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이후의 초대기독교사 (유대적성향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은바리라이프 2009. 9. 4. 18:38

바울이후의 초대기독교사 (유대적성향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바울은 '바울의 연대기'에서 말한 것 처럼 60년대 초에 순교합니다. 따라고 '바울이후의 기독교사'라고 할 때, 대략 60년대에서 부터, 예루살렘 성전멸망 (70년)을 거치면서 기독교가 어떻게 변화, 발전, 전파되는지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이 역사를 이방인 중심의 헬라기독교와 유대인 중심이며 율법의 유효성을 계속 고수하는 유대기독교로 나누어 관찰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행, 바울의 서신 등을 통해 헬라 중심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또 앞으로도 다룰 기회가 많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유대기독교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겠습니다.

50-60년대

이때 팔레스타인 내에서는 반로마적인 저항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도 이 영향을 받습니다. 행 12,1이하에 나오는 헤롯왕에 의한 (정확히 말하면, 아그립바 1세, 41-44년 통치) 요한의 형제 야교보의 처형, 베드로의 감금등은 비록 40년대의 사건이긴 하지만 이러한 당시 사회분위기를 반영합니다.
혹자는 이사건을 계기로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봅니다. 그리고 갈 2장에서 초대교회의 기둥 중의 하나로 다시 등장하는데 (9절에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이는 사도회의를 계기로 잠시 예루살렘에 올라와 머문것이라고 합니다. 이 주장이 맞는지 여부는 판단보류하고 남겨 놓습니다.
'교회의 기둥'의 순서에 야고보가 게바 (베드로)보다 먼저 나오는 데,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교회의 주도권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잡고있었던 것 같다. 야고보는 4 복음서에서 예수의 집안을 언급하는 구절에서 (막 6,3이하 그리고 병행구) 만 나오다가 고전 15,7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난 사람들의 리스트에 등장하고 갈 2에 '교회의 기둥'에 첫 번째로 거명되는 것을 보아,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적극적으로 예수운동에 가담하지 않다가 예수님 사후, 예수부활의 사건을 통해 적극적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활동했고 예수의 혈육이자, 친형제라는 이유로 예루살렘교회를 이끄는 지위에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
40년대에 베드로만 예루살렘에서 박해받았고,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기독교인들과 공동식사를 하다가 다시 이방인, 유대인으로 나누어 식사를 하게되는 것을 보면 (갈 2,11이하 - 유대인들은 정결법에 따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믿음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같다고 보고 함께 교회 안에서 공동식사를 하도록 했다) 야고보의 경향은 복음을 믿되 율법도 함께 지켜야 된다는 견해을 (유대기독교의 입장) 가진 것 같다 (이런 이유로 40년 대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지 않는다. 물론 그도 대제사장 한나스에 의해 62년 처형될 때 죄목이 율법을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요세프스의 Ant 20,200이하 참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이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 베드로가 아니라 (갈 2,11이하 참고) 야고보가 40-50년 대에 예루살렘 교회의 실권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츄해 볼 때,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위에서 말한 팔레스타인의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전반적으로 (특별히 이방인에게 율법이 계속 유효한 가의 문제에 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50년대의 분위기를 알려면 요세프스의 유대전쟁사 2,254이하를 참조).

유대전쟁 (66-70) 이후의 유대기독교

이 부문은 우선 간략하게 설명한 초대교회사 '신약관련역사(개요)'중 "유대전쟁과 성전멸망" 항목 참조하십시오.

영향력 감소
성전멸망은 유대교에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교 성립은 성전멸망이후입니다. 하지만 편의상 사용합니다) 그랬던 것 처럼,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한 유대기독교에 큰 타격을 줍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예언에 따르면 장차 메시아가, 즉 그리스도가 재림할 곳이요 (롬 9,33; 11,26), 여기에서 복음이 시작되기에 (롬 15,19), 이방인은 예루살렘에 복음의 빚진 자들 (롬 15,27)로 이해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초대기독교사 모태요, 출발점이라고, 특별히 예루살렘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주로 유대인기독교인) 생각하였다. 실제로 행의 여러 기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교회에 대해 정도에 따라서는 비판적이였던 바울의 서신에서도 예루살렘 교회가 당시 초대기독교사에서 가진 권위가 (갈 2,11이하) 확인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의 함락은 예루살렘교회가 가진 위의 생각이 잘못이였다는 쪽으로 이끌어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 공동체가 이전에 가졌던 초대기독교 내에서의 위상이나 영향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그러나 성전 멸망에도 불구, 예루살렘 내에 유대기독교가 남아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더 이상 멸망 전의 예루살렘교회가 아니였다. 주 세력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3,5,3의 전설같은 이야기에 의하면 성전 멸망 직전 계시에 의해 펠라로 (요단 동편의 헬라도시) 옮겼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초대교회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막 13,14이하에 그러한 암시가 엿보임).

몇가지 주의할 점
그렇다고 해서 유대기독교가 전멸했다고 말해서는 않된다. 우리는 유대기독교와 관련해서 몇가지 편견을 갖기 쉽다.
즉,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부 이래로 (이레네우스 이래로) 바울신학의 영향을 받아, '율법에서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방기독교가 옳다고 보고, 유대기독교를 율법을 옹호하는 유대교의 한 갈래로 보면서 이들을 이단시하거나 최소한 색안경을 쓰고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혹은 보통 성서에 있는 자료만으로 초대기독교를 재구성하려하면서 유대기독교의 존재를 무시해버리는 잘못에 빠지기도 한다 (특별히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 만을 가지고). 이 결과 기독교사는 현저히 축소되어 버린다. 즉,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기독교와 바울 중심의 헬라기독교 간의 대립 (바울) 내지 협력을 통해 (행)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로마 쪽으로 진출, 확장되는 작은 그림을 그리기면서 유대전쟁 이후에 유대기독교는 존재가 미미하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헬라쪽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은 특별히 바울의 지휘 하에서 만 (행의 기본구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 중 한 부분이다. 유대 명절에 (특별히 유월절에) 당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제사들 드리러, 혹은 순례하러 예루살렘에 왔다. 이들은 여기서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통하던 아니면 소문으로 듣던 간에, 그리고 예루살렘에 초대교회가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언어의 차이로 아람어 중심으로 예배드리던 교회와 헬라어로 예배드리던 교회가 -엄밀히 말하면 개인 집, 한번에 예배드릴 수 있는 인원 20-30명에 불과- 각각 여러개 있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각자 살던 곳으로 가서 이 복음을 전한다. (참고 행 11,19이하 "때에 ...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그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 주 예수를 전파하니..."). 혹은 각 헬라교회나 예루살렘교회도 전도자를 파송한다 (행 11,27; 갈 2,11이하; 행 13,1이하). 즉, 복음전파는 동시다발적이며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의거) 유대기독교와 이방인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만 생각해서도 않된다. (바울에 의하면 유대적 기독교는 복음에 의해 자유인이 된 이방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속박시키는 것이다 - 예: "...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갈 2,4,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그러나 마태복음의 "이 악한 자들을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이들, 즉 유대인들)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농부들에게 (즉 이방인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마 21,41,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세례를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28,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5,17,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버리고 또 그같이 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5,19의 두가지 견해는 (적어도 바울의 경우를 놓고 볼 때) 서로 상치되는 이야기가 같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율법준수와 이방인이 마태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그리고 이방인을 이미 그 구성원으로 상정하면서도 율법과 복음에 대해 어떤 갈등도 내비치지 않는 도마복음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즉, 바울적인 잣대로 만 유대기독교를 보면 이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도 그러하거니와 초대교회사을 서술할 때도 편협되고 제한된 그림을 그릴 수 밖게 없게 된다.

