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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은바리라이프 2009. 7. 17. 16:59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이찬수(강남대)

 

I.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현황

그리스도교는 조선 후기에 소개된 종교이며, 다른 전통 종교들에 비하면 그 연구의 역사도 일천하며,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체를 정리한 자료도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연구는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어오고 있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대상으로 한 연구의 역사는 100년을 크게 넘지 못한다. 특히 한국인에 의한 한국 그리스도교 통사적(通史的) 연구는 1920년대에 선을 보였다가 침체기를 거쳐 196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정도이다. 한국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관련 자료들은 상당한 정도로 축적되어 왔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반에 <대한> 이차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00여년 간 이루어진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결과들을 시기별로 세밀하게 구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사실상 큰 의미도 없다. 연구 태도상으로 보면 초기부터 있었던 호교론적 연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가 하면, 다양한 방법론이 여전히 혼재해 있고, 연구 주제별로 보면 주로 교회사적 차원의 연구가 두르러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천주교 측 자료나 개신교 측 자료냐에 따라 같은 사람에 따라 평가가 상이할 정도로 이들은 그 동안 별도의 장에서 연구되고 서술되어 왔다. 천구교권의 그리스도교 연구와 개신교권의 그리스도교 연구는 그 주제와 시각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 관련 연구는 주로 교회사적 차원에서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앙 수용과 전파 과정 및 그 사이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에 관한 연구가 주종을 이룬다. 가령 해방 이후 출판된 한국 가톨릭 관련 연구 자료들 121건(논문 + 단행본) 가운데 통시적으로 다룬 연구는 12건으로 10% 미만이며, 일제 시대 이후의 시기를 다룬 자료들 역시 15건, 10% 정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78%에 해당하는 94건이 주로 조선 후기 신앙 전래 경로, 초기 교회사, 인물 소개, 전례의 문제 등에 치중해 있다. 특히 해방 이전 자료들은 이 가운데서도 천주교 박해, 순교의 문제를 다룬 '순교자 전기'의 성격이 강하다. 이와 함께 우리 전통 종교 및 문화와의 비교 연구, 민족주의적 시각에 기초한 연구 등 한국적 상황을 중시한 그리스도교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그나마 초기의 자료는 주로 외국인 주교의 시각에서 본 한국 천주교회 성립과정 및 순교자 현양에 관련된 자료 일색이고, 일제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에 의한 천주교 연구가 일부 있었을 정도로, 한국인에 의한 연구는 일제시기를 지나도록 거의 없었다. 해방 후 유홍렬(柳洪烈)이 천주교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최석우(崔奭祐), 이원순(李元淳) 등 일부 교회사가들이 6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뒤, 70, 80년대에 들어서야 다양한 연구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수준이다. 70, 80년대 들어 출판되었던 천주교회 통사(通史)인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증보판, 1975), 최석우의 논문집인 {한국천주교회의 역사}(1982), 조광의 {조선후기 천 주교사 연구}(1988) 등에서도 거의 조선 후기나 일제시기 전반부까지의 상황에 머물고 있을 만큼 초기 그리스도교 연구에 치우쳐 있는 형편이다. 여전히 천주교 신앙 수용과 전파 과정 및 그 사이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개신교의 경우도 일제 초기까지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개신교 수용과정, 선교상황 및 한국의 실정 소개 등에 연구의 초점이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만한 책은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隱者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897)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자체를 주로 다룬 연구서는 아니지만,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글을 읽고서 한국 선교에 착수했을 만큼, 미국권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그러다가 한국인에 의한 연구가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에 백낙준(白樂濬)이 한국 그리스도교사(개신교사)를 영문으로 정리하면서부터이다. 이후 3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 신학 자체에 대한 논의가 생겨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이것은 한국 신학 사상사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로 이어졌다. 크게 말해 천주교가 주로 순교자 현양 관련 연구에 치중했다면 상대적으로 개신교는 신학 자체에 대한 논의를 더 중시한 셈이 된다. 그렇더라도 주로 교회사적 차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해왔다는 점에서는 양쪽이 마찬가지이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본격적인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통사 중에는 교회사적 차원에서의 연구가 두드러진다는 말이다.

 

교회사 차원의 연구는 다시 천주교권의 '순교자 현양을 위한 교회사 연구',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두루 나타나는 '선교론적/호교론적 차원에서의 교회사 연구', 주로 개신교권에서 보이는 '민족의식적 차원에서의 교회사 연구'로 나뉜다. 이 가운데서 순교자 현양 차원의 교회사 연구는 달레(Dallet)의『한국천주교회사』(1874)와 김창문, 정재선 편 『한국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1963),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증보판)』(1975) 및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1983), 이원순의『한국 천주교회사』(1970), 박도식의 『순교자들의 신앙: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사』(1978), 김옥회의 『순교자들의 전기: 한국 천주교회 약사』(1986) 등의 두드러진 입장이다.

 

선교론적/호교론적 차원의 교회사 연구에는 개신교권의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영문판 1929, 한글판 1973), Clark(Allen D. Clark),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1961, rev. CLSK, 1971), 보수적 선교사 신앙의 차원에서 한국 기독교의 의미를 서술하고 있는 김성준의 『한국기독교사』(기독교문화사, 1993) 등이 있고, 천주교에 관해서는 주재용,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1970), 양한모,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생각한다』(1982),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1982) 및 『한국 교회사의 탐구』(1982), 유홍렬,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1983), 이원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1986) 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입장의 교회사 연구는 1990년도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부각되고 있는 연구 경향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교회사 연구이다.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 1982), 조광의 {조선후기 천주교회 연구}(1988) 및 {한국천주교 200년}(198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1989·1990) 등이 대표적이다. 이 민족의식 차원에서의 연구는 송길섭, 이성삼, 전택부, 오윤태, 김광수 등 1970-80년대 교회사가들에 의해서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밖에 민족의식을 중시하는 차원의 연구 중에는 이미 18세기에 이루어진 이기경(李基慶)의 {闢衛編}과 같은 서학 비판적인 연구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인 연구들은 아직 서학, 즉 그리스도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이전, 초기 그리스도교사에 흔히 있었던 일이기에, 개신교까지 한국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난 100년 이래로 이러한 연구는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193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근본주의적 선교론의 관점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으나, 그 후 한국적 상황을 중시한 신학논문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960년대에 이르면 주체적 한국신학, 한국적 그리스도교의 형성을 위한 노력들로 이어지게 된다. 윤성범의『기독교와 한국사상』(1964), 유동식의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책들은 한국적 상황에 어울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적 모색이라는 점에서 관심 깊게 보아야할 연구서들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80∼90년대에 등장한 본격적인 한국 신학사상사 연구서들, 즉 유동식의 『한국신학의 광맥』(1982), 송길섭의 『한국 신학사상사』(1987), 변선환의 『한국적 신학의 모색』(1997), 그리고 가장 최근에 저술된 주재용의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1998) 등의 사상적 토대로 작용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의 정치 현실과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과학적 시각을 중시하는 민중신학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이러한 움직임을 반영하여 1990년대에는 '민중사관'에 근거한 교회사가 출판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기독교100년사』(1992)가 이와 관련한 최대 작품이며,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주제별로 쉽게 풀어쓰고 있는 문규현의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I·II, 1994)도 의미 있는 자료이다.

 

비록 민중신학적 한국 교회사가 그리스도교사, 신학사상사 등의 연구로까지 이어지고 있지는 못한 형편이지만,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안에 사회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1990년대에 역사학과 사회과학적 시각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90년대는 종교학적 시각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기이다.

