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 14-25절의 해석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균형 잡힌 성화론을 위해서는 로마서 7장 14-25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이 구절에 묘사된 사람은 신자인가 아니면 불신자인가에 대한 문제가 2천년 교회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논쟁이었다. 칼빈이 전통적인 입장을 대변한다면 웨슬리는 반대 입장의 대표적인 옹호자이다.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는 이들은 칼빈을 비롯해 어거스틴,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젼과 대부분의 청교도 목사와 신학자들, 찰스 핫지(Charles Hodge), 존 머레이(John Murray), 존 스탓(John Stott), 제임스 패커, 제임스 던(James Dunn)등이다. 웨슬리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로서는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 헤르만 리델보스(Herrmann Ridderbos), 막스 터너(Max Turner)를 비롯한 많은 국내외 신약학자들을 들 수 있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비전통적인 해석이 오히려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불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적 근거는 여기에 묘사된 사람은 아직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법을 행하려는 선한 뜻과 의지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죄의 결박에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의 원함은 있어도 그 의지와는 반대로 결국 죄를 짓고 마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다. 곧 죄의 종인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바로 앞에서(로마서 6장) 천명한 복된 사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지배에서 결정적으로 자유했다는 메시지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본문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는 이들은 그 사람은 결코 불신자일 수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간절한 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다(롬 7:22). 거듭나지 않은 이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 수 있을까? 어떤 신약학자는 불신자들 가운데 양심적이고 선을 사모하는 이들의 예를 들어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처럼 자신들이 설정한 윤리적 기준을 추구하고 그러한 의로움을 사모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의 참된 의미를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바울 사도는 거듭나지 않은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는다고 했다(롬 8:7-8). 불신자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바울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또한 여기에 묘사된 사람은 자신의 부패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고백도 했다(롬 7:18, 14). 이것은 거듭나기 전의 바울 사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자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 빛 가운데 드러난 자신의 부패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부르짖었다(롬 7:14).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기에 묘사된 사람을 불신자라고 볼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선을 원하지만 결국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 법을 따르려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고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인가? 죄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은 이다지도 희박하다는 말인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마음으로는 간절히 원하나 그대로 살지 못하는 좌절을 끊임없이 맛보고 살 수 밖에 없는 곤고하고 비참한 삶인가?
여기서 우리는 어느 쪽 입장도 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봉착한다. 양측의 해석 모두 일리가 있는 동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중도적 입장은 이 본문을 거듭나기 전에서 거듭난 상태로 전환하는 개종이나 회심 때의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20세기의 저명한 강해 설교자 로이드 존스와 칼빈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던 밴스트라(Bandstra)가 그런 식으로 본문을 해석했다.
또 다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케직 사경회에서 유행했던 견해인데 제2의 축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본문은 거듭난 자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지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 미성숙한 그리스도인, 즉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패와 좌절과 신음이 계속되는 곤고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제2의 축복은 이렇게 실패가 거듭되는 무력한 삶이 승리와 기쁨으로 가득한 풍성한 삶으로 전환되게 한다. 제2의 축복은 곧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전환되는 체험”인 셈이다. 그러나 이 땅위에 사는 동안 로마서 7장에 묘사된 내적 갈등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알렉산더 휫트(Alexander Whyte) 목사는 자주 교인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목사인한 그들은 로마서 7장을 결코 졸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탄식과 감사의 공존
이 난해한 구절을 원만하게 해석하는 열쇠는 로마서 7장을 8장과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만을 분리시켜 거기에 묘사된 상태가 거듭나기 전인지 후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 자체가 적절치 못한 질문이다. 로마서 7장에 신자의 경험의 한 면이 묘사되었다면 다른 한 면은 로마서 8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 7장과 8장이 서로 합쳐져 거듭난 자의 경험을 온전히 묘사한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다. 로마서 7장에서 그 반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은 8장에 그려져 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신자의 경험을 율법과 육신의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그리하여 육신의 약함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과 우리 안에 역사하는 죄와 사망의 법과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밝혀주었다. 반면에 8장에서는 신자의 경험을 내주하는 성령의 관점에서 조명하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육신의 약함의 문제를 해결하고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있게 하는지를 설명하였다(롬 8:1-4). 이렇게 이중적인 관점에서 신자의 경험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지배와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로마서 7장과 8장은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두 가지 깨달음과 확신을 제공한다. 곧 로마서 7장은 우리 안에는 죄와 사망의 법과 세력이 역사하기에 내 힘만 의지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없다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동시에 로마서 8장은 우리는 약하나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우리 신앙생활에 이 두 가지 확신이 항상 공존해야 한다. 내 힘만 의지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철저한 무력감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내게 능력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는 어느 한쪽의 확신이 결여된데 서 기인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약함은 뼈저리게 절감하지만 자신의 무력함만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신자의 부패성과 불완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성화론이 이런 패배주의적 신앙을 조장할 수 있다. 반대로 주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확신은 있으나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깊은 인식이 부족함으로 실제로는 성령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힘과 열심을 더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 성령만을 의존하기에는 아직 육신이 너무 강한 것이다. 긍정의 힘과 믿음마저 성령이 아니라 육신에서 산출될 수 있다.
베드로처럼 자만심에 빠져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묘사된 것과 유사한 실패의 경험을 맛 볼 수 있다. 또한 육신의 소욕을 좇는 삶이나 습관적인 죄악으로 인해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을 때 이와 비슷한 영적인 곤고함을 체험한다. 우리의 삶이 로마서 8장에 약속된 승리와 자유를 누림보다 로마서 7장에 묘사된 실패와 죄의 억압을 더 자주 체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의 은혜가 결핍되었다는 증거이다.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 안에는 죄의 세력과의 치열한 내적 싸움은 계속되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넉넉히 이기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 곧 부활의 능력을 충만히 누리게 된다. 우리 삶 속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탄식은 계속되지만 그 탄식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는 감탄과 찬송으로 이어지는 탄식이다.
성령충만한 삶에는 이 탄식과 감탄이 공존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 탄식이 없어지리라는 잘못된 기대가 가장 큰 탄식거리이다. 이 탄식이 없을 때 우리에게는 감탄도 사라진다.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 능력을 간절히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이 탄식을 감사의 찬양으로 바꾸는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매일 만끽하지도 못 할 것이다. 죄의 비참으로부터 오는 탄식과 신음은 죄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감격과 기쁨을 한층 더 크게 한다. 이 탄식이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며, 주님의 능력만을 자랑하게 한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이 탄식은 더 깊어져 더 완전한 성화에 대한 갈망과 소망을 고조시킨다.
선지동산 50호 게재 / 성화의 복음(10) / 박영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