11) 대개 두 당사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바울의 글에서 이 용어는 종종‘원수됨’,‘막힘’(롬5:10,엡2:14,골1:22)과 대조되어 쓰이고 있다. 이것은 또한 적극적 의미에서 ‘평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화목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두고 있으며,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관시킨다. 그리고 ‘화목케 하는 직책’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화목의 근거는 그리스도안에 - 그의 죽음에(롬5:10) ‘그의 십자가에’(엡2:16),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골1:22) -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인간과의 화목을 요청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화목케 하는 삶이 인간들의 삶에 실현될것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케 하시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5:18)라고 바울은 말한다. 즉 화목이라는 말은 원수로서 하나님의 진노아래 사는대신 하나님의 평강과 사랑에 둘러싸이고 그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삶일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안에서 용납하며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화해는 밀접한 관계속에 있으며 공동체안에 있는 지체들의 상호성을 동시에 지배하는 원리이다.
바울은 세계를 화목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인간과 이웃과의 화목,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을 요구한다고 보았다.(엡2.3장) 바울은 특히 에베소서 2장 12-17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관계가 십자가의 사랑안에서 소멸되었다고 보았다. 바울은 그들이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없던 자요 외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가져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또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시고 대립을 제거하시며 폐하여 버리신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함께 십자가에 관련시킴으로써 이제 그리스도의 화목의 상징적 행위를 사랑안에서 세계의 화목을 실현한 것으로 본것이다.
바울의 화목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교회의 일치를 가져오게하며, 성령의 강한 역사로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게 한다. 전술한바와 같이 바울은 주님과 함께하는 교회의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몸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믿는 사람들의 일체성을 가장 중요한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통일성이 가리키는 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몸이란 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자신안에서 한 새로운 사람을 지으셨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써 교회지체의 부분을 대표하고 있으며 교회를 자신속에서 한 새로운 통일체로 연합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전 우주의 질서와 일치를 회복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화목이라는 매개체속에서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는 일치성을 회복하고 보존,성장되는 것이다.
바울이 화해를 십자가 또는 대속과 대등시한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 세가지의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는 초기 서신에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십자가의 도’(고전1:18)라고 했다. 동시에 고린도후서 5:19절에서 그는 동일한 복음을 ‘화목케 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디모데전서에서 그가 부르심을 받은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했다.(2:5.6)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는 그의 소명을‘화목케 하는 직책’(5:18)이라고 했다. 위의 말씀이 대등한 것이라면 ‘화목의 말씀’은 곧 ‘십자가의 도’이고그 본질은 곧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케하는 직책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예수를 대속양으로 우리가운데 보내신것과 그것 때문에 지체들이 서로 화목해야 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직책이고 이것이 곧 복음이다. 이러한 바울의 화목의 복음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혼란가운데 있는 지체를 사랑으로 연결하여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게 하는데 충분했으리라 본다.
2. αγαπη 와 섬김(봉사)
공동체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섬김을 통하여 각지체에게 전달된다.예수께서는 지체간에 서로 사랑할것을 손수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 제자들에게 교훈하셨다. 복음서 후반부의 처음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13:1-11)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2절이하 계속되는 설교에서 예수님의 행위는 지체들 서로의 관계에서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명령되고 있다.(13:14-15)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신데로 사랑안에서 섬기라는 위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Bultmann도 이 공식을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도해석한다. 즉 공동체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받은 것을 행할 의무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고별설교는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기도로써 마무리 되어지는데 그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되게 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다시 그들을 하나되게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간구이다(요 17:26:26).섬김의 모범에서 시작된 고별설교가 사랑안에서의 일치로 요약되는 것이다. 예수는 떠나가지만 제자들이 상호 섬김을 통한 사랑속에 있는 한 예수는 그들안에 머물게 된다.(요17:26)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은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안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제공하는 귀중한 교훈이 되고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사람에게 종이 된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의 자유를 말하면서(고전 10:23, 25-27) 동시에 사랑은 자유에 한계를 지어 놓는다고 하였다.