 

이상과 같은 흐름들을 토대로 하여 이제부터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역사를 주요 단행본들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연구의 시각 및 범위

본 연구는 무엇보다도 천주교권 자료와 개신교권 자로를 두루 다루고자 한다. 그 동안은 천주교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와 개신교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거의 별개로 이루어져 왔다. 같은 단행본에 들어있는 경우에도 별도의 부분에서 상이한 시각을 가지고 논의되어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韓國文化史大系}(第VI卷 宗敎·哲學史. 高大民族文化硏究所, 1970)에서도 천주교사는 [韓國基督敎史(一)]이라는 이름으로 유홍렬(柳洪烈)이, 개신교사는 [韓國基督敎史(二)]라는 이름으로 김양선(金良善)이 비슷한 분량으로 독자적으로 서술했다. 최근의 연구라고 할 수 있을 한국종교학회 주최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에 대한 성찰(1997년 가을, "해방 후 50년 한국 종교연구사")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는 분리된 별도의 장에서 다루어졌고, 한국종교사회연구소에서 펴낸 {1945년 이후 한국 종교의 성찰과 전망}(1989)이나 {한국인의 종교}(정음사, 1987)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다수는 여전히 '교회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망라한 종교학적인 차원에서의 전문적인 그리스도교 연구사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천주교 교회사와 개신교 교회사를 함께 다룬다고 하더라도 개신교 연구자는 천주교 교회사를 개신교 교회사의 전사(前史) 정도로 다루고, 천주교 연구자는 개신교 교회사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이것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이(相異)한 교회관에서 오는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연구자가 부족하다는 것이 더 큰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 전래된 초기의 그리스도교는 천주교든 개신교든 모두 '한통속의' 서양종교로 비쳐졌다는 점에서, 이 둘은 반드시 동시에 연구될 필요가 있다. 별개로 연구하는 것은 한국 그리스도교라는 '숲'이 아닌 개개 종파라는 '나무'만 보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사 연구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천주교나 개신교, 정교회까지 포함하여 모두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령 교회사 연구라면 도가 서술도 가능하겠지만,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그리스도교사'라는 이름으로 분리 서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만일 세계종교사의 그리스도교 부분이나, 세계 그리스도교사를 서술할 때 천구교만 서술하거나 개신교만 서술한다면 호교론적 종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각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난 100여 년간 이루어져 온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태도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하고자 한다. 신학이나 한국 교회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그 연구의 태도가 어떠했으며, 그 동안 연구자들이 어떠한 시각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연구해 왔는지 종교학적인 차원에서 종합적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려는 것이다. 천주교권 자료와 개신교권 자료를 두루 다루되, 두 자료의 시각이나 연구 경향이 상이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체적으로는 이들을 구분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천주교 연구와 개신교 연구 모두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일부라는 시각에서 이들을 조화시켜가며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천구고와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권 자료와 개신교권 자료의 시각이 상이한 데다가, 대부분의 자료들이 자기 종파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현실을 감안하여, 전체적으로는 이들을 다른 장(章)에서 다루겠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일부라는 시각을 가지고서 서로 조화시켜가며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는 말로 사용할 것이다.

 

그 동안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주로 한국이라는 곳에서 산출된 다양한 장르의 그리스도교 관련 글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연구 제로들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제대로 할 겨를이 없었다. 본 연구는 한국 그리스도교를 가능한 한 통시적이고 전체적으로 다룬 단행본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그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평가해보고자 한다. 교회사 관련 책이든, 신학 사상사 관련 책이든 한국 그리스도교 안에서 전개된 일들을 가능한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단행본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일부 관련 논문들을 보조자료로 삼겠다. 그렇지만 개신교의 장로교나 감리교 등 특정 종파만을 다루거나 천주교의 교구 내지는 수도회의 역사 등을 다룬 연구서 및 교육, 사회사업 등 주변적인 사항들을 다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특정 인물이나 박해, 순교, 조상제사 등 특정 개념만을 다룬 글들은 제외했다. 먼저한국 천주교 연구의 대표적인 저작들의 내용과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III.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1.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경향

1) 순교자 현양을 위한 교회사 연구들

(1)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1874)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용과 초기 전파 과정을 비교적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대작은 한국 밖에서 나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인 샤를르 달레(Claude-Charles Dallet, 1829-1878)의 {韓國天主敎會史}(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Paris, 1874)이다. 달레는 조선에서 전교하던 신부들의 편지와 그들이 불어로 번역하여 보낸 조선측 기록이나 보고들 - 특히 다블뤼(Daveluy) 주교가 조선의 국한문 원자료를 불어로 번역한 자료들 - 에다가 정약용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 등을 일부 참조하여 이 책을 남겼다. 초기의 기록이 순교자 전기를 중심으로 남아있었던 것처럼, 달레의 기록도 순교자에 관한 기록이라면 중복되는 경우에도 삭제하거나 일부러 요약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다. 그만큼 이 책은 기본적으로 한국에서의 천주교 박해와 순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순교 정신을 현양하려는 종교적이고 호교론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책이다.

 

그것도 한국에는 한번도 머문 적이 없는 외국인 신부의 눈으로 프랑스 측 자료를 중심으로 한 저술인 까닭에 한국 교회 내부의 시각은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 서론에서 조선의 정황에 대해 개관한 이후 본론(전체 2편 9권)에서는 주로 조선 내 프랑스 신부들의 활동 상황과 신자들의 박해 및 순교 상황 등을 담은 서한의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개 방식은 마치 조선이라는 나라를 실험자가 실험실에서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보는' 자세처럼 느껴진다. 조선을 제 3의 땅으로 보고 관찰하는 '객관적 관찰자'의 시각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그곳에 조선 측 관변 자료에서 보이는 교회관련 사회와 정부의 입장 등, 일차적인 자료들이 들어갈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전모를 밝혀주는 책은 물론 아니다. 더욱이 1871년까지의 일만 수록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문제는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의 실상을 밝히고 있는 대다수의 책들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불과 2년만에(1872-1874) 비교적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에서, 한편에서는 달레의 천재성을 볼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각종 자료를 고증 없이 성급하게 이용했다는 점도 느껴진다. 가령, 그의 책의 골격은 다블뤼 주교가 프랑스로 보낸 자료들을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졌는데, 다블뤼 주교가 불확실하니까 이용하지 말라고 한 자료들까지 저술에 사용한 점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조선 역사와 제도, 언어, 풍속, 관습에 대해 다룬 서설(序說)은 조선의 자료가 아닌, 다블뤼 주교가 모은 자료 및 중국과 일본의 자료 일부를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을 중국의 속국 차원에서 묘사한다든지, 조선의 기원을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따라 본다든지, 임진왜란 이래로 부산 지역은 여전히 일본인이 점령하고 있다든지 하는 예 등을 거론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이와 함께 조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상숭배, 점복, 푸닥거리 등 미신적 행위가 활개치며, 유교와 불교라는 '저급한' 종교적 전통들만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선의 천주교인들의 신앙에 대해 논할 때는 모두 좋은 가문의 영재들이라는 식으로 주로 묘사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보잘것없지만, 천주교인이 된 자는 한결같이 훌륭한 자들이라는 '천주교 우월적'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분량으로나 체계로나 달레의 책은 초기의 책이면서도 여전히 당시의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을 가장 상세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이고 기초적인 책으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다양하게 흩어져 있던 방대한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고 체계화했다. 그런 탓에 달레 이후의 저서는 거의 대부분 달레의 작품을 참고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어도 달레의 서술 내용과 중복되는 시기에 관해서는 달레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드브레의 {조선천주교회의 기원과 발전}(1924)도 달레의 것을 요약한 데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도 달레의 책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했다.