유대교와의 관계
초대교회사 '신약관련역사(개요)'중 "바리새인 중심으로 재편된 유대교" 항목에서 일부 밝힌 대로 성전멸망은 당시 유대교에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위에서 밝혔듯이 엄밀한 의미의 유대교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멸망전까지 유대교는 성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느슨한 연계상태였고 내부에 다양한 분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등등)
성전이 파괴는 지금까지 유대교를 결집시켜주던 핵심이 사라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를 잇는 정신적인 지주로 경전을 정합니다. (90년 지중해 연안의 도시 얌니아에서 구약이 확정됩니다) 그리고 성직자계급의 사두개인들 대신 평신도들인 바리새인들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니라 경전이요, 그 경전을 어떻게 해석하는냐 였습니다. 대표적인 학파로 개방적인 힐렐과 엄격한 샴마아이 두 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내의 이단들을 척결, 청소하는 작업이 벌어집니다.
이와 관련 아주 유용한 자료가 하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드렸던 18개로 이루어진 기도문 중에 12번 째 기도문: "변절자에게 희망이 없게하시고 폭력의 나라를 우리의 시대에 주님께서 근절하소서. 나사렛인과 이단자들은 이 순간 죽게하소서. 그들은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게 하시고 의인과 함께 계수되지 말게 하소서. 폭력을 행하는 자를 무릎꿇게 하시는 야훼여 찬양을 받으소서"
이런 와중에 지금까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유대교 내에 있었던 유대기독교는 (바리새인 주도하의) 유대교에서 쫓겨납니다. '마태복음 연재'에서 여러차례 밝힌 것 처럼 마태복음 내에서 유독 예수와 바리새인과의 논쟁이 많은 것은 마태의 공동체가 그런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도 바리새인 중심으로 재편되어가는 성전멸망이후의 유대교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9,2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12,4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16,2).
즉, 전체적으로 볼 때 율법준수의 문제에 개방적이였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나 헬라지역에 사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으로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혹은,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엄격하게 정결법이나 율법조항들을 준수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주위환경은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방지역이였고 따라서 자의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혹은 유대교에 의한 박해로 (참고: 스데반의 박해) 유대교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유대기독교는 율법에 충실했고 따라서 다양한 분파를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내에 주후 70년 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성전 멸망이후 바리새인들에 의해 유대교가 강경노선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 믿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사교로 몰려 유대교에서 추방당한다.

유대기독교의 존재
사도행전은 서방쪽으로 (즉 로마쪽으로) 진출하는 바울 중심의 헬라기독교에 관해서만 다루며 (요단) 동쪽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이 회심후에 아라비아로 갔다는 사실은 [갈 1,17] 비록 바울적인 공동체이긴 하겠만 아라비아에도 교회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게한다. -단, 바울이 거기서 선교를 했다는 가정하에).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라아에 초기 단계부터 유대적기독교적인 성향의 공동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유대적인 경향의 마태복음,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도 (비록 전적으로 유대기독교을 대변한다고 볼수는 없지만) 유대기독교가 존속했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다.
그리고 150년 경의 주교 Papias von Hierapolis에 의하면 "선교사 빌립은 소아시아에 정착했는데 이는 예루살렘교회에 속한 이가 소아시아로 온 것이다"라는 설명이나 교부들의 글에서 언급되는 "나사렛복음서", "에비온복음서" 혹은 "히브리복음서"등도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계속적인 존재을 시사한다.

예루살렘 내의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최후
초대 교부 헤게쉽의 글에 의하면 (대략 180년 경 이 글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인용됨 교회사 3,11) 야고보의 처형이후 예수의 친척인 클로파스의 아들 시몬이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 된다. 그는 이 공동체를 펠라로 옮겼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온다.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 (81-96년) 예수의 친척들은 황제로부터 심문을 받았으나 무죄로 판명받고 풀려 나온다 (교회사 3,10). 시몬은 107년 유대교의 한 분파이며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된다. 이러한 헤게쉽의 증언이 역사적인 사실인 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와 혈연관계에 있는 이들이 계속 이 공동체의 지도자였다는 점과 바 코바의 난 까지(팔레스타인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항거 115년 경 발생) 이 공동체가 계속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점이다. 유대기독교인들은 바 코바에 의해 이미 박해받았음으로 이 항거 운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 코바의 항거 이후 아에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이 거주하는 것이 전면 금지된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도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인종적 테러와 성서적 화해의 지평

서중석(연세대학교 교수, 신과대학장)


I.

크리스천에게 '복음'이라는 용어만큼 사용빈도가 높은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의 이해에 따르면, 그것은 이방인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롬1:15∼17; 15:15∼16),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는 것이다(롬3:22, 29∼30; 갈3:28). 이 내용은 이런 표어로 요약될 수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바울 스스로가 자신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선언했다(고전 9:22).

9•11 뉴욕 테러 사건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도출되고 있다. 그 견해들은 어느 쪽이 옳으냐의 문제에 관한 한, 결국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미국은 절대적으로 옳고, 테러국은 악의 세력이다. 둘째, 미국은 악의 세력이고, 미국에 대한 테러는 지하드(聖戰)의 일환이다. 셋째, 미국 역시 테러 국가이기에 이번 전쟁은 테러국 대 테러국의 싸움이다. 이중에 자신을 선으로 내세우고 상대를 악으로 매도하는 입장들은 그 매도의 주체가 미국이든 아프가니스탄이든 결국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셈이 될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든 개인이든 한 쪽만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다른 쪽은 절대적으로 불의하다고 판정할 수 없다. 양쪽이 모두 선악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세 가지 견해 중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 번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MIT 교수인 노암 촘스키의 견해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동안 수많은 국제 분쟁 관련 사건들, 가령, 발칸반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대학살, 콜롬비아, 쿠바, 이라크 사태들은 국제기구에 의해 조정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힘에 의해 왜곡되어 결국 궁극적 해결보다는 또 다른 문제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그러한 국제 분쟁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자신만은 유엔헌장, 국제사법재판소 등의 각종 규범들로부터 면제되는 것처럼 행동해왔다. 한 예로, 1975년 인도네시아가 미국의 지원 아래 동티모르를 침공했을 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즉각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미국의 유엔 대사 모이니한은 이를 무효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돌과 전쟁의 와중에서 크리스천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는가? 기본적으로 그 관심의 방향은 개 교회의 이익이나 교단의 이익을 넘어서서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곧, 인종과 인종, 종교와 종교의 갈등을 화해로 이끌고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주도해 나가야 하며, 그 신학적, 성서적 근거를 착실히 다져나가는 데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종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일이 필요하다. 특별히 인종적 고정관념,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우선 자신들이 '믿고 있는' 소위 '구약성경'을 유일한 성경으로 인식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극복해야 한다.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양면성이 있다.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일들에 관해서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우호적이다.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마르크스 등 인류 역사의 거대한 인물들이 유대인이었다는 점이 부각될 때에는 고개를 호의적으로 끄덕인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삼분의 일 이상이 유대인이라는 점이 거론될 때는 신명이 난다.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보도될 때마다 이스라엘 편이 되어 사태를 주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일에 관한 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냉담한 시각을 유지한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자손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의 후예라는 것이다.

