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도어록(door lock)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문화가 있다. 급한 성미의 기질이 낳은 참신한 문화도 있고, 독특한 주거 문화가 낳은 기현상도 있다. 때로는 경쟁력으로, 때로는 왜곡된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는 한국만의 문화를 짚어본다.최근 독일 소도시 오버아마가우로 출장 간 회사원 이광수(36)씨, 호텔에서 웃지 못할 경험을 했다. 직원이 건넨 기계식 옛날 열쇠로 호텔 방문을 여는데 도무지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몇 분간 쩔쩔매다 벨보이를 불렀다. 벨보이가 문을 미니 그대로 열렸다. 알고 보니 이미 열린 문에 대고 이씨가 계속 열쇠를 돌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제서야 알았어요. 열쇠로 문을 열 때 손으로 느끼는 '딸깍'하는 미묘한 느낌을 한참 동안 잊었다는 사실을."
요즘 한국에선 집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다. 간단히 버튼만 누르면 '삐리리~' 경쾌한 전자음을 내며 스스로 문을 여는 '친절한' 디지털 도어록(digital door lock) 덕에 열쇠고리에 대롱대롱 집 열쇠를 매달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원격으로 시동을 걸어주는 자동차 스마트키까지 나와 열쇠가 전혀 없이도 생활이 가능할 정도다.
디지털 도어록이 나온 시기는 1997년 즈음. 한국디지털도어록 제조사협회 김지향 사업팀장은 "97년 전후로 한 업체가 일본에서 디지털 잠금 기술을 배웠고 이를 한국식으로 바꿔 디지털 도어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협회에 따르면 디지털록을 이용하는 가구는 전체의 40% 정도. 아파트의 경우 약 80%, 2000년 이후 지은 아파트는 100% 디지털록을 장착하고 있다. 2009년 시장규모는 약 1800억원. 매해 8~12%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을 만큼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선 디지털록을 한 가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탈리아 교민 여미영씨는 "유럽에선 아직도 피아노 열쇠처럼 커다란 옛날 열쇠를 사용하는 가정이 태반"이라고 했다. 디지털 잠금 기술을 개발한 일본에서도 디지털록을 보조키로 하는 경우는 있지만, 열쇠 없이 디지털록만 설치한 집은 보기 드물다.
디지털록이 한국에서만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이 꼽는 디지털록 확산의 일등공신은 한국의 특수한 아파트 문화와 IT 붐. 부동산 붐이 불붙어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고 IT 벤처산업이 호황을 맞은 2001년이 디지털록 시장이 급성장한 기점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국인 특유의 '디지털 맹신(盲信)'도 요인이다. 디지털록 업체 대양D&T 이행문 대리는 "한국에선 열쇠공들이 해정구(열쇠 따는 만능 기계)를 이용해 저지르는 범죄가 많아서인지 기계식 열쇠가 안전하지 않다고 여긴다. 첨단 디지털 기술에 대한 신뢰도 높아 초반부터 디지털록에 대한 불신이 작았다"고 말했다.
국산 디지털 도어록 기술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 수준. 최근엔 문에 손을 대지 않고 리모컨처럼 열쇠에 달린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도어록 스마트키'까지 나왔다. 마술처럼 문을 건드리지 않고도 문을 열 수 있는 나라, 2009년 한국의 풍속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