(고전 8:9)즉 사랑은 본질상 언제든지 섬기게 되어 있으며 또한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예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골 3:1)이셨지만 동시에 여자에게 나셨고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그는 자유자이며 동시에 종이셨다(빌 2:6-7). 바울에 의하면 자유는 율법의 주장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롬 8:2-4,갈 4:2-5) 그러나 그순간 동시적으로 “사랑의 계명”으로 해석된 “사랑의 법”에 의하여 이웃에 대한 봉사로 속박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롬 1:1, 갈 1:10, 빌 1:1)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예속시켰다고 말한다.(고전 7:22)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모범을 따라 타인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섬김과 사랑은 일치한다. 바울의 ‘종이되다’(δονγενετε 갈5:13, 고전 9:19), ‘섬기다’(διακονων 롬 15:25),‘자신을 내어주다’(τον δοντοs εαυτον 갈 1:4, 2:20)는 말은 αγαπη 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는퍼니쉬의 주장은 사랑과 섬김의 관계성을 잘 설명한다. 또한 Ladd 는 “사랑은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을 능력이다”라고 보았다. 이는 퍼니쉬와 Ladd 의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게하라”(고전 9:19),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는 바울의 권고를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섬김으로써의 종의 개념은 사랑에 의해 주어진 종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것(갈 5:13)은 오히려 율법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의 요구이다. 따라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은 자유의 포기가 아니라 바로 자유의 활동이다. 이것은 섬김을 통한 사랑이 서로 종노릇하는 가운데 공동체를 세우고 권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전8:1, 롬 14:15)이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남의 유익을 구할것“을 요구한다.(고전 10:24, 13:5)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율법의 요구를 바울은 섬김의 αγαπη 를 통해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섬김의 문제는 바울이 그의 교회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에서도 잘 표현된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자가 되려 함이라”(고후 1:24)고 말한다. 그의 신령한 부르심과 여러가지 은사, 그리고 교회를 세운 수고등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자세로 행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주인이므로 이렇게 할것을 거절하고(고후 4:5)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섬김의 모범대로 그들 가운데 섬김의 정신으로 서 있는 것이다.
바울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일지라도 그는 공동체 지체중에서 영으로 함께 하면서 동일하게 그들을 마음속에 그릴수 있었다.(고전 5:3, 골 2:5)이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바울은 끊임없이 συν (함께,공동-)이라는 접두어를 가진 복합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의 공동체들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일에 그가 함께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바울이 이런식으로자신을 그의 공동체들과 동일시하는 데에는 의미심장한 이유들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겸허히 낮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 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교회에 대한 섬김의 기반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나타난 사랑에 두고 자신을 그의 회심자들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바울의 섬김의 정신은 카리스마의 질서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에 의하면 카리스마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며 특정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와같이 다양한 카리스마의 세계에서도 질서가 요구되어진다. 각자 자기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일치와 질서에 기여토록 되었다. 그래서 “은사는 여려가지나 영은 한분뿐이고 각자에게 영의 계시가 공동이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고전 12:4,7)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한스큉은 “넓은 의미의 카리스마는 개인에 대하여 공동체내의 특정한 봉사활동을 부과하고 동시에 이 봉사활동을 수행할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부름이라”하였다. 그는 이어서 카리스마와 소명과 봉사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며 용어상 교차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고린도전서 12:4-6에서는 카리스마가 봉사와 바뀌어 있고 로마서 11:29와 고린도전서 7:7,17에서는 소명과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봉사의 전제가 되는 것이 카리스마라는 것이다.
은사를 말하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1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왜냐면 은사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이 은사를 통제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은사를 말할 때 그 은사는 교회안에서 지위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요 남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은혜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성령의 첫 열매요 최고의 카리스마이다. 이 카리스마는 십자가와 봉사와 사랑의 길을 요구한다. 한 영안에서 각자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한 주님께 순종하면서 서로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3.αγαπη와 겸손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서 기초가 되는 요소는 ‘겸손’이다. (벧전5:3-6,고전15:10,눅17:10) 고통과 교회내의 적절한 교제(롬12:16,엡4:2,빌2:2,골3:12)가 겸손한 마음의 특징을 이룬다. 이런겸손은 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된 인간에게 자신의 몸을 비하시킨 사건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오히려 자기를 비어 ... 사람과 같이 되었고 ...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이라고 말한다.
