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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인기 드라마의 필수 조건이다. 트렌디 한 미니시리즈나 청춘 드라마 뿐 아니라 아침 드라마, 일일 드라마, 주말 드라마에서조차 재벌이 빠지면 당면 빠진 잡채처럼 영 심심하다. 혹자는 드라마마다 사업체와 이름만 바꿀 뿐 나머지는 국화빵 틀에 찍어낸 것처럼 비슷비슷한 조건과 성격으로 등장하는 재벌의 캐릭터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의외로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불리는 문학 작품 속에서도 재벌의 캐릭터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이수일과 김중배
이수일과 심순애에 등장하는 이수일은 잘 생긴 얼굴, 뛰어난 학벌에도 불구하고 밴댕이가 무색하게 속 좁은 성격 때문에 고전작품 속 열폭(열등감 폭발) 남자의 대표중의 대표이다. 심순애와 먼저 사랑을 도란도란 속삭였던 이수일이 라이벌인 김중배에게 열등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경제적 능력 차이였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연인들이 많았는지 몇 년 전에는 한 음료수 광고 시리즈의 이야기 구조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긴 생머리를 자랑하는 전지현은 광고 속에서 상대역으로 등장한 이수일 과의 남자친구를 향해 명언을 남긴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도 여자에겐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문제의 김중배는 누구인가. 그가 바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재벌 2세이다. 작품 속 어디에서도 김중배가 자수성가했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순애에게 여자의 로망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줄 수 있었던 그의 부유함은 대물림 된 재산에 기반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이 완전히 끝난 것도, 순애의 마음이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닌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울부짖으며 순애를 들들 볶고 닦달하며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 이수일의 오버연기 때문에 김중배는 대게 임자 있는 여자에게 손을 댄 졸렬한 남자로 평가절하 되어 왔다. 하지만 비록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했다고는 하지만 순애가 결혼한 품절녀도 아니었으니 남자친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순애에게 호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양심상의 문제였을 뿐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는 연애 정글의 법칙 제 1조항이 아니던가.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고가의 선물로 순애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 김중배는 오히려 순수하게도 보인다. 사랑이 끝나기도 전, 어떤 반전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피해자라며 순애를 돈에 혹한 나쁜 여자로 몰아세우며 막말을 서슴지 않은 이수일이야말로 뼛속까지 현실적이고 약아빠졌으며 야박한 남자이다. 이런 남자는 연애라면 몰라도 결혼하면 고생길이 훤하다.<삼대>의 조덕기와 김병화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한 재벌, 두 번째는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꽃미남 득실거리는 고전 <삼대>의 주인공인 조덕기이다. 제목 그대로 그의 부유함도 역시나 집안에서 대물림 된 것에 기반하고 있으니 그는 재벌 3세이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가 주축이 되어 관리되고 있는 조덕기 집안의 부유함은 탄탄하기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각종 사람들에게 수시로 약점이 노출되어 있는 바람에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안쓰럽고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조덕기의 안정된 생활을 삐거덕거리게 만들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기며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유들유들한 사회주의자 김병화이다.
첫 등장부터 친구인 덕기에게 담배를 강탈하고서도 당당한가 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덕기의 잘못이 아님에도 마치 나쁜 짓이라도 되는 양 끊임없이 냉소적으로 비꼬기를 거듭한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면 될 것이지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자기암시라도 걸었는지 가난하게 태어나고 자란 사람 특유의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속내를 사회주의 지식으로 무장한 두뇌와 달변을 자랑하는 혓바닥으로 감춰 놓고 비위 좋게 덕기의 절친한 친구임을 자처하며 덕기네 집을 드나드는 것이다. 그의 사람됨을 본능적으로 알아본 덕기의 할아버지는 김병화에게 경계심을 잔뜩 품은 채 덕기에게 교제를 끊을 것을 요구하지만 우유부단하고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하지 못한 전형적인 착한 부잣집 아들 스타일의 덕기는 병화에게 휘둘릴 뿐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은 조덕기와 김병화 두 사람의 문제에서 나아가 덕기의 아버지인 조상훈까지 연결되어 복잡한 불륜과 연애를 넘나드는 복잡한 관계로 발전한다. 슬픈 것은 일찌감치 주인공인 조덕기는 젊고, 유학까지 마친 세련된 지식인에, 부자에, 얼굴도 멀끔하지만 아쉽게도 일찌감치 조혼으로 품절된 바람에 멜로 라인에 있어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젊은 느티나무>의 현규와 지수
마지막으로 만나볼 문학 작품 속 재벌은 피 끓는 청춘 남녀의 아련한 사랑을 감각적으로 다룬 <젊은 느티나무> 속 남자 주인공이다. 1960년에 발표된 소설이라고 보기엔 놀라우리만치 세련된 배경에서 출발하는 <젊은 느티나무>의 주인공은 두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복 많은 히로인 숙희이다. 주인공인 세 명의 남녀들 중 여주인공의 이름만이 1960년대를 반영하고 있을 뿐, 나머지 두 남자의 이름은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러운 느낌이 없는 ‘현규’와 ‘지수’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혼으로 만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 숙희와 현규는 한 집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눈물 콧물 흘리며 하늘을 원망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무려 숙희의 주도 하에 은근히 밀고 당기기를 즐긴다. 물론 현규의 아버지는 물론 현규까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써 일단 이들은 최상류층 생활을 누린다. 간식으로 치즈와 크래커, 콜라를 먹는 것은 물론이요, 간간이 운동 삼아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서양식으로 지어진 마당이 커다란 이층집에는 일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랑에 대한 야릇한 고민과 상상만을 하면서 감정을 소모한다.
이 둘의 사랑에 희생된 또 한 명의 슬픈 재벌 2세는 바로 현규의 친구 지수이다. K장관의 아들이라고 친절하게 내력이 설명된 그는 킹카 중의 킹카지만 우연히 숙희에게 반해 ‘편지’로 구애를 한다. 하지만 그 ‘편지’는 현규에게 질투심을 유발시켜 결국 숙희와 현규가 서로의 감정을 확실하게 깨닫게 만든다.
몇 몇 작품만 살펴보았지만 고전과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재벌들의 모습은 오늘날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문학 작품 속 재벌들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통속적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재벌 캐릭터들은 이처럼 고전과 문학을 통해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미리 익숙해져 왔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재벌보다는 익숙한 재벌의 모습이 이야기를 이해하기에 훨씬 쉽고 편안하기 때문에 재벌 캐릭터는 매번 곰탕처럼 그 모습 그대로 우리고, 또 우려지는 것이 아닐까.
꽃미남 애호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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