 

(2) 일본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의 연구

달레 이후에는 본격적인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서는 등장하지 않다가, 일제 시대 야마구치(山口正之)나 우라카와(浦川和三郞) 등과 같은 일본인 신부에 의한 연구서들이 한 두 권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우라카와는 우라카와는 달레의 {朝鮮天主敎會史}와 로네의 {韓國79位殉敎福者傳}(1925)을 참조하여 1846년까지 일어난 순교자들의 전기를 기록한 800쪽 이상의 방대한 책 {朝鮮殉敎史}(1944)를 남겼으며, 그밖에 赤木仁兵衛, 石井壽夫 등의 학자가 사회사, 사상사적 측면에서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선 천주교사를 근대적으로 연구한 선구자적 인물은 야마구치이다. 그는해방 후 일본에서 {黃嗣永帛書硏究}(大阪: 全國書房, 1946)를 출판했고, 그의 죽음(1964) 직후에는 유고집 {朝鮮西敎史}(大阪: 全國書房; 東京: 雄山閣, 1967)가 출판되었다. 그의 책 중 {黃嗣永帛書硏究}는 다소 평면적 접근이기는 하지만, 「황사영 백서」를 처음으로 집중 분석한 책이며, {朝鮮西敎史}는 16세기 조선 그리스도교의 여명기에서부터 조선천주교회 박해기를 거쳐 「황사영 백서」 및 프랑스 주교들의 서한을 소개하는 형식을 통해 조선 천주교회사를 정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동·서양의 다양한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교회사적인 시각보다는 문화사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 참신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이상 일본인에 의한 연구 결과들이 달레의 저술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고, 전체적으로는 후기의 사건들까지 기록하고 있는 근대적인 연구 성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체로 한국 천주교인의 자율적인 태도가 배체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달레의 작품이 그렇듯이, 외국인에 의한 연구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 전반의 연구는 일제시기 내내 전무하다시피 했다. 거의 예외적인 책이 1931년 조선교구설정 100주년 기념으로 경성천주교청년연합회(京城天主敎靑年聯合會)에서 간행한 {朝鮮天主公敎會略史}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그 동안의 교회사가 주로 외국인 신부에 의해 씌어졌고,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도 일본에 납치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부터 잡으려는 움직임이 컸으나, 그러한 경향을 배제하고서 한국인의 신앙과 교회 창설을 한국인의 자율적 역사로 서술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그 분량이나 학문적 깊이 등에서는 매우 빈약해, 정식 연구서라 하기는 힘들다. 서술 태도 역시 자기해명적 호교론의 자세에서 기록된 문헌이다. 그 후 한국 그리스도교(천주교) 연구는 다시 황무지 상태에 빠진다.

 

1930년대에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으며, 그 후 40년대에 들어서도 일제의 한국 그리스도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관련 연구가 거의 휴면기에 들어갔다. 해방 이후에도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1950년도 초반까지 그리스도교 연구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답보상태로 접어들었다. 천주교의 경우는 해방 이후에야 유홍렬, 홍이섭, 주재용 등이 등장해 한국인에 의한 교회사 관련 문헌들이 비로소 쌓이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도 한국 천주교회사 최대의 통사서(通史書)로 남아있는 유홍렬의 작품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3)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1949 - 1975)

전형적인 유교적 양반 가문에 속하던 집안의 분위기를 뒤로하고 천주교로 개종한 이래(1936), 한국 천주교 역사 연구에 뜻을 둔 유홍렬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일본인 신부 야마구치(山口正之)의 논문을 주로 참조하여 1949년에 {한국천주교회사} 상권(上卷)을 출판했다. 이 책은 1871년까지의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처럼, 첫 번째 천주교 박해인 신유교난(1801)과 그 후 1830년까지에 이르는 교회 재건 운동 정도만 수록했었다. 그 이후 1962년까지의 자료들을 곳곳에서 모아 기존 상권의 내용을 보완하고 나머지 역사를 이어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1962년도에 출판했다. 이것은 피아첸티니(Arthur Piacentini) 수사가 엮은 리델(Ridel) 주교의 전기(1890)와 뮈뗄(Mutel) 주교의 일기 및 그의 {한국 가톨릭의 기원과 발전}(Le Catholicisme en Coreé, Son origin et ses progres, 1924)을 주로 참조하고 우리 나라의 각종 자료와 비교하며 엮은 것이었다. 초기 프랑스 신부들의 기록과 그간에 쌓인 한국의 기록들을 견주면서 비교적 체계 있게 종합해낸 책으로서, 1975년도에는 최종 증보판이 출판된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 가운데 가장 큰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워낙 척박한 토양에서 이루어놓은 종합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이 책의 기본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시각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지나친 천주교 우월적 호교론이 두드러진다.

 

가령 이 책은 천주교 신앙 전래 이후로 1970년대 중반까지의 교회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개신교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상당히 열등시한다. 루터의 언행에 대한 그의 언급은 한 예이다. 한국의 전통적 종교문화에 대해 언급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개신교의 일파인 장로교의 조선 선교를 묘사할 때, 그리고 조선말에 생겨난 민족종교 동학(東學)에 대해 언급할 때 이러한 태도가 보인다. 또 서학을 금지하는 정부의 행위는 '악마의 책동'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조선 정부가 청나라의 힘을 빌어서라도 '동학란'(東學亂)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는 당연시하거나 정당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유홍렬은 천주교 전교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은 '선'(善)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은 '악'(惡)으로 보는, 비교적 단순한 태도로 일관한다. 대부분의 사건을 천주교 신앙과 언어에 근거한 호교론적 태도로 판단하며, 천주교 신앙 전래에 도움이 된 일이라면 거의 대부분 복된 일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 하느님께서 돌보시는 천주교인에게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듯 묘사하고, 교회사의 주요 인물들을 다분히 신앙중심적인 기준에 따라, 아니 교리를 얼마나 잘 지켰느냐 하는 교리중심적 기준에 따라 그 신앙 상태를 점검해 나간다.

전체적으로는 국사학자답게 연대기적 사실 나열에 충실하다가도 종교적 관점이 개재될 때는 지극히 초보적인 호교적 신앙관을 드러낸다. 교회 역사상의 온갖 자료들을 소화하려던 노력은 대단하지만, 그 해석이 지나치게 '신앙적'이어서, 그가 제시한 역사적 사실마저 옳은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달레의 책이 쓰여진 지 1세기가 지난 후의 출판물이지만(수정증보판의 경우), 전체적으로 1세기 전 외국인 신부의 시각과 대동소이하다. 1970년대에 완성된 글이라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이와 함께 그의 몰민족적 태도도 두드러진다. 천주교의 전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면, '조선은 소인국(小人國)'이라는 자기비하적인 태도도 빈번히 드러낸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천주교도의 박해는 "하잘 것 없는 정권 다툼과 타인을 흠뜯는 당파싸움판에," "줏대 없고 얼빠진 정치 하에서" "희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정도로 민족적인 시각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천주교회 전래사는 구세력을 타도하는 "무저항주의의 거룩한 투쟁사이며 몽매한 인지를 근대적으로 계발시킨 개명사"라 요약한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천인공노할' 자료로 평가할 수밖에 없을 황사영의 {백서}에 대해서도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만을 높게 사며 극찬한다.

 

이러한 시각은 천주교 신앙과 조선의 종교 문화를 지극히 대립적인 것으로, 조선의 전통은 없어져도 좋을 것으로 보는 황사영의 시각과 거의 같다. 또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천주교박해(辛丑敎難)의 원인을 많은 사람이 천주교회로 나오게 되자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교회를 비방한 미신 신봉자 무당들"과 "제주도 사람들의 배타주의 사상"에서 찾을 때도 이러한 몰민족적 시각이 스며있다. 한국적 맥락, 한국의 종교문화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박해받던 당시의 신앙에 감정이입된 상태에서 서술해나간다고 말해도 과장만은 아니겠다.