빌립보서 2장6-8절은 바울에게 있어서 성육신의 개념이 αγαπη motif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셔서 인간이 하나님과 사귈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이 성육신의 계시, 겸허의 계시가 하나님의 αγαπη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겸손과 αγαπη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레함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라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αγαπη를 깨달은 순간부터 그가 이미 소유한것에 αγαπη를 새로운 요소로써 단순히 첨가하고 있다. 즉αγαπη를 πιατιs의 골격에 첨가하여 적용시켰다.(갈5:16) 바울은 두가지 사실을 그의 경험을 통해 명백히 하고 있다. 그것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는 것이다. πιατιs가 그 교만을 제거할수 없다.여기서 요구되는것이 겸손이다. 교만이 치료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려오시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겸손만이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 사이를 다리놓아 줄수 있다.(엡2:14-16) 이 겸손의 표본은 하나님의αγαπη의 발로였고 αγαπη만이 하나님과 격리된 인간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 서 바울은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라고 말한다.
바울은 αγαπη표현방법의 최고적 방법으로 십자가를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알게 한다. 요한의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3:16)라는 말을 의미한다. 즉 바울은 ‘사랑의 하나님’(고후13:11)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살전4:19)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αγαπη는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이라는 삶의 양식을 요구한다. αγαπη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가 말한 αγαπη는 있음(is)이고 행위(does)이다’라는말은 겸손의 양태로 나타내는 사랑의 존재양식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의 ’αγαπη의 특수한 현현 양식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의 겸허는 그리스도안에 있는자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빌2:3) 이것은 “존경하므로 서로를 앞세우는일”(롬12:10)에 일치시키면서 묘사된다. 이런 겸손은 정신적인 상태로,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아닌 공동체내에서 지체의 지체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바울의 겸손은 그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그들에 거슬려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각각 자기일만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빌2:4)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αγαπη의 양식이다. “부요한 자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고후8:9) 하나님의 자기겸허는 하나님 사랑의 최고표현이며 공동체를 지배하는 αγαπη 의 또다른 표현이다.
실상 겸손이란 개념은 특별히 기독교적 내용을 지니며(빌2:3,골3:12)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우선적 의미로 산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구약에서도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의 자아 겸비적 사랑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빌2:3),“높은데 마음을 두지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함”(롬12:16) “존경하기는 서로 먼저 함”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이러한 겸손은 그리스도가 자기를 내어주심에 근거한 교회안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과 관련되어 언급되었다. 겸손의 개념과 반대되는 용어는 ‘높은 마음’(롬11:20),‘기만’,‘이기심’(빌2:3), ‘허식’등이다. 이런모든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들이며 겸손은 이에 대조되는 말로써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우는 용어인 것이다.
겸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온유이다. 이러한 서로간의 사랑에 관한 명확성 역시 그리스도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후10:1) 이것은 공동체내에서 범죄한 자들에 대한 자만심을 가지지않고 그들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표현된다.(갈6:1) 이런 온유한 심령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런 겸손은 ‘사랑의 송가’(고전13장)에서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것으로 표현된다.
위에서 살핀것처럼 겸손은 대체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표현방법이다. 그리고 바울에게 있어서 겸손은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상호관계의 관점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공동체 형성의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다.
4. αγαπη와 εν Χριστω
εν Χριστω는 바울신학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으로 ‘성령안에서’ 또는 ‘사랑안에서’ 라는 말과 상보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안에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의식적인 교제를 가르친다. 그리스도안에는 권면이 있으며 (빌2:1) 겸손한 봉사가 있다.(빌2:5)하나님의 평강은 그리스도안에 있는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빌4:7)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끊을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롬8:39) 니그렌에 의하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난다. 그는 실제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을 만난다. 구속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삶의 조건으로부터 자유케하는 방법을 구성해 줌으로 그와의 교제를 붙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사랑안에서 인간조건속으로 들어오셔서 낮추심으로 인간과 교제를 형성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이는 그리스도 사랑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보이시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εν Χριστω와 εν αγαπη 는 일치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라는 개념을 살필때 먼저 바울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개념을 주목해야한다. 새로운 피조물의 변화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을 때 일어나게된다(고후5:17). 이 문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재적인 근본적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인간예수의 죽음, 그 이상의것을 보고있다. 그는 악한영의 지배를 받는 옛 피조물의 죽음뿐만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새로운 피조물의 출현을 본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여러가지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엡1:4) 미리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셨다.(엡1:7) 구속하심(롬3:24)과 거룩하게 하심(고전1:2)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다 이 세상과의 화해 역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다(고후 5:19).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가깝게 될 수있다. (엡2:12) 죄사함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다.(엡 :32)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새롭게 하였다. 그러나 역시 이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것 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삶이다.”(엡5: 2 ) 이 말씀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이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εν Χριστω와 εν αγαπη가 바울에게서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αγαπη 는 “그리스도안에”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이 αγαπη 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다.