히틀러 살인 집단이 유대인 6백만 명을 대량학살할 때, 기독교인들의 소극성, 무관심, 중립성이 그 살인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원조가 됐다는 점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신학자들도 히틀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는 점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루드비히 뮐러 감독이라든지 비텐베르크 신학대학 학장을 비롯한 많은 목회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히틀러에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나치스 신학을 표방하고, 그 속에서 나치스 교회론, 나치스 기독론, 나치스 기독교 윤리 등을 세부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구약성서를 유대인들의 책이라 해서 아예 인정하지 않았고, 신약성서도 그 안에 담긴 유대교적 요소는 모두 제거시키려고 애썼다. 물론 틸리히나 바르트 또는 본회퍼처럼 히틀러에 항거한 신학자들도 있었으나, 그 수는 살인을 직접, 간접으로 지원한 수에 비하면 대단히 미미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미국의 태도도 대단히 유동적이다. 이번 뉴욕 테러 사건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들어 준 데 대한 이슬람의 분노의 폭발이다. 미국은 이것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안간힘을 다하고, 테러국은 그것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임을 주지시키려고 애쓴다. 아무튼 장차 미국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태풍의 눈이 될 것이다. 물론 앞으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우호적 입장은 변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미국이 언제나 유대인들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경제력이 미미했던 히틀러 시대에 유대인들에 대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미국의 태도는 방조 그 자체였다.

II.

유대인들에 대한 타 인종의 고정관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동시에 타 인종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정관념도 수정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공식을 현실에 대입한다면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인을 이해하기 위해 다소 팔레스타인의 입장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은 지 2,000년 만에 나라를 다시 되찾은 끈질긴 민족성을 가진 국가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탄을 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한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그 동안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권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부터 1,600여 년 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정복했던 만주 일대가 과거 우리 땅이었다고 이제 내놓으라고 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2,000년 만에 옛 땅을 내놓으라는 것은 국제적으로 유례 없는 상식 밖의 요구가 아닌가?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땅에 선포된 이스라엘의 건국은 아랍 국가들의 반대 속에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착착 진행되었다. 바로 그 날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하루아침에 난민 신세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분노 속에서 땅의 회복을 다짐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독일과 그에 묵시적으로 동의한 유럽 여러 나라들에 의해 학살을 당해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의 죄과를 아랍인들이 뒤집어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우려면 유럽, 특히 독일의 양보와 협조로 유럽에 세웠어야 했다.

아랍인들은 1967년의 중동전쟁에서 지중해지역의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골란고원, 시나이반도 등 자신들의 남은 영토마저 이스라엘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를 통해 점령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촉구했으나 그 결의안은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아랍인들은 미국의 정책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핵사찰의 예외로 묵인하면서 적대관계에 있는 인근 아랍국가들의 핵시설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미국의 이중 잣대에 분노하고 있다.

뉴욕 테러도 인종적 고정관념과 연관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 뉴욕인가? 물론 그곳이 미국의 경제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경제적인 것으로만 제한할 수 없다. 경제적 이유만이라면 월드 트레이드 센터보다 더 높은 시카고 씨어즈 타워(1,454피트)가 선정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시카고 씨어즈 타워는 그 경제 규모가 세부 분야별로 1, 2위를 서로 다투는 곳이기 때문이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선정된 것은 그곳이 경제적 상징성에다 인종적 상징성이 추가된 곳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미국 전역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고 뉴욕에 대거 몰려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월 스트리트와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유대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씨어즈 타워는 경제적 상징성은 크나 인종적 상징성은 현격히 떨어진다. 미국의 친 이스라엘 일변도의 외교정책이 이번 테러의 한 원인이라면, 월드 트레이드 센터 테러는 유대인들 및 그들을 감싸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인종적 공격이다.

성서는 바로 어떤 종류의 인종적 경계선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종적 고정관념은 무엇보다도 '관념'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인종적 편견 때문에 생명까지 살해하는 일은 그것이 어느 편에 의해 자행되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의 가치는 그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로도 말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말살하는 정책은 그것이 미국에 의해 자행되든, 또는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에 의해 자행되든 우리는 결코 묵시적으로라도 동의할 수 없다.

지금도 크고 작은 여러 나라들이 인종적 고정관념에서 빚어진 분규로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타 인종 청소'를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어이없는 정치지도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가령, '인종 청소' 정책에 따라 크로아티아(91), 보스니아(92), 코소보(98)를 대상으로 세 차례에 걸쳐 참혹한 내전을 주도했던 과거 밀로셰비치도 그 중 하나였다. 오늘날, 배타적 인종주의야말로 평화 정착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III.

타 종교와의 대화는, 만일 우리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유대교와 먼저 할 수 없다면,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부터 착실히 진행해 나가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크리스천과 유대인의 대화를 가로막는 장벽은 대체로 두 가지 항목에서 연유된다. 첫째는 예수가 유대인들에 대해 비판했고, 그로 인해 유대인들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것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적이라고 설정하는 데 기인한다. 이 문제는 비교적 해결이 간단하다. 예수가 비판한 대상이나 예수를 처형한 주체가 유대인 일반이 아니라 유대인 지도자들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지도층 중 일부는 예수에게 동정적이었고, 예수도 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셨다.

문제는 둘째 항목이다. 곧,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소위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이 유대교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게 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곧,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고 유대교는 공로의 종교라는 도식이 문제이다. 이 주제에 집중해 보자.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고 유대교는 공로의 종교인가? 정말 그러한가? 바울의 율법 행위 비판은 유대교 구원관의 근본 사상에 대한 비판인가? 만일 유대교가 바울의 비판이 빗나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울이 유대교의 구원관을 오해한 데서 연유된 것인가?

우선, 유대교는 업적을 통한 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가령, 샌더스(E. P. Sanders)는 바울에게 알려진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성격을 '언약적 율법주의'로 명명한다. '언약적 율법주의'에 따르면, 언약은 인간의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 주어졌고 율법은 그 언약 안에서 언약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수단('머무름')일 뿐 그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조건('들어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고 율법을 통한 인간의 복종은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된다.