 

유홍렬의 책이 한국 천주교회사 분야로는 불모지와 같은 상황에서 어렵사리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한 역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 자신의 독창적 그리스도교사관에 근거한 연구라기보다는 달레 신부와 리델, 뮈델 주교의 기록을 확인하는 차원에 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한계이다. 특히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시각과 내용을 많은 경우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프랑스와 한국 양측의 자료를 비교하며 엮다 보니, 다른 장(章)에서도 이전 장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실을 중복, 서술하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그때 그때 준비된 자료를 연대기적으로 엮다 보니 이전 자료들과 겹치는 사례들을 철저히 가려내지 못한 데서 온 결과로 보인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천주교인 '순교사'(殉敎史) 수준이듯이, 유홍렬의 책도 '순교사'에 가깝다. 주로 외국인 신부의 입국, 순교, 국내 신자들의 순교 동향, 정부의 천주교 박해 등, 신앙인의 눈에 비친 교회의 '희생적' 사실들을 나열하는 수준에 머문다. 주로 외국인 신부들의 입국 의도를 강조하고, 달레의 저술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정하상, 김대건 등의 개인 기록을 반복, 소개하는 식으로 전개해나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순교사에 가까우면서도, 정작 그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근거와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미진하다. 그것이 한국천주교회를 이끌어 가는 핵심으로 분석되어야 마땅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저 '천주의 은총'으로 해석하는 수준에 머문다.

 

교회가 조선에 끼친 구체적 영향 분석이나 천주교회의 전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들어갈 여지도 거의 없다. 한국 천주교회의 '독자적 창설'을 강조하지만, 무엇이 독자적인 창설인지, 무엇을 <한국> 천주교회라고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미흡하다. 여기서 한국은 그저 장소의 개념으로만 등장할 뿐, 한국의 역사·문화가 천주교회와 맺을 수밖에 없는 관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75년에도 증보판이 나왔고, 형식상으로는 1970년대의 자료들까지 일부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상 거의 모든 내용이 일제시기 이전까지만 다루고 있다는 문제점도 있다. 1970년도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낸 {韓國文化史大系}(第VI卷 宗敎·哲學史)의 일부인 유홍렬의 [한국기독교사(一)]도 그 시각이나 주제, 연구 범위 등에 있어서 거의 이와 같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천주교회 통사서로서는 지금까지도 거의 유일한 책이다. 바꾸어놓고 말하면, 이 책 이래로 오늘날까지도 체계적인 한국 천주교회 통사는 아직 등장하고 있지 못할만큼 천주교 통사 부분은 아직 미진한 형편이라는 뜻이다. 1950-60년대에 걸쳐 홍이섭과 주재용이, 60년대 이후에는 이원순, 최석우 등이 천주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상당수 발표했고, 개신교 목사였던 김양선도 천주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많이 간행했다. 김구정, 김옥희 등도 교회사 연구에 전념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연구와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 통사의 기초는 최석우에 이르러 확립된다.

 

2) 호교론적 한국 천주교회 연구 ― 최석우의 『한국천주교회의 역사』(1982)

유럽 유학 후 1960년대에 돌아온 최석우(崔奭祐)는 현재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독일 본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 『초대감목대리구의 설립과 한국 가톨릭 교회의 기원』(1961)을 통해 한국 초기 교회사와 관련된 여러 종류의 서양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 창설기의 상황을 자세히 밝혀주고 있다. 무엇보다 1964년 가톨릭대학 부설 한국교회사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가 1975년 새롭게 독립한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주관하면서 이 분야 연구의 폭을 넓히는데 결정적인 공을 쌓고 있다. 유홍렬의 호교론적이고 종파중심주의적 태도는 최석우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수정되기 시작한다.

 

최석우는 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썼던 논문들을 모아 {한국천주교회의 역사}(1982)를 출판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해 들어가는 방식과 태도가 달레나 유홍렬에 비하면 객관적이며, 또 진지하고 정교하다. 그러나 체계적인 연구서라기보다는 논문집의 형태인 까닭에 각 장마다 서로 겹치는 내용들이 있으며, 또 각 장마다 글의 난이도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내용도 여전히 19세기 조선천주교회사 서술에 머물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저자 자신이 서언에서 "개항 이후의 현대까지의 교회사 연구가 너무 부족한 현실"이라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도 20세기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는 극히 미진하며, 일제 시기 한국 천주교회 연구는 전무하다. 다만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한 북한 종교실태를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부분(제7장)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총체적 연구를 위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본다.

 

전체적인 시각에 있어서 이 책은 달레나 유홍렬의 그것과 비교해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유홍렬이 천주교 호교론적 신앙관에 근거해 몰민족적 태도를 강하게 나타냈다면, 최석우는 다소 온건해진다. 유홍렬이 아무런 해석도 없이 일방적으로 타종교 억압적, 천주교 중심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다르게, 최석우는 유교적 배타성, 조선왕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문제점 등도 직접적이기보다는 우회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런 식으로 온건한 천주교 중심적이고 옹호론적 태도를 견지한다.

 

동학난을 다룰 때나 개신교와의 관계를 다룰 때도 유홍렬처럼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천주교 중심적 판단을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한글 성서번역의 역사를 다룰 때는 이미 개신교권에서 선교사 로스가 이응찬의 도움으로 1887년에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를 번역 간행했는데, 최석우는 1910년 한기근 신부가 번역한 {사사성경}(四史聖經)을 최초의 번역으로 거론한다. 어떤 때는 협의의 교회론을, 어떤 때는 광의의 교회론을 펼치며, 한국에서 벌어진 교회관련 일들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목소리가 약하다. 그만큼 천주교 중심적이고 옹호론적인 역사 서술에 익숙해 있다는 증거이다.

 

순교자에 대한 언급에서도 비록 찬양 일변도로 나가지는 않지만, 한편에서는 "천주교인들의 불굴성과 순교자들의 영웅적 용기 자체가 하나의 웅변적 호교(護敎)였을 것이고, 유배지에 있어서의 교우들의 궁핍한 생활과 인내도 이교인에게 감화를 주었을 것"이라며 순교자적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박해의 결과는 역시 교회의 승리를 의미한다"며 박해를 이겨낸 교회를 '신앙의 견지에서' 해석하면서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의 천주교회가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둔감한 채, 그 동안 식민지 정책과 포교정책을 분간하지 못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거론한다. 박해 자체를 주로 '신앙의 사실'로 해석한다는 점에서는 달레, 유홍렬 등의 시각과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 조선 정세와 정책을 잘 읽지 못한 책임이 교회에도 있음을 지적할 때는 신앙의 사실과 정치·사회적 사실을 구분하는 다소 중립적인 자리에 선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최석우의 한국 천주교회 역사 연구에서도 '한국'은 그저 장소 내지는 공간 개념으로 등장할 뿐, 한국 사회, 민족, 문화, 역사 등이 지닌 독특성과 구체성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천주교회 중심의 역사적 사실(Historie) 나열에 충실하며 옹호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사실은 해석이 있음으로써 유의미해지고 방향성도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회사를 다룬다 해도 '사실사' 나열에 머물기보다는 천주교회의 한국 토착사, 신앙 해석사(Geschichte)의 측면을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해석은 당연히 사회적 흐름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한국>이라는 장소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인 토양이 된다. 여기서 분파적 서술은 애당초 자가당착이 되고 마는 것이다.