거쓰리는 “그리스도 안에”는 실제적으로 교회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것 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공동체의 형성에 보편적인 기초를 준것으로 보았고 각 신자들은 공동체와 동일시 되어진다.(고전12:13)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는 모든 지체가 한몸이 되며(롬12:5) 모든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다(갈3:28).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것없이 모두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엡3:6) 이와 같은 구절가운데는 공통적인 강조점이 드러나고 있다. 신자들은 개개인으로 뿐만아니라 모두가 같은 백성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사랑안에 함께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지체들에게 주어지는 원리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과 교회가 동일시될때, 교회는 보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삶을 나누는 신자들의 모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삶의 원리와 새로운 도덕사상과 새로운 사상체계를 갖추어야한다. 새로운 삶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인간과 연합했듯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래서 바울은“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다”(롬12:5),“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입니다”(갈3:28)라고 연합을 말한다. 따라서 사랑이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우는 원리라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역시 공동체를 연합시키고 일치시키는 바울의 중요한 개념인것이다.
αγαπη와 εν Χριστω 의 관계성은 바울서신에 이것들이 쓰여진 실례를 비교해 볼때 양자의 일치성이 현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실례를 몇가지 찿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안에서 행하라”(골2:6)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전16:14)의 관계성이다. 그리고 “그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라”(골2:7)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의 관계성을 들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롬12:5)와 “사랑안에서 연합하며”(골2:2)의 관계성을 볼 수 있고“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롬13:14,갈3:27)과 “하나님의.... 사랑하신자처럼....옷입고”(골3:12)를 들수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는것이 사랑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공동체의 신비한 연합을 가져오며 이것을 또한 지체들을 한몸으로 묶어주는 원리가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공동체를 보존하고 연합하는 원리로써 사랑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Ⅴ.Paul αγαπη 의 근거
1.하나님 사랑
바울의 사랑의 근거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추적하고자 할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왜냐면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인사말과 맺는말에 ‘은혜’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은혜는 헬라어의 인사어에서 확장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긍휼의 개념이 첨가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신학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성이다.
은혜의 교리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이다. 더우기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실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서 요약될수 있다. 바울에게는 은혜라는 말이 직접적으로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암시적으로건(하나님 은혜의 집행자로써) 압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것이 성숙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은혜를 나타내주는 구약의 두단어‘헨’( )과 ‘헤세드’( ) 에서 그리고 바울이 사용한 ‘카리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소서”(출33:13) “내가 너를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노라 그러므로 인자함으로 내가 너를 인도하였다”(렘31:3) 여기서 구약의‘헨’은 은총으로,‘헤세도’는 인자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무리에게 자비하심으로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이나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5:20)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은혜의 교리가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다. 특히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두드러진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롬5:15)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은혜가 율법보다 우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롬6:14),로마서9-11장에서 이스라엘의 위치에 대해서 논하면서 남은자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는자’(롬11:5)라고 말한다.이런 은혜의 교리는 고린도서에서도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1장 4절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변과 지식을 풍성케 하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 자신의 경험이 그의 사역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있다.(고전15:10) 그는 또한 그의 행위의 근거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세상의 지식을 비교하고 있다.(고후1:12) 그는 그의 사역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확장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고후4:15) 그는 은혜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위하여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은혜의 행위임을 보여주고 있다.(고후8:9) 인간의 필요를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강하게 증거되고 있다.(고후9:14,12:9) 이와 같이 그는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표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바울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댸한 동일한 신뢰의 형태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부르시는 것은 은혜를 통해서이다.(갈1:6,15) 이것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엡1:6-7) 다른 사람들과도 서로 나눌수 있는 것이다.(빌1:7) 골로새서에서 은혜는 ‘진리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며,(골1:5)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갈5:4)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인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불러 모은 백성이라고 본다.(롬1:6.8:26) 하나님의 백성과 또 이 백성에 속하는 것의 전체적 구성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택하심의 특성에 의거한다. 그 므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참으로 만인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교회의 출발점은 개인이 아닌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교회는 새로운 백성이 된다. 하나님은 이 새로운 백성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의거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기독교인의 생활과 그 공동체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여 얻게된 총체적 자세이다"