샌더스가 규명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적 기조와 상당한 근사성을 갖는다. 곧 우선권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고,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응답이며, 선한 행위들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그 열매라는 것 등이다. 물론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업적)들을 통한 구원의 종교가 아니었다는 샌더스의 주장은 그의 독창적인 연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미 베르블로브스키(R. J. Z. Werblowsky)나 샌드멜(S. Sandmel)과 같은 유대인 학자들도 이 점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베르블로브스키는 「은혜로서의 토라」라는 논문에서 유대인이 토라(律法)에서 구하는 것은 '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이 율법에 다가간 이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안에서 선택된 공동체의 한 멤버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원했기 때문이다." 샌드멜도 l세기 유대교에 대한 크리스천 학자들의 주관적인 선입관을 지적하고 그것을 통렬히 비판했다. 곧, 유대인의 율법주의에 관해 고정관념을 고집하는 크리스천들과는 학문적인 교류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크리스천 학자로서 유대교가 업적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샌더스의 노력은 결국 1세기 유대교에 대한 크리스천 학자들의 고정관념을 수정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물론 아직도 반-유대교적 고정관념에서 전혀 벗어나려 하지 않는 리더보스(H. Ridderbos)나 쥬이트(R. Jewett)와 같은 학자들도 있으나, 이들은 '업적의 종교로서의 유대교'라는 자기들의 편견이 유대인 학자들에게는 빗나간 것으로 판정 받고 있다는 점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군의 학자들은 샌더스의 주장의 세세한 부분에는 의견을 달리한다 해도 소위 '오해된 유대교'에 관한 그의 수정에 동의하고 있다. 가령 포터(C. L. Porter)나 던(James D. G. Dunn)은 유대교가 공로의 종교가 아니라는 샌더스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그것을 전제로 한 채 자신들의 논의를 확장시켜 나갈 정도이다. 유대교가 업적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면 바울은 유대교를 오해했는가?

우선, '유대교' 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단일 그룹으로 통합된 연합체가 아니었다. 요세푸스(Jesephus)에 따르면 주후 70년 이전 유대교의 주요 그룹들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였다. 그러나 이것은 주요 그룹들을 열거한 것이고, 그 외에도 '사마리아그룹', '갈릴리파', '세례파', '게니스태파', '나사렛파' 등으로 불리는 유대교의 종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기독교도 "그 발전 초기에는 하나의 유대교 종파였다." 바리새파가 주도권을 잡고 '정통'이 되기 시작한 주후 70년 이후와는 달리, 그 이전의 유대교에는 "정통과 이단 사이에 절대적으로 엄격한 경계선을 그을 수 없었다."

주후 70년 이전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에 랍비적 유대교가 이미 표준이 되고 있었다는 편리한 작업 가설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뉴스너(J. Neusner)나 세갈(A. F. Segal), 몬테휘오르(C. J. G. Montefiore)와 같은 유대인 학자들은 70년 이전 유대교를 이야기할 때는 단수 '유대교'가 아니라 복수 '유대교들'(Judaisms) 혹은 '많은 유대교들'(many Judaisms)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바울 당시 이러한 유대교의 다양한 그룹들 혹은 패턴들의 차이를 무시한 셈이다. 물론 그가 1세기 팔fp스타인 유대교 문서들 여러 곳에서 유대교가 업적의 종교가 아니라는 근거를 발견하고 그것을 강조한 것은 그의 공헌이라 하겠다. 그러나 당시 모든 유대교 종파들의 신학 사상들이 동일했던 것도 아니고, 한 종파만 해도 그 종파 내의 사상 체계들이 전부 일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샌더스는 랍비적 자료들 자체가 서로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는 마치 서로 상이한 마가의 율법관과 바울의 율법관을 함께 담고 있는 신약성서를 다른 문서와 비교하는 것과 같다. 마가와 바울이 어떤 특정한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해도, 신약성서의 율법관이 하나로 통일된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다른 문서와 비교하는 것은 신약성서 자체 내의 긴장 관계를 무시하거나 희생시켜야 가능하다.

가령, 쿰란공동체만 해도 '언약적 율법주의'가 발견되는 문서가 있는가 하면, 회개와 정결은 단지 '머무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들어감'(구원)의 구성 요소가 된다고 주장하는 문서도 있다(쿰란 문서의「사회 교본」). 더구나 구약성서 자체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선언과는 대조적으로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것으로 살리라."(레 18:5)라는 선언도 나타난다. 레위기의 선언의 경우, 사람의 구원은 그의 행위에 의존되어 있다.

그밖에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롬 4:2∼3)는 바울의 선언과는 대조적으로 야고보서의 저자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선언한(약 2:21) 것을 미루어 볼 때, l세기 유대교의 다양한 사상은 하나의 색깔로 요약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리새 출신의 바울이 구약의 율법 행위에 의한 구원 관련 구절들을 거의 선택하지 않거나, 선택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율법 행위 구원파의 생각을 거부한 당시 바리새적 유대교의 입장과 신학을 대변해 준다.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단일체가 아니라 상이한 사상 체계를 지닌 다양한 종파들의 총칭이었다는 점이 바울이 비판한 대상의 정체 규명에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바울의 비판 대상은 유대교 전체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유대교의 한 특정한 종파(율법 행위 구원파)의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주도적인 종파 중 하나였던 바리새적 유대교를 오해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이 속했던 유대교는 업적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율법의 행위들이 언약 내의 '머무름'에 불과할 뿐 '들어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바리새적 유대교의 입장에 서 있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거부한 것은 그 입장과는 대조적인 입장, 곧 율법의 행위들이 '머무름'뿐 아니라 '들어감'의 조건도 된다고 생각했던 유대교의 한 독특한 종파인 '율법 행위 구원파'의 주장에 대한 거부이다. 이러한 설정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의 강도를 샌더스보다 한결 더 경감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IV.

'율법의 행위들'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으로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유대인들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짓게 하는 '분리'의 기능을 수행한다. 율법의 행위들은 일종의 '식별들', 또는 '정체 표지들'이 된다. 구약에서 율법에 복종하라는 명령은 거룩하지 않은 국가들로부터 분리되라는 명령이다(신 7:1∼11; 스 10:11).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율법을 받은 자신들을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켰다.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율법의 행위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수단이었다. 유대인들은 "그 경계선이 위협받게 되는 듯하거나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의 정체성이 도전받게 되는 문제에 민감하다." 율법의 행위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에 대해 우월감이나 특권의식을 갖게 하는 방편이 되었다.

결국, 율법의 행위들에서 유발된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은 자신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장벽을 설치하게 했다. 바울은 바로 이 '장벽'을 제거하려 힘썼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 행위들뿐만 아니라, 장벽 설치 수단으로서의 율법 행위들도 함께 해당된다. 전자의 경우, 그 비판은 유대교 내의 한 종파에만 해당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70년 이전 유대교 전체의 율법관에 해당된다. 장벽 설치 수단으로서의 율법관은 유대교의 어느 한 종파에만 국한된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신앙 인의(認義)사상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나라로부터 소외된"(엡 2:12) 사람들이었다는 관념을 전제로 한다.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할 때, 그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이방 죄인들로부터 구별된 유대인들만의 특권이 아님을 강조했다.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는' 수혜 대상은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 차별없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인의론은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세워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장벽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철폐되었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바울의 인의론은 기본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선 제거에 주력하고 있다. 곧, 신앙 인의(認義)는 인종적 편견, 문화적 우월성, 국가적 특권에 연유된 차별의 관행들에 반대하여 바울이 세운 깃발이다. 이러한 해석은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고정관념을 수정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곧,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을 상당부분 완화시키고, 그 둘의 접촉점을 모색하기 위한 주요한 신학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와도 대화를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유대교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이슬람교와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유대교와의 대화의 성패 여부는 기독교가 이슬람교를 포함한 타 종교에로까지 대화를 확대해나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신구약 중간사란?