 

3) 민족사적 한국 천주교회 연구 ― 조광(趙珖)의 {한국천주교 200년}(1989)

이러한 현상은 조광(趙珖)의 80년대 후반 저서인 {조선후기 천주교사연구}(1988) 및 {한국천주교 200년}(1989)에서 어느 정도 수정된다. 조광의 연구에 이르러서 한국 천주교회사는, 비록 정치·사회사적인 의도가 두드러지고 있기는 하지만, 비로소 '해석'되기 시작한다. 그는 민족적인 시각과 교회 비판적인 시각을 어느 정도 겸비하고서 달레, 유홍렬은 물론 최석우에게서도 근본적으로 교정되지 않고 있는 호교론적인 시각과 사실기술적 태도를 지양한다. 조광은 '동아시아 문화사'에 근거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한국 전체 안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도록 반성적으로 해석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독한 박해가 이루어져 왔던 현상을 두고 제국주의적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대외적 현상과 성리학적 질서에 대해 반성하고 실학을 비롯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던 대내적 분위기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달레가 「황사영 백서」등의 자료에 근거해 천주교인 박해를 주로 당쟁(黨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유홍렬이 그대로 답습하던 것과는 다른 태도이다. 천주교 박해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성리학적 통치 질서에 반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지, 당쟁 자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가 '효'(孝)라고 하는 사회질서 전통으로서의 조상 제사를 용납하지 못한 것은 동양 문화 전통에 대한 서유럽 교회의 몰이해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교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정약용, 이승훈, 이벽 등 초기 천주교 사대부들이 천주교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을 단순히 '배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애당초 학문적 관심과 보유론적(補儒論的) 자세에서 출발했던 이들 양반 계층의 당시 입장에서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평가를 한다.

 

유홍렬은 교회가 사회 고위층의 교회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곳곳에서 유명인사들의 입교를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소개하지만, 조광은 사실상 천주교회는 양반 교회가 아니라 중인 이하의 교회, 상놈들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도리어 중시한다. 신자들의 교리 수준이 낮아서 가성직 제도가 시행된 것이라고도 보면서, 한편에서는 교회를 위한 자발적인 노력의 반영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가 조상 제사를 용인하지 못한 편협함은 물론 한일합방을 묵인하거나 그에 동조했던 일, 일제하 3·1운동에 교단 차원에서 참여하지 못한 일, 그리고 신사참배를 인정했던 일들 모두 변명의 여지없이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조광의 이러한 지적에 이르러서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 민족 공동체의 일부이고 또 일부이어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광은 교회를 비판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비판 속에서도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애정을 담는다. '순교'의 의미를 그저 신앙의 차원에서만 찾지 않고, 개인의 인격이 매몰되어 있던 조선 후기적 상황에서 자신의 양심과 인격을 보고서, 자기의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었다고 하는, 개성의 발견 차원에서 높게 해석하며 평가한다. 이렇게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애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행위는 유홍렬이나 최석우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 연구 태도에 중요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광의 이 책은 세세한 한국사, 교회사의 자료에 근거를 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에 근거한 자기 반성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교회사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은 없다는 말이다. 한국 천주교 200년의 역사에 대한 한국 정치·사회적 시각에서의 반성 수준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에 관한 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범주보다는 한국 역사 연구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하겠다.

 

한국 천주교 연구사에 끼친 조광의 공헌은 한국 천주교 문화의 절대성과 상대성, 보편성과 특수성을 구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천주교 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를 상대화시킬 줄 아는 것은 성숙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는 1980년대에 들어 자신을 상대화시켜 보기 시작한 셈이라고 하겠다.

 

4) 1960-90년대 한국 천주교 연구의 흐름 및 과제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유홍렬, 홍이섭이 활동하였고, 최석우, 이원순 등이 활동을 개시한 이래, 1970년대에 이르면 최동희, 김옥희, 금장태, 조광, 노길명 등의 연구자가 등장하여 한국 천주교회사 관련 분야에 현재까지 활발히 작업하고 있다. 1977년도에는 최석우 신부가 주도하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정기 연구 논문집인 {교회사연구}를 창간해,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철학, 종교사와 관련하여 '주제별 천주교회사' 연구에 몰두할 뿐,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체적 연구로까지는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이와 함께 1980년대에는 앞에서의 연구자들과 최기복, 하성래 등이 등장하고, 90년대 차기진 등의 연구자가 가세하면서 철학, 역사, 정치, 문화 등으로 연구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도 초기 교회사, 박해사 등을 연구하는 경향은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다. 한국 교회사 연구의 현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이원순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전반에 어울린다:

 

한국 교회사 연구는 한국신학을 위한 구원사 연구와 한국 사학을 위한 인간사 연구의 두 국면으로 전개되어 왔다. 전자의 경우 우리 나라의 교회사 연구에서 순교자 현양 의식에서의 순교사 연구는 있었으나 아직 한국 신학을 위한 구세사적 연구는 지극히 미흡하다. 아니 불모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순교사 연구, 그것도 순교자 현양 차원의 연구는 한국 종교사, 좁게는 천주교사를 박해자와 피박해자로 이원화해 대립적으로 보게 만든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는 과연 박해와 순교의 역사이기만 한가? 천주교회가 전래되던 시절 많은 피해자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피해를 '박해' 내지는 '순교'라고만 볼 때, 그러한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있는 조선시대의 종교 문화, 특히 유교적 질서를 적대적이고 오류에 물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는 문제를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 연구가들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큰 과제로 남아있는 셈이다. 순교사 수준, 더 나아가 교회사 수준을 넘어, 아니 교회사를 다루더라도 한국 종교문화의 일부라는 시각을 가지고 한국 종교문화적 상황에 어울리는 체계적 천주교사를 낳아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개신교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1990년대의 한국 천주교 연구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개신교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만의 경향은 아니다. 사실 세계 가톨릭 교회사 연구의 주요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김성태의 다음과 같은 비판적 지적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가톨릭 교회에서 나온 많은 교회사 저서들은 가톨릭 교회에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물론 이 저서들은 교회 분규와 이단 운동의 발생에 대한 배경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후에는 더 이상 이 운동들의 진전 과정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가톨릭 교회사가들은 그들이 가톨릭 교회인이기 때문에 엄밀한 가톨릭적 의미의 단어로 교회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일치의 분위기가 증진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가톨릭 역사가들이 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해 무관심하고 교회사의 대상을 가톨릭 교회에 국한시키는 것은 역사적 결함이다. 폭넓은 안목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사회의 역사를 취급함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성태의 지적대로 하자면, 개신교인이 더 많은 한국에서조차 천주교 중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전개하는 것은 자칫 '게토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애당초 천주교회사만을 서술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해도, 천주교회사를 중심으로 서술할 수는 있어도 개신교회사를 무시하거나 열등시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 하에 개신교의 실정만을 다룬 대다수의 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일이다. 종파적 사시 나열에 머물지 말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 동안 전무하다시피 했던 종교로서의 천주교 연구, 신학사상사적 통사 연구 등, 그리스도교 관련 사건과 추이에 대한 사상사적, 종교사적, 신학적 해석작업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5) 국학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 ―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1928)