바울의 사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령을 무시하고 바울의 기독교를 설명하려 하는것은 전기 없는 현대문명을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헌터는 말하였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성령의 영역, 즉 성령의 역사하심 아래 두고 있다. 성령은 종말이 실제적으로 이 세대속에 도래해 들어 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성령이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하시는 현존이라고 하는것이 바울의 견해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은바 되니라“.(롬5:5) ”형제들아 내가 ...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롬15:30)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사랑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역사안에서 활동하고 능력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2.예수의 사랑
바울의 사상은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점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다메섹 도상의 만남은 바울의 αγαπη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하게 하였고 그 후 바울의 일관성있는 중심은 그리스도 사건의 십자가 해석에 의해 구성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의 원동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신‘(엡5:25-26,4:16) 예수의 목적과 율법의 완성으로써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에 기인한다. 메이첸은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증거는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의 종교라고 전제하면서 “바울의 예수에 댸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사랑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 존재한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가 말한 사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기초를 두고 있다.‘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셨다’(갈2:20)는 말씀에 바울종교의 기초가 있다” 고보았다.
물론 신학자들 사이에는 바울과 예수의 관계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쿰멜은 ‘신학자 바울이 단순한 예수의 종교를 부패시켰다’ 고보았다. 또한 그는 역사적 비평방법을 사용하여 유대주의의 전체적 구성안에 있는 예수와 예수로부터 결별된 바울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와의 역사적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었고(롬8:11,6:9.고전15:3-8,12:9), 그는“다른 예수를 전파하지 않았고”(고후11:4),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였고”(고전1:23)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인간예수와 부활하신 주를 동일시 하였고 그의 멧세지가 역사적 예수의 활동과 메세지를 인용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의 가르침은 새로운 시작으로써 자신의 사상에 기인한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도(롬11:13,고전9:2,롬1:1,고후1:1,엡1:1,딤전1:1,딤후1:1)와 종(롬1:1,빌1:1,딛1:1)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의 계속이었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성 문제는 αγαπη개념에서도 찾을수 있다. 니그렌은 말하기를 “ αγαπη이념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중심점이었으며(마22:37-40)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동기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윤리이고 새 계명이다.(요13:34,요일2:7,요이5) 만약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종교가 다르다면 αγαπη동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예수의 αγαπη동기가 살아남아 있다.(롬13:9-10) 그러므로 바울은 새로운 종교의 수립자가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도요 종이다. 바울의 기독교에 αγαπη동기가 있다면 바울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예수 종교와의 계속이다” 라 했다.
이 문제는 예수의 “두가지 계명”(막12:28-34,마22:34-40,눅10:25-37)과 바울의 이웃사랑의 연관성에서 설명될수 있다. 예수께 던진 서기관의 질문은 ‘첫째’에 관한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계명을 동시에말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이에서”(τουτων 막12:31)이란 말을 사용함으로 연속적으로 첫째와 둘째를 말하여 각 계명의 독특한 동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둘째계명은 두번째고 중요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서기관의 질문에 관하여 최고계명을 연달아 말한것의 둘째인 것이다. 마 의 본문에서는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22:40)라고 말하고 있다.바울은 이웃사랑에 대해 성령의 은사인 사랑의 윤리가 본질적으로 율법의 성취라고 보았다. 그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부여하며(갈5:14,롬13:8-9) “온 율법은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어졌다”(갈5:14)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과 일치성을 갖는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는것을 원수 사랑에까지 확대시킨다.즉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 하는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자를 위해 기도하라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5:43-46, 눅6:27.32.35)라고 말한다. 이러한 교훈은 바울서신에서도 발견된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또한 예수는 핍박 당하는자를 기꺼이 ‘문안’할것을 말한다.(마5:47) 그리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것”(마5:44)을 말한다. 이에 바울은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의 사랑의 계명에 기초하여 예수와의 일치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의 αγαπη motif 에 차이가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강조하는 것에 비하여 바울은 예수의 사랑을 강조한다. 예수가 천국의 복음을 강조하는것에 비하여 바울은 십자가 종교의 중심을 강조한다. 그래서 브레데는 “예수가 유대 경건의 가장 고상한 유형으로부터 떨어져 선것보다 바울은 그 예수에서 더 멀리 떨어져 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변질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재해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브레데의 말처럼 바울은 최초로 “구속의 종교로써 기독교를 수립한 기독교의 제2의 창시자”인 것이다.