1. 신구약 중간사라면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역사를 말하는건가요?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기까지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사라 할 때, 그 시기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구약시대로 보고 어디서부터 신약시대가 시작되는가 하는 데에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유다인들이 마지막 예언자라 생각하는 말라기 예언자 시대 이후(기원전 460년)부터 예수 그리스도 탄생까지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구약성서의 마지막 부분인 마카베오 하권이 완성된 이후(기원전 160년 이후)부터 사도 시대까지를 신구약 중간기라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대한 여러 방면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구약성서 중 많은 책들은 바빌론 유배 시절 이후(기원전 538년)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 재편집되거나 새로 씌어졌고, 12소예언자 중 다수 예언자들의 활동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형성된, 구약성서의 그리스어역본인 70인역까지 생각한다면 신구약 중간사는 모호해지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생소한 단어와 표현들로 인해 품게 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더 깊은 이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개념과 시기의 결정에 대해서는 유보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구약 중간사라는 명칭으로 이것을 개진하는 이유는 이미 교회 내에 신약성서의 배경 역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신구약 중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혼란을 줄이자는 의도에서입니다.

우선, 신약성서 배경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탄생을 거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서는 유배 이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요. 신약성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유다교, 그리고 오늘날의 유다교 역시 이 시기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2. 유다교는 그때 시작된 게 아니고 우리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있어온 종교가 아닌가요?

물론 넓은 의미에서 유다교라고 하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 족장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천여 년에 걸친 유다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보면 유다교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비로소 뿌리를 내려서 오늘에 이른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유다교라는 종교사조가 부상하면서 이제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의 역사는 일단락 되었고 유다교의 역사로 탈바꿈하여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유다교와 유다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성서를 정독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유다인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구약성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신약성서에서는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바빌론 유배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내외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들어와 '유다인' 즉, 유다 지파 출신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새로운 요인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나요?

다윗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다인들에게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민족의 구심점이 없어져버린 것이었지요.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들의 침입과 지배가 이어졌고, 그들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유다인들의 투쟁과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과 종교에 대한 동질성과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로운 요인이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파생된 복합적인 것들이지요.


4. 유다를 지배한 강대국들로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나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관심 있는 이라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어서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패망하여 바빌론으로 유배 갔었다는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이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켜 유다인들은 고레스 황제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레스는 이듬해 칙령을 내려 바빌론에 유배 와서 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귀향과 파괴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처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배척보다는 유다인의 민족성을 보존하고 장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유다지파, 즉 유다인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하게 됩니다.


5. 귀환 이후에는 유다인들을 통솔하는 지도자가 따로 있었습니까?

당시 단체로는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이란 유배시기 이후에 생긴 유다인의 최고회의인데 대사제를 포함한 71명의 원로들로 구성되었지요. 이것은 정부 의회의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고등법원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산헤드린의 결정은 법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모든 종교적인 문제들과 율법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루었고, 대제사장의 권한을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제국은 유다인을 팔레스티나 지역의 책임자인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즈루빠벨, 느헤미야, 에즈라가 그 대표적 인물이지요.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즈루빠벨은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여(기원전 515년 3월)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였고, 느헤미야는 율법준수와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를 명하여 순수혈통과 전통계보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이어 제관이요, 율사인 에즈라가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세의 법전을 가지고 와서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고, 그 역시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엄하게 다스려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어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든 이는 바로 에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아무리 그렇다고 이미 한 결혼을 파기할 만큼 순수혈통이 중요한 것이었나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민(選民)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에 이방인들과는 엄연히 구분된 특별한 민족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상은 바로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유다인들의 절대절명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패망 이후 이방민족과의 혼합으로 유명무실해져 버린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들은 굳이 분리를 고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인식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정결한 백성, 이방인들은 죄인이라는 인식은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마태 5,46-47; 5,7; 18,17; 사도 2,23). 우리는 역사 속에서 유다인과 다른 민족들 간에 생긴 골 깊은 적대 의식을 찾아 볼 수 있고,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모습들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악순환은 에즈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7.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순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나요?

이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출신들로서 바빌론 유배 기간동안 유다 인접지역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의 혼혈민족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들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은 혼혈 그 자체라기보다 혼혈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종교의 혼탁성 때문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과 자신들이 이스라엘 후손임을 주장하는 사마리아 사람들 간에는 심각한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지요.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히 배척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전복구를 방해했습니다.

이때부터 골 깊은 대립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노예보다도 한 단계 낮춰 취급할 정도이며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유다인들 사이에 지독한 욕으로 통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민족적인 증오심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이웃사랑의 계명은 이런 배경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8. 페르시아 제국 다음으로 누가 팔레스티나를 지배했나요?

그 다음에 팔레스티나를 점령한(기원전 332년) 이는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이 시대에도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지배하에서 누렸던 종교적인 자유를 그대로 누릴 수 있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동부 지중해변에서부터 인도까지 자신이 정복하는 곳마다 그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후 알렉산더 대왕이 열병으로 사망하자 그 유언에 의해 영토는 막료장군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서게 되었고(기원전 323년),시리아에는 셀류코스 왕조가 서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상황과 헬레니즘 문화의 지속적인 영향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게 된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 안티오쿠스 3세 지배하에서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에 대한 호의적인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9. 그렇다면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얘긴 가요?

안티오쿠스 3세가 로마와 전쟁을 벌여 참담하게 패하면서 그 호의적인 상황은 달라졌던 겁니다. 오늘날 미화 3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전쟁 배상금 5천 달란트를 로마 측에 지불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채우기 위해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제 압류했습니다. 그의 왕위를 이은 셀류코스 4세, 안티오쿠스 4세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지요.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것입니다.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하고 인두세, 제왕세, 성전세와 같은 유다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마을 전체를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하고,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칙령을 발표하여 시리아의 법과 관습을 추종하게 하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0. 그 당시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어떠하였나요?

유다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지도층인 유다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소홀히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식 경기장에서 세속적인 쾌락에 탐닉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성전 뜰은 술꾼들의 숙소가 되었고 성전에서는 유다인들이 보기에 불경스러운 이방 의식들이 행해졌습니다(1마카 1,44-50 참조). 또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의 동생인 요수아라는 인물은 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리스식 이름인 야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대제사장직을 차지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지불하여 대제사장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치자의 헬레니즘화 정책 추진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겠다는 메넬리우스라는 자가 나타나 야손은 불과 3년만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행위까지도 거침없이 자행되었습니다. 셀류코스의 역대 왕들은, 이러한 대제사장들의 묵인 하에 유다인들을 박해하고 성전의 재산들을 약탈해갔습니다. 심지어 성전 전면에 붙여진 금박까지도 벗겨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런 반역의 모습들을 친일파 지도자들의 행위에서 볼 수 있지요.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는 통치자들은 팔레스티나 곳곳에 그리스식 경기장, 신전, 대중목욕탕을 세웠고, 유다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금하고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한 떼의 돼지를 성전에 몰아넣고, 제우스 신에게 헌납된 제단 위에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지요.


11. 유다인들은 그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었나요?

유다인들의 반응이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부류는 헬레니즘화를 선호하고 받아들인 이들로서 왕의 칙령에 흔쾌히 호응하여 동참하였고, 또 한 부류는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을 버리고 할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갔고, 나머지 한 부류의 사람들은 추종을 강하게 거부하고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이들이었습니다. 마카베오서에는 이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정한 것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1마카 1,62-63).