천주교권의 자료를 주로 다루었으면서도, 천주교권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는 작품이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 1928)이다. 이 책은 간단한 서양 소개로부터 그리스도교의 東來를 거쳐 憲宗 당시의 기해교난까지를 담고 있는 상권과, 조선 근세사에서 그리스도교로 인해 일어난 전반적인 영향 및 조선 외교사를 싣고 있는 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광의 연구를 제외하고서, 앞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서들이 모두 '호교론적 관점'에 있거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책은 1920년대에 국학(國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연구서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연구서들이 '벽위' 계열의 서학 비판서를 제외하면,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인에 의해 저술된 것에 반해 이능화는 불교신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한국 종교 전반을 연구했다. 그 가운데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조선민족의 시각을 견지하고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한국그리스도교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능화가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던 1920년대는 그리스도교는 물론 한국사 전반이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국내에서 참고할 수 있을만한 본격적인 문헌이라고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1874), 드브레의 {한국천주교 - 그 기원과 발전}(1924)와 같은 불어권 천주교 자료들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조선 측의 자료를 도외시하고 있고, 또 이능화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유학중이던 개신교 교회사가 백낙준이 주로 미국 선교사들의 자료를 이용해 한국 개신교사를 학위논문으로 정리하고 있던 시절에, 그는 천주교 측 자료들에다가 조선 측의 관변(官邊) 기록 및 그리스도교를 한국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하게 해줄만한 학인들의 자료들을 참조해 써내려 갔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조선 기독교사를 서술한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 한국문화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개신교보다는 천주교회를 주로 다룬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개신교를 다룬 문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당시의 조선 정치 현실상으로 보면 천주교가 더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해 가는 과정도 외교적 문제 해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천주교 박해의 원인을 당쟁이라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고, 조선조 유교 사회도 소수 양반을 위한 것이었지 일반 백성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보며, 당시의 쇄국정책도 강하게 비판할 만큼 정치적인 관심을 기울일 때 더욱 드러난다. 그는 조선의 근대화과정을 중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조선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 및 역할을 정치, 외교, 사회, 문화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검토한다. 한 마디로 '사회사적 관심'을 가지고서 그리스도교를 서술해나간 셈이다. 이러한 연구 방법 내지는 시각이 이능화 그리스도교 연구의 근대성, 이능화 저술의 독자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그의 저술이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라 '자료의 나열'에 그친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는 바로 그러한 나열을 통해 한국종교사를 서술하고자 했고, 또 한편에서는 한국의 종교들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선구자라는 평가는 정당해 보인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국 그리스도교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불교도로서 그리스도교에 대해 독자적으로 연구했다는 사실에서 이능화는 근대적인 의미의 '비교종교학의 개조', '한국종교학의 아버지'로까지 평가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이 책은 후대 천주교회사가나 개신교회사가 모두에 의해 동등하게 인용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호교론적이고 종파중심적 연구태도를 완화시켜 주고, 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데서도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적 의미가 지대하다 하겠다.

 

 

2. 한국 개신교회사 연구의 경향

1) 선교론적/종교 변증적 차원의 연구: 1920-30년대 개신교 연구 경향

이능화가 조선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연구하던 무렵, 한국 개신교 안에는 신학이라는 것이 비로소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연구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길선주, 최병헌, 윤치호 등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학적 원리와 내용을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 전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양주삼, 남궁혁, 송창근 등이 등장해 한국 안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단초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의 그리스도교 변증적 신학 연구는 본격적인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라고 할 수는 없어도 한국 신학사상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그러나 역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전반과 관련하여 1920년대에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백낙준이다.

 

(1)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1929)

백낙준(白樂濬, 1895-1985)은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를 정리하여 한국 교회의 위상을 평가하여 준 역사신학자"이며, 근대적 의미의 교회사가이다. 물론 백낙준이 등장하기 전에도 한국에 개신교의 선교 상황을 소개한 문서들이 여러 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안내서에 가깝지,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총체적인 서술이나 연구서들은 못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와 관련해서 보자면, 이 작품들은 백낙준과 같은 교회사가가 한국의 교회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토대로 작용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백낙준은 이러한 저술들에 근거해 1927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1929년 숭실전문학교에서 영문 간행)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다. 그는 이를 통해 최초로 한국의 개신교사를 정리하였다. 이 책은 방대한 서양의 자료를 수집해 서구적 학문 방법론에 따라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적이다. 아울러 저자는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미주에 알리기 위한 예비적인 지침서 차원에서 이러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사 정리에 공헌한 야마구치(山口正之)가 비판하는 대로, 조선 측의 사료는 거의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데 이 책의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저자 자신이 미국 선교사가 되어 한국을 피선교국으로 대상화해버린데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사태를 잘 반영해준다: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宣敎史)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사상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 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자초지금에 선교사로 일관되어 왔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 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가 비록 선교사(宣敎史)라 하면서도 "외인 선교사(宣敎師)에 의한 피선교 과정으로 해석하여서 만은 아니 된다"고 이어서 덧붙이고 있지만, 사실상 외인 선교사에 의한 선교 과정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외국인에 의한 선교만이 아니라 한국인에 의한 선교도 포함되어 있다는 식의 소극적 선교론에 머문다. 선교라는 것을 주로 '한국 밖에서 한국 안으로'라는 방향성에서 보는 까닭에, 한국 측 사료를 인용했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서구적 시각에 의한 일방적 선교론의 차원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총론에서 이렇게 자신의 연구 태도를 밝히고 있다: "선교사 측에서 능동적으로 선교를 선행한 사실에 치중하여 이 편에서 다루는 초기 전래사를 선교사로 서술하기로 한다."

 

그는 이러한 선교사관을 예일대학교의 라투렛(K.S.Latourette) 교수에게서 배운 뒤, 선교사는 단순히 종교사의 일부가 아니라 인류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역사과학의 한 분야로 규정한다. 그는 이 선교적 사관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벗어나 인간의 근원적인 신앙의 세계와 보편적인 인류 문명의 연관성을 본다. 자연스럽게 개신교 전래 과정과 조선의 개화 과정, 개신교의 전파와 신(新) 문화의 전개를 같은 맥락에서 본다. 한국 민족사의 핵심을 문화사로 보고, 개신교가 한국 문화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시각을 견지한다. 그러나 문제는 선교사를 아무리 정치, 경제, 역사학의 일부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의 표현대로 '전수자(傳受者)'보다는 '전수자(傳授者)'를 더 중시하는 한, 그 때의 한국문화에의 공헌이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사실상 그리스도교 전수자(傳授者)는 한국의 국권 상실에 간접적으로 공헌하였다는 점을 이 책은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사실상 '한국개신교사'라기보다는 '한국개신교 선교사'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호교론적 관점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 전반기에 등장한 책이면서도 그 연구 자세는 여전히 타의 모범이 된다. 라투렛 교수가 추천의 서문(1927)에서 말하고 있듯이, 1920년대의 작품이면서도 서양사학의 방법 응용에 능숙하고, 자료를 취하고 해석하는 데 어느 정도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그리스도교도 '희랍화', '로마화'를 거침으로써 성장해오고 전해져왔다는 해석학적 입장도 견지할 만큼 학문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시대에 크게 뒤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으로 인해 한국 개신교의 역사적 접근이 제대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홍이섭은 이 책을 "선교사 연구에 길이 남을만한 기념비적 서술"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2) 1930 - 60년대의 연구 경향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의 출판을 전후로 해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上}(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上卷, 1928) 및 {조선남감리교회삼십주년기념보}(朝鮮南監理敎會三十周年記念報, 1930),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약사}(朝鮮耶蘇敎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 1929), 그리고 클라크(Charles Allen Clark)의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1930) 등이 출판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교파 중심의 역사서술이며, 선교론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1934년에는 각 교단별로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정리하는 문서들이 발간되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를 쉽게 풀어쓴 장정심의 {조선기독교50년사화}(1934), 채필근의 {조선기독교발달사}(1939)등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해방기를 지나 1950년대에는 김양선이 '고난과 구원,' '대립과 화해'라는 사관을 가지고 승리자로서의 교회와 신도의 모습을 밝힌다는 취지 하에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1956)를 썼다. 이 책은 백낙준의 연구이래 가장 학문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1950년대를 전후한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를 선교론적 시각에서 정리해주고 있다. 그 사관에 있어서는 백낙준의 선교사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클락(Allen Clark)의 History of Korean Church(1961), 오윤태의 {日韓キリスト敎交流史}(1968), 이호운의 {한국교회초기사}(1970) 등으로 이어지면서 1960년대까지 한국 개신교회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한국 교회의 역사를 주체적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보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민경배(閔庚培)이다.