3.요한의 사랑
요한의 윤리에는 하나님 본성의 핵심이 되고 있는 사랑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사랑이라는 자원은 예수를 통해 공동체에 구현된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αγαπη를 하나님의 속성이며(요일4:7)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이며(요3:16) 이에 대한 사람의 응답으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았다. αγαπη는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으로써 예수에게서 실현 완성되었고,이에 대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 응답하는 유일한 길이 이웃에 대한 희생적 사랑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바울의 사랑의 근거를 추적하면서 예수의 열두제자중 하나이며 사랑의 사도로 대변되는 요한의 사랑과 바울의 사랑과의 관련성과 차이점을 점검해 보는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먼저 바울은 사랑을“그리스도의 법”(갈6:2,고전9:1),“율법의 완성”(롬13:10)으로 보았고 요한은 사랑을 새 계명(요13:34)으로 보았다는데서 일치점을 갖는다. 바울은 온 율법은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어졌다(갈5:14)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전9:1)는 말을 사용하고있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포한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법은 “주께받은 계명” 곧‘하나님을 사랑하는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요일4:21)이다. 요한은 이것을‘새계명’이라 했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이거나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적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과도 상통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의 객관적인 사귐인 동시에 항구적인 실제로서 사랑의 지식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뿌리요 기초(엡3:18-19)로 보았다.
물론 불트만은 바울과 요한과의 관계는 초대 기독교신학의 직선적 발전도식에 의해 이루어질수 없는 전혀 다른 방향들을 달리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바울과 요한 사이에는 종교사적 분위기나 기독교의 공동용어 즉 영원한 생명(요3:15.36,롬5:21),기쁨(요17:13,롬14:17),평화(요14:17),보내다(요3:17,갈4:4)등의 사용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일치점이 있으나 특수한 바울적 용어 즉 육 - 영, 몸,혼,이성,자랑,염려,양심,적 등이나 구원사적인 바울의 용어 즉 하나님의 의, 율법과 은혜 등이나 바울의 구원사적인 관점들이 요한에게는 전혀 없다고 보았다. “요한은 바울학파에 속하지 않고 바울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독창적 인물이고 신학적 분위기에 있어서 다른 분위기에 서 있다 ”고 보았다.
그러나 십자가와 하나님의 αγαπη의 인증은 바울과 요한이 동일하다. 바울의 αγαπη는 본질적으로 십자가의 αγαπη이고 (빌2:8), 요한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가장 심오한 신비를 나타내고 있는 십자가이다. 요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αγαπη를 배운다(요일3:16).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아들을 보내셨다”(요일4:6)는 사실에 존재한다. 그리고 예수가“세상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요 13:1)는 사실에 전제하고 있다. 바울에게와 같이 요한에게서도 그리스도 사랑의 사역의 주체는 행위하시는 하나님이다.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상과 αγαπη사상은 거의 동일시된다. 즉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롬5:18),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αγαπη는 인간의 사랑을 부른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다” (요일4:19)고 한다. 요한의 이 두 사랑의 방향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서로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찌라도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속한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4::20-21). 형제사랑은 바울에게 있어서 역시 하나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직접관련된다. (요일 5:1, 3:16, 4:11)
그러나 바울과 요한의 사랑에 있어서 차이점은 형제사랑과 이웃 사랑의 개념에서 드러난다. 요한은 이웃사랑과 형제사랑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즉 αγαπη는 사랑의 교제인데 요한에게는 αγαπη사랑의 교제에 제한이 있다. 그가 말하는 형제는 하나님안에서 연합한 제자된 형제이다. 이것은 밖에 있는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13:35) 세상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한정된다.(요14:21-24,17:6-9,21:7)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한정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이웃사랑에는 원수사랑도 포함된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정직하게 계승한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핍박하는자를 위해 기도하라”(마5:43-46)고 원수 사랑을 제시한것처럼 바울도 “너희를 핍박하는자를 축복하고......”(롬12:14) “후욕을 당한후 축복하고.....”라고 확대되어진 이웃사랑의 보편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과 요한의 αγαπη이념은 일치점을 내포하면서도 성격상 차이점이 있다. 요한의 사랑은 αγαπη가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αγαπη이념을 약화시킨다. 니그렌에 의하면 요한의 αγαπη 이념은 기독교의 사랑의 이념에 변천을 초래하였다. 곧 기독교 사랑의 이념이 오직 αγαπη 모니브로써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ερωs 와 αγαπη 로써 결정되게 되었다. 고보았다. 이것은 에로스와 아가페의 이원론적 혼합으로 기독교의 αγαπη의 절대성을 파괴할 위험성을 가져오게 된다.따라서 하퍼와 같은 사람은 ‘예수가 명백히 가르친, 친구와 아울러 원수도 사랑하라는 사랑의 보편적 영역이 요한에 의해 심각하게 제한되었으며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랑이 그리스도인 사회의 사랑으로 좁혀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과 요한의 사랑을 구별짖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Ⅴ. 결 론