이렇게 저항하는 이들에게 취해진 것은 전대미문의 박해였지요. 아기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사형 당했고, 부정한 음식에 손대기를 거절한 많은 이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그 외 여러 이유로 잔인한 고문을 당하여 죽어간 이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구약성서 중에 유일하게 묵시문학으로 분류되는 다니엘서는 바로 이렇게 안티오쿠스 박해가 한창일 때 엮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신앙공동체의 결속과 반발이 더 심해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지요. 드디어 일부 유다인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바로 이 무장봉기에 참여했던 하시딤파에 속한 사람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12. 그러면 하시딤파가 무장봉기를 일으켰나요?

하시딤파가 무장봉기를 처음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무장봉기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저술과 마카베오 상하권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맨 처음 하스모네 일가인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 마따디아에 의해 촉발되었고 후에 하시딤파 사람들과 합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우선 하시딤파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하시딤'이라는 말은 '경건한 자들' '율법에 충실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종파는 여러 단체들의 필요에 따라서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필요란 바로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는 이들에 대하여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금지와 박해에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였거나 그런 조치로 위협을 받았던 자들로 이루어진 숙명적인 결합체였습니다.

종말론적인 사상을 물려받았던 이들도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고, 엄격하게 율법에 충실하려는 자들도 이 종파에 소속되어 있었지요.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은 다니엘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시딤파 사람들은 호전적인 정치 집단이 아니라 종교를 우선으로 여기는 경건주의자들이지요.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바리사이파 에쎄네파라는 종파는 바로 하시딤에서 나왔답니다.


13. 하스모네 일가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민중봉기를 일으켰나요?

앞에서 민중봉기를 촉발한 이가 하스모네 일가의 마따디아라는 사람이라고 했던 걸 기억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제사장 마따디아가 살고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 악명 높은 칙령이 내려지면서 시작됩니다. 이 칙령을 선포하기 위해 마을에 도착한 관리는, 원로인 마따디아가 이방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데 앞장서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이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고, 이를 따르려는 한 유다인을 죽이고 그 관리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다섯과 그를 따르는 열성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어느 구릉지대로 피신을 했고 그곳에서 하시딤파 사람들을 만나 그들 모두는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규모가 매우 작았으나 점점 그 수효가 늘었습니다. 마카베오 상권에서는 그들의 활동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죄인들과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고 그들을 쳐부수었다. 이때 살아남은 적군들은 이방인들에게 도망쳐 가 피난처를 얻었다. 마따디아와 그의 동지들은 이교제단을 찾아다니면서 모두 헐어버리고 또 이스라엘 땅에 사는 어린이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고 교만한 자들을 쫓아내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왕의 손에서 율법을 구해내었고 죄인들에게 승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2,44-48)라고 말합니다.


14. 그러면 마따디아 편이 이겼나요?

아직은 초반전에 불과합니다. 사태의 추이를 더 지켜보기로 하지요. 그들은 율법에 대한 열성만큼이나 열심히 싸웠고, 안식일에 적이 공격해올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대응하여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봉기를 주도한 마따디아는 봉기 2-3개월만에 심한 과로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이라는 다섯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임종 전에 셋째아들인 유다에게 자신의 영도권을 물려주었지요.

유다는 마카베오(쇠망치라는 뜻)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무모하리 만치 용감하였고, 영도력이 뛰어나 그 동안 산발적이었던 모든 게릴라 부대를 자신의 지휘하에 일원화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이 유다인의 무장봉기를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전환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의 이름을 그의 별명을 따라 '마카베오 항쟁'이라 부릅니다. 유다가 이끄는 이 게릴라 부대는 셀류코스 군대를 철저히 격파시켰고 다시 새로운 제단을 세워 성전이 모독된 달로부터 꼭 3년이 되는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다시 봉헌하였습니다. 그후 유다인들은 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하누카'(봉헌이라는 뜻)축제를 지내게 되었지요.


15. 그렇다면 유다인들은 완전히 독립한 건가요?

종교적으로는 자유를 얻었다 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유다(마카베오)가 죽고 난 후 동생인 요나단이, 다시 그 형 시몬이 뒤를 이었으나 여전히 셀류코스 왕조의 간섭을 받는 상태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은 계속되었지요.

또한 그들과 평화협상을 맺기도 했고, 셀류코스 왕은 하스모네 일가가 예루살렘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시몬의 아들 유다와 요한이 셀류코스 군대를 대파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승전으로 인해 유다인들은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고 할 수 있지요. 거의 30년 동안이나 걸린 기나긴 과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하스모네 일가는 유다인들의 실제적 통치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요나단은 독립군 사령관직에 만족하지 않고, 다윗 시대 이후 대대로 사독 가문이 맡아해 온 대제사장직까지 겸직하는 과욕을 부렸지요. 물론 셀류코스 왕조 쪽에서 수락하는 방법으로 말합니다. 그의 뒤를 이은 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민중봉기 처음의 정신과는 달리 셀류코스 왕조를 섬기며, 유다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려고 고심하는 전략가로 변질돼버린 것입니다. 결국 마카베오 전쟁은 유다인들에게 독립이 아닌 하스모네 일가의 통치시대만을 등장시켰을 뿐이지요.


16. 유다인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았나요? 처음 민중봉기에 합세했던 하시딤파는 어떻게 되었나요?

요나단과 시몬이 대제사장직까지 독식하고 정치적인 방향으로만 흐르자, 하시딤파 사람들은 점차 그들이 하는 일에서 관심을 잃고 손을 떼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모였던 하시딤파 사람들은 모이기 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고유한 특성대로 분리되었습니다. 여기서 생겨난 종파가 바리사이파와 에쎄네파이지요. 이때 이미 사두가이파가 있었으니 유다교 내에서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진 세 개의 종파가 존재하게 된 셈이지요. 이들 세 종파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결국은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오직 율법의 권위 하에서 살아 갈 것을 다짐하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구원이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데 있어서는 각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 그 견해들이 어떻게 달랐나요? 그리고 각 종파들에 대해 좀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요.

우선 사두가이파에 대해 알아보죠.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존의 귀족들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는 고위 제사장들 그리고 부유한 재산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실리적인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현재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류의 통치자건 상관없이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후에 등장하는 로마 정권과도 결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교란 상태나 변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득권 층이 바라는 바와 다를 바 없었지요. 후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한 것도 바로 변혁을 두려워했던 이유에서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었습니다.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된 율법의 계율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죠.

또한 부활, 천사, 사후의 상벌문제,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니 합법적인 성전기구의 감독 하에서 제사를 엄숙하게 드리는 것 그리고 의식과 제물봉헌에 관한 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지요. 이런 이유로 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기에 사두가이파와 적대관계가 되었나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철저히 배격하였다는 점에서 사두가이파와 구분됩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 어떤 종파보다도 지나치리만큼 엄격했지요. 그러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모세의 율법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구전된 율법을 그대로 전승하며 발전시켜나갔습니다. 후에 이것은 미쉬나로 편찬되었고, 결국에는 탈무드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잠깐 미쉬나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하면, 기원전 3백 년부터 서기 5백 년까지 유다교 랍비들에 의해 구두로 전해져 구전율법을 탈무드라고 하는데 중심 본문은 미쉬나, 이 본문의 몇 배 분량의 주석 부분은 게마라라고 합니다. 탈무드는 유다인의 종교 및 모든 생활 전반에 관한 가르침인데 성문율법인 구약성서와 함께 바리사이파에 의해 주도된 전통 유다교의 경전이라고 합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사두가이파와 달리 부활신앙, 사후의 상벌, 천사와 같이 새로 도입된 개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다른 점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라면 바리사이파는 주로 평신도들이었지요.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도덕적으로 성실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실제로 유다교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후에 율법의 틀에 매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순을 야기시켰기에 예수께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19. 율법학자(랍비)들과 바리사이파는 동일한 사람들을 가리키는가요?