 

2) 민족사적 교회사 연구

(1)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1972·1982)

민경배는 백낙준을 위시한 기존의 교회사 연구서의 시각을 '선교사적 사관'이라 규정하고서, 한국의 그리스도교회사는 이제 그것을 벗어나 '민족교회사관'의 차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교회와 인사들의 자료"를 일방적으로 인용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을 중시하려는 입장이다.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의 주체는 한국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 교회사에서의 '민족'은 188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그 역사 해석을 주도하는 한 주체"이다. "'민족'이란 것이 우리 교회 신앙의 구성 전개 과정에서 '접수'와 '거부'라는 측면을 통해 그 주류 형성의 핵심으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눈을 가지고 그는 한국 교회가 민족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고, 풀어나갔는가 하는 점을 역사 서술의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선교사(史)의 교회사는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교회의 연장으로서 그 성장을 통계표에서 측정하는 양(量)으로서 이해하는 데 그칠 수가 있다. 거기서 한국 교회는 한 대상이지 주체는 아니고, 따라서 생(生)이 아닌 형(形)으로 경화되고 만다. 주체로서의 민족교회사를 쓰고자 하는 대임을 가지고 우리는 한국 교회사를 써나갈 생각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소책자 {한국의 기독교회사}(현대신서7, 1968)를 펴냈고, 그것을 근간으로 대폭 증보한 {한국기독교회사}(1972)를 다시 냈다. 다시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1974), {교회와 민족}(1981)을 위시하여,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 1982) 등을 펴내면서 자신의 민족교회사관을 공고히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정리한다: "민족교회사 방법론은 교회가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에큐메니칼한 사명을 전제하고, 그 성립과 전개에서 민족의 교회로서 구형된 정신과 과정을 주체로 역사를 일괄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내적 뜨거움(內燃)의 외적 연장(外延)이 한국의 그리스도교회사라고 본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의해 한국 그리스도교사를 "종래 서방의 기독교에 초점을 두어 그곳으로부터 복음의 확장의 역사로 한국 기독교사를 보았던 시각이 많이 교정되었다. 한국 기독교사를 한국 안쪽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다. 무엇보다 '민족교회사관'을 전개하면서 마치 '민족'의 중심은 개신교뿐인 냥 글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교회 역사 해석의 시작을 1780년대가 아닌, 1880년대부터라고 보았을 때, 그리고 개신교는 민족의 문제를 경시한 천주교에 대해 "반민족(反民族)이 아니고 오히려 친민족(親民族)이란 존재 양식을 시위하여야만 했다"고 표현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천주교는 과연 민족의 문제에 전혀 무관심하기만 했던가? 서구 천주교회가 조선의 오랜 전통인 조상 제사를 거부한 데 대해 초기의 상당수 양반 교인들이 천주교회를 비판하거나 등지게 된 것은 천주교인이 보여준 민족 중심적 태도가 아니던가? 이 책에서는 마치 천주교는 그 자체로 몰민족적(沒民族的)이고 개신교는 그 자체로 민족적이라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것은 또 천주교는 몰민족적이기에 박해를 받았고, 개신교는 민족적이기에 그렇지 않았다는 듯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초기 한국의 개신교가 박해를 심하게 받지 않았던 것은 개신교 선교국이었던 미국 등지에서 의도적으로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지, 개신교 자체가 민족을 중시하는 종교였기 때문은 아니었고 천주교 자체가 몰민족적 종교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민족 문제에 대처하는 양식, 신앙적 정서 상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민족의 문제에 본질적인 차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민족교회사관'을 적용하려 했다면, 신·구교 중 어느 한 쪽을 지나치게 경원시하는 태도는 곤란하다. 민경배는 초기 천주교회는 "민족 주체의 역사에서 양해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판단한다. 이런 식으로 개신교에만 민족교회사관을 적용하는 바람에 민족에서 한쪽 팔을 떼어버리고 마는 꼴이 된다.

 

종교학적 관점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민경배의 종교관에서 온다. 그는 기본적으로 "근대 한국은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 심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유·불·선(儒·佛·仙)은 "정신적 차원이 고갈되고, 그 형식과 명분만으로 무게 없는 반복만 되풀이하던 근대는 종교적 신앙과 정신 생활의 전례 없는 진공기"라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신비적인 종교인 그리스도교밖에는 이 백성에게 호소할 종교가 따로 없었다"는 헐버트(H. B. Hulbert)의 말을 자연스럽게 인용한다. "황막한 새 정세의 전개에 기댈 곳 없는 서러움을 안은 듯한 모습이 프로테스탄트가 선교되기 직전의 우리 나라 실정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무엇보다 이미 그보다 100년전에 이 땅에 들어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던 천주교는 안중에 두지 않은 발상이다. 그리고 개신교의 선교를 지나치게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본 결과이기도 하다. 개신교가 한국 민족의 종교적 요청에 부응했던 것은 사실이겠으나, 개신교의 성공을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정치, 사회적인 측면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여러 사람이 지적한 대로, 당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서 한국인은 자신을 보호해 줄 정치적 힘을 찾은 것이지, 새로운 '영적 실재'를 갈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중국과 일본을 믿지 못하던 조선이 구미 문명에 기댄 것이지, 그리스도교라는 '영적 실재'에 대번에 종교적으로 동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정치·사회적 출발점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리스도교가 한국의 '종교적' 공백기를 메워주었다는 판단은 설득력이 약하다. "한국기독'교회사'"가 아무리 "신 은총과 신앙 체험의 차원 다른 힘과 생성의 역사,"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을 전제하는 그리스도교 중심의 역사라 해도, 그것 역시 <한국>이라는 장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한국 역사의 일부이어야 하고, 한국의 다른 것들을 존중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민족사관은 외세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정치·사회적 혼란기인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교회의 상황을 조명하기에는 어울리지만, 해방 이후 역사를 해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민경배의 연구로 인해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자들은 <사관>(史觀)이라는 거시적 안목을 지니게 되었고, 민족의 문제를 더욱 중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민족의 문제를 중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사도 한국사의 일부일 수 있고, 또 일부여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이 점에 민경배 연구서의 의의가 있다 하겠다.

 

민경배의 민족교회사관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 역사를 민족의 관점에서 정리하려는 시도가 송길섭, 이성삼, 전택부, 오윤태, 김광수, 이만열 등 1970-80년대 교회사가들에 의해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이 시기 교회사 연구의 주된 관심은 교회의 역할을 민족사 안에서 규명하는 가운데 교회사와 민족사를 연결짓는 작업이었다. 이 가운데 이만열은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1981)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와 민족의식의 상관성을 밝히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김인수 같은 이는 선교론적 차원, 민족의식적 차원, 민주사관 등을 비판하면서 일종의 '섭리사관'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섭리'라는 말의 모호함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보인다.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 기독교의 역사}(1989·1990)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작품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1989·1990)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한국교회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보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이 연구는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소속 다수의 연구자가 공동으로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다. 다수 연구자가 참여한 공동 연구였던 만큼 각 장마다 연구 결과들이 기존의 연구서들에 비해 비교적 정교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각 연구자들 간에 입장 차이도 드러난다는 문제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능한 한 신학, 사학, 사회학 등의 연구 성과들을 수용하고자 하는 '종합적 태도'를 보였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세심한 정성이 돋보인다.