바울의 서신은 일찌기‘십자가의 신학’‘은총의신학’으로 파악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속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음은 의심할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바 되었으며(롬5:6-8),그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고 화해시키는 일을 한다(롬5:9) 이와 같은 신적인 사랑은 윤리적인 명령형이 되어 이웃사랑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의 사랑은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행위인 동시에 우리중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교회는 우리중에 작용하는 사랑의 힘이 이웃사랑으로 실천되는 장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가 사랑안에서 보존되고 성장하기를 지속적으로 권면한다. 이는 바울서신의 대부분이 지역에 흩어져있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들이라는 점에서 증명된다.서신의 내용들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그문제의 해결방안, 공동체의 성장방안 그리고 공동체내에서 각지체들의 윤리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는 그가 세운 교회이든 아니든지 간에 공동체가 파괴 되고 지체간에 분쟁이 있는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계속서신을 보내면서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연합하여 공동체를 보존하고 성장시킬것을 권면하고 있다.
바울이 생각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수평적인 사랑의 연합을 한 공동체이다.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의 영역으로 수용해야 한다. 사랑은 다양한 구성원들을 연합과 일치로 이끈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은 이미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을 요청한다는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공동체를 지배하는 원리이며, 공동체를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윤리가 된다.
바울은 이사랑의 윤리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추한다고 말하고있다. 그에 의하면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희생케하므로 전혀 무가치한 인간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롬5:8이하) 이사랑에 의해 우리는 의롭게되었고 하나님과 화해한자로써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 공동체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신목적은 개인적인 차원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사회적인 영역을 의미하고 있다. 구원받은 개개인은 그분께 속하여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영역에서 하나를 이루워야한다.
바울이 공동체의 이상으로써 다양성속의 연합, 연합에 따르는 상호의존성,그리고 연합과 의존의 근거가 사랑이라는것을 이미 언급하였다. 이런 사랑은 그리스도의 수직적 사랑이 그 사랑을 입을 사람들에게 있어 수평적 사랑으로 확대될 때 참의미를 부여받는다. 즉 선행적인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이 인간과 만나는 지점에서 이웃사랑으로 실천이 이루어질때 사랑의 참가치가 부여된다.
수평적 이웃사랑은 공동체를 보존하는 중요한 윤리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들인 분쟁, 편랑. 이기심. 육신의일들이 있는곳에 화목,섬김, 겸손, 용서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위의 네 개념은 공동체내에서 지체간의 윤리적 성격을 규정할뿐만아니라,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적 요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하나님과의 화목,겸손, 섬김, 용서를 보여주셨다. 따라서 바울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내에서 그러한 삶을 살것을 요청한다.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αγαπη 의 겸허가 바로 공동체를 지배하는 윤리가 될것을 강조한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위의 사랑은 다른 덕목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접하게 된 인간의 총체적 삶의 자세이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삶속에서 날마다 재현되어야 할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며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가는 것이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하다. 이웃과의 개인적인 관계뿐만아니라, 공동체 전체로 퍼져 지체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원리가 되고 공동체를 보존, 발전시키는 윤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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