둘은 명확히 구분되는 말입니다. 단지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이 율법학자들이었고 많은 율법학자들이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요.

당시 사두가이파 율법학자와 같은, 바리사이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구성원들을 보면, 소수의 율법학자와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상층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외 대다수는 평민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라고 모두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들은 비록 율법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할지라도 율법에 헌신적인 사람들로서 바리사이파적인 정결례와 십일조 의무를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으며,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는 대다수의 민중들을 업신여겼습니다. 그와 같은 율법학자들의 허영심과 명예욕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은 예수께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았지요.


20. 에쎄네파는 어떠했습니까?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들이 전해 내려오지만, 에쎄네파에 대한 기록은 얼마 전까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사해 근처 동굴에서 '꿈란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에쎄네파에 대한 상당 부분들이 밝혀지기 시작했지요. 앞에서 언급한 하시딤파에 대한 내용과 대제사장직까지 독식한 요나단의 과욕은 에쎄네파의 출현과 관계가 있습니다.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단지 '의로운 스승'이라는 별명만으로 전해지지만, 대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맡아 드려왔던 사독계열의 대제사장 출신이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시딤파 일원으로 민중봉기에 참여했지만 요나단이 사독계열 가문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직을 차지한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극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반발은 통치자의 가혹한 박해로 이루어졌지요. 결국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박해를 피해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사해 근처 꿈란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 은둔생활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들을 두고 '꿈란 수도자'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바리사이파보다 더 엄격히 율법을 지켰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세상과 분리된 채 극히 제한된 교류만을 유지했습니다. 묵시문학적인 종말론, 율법중심의 근본주의, 선민주의적 배타의식, 이런 점들이 당시 에쎄네파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특성이라 할 수 있지요.


21. 에쎄네파는 신앙적인 면에서도 다른 종파와 달리 특이했겠네요.

그들은 임박한 종말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곧 종말전쟁이 일어나 미카엘이 조종하는 빛의 아들들과 벨리알이 조종하는 어둠의 아들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되고 그 결과는 예정되어 있지 않지만 만일 빛의 아들들이 이긴다면 메시아를 모시고 종말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이런 상상에 끊임없이 젖어 있었던 것이지요.

에쎄네파 사람들은 요나단 일파를 사악한 무리로 보고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사악한 도시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떠나 사막 한가운데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게 된 것이지요. 원래 제관들이 지켜야 하는 정결례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이들은 율법과 수도원 규범에 충실한 자신들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공동체' 라고 인식했고, 종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말사상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행했던 묵시문학의 일종이었습니다.

또한 자기종파의 사람들만이 선민이라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철저하리 만치 배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에쎄네파의 신심은 신약성서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22. 묵시문학은 그 무렵에 등장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종말론을'묵시'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한 심리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묵시문학은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 이렇게 두 권을 들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사야서 24-27장,34장, 즈가리야서 9-14장도 묵시문학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에녹의 묵시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특징은 이원론적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건은 하느님과 사탄, 빛과 어둠이 벌이는 우주적 투쟁이 반영된 것이고, 죄악으로 더렵혀진 이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 심판이야말로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친히 강림하시는 날 이루어지며, 그날 사탄의 무리들은 벌을 받게 되고 그분이 친히 선택하신 이들은 구원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묵시문학의 표현은 오늘날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다소 엉뚱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 당시 유다인들의 절실한 신앙 표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해 나가시며, 역사의 종말인 심판의 날에 엄정한 판결을 내리시고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간직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묵시적인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위급하고 불안한 상황이 재현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23.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쎄네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나요?

사실 유다인들 모두가 이 세 종파 중 어느 하나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세 종파가 유독 드러나 보였기에 유다인들 전부가 이들 중 한군데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낳게 됩니다. 세 종파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주로 무지한 시골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으며,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암 하렛즈'(땅의 백성이라는 뜻)라 불리며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순수 유다 혈통을 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출생이 불분명한 사생아들, 도둑질을 하다 잡혀 노예가 되었거나 스스로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된 이들 그리고 개종자들이나 해방된 노예들, 그리고 이방인이면서 해방된 노예들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엄격한 위계 사회에서 억압과 불이익을 당했던 이들입니다. 세 종파에 속하지 않은 이들로 암 하렛즈라고 불리는 사람들 말고도 팔레스티나 지역이 아닌 외국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의 공동체를 두고 '디아스포라'(분산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에 5십만에서 7십만 정도의 유다인이 살고 있었던 반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살던 해외 유다인 수 는 2백만에서 5백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24. 이들은 이민을 자청해서 간 사람들인가요?

현재 일본과 사할린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계속 정복당하면서 강제로 추방되거나 통치국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 그리고 살길을 찾아 자청해서 본토를 떠난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하나 둘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후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곳에 남아서 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엘레판틴 지역이 있지요. 이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동화되어 살기보다 자신들만의 율법을 지키며, 민족과 종교의 고유성을 고수하려 하였기에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유배 초기부터 이 해외 유다인들에게는 함께 율법을 읽고

기도를 바치는 모임 장소인 회당이 있었는데, 그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에 의해서 팔레스티나에도 그런 회당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도행전 6장 9절에는 이 회당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옵니다. 회당은 바로 유배시기에 생긴 유다인의 독특한 신앙형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들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 '70인역'이라는 성서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72명 역자들이 각기 구약성서를 그 리스어로 번역하였는데 완료 후에 비교해보니 한 자도 다르지 않았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지요. 그래서 70인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25. 당시 팔레스티나 여성들은 이런 민중봉기나 종교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나요?

공개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전쟁을 수행하고 평화를 지키는 공적인 삶은 순전히 남자들만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단지 집을 지키고 규방에 유폐된 성(性)적인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들은 집밖을 나갈 때 반드시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나가야 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남성들의 수치로 여겨졌을 정도였지요.

경제적인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일부다처가 허용되었고, 이혼을 요구할 권리는 남성 쪽에만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과 여성의 뜰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여성들에게는 이곳에만 출입이 허용되었을 정도여서 종교적인 활동과 의무에서도 여성은 심한 제약을 받았던 것이지요. 후에 있었던 일이지만 예수의 여성관과 결혼관은 이스라엘 역사상 유래 없는 것이었습니다.


26. 마따디아, 유다 마카베오,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진 하스모네 일가의 통치는 그후 어떻게 되었나요?

위에서 하스모네 일가의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이 셀류코스 왕조의 군대를 대파하여, 독립을 얻었다는 이야기까지 했었지요. 그후 시몬이 그의 사위에게 피살되자(기원전 134년),아들 아리스토불로 1세가 그 자리를 맡게 되면서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다음 왕위는 계속하여 동생, 그 아내, 동생의 큰아들, 둘째아들로 이어졌고, 대부분 왕위에 앉은 이들은 대제사장까지 겸직하였습니다. 기원전 64년에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시리아를 속주로 만들고 팔레스티나도 시리아 속주에 포함시켰지요. 이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로마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팔레스티나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면서 하스모네 왕가는 몰락하게 되고 헤로데 가문이 통치하게 됩니다.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헤로데도 바로 이때에 등장한 인물이고, 세리니 호구조사니 하는 용어들도 이 시대에 등장한 것들이지요.


27. 헤로데 가문은 유다 출신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나요?

그들은 이두매 출신이었습니다. 이두매인이란 유다 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모네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 치세 때(기원전 134-104년) 유다에 합병되면서 거의 유다 백성의 일부로 간주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 유다인이 아닌 '반쪽 유다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에서 실세로 등장할 즈음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텔은 로마에 아부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지요. 당시 로마도 내란으로 어수선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안티파텔은 적절한 충성심을 보여 계속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황제 케사르에게서조차 로마시민권을 받았고, 총독으로 임명되었지요. 안티파텔은 이제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로마의 편에 서서 공개적으로 팔레스티나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켜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지요. 오히려 헤로데의 경우는 누구보다도 더욱 악독하게 로마의 정책을 앞장서서 수행해나갔습니다.

유다인들의 반발은 있었지만 자신의 정적을 가치없이 숙청, 살해하는 헤로데의 폭정 앞에서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해나가기 위해 마사다와 같은 요새 건설과 식민시설 설치,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면서 그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의 분노는 점점 높아져 극에 달할 수밖에요. 결국 안티파텔은 암살 당했으나 헤로데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어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로마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헤로데 가문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이 헤로데밖에 없었습니다.


28. 위의 헤로데가 바로 신약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헤로데인가요?

신약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헤로데는 바로 이 사람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던 헤로데(마태 14,1-12; 마르 6,14-29; 루가 3,1-20), 예수를 심문했던 헤로데(루가 23,7-15)가 바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이지요. 헤로데 대왕이 죽으면서(기원전 4년) 그의 세 아들에게 모든 것을 상속해 주었는데, 아르켈라오에게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필립보에게는 대부분의 북동부 지역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복형제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르켈라오는 십 년도 못되어 로마로부터 파면 당하고, 필립보는 서기 34년에 죽었으며, 헤로데 안티파스도 39년에 파직 당하여 모든 영지는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되었습니다. 서기 41년부터 44년까지 헤로데 가문 출신 헤로데 아그리빠 1세(아르켈라오 아들)가 통치한 적도 있었지만 그 외는 로마인들이 팔레스티나를 직접 통치(서기 6-41년, 44-66년)했습니다.


29. 로마가 직접 통치하면서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로마 제국은 우선 세제 개혁을 목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주민의 수효와 그들의 자산 상태를 정확히 조사함으로써 세금을 확실하게 징수하겠다는 게 통치자의 의도인 동시에, 민족 전체를 얽어매어 통치하려는 기초작업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2장 1-7절에서는 예수의 탄생이 이 호구조사 때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한 시기는 서기 6-7년경이고 예수는 헤로데 대왕의 치세 때(기원전 37-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호구조사와 예수의 탄생은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호구조사는 유다인들을 분노케 했고 호구조사에 따른 세금 정책과 징수를 맡은 세리들도 유다인들에게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자주 볼 수 있지요.


30. 유다인들의 분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나요?

이것은 마카베오 항쟁에서 유다인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유다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에 불을 질렀습니다. 열혈당원(Zealots)의 출현은 그 대표적인 시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출발은 이렇습니다. 호구조사에 의해 12세(또는 14세)부터 65세까지의 주민은 관할지역에 한 데나리온을 바쳐야 한다는 인두세 정책이 발표되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거부하고 나서서 바리사이파 사람 사독과 함께 동지들을 모아 열혈당을 조직했고, 공개적으로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하느님만이 유일한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열혈당원들은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과도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다져진 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에게 긍정적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대항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과 로마인들에게 굴복하는 유다인들이 열혈당원의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단도나 칼을 차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 시몬도 열혈당원이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31. 그러면 열혈당원의 사상은 이전에 마카베오 항쟁을 일으킨 마카베오일가의 사상과 비슷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혈당원들은 앞으로 하느님 통치 외에는 그 어떤 세상의 통치도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을 마지막 날 이 세상을 심판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는 하느님의 진노와 채찍만이 있는 마지막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열혈당원들은 어느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었고 특히 로마에게는 맹세코 저항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통치자들과 타협할 수도 있다고 인식한 마카베오 일가의 봉기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혈당원들은 위세에 몰렸을 때 과감히 자결을 할 수도 있었지요. 이들이 지닌 사상은 지극히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이었습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유다 전쟁에서도 열혈당원들은 주축이 되었답니다.


32. 그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이어진 전쟁 말이군요. 어떻게 해서 처음 시작되었나요?

서기 66년에 플로루스 총독이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착취하고 이에 반항하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하자 그 동안 쌓였던 유다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이젠 타협도 불가능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의 궁궐, 로마 사령관이 거주하는 안토니우스 성은 모두 불에 탔고, 로마의 보병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유다인들에 의해 학살당하였습니다. 열혈당원들은 마사다 요새와 헤로디온 요새를 점령하였고, 후에 역사가로서 저서를 남겨 우리에게 그 시대의 사건들을 전해준 요세푸스도 당시 혈열당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는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베스파시우스 장군에게 이 반역자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군에 의해 대부분 쉽게 함락되었지만 예루살렘은 그리 만만치 않았지요.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과 합류하지 않고 베레아와 펠라로 피신한 상태였고,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서편 지중해 연안에 있는 얌니아로 피했으며 그곳에서 집회를 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서기 70년 6월, 안토니오 성 함락, 같은 해 9월에 예루살렘 성전도 함락되어 성전은 불타버렸습니다. 사해서안에 위치한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열혈당원들이 서기 74년까지 치열하게 항거하다 끝내 모두 자결함으로써 이 유다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33. 그러면 이제 유다교 아니 이스라엘 역사는 끝나버린건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다 전쟁으로 열혈당원, 사두가이파, 에쎄네파는 모두 소멸되고 바리사이파만이 남았습니다. 유다인들은, 현상 유지만을 고집했던 사두가이파도, 호전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종말론적인 호기도 모두 꿈에 불과한 것임을 자각하게 되었지요. 이제 유다교는 종말론적인 사상에 매어 마냥 누군가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길 바로 바리사이파가 강조한 율법 중심의 공동체만 이 자신들이 가야 할 길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유다인의 입장에서 구약을 바로 탈무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점이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막을 내렸고, 구약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였음이 증명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한 분이신 같은 하느님을 숭배하고 동일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서, 또한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각하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말입니다.

 

 

34. 신약의 배경이 되는 이 초기 유다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구약과 신약성서의 무대는 지중해 연안의 근동 지역이라는 같은 장소이지만 사회적, 종교적 배경은 서로 다릅니다. 귀환 이후 유다교가 제 꼴을 갖추면서 신약의 분위기는 구약에 비해 사뭇 달라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 시기 동안 중동은 세 차례나 판도가 바뀌었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의 원로들을 만나고, 여러 종파들을 만나고, 세리를 만나고, 예수께서 회당에서 구약성서를 읽거나 기도하시는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시절에 팔레스티나는 유다와 사마리아, 갈릴래아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전혀 구약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놀람과 의문으로 신약을 일게 됩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소중한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