 

이 책에서는 "총체적인 역사 이해"를 위해 "교단, 교파, 종파의 폐쇄적 분위기를 쇄신"하고 "한국 기독교사를 민족사라는 큰 틀 안에서 조명"하고자 하며 "자료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다루고 "민족의 현실 문제나 장래에 책임성 있는" 태도로 임하고자 한다는 시각을 견지한다. 하지만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러한 시각과 목표가 실제로 달성되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무엇보다 교화적 폐쇄성을 극복하고자 한다지만, 머리글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의 집필자 모두 "고백적 기독교(개신교) 신앙인들로서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이 땅과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였다고 믿는 가운데 한국 근·현대 민족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밝혀보려는 입장에서 집필"한 것인 한, 다시 말해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 섭리' 속에서 보고자 하는 한, 다양한 종교 전통이 녹아 있는 우리 민족 전체의 문제를 전적으로 포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수정 역 신약성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폡}(1885)가 국한문혼용체로 된 것에 대해서는 "한글만 사용할 경우 정확한 의미 전달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도 대상인 지식층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다시 옹호하며 말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범한다(165쪽). 이러한 현상은 이 책이 기본적으로 "개신교 역사가들의 자기 고백의 성격을 띠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12, 143쪽). 또 146, 148쪽에서는 느닷없이 호교론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입장들이 튀어나오고 있음도 볼 수 있다. 그밖에 157, 174, 182쪽 등에 보이는 '섭리사적' 접근 태도를 참조할 것. 이것은 자연스럽게 호교론적이고 자기옹호적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한 예는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傳來)되었고, 개신교는 '수용'(受容)되었다고 하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이 말 속에는 개신교가 주체적인데 비해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비주체적이라는 듯한 뉘앙스가 들어있다. "천주교회사와 개신교회사를 단절이 아닌 대화와 연결로 보고자 한다"지만, 여전히 개신교회사의 '전사'(前史) 수준에서 보려는 경향도 완전히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 교회사가인 이원순이나 최석우 등이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되었고, 한국 개신교회는 '선교'되었다고 보는 시각과 방향상은 반대이지만 같은 차원이다. 개신교 신앙인은 개신교에서 더 주체성을 보고, 천주교 신앙인은 천주교에서 더 주체성을 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천주교 도입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개신교사 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교단, 교파, 종파의 폐쇄적 분위기를 쇄신하겠다"는 본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저변에 한국 천주교의 활동을 깔고 개신교의 수용과 정착, 발전의 역사를 추적해본다"면서, 천주교회의 활동은 말 그대로 저변에 깔려있기만 할 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또 "한국 기독교사를 민족사라는 큰 틀 안에서 조명하고." "민족의 현실 문제와 장래를 책 임지는" 것으로 다루고자 한다지만, 한국 그리스도교 안에서 벌어진 일을 참으로 민족적이고 주체적으로 보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가령 천주교 도입기에 있었던 '가성직 제도' 혹은 '가교계 제도'에 전혀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으며, 서구의 무력을 동원해서 조선을 위협해주기를 바라던 「황사영 백서」에 대해 민족적인 차원에서의 비판도 없다. "민족의 현실 문제와 장래를 책임지는" 태도로 임한다면서 전체적으로는 현상적 보고에 머무는 경향이 크다.

 

한국의 종교, 문화 등의 주체를 이루는 '민중적' 시각에서의 분석도 부족하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선교사, 교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전개된 교회의 흐름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크다. 머리글에 의하면, 이 책의 연구자는 스스로를 민족교회사관, 민중교회사관을 전개한 제2세대의 작업을 토대로 하는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제3세대로 자처하고 있지만, 기존의 민족교회사관 수준, 그것도 '위로부터의' 민족교회사관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같은 민족교회 사관이라도 '아래로부터의' 민족교회사관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전달자의 시각이 아니라 수용자의 시각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는지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이 책도 주로 그리스도교 '전달자'의 시각에 서 있으며, 한국인은 그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수용'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약하다.

 

하지만 다른 역사서들에 비해 한국 개신교의 종파주의적 성향을 지적하고 '하나의 개신교회'를 이루기 위한 노력들을 소개할 때, 그리고 서구 의존적 신학 풍토 등을 부분적이나마 비판적으로 제기할 때의 정신은 비교적 높이 평가할 만 하다. 100여년 전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선교정책이었던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결과적으로 한국인 교역자 양성을 저해했고, 장기적으로는 한국 교회의 발전을 저해시켰다는 지적에서는 민족의식도 일부 보인다. 아울러 거의 모든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일본 신사에 참배했던 사건에 대한 비판적 회고, 그리스도교계의 친일(親日), 부일적(附日的) 행동에 대한 반성적 조명 부분에서는 개신교 신앙의 고백적 차원과 민족의식적 차원이 모두 보인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고, 비교적 꼼꼼히 글을 전개해나가면서 그래도 초종파적으로 역사를 서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다른 연구서들보다 진일보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으로 인해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가 진정한 의미의 초교파적, 한국민족적 연구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신구교 교회사가들의 공동집필로 한국에서의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모두의 역사가 함께 어우러진 '한국 그리스도교회사'"를 내야 할 과제가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자들에게 남아있는 셈이다.

 

 

3.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정착기, 1980년대 ― {한국기독교백년사대계}(1987)

1980년대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그 동안 걸어온 길을 종합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된 때이다. 그 상징적인 연구서가 80년대 후반 4 명의 연구자에 의해 편찬된 {한국기독교백년사대계}(전4권, 1987)일 것이다. 이 책은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에서 "한국 개신교가 선교이래 각 분야에 끼친 영향의 발자취를 발굴하여서 전체적으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새로 조명"하려는 의도에서 기획, 집필되었다. 전택부의 {한국교회발전사}, 송길섭의 {한국신학사상사}, 이만열의 {한국 기독교문화운동사}, 민경배의 {한국 기독교사회운동사} 등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입장을 간단 간단하게 평가해보기로 한다.

 

(1) 전택부의 {한국교회발전사}

먼저 재야 교회사가 전택부의 {한국교회발전사}(1987)는 통사적 차원의 한국 개신교회 성장사이다. 그는 여기서 천주교회와의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초기 개신교 역사 사이사이에 천주교 역사를 끼워 넣었으나, 여전히 천주교의 역사는 개신교의 <배경사>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발전'이라는 말을 개신교의 양적이고 질적인 성장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박순경이 옳게 지적한대로, 양적 성장이 반드시 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지거나 그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그 용법과 전체 시각의 문제가 없지 않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민족교회'를 강조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교회로 형성될 필연성에 놓여있었다"고 지적한다. "처음부터," 달리 표현하면 "최초의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의 헌신적 선교활동 당시부터" 그리스도교는 우리 민족 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논지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 안에 헌신적 선교활동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민족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자세히 풀어주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2) 이만열의 {한국 기독교문화운동사}

다음, 이만열의 {한국 기독교문화운동사}(1987)를 살펴보자.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 문화의 정립이라는 과제를 두고, 기독교에 의한, 기독교와 관련된 그 동안의 문화를 일단 정리해보려는 뜻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제 1 편에서는 조선 후기에 전래된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인 봉건사회를 개화시키는 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기능을 실증적으로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는 한글 성서 번역과 성서 반포 사업, 그리스도교의 근대 교육사업, 근대 출판문화 운동 전개 등을 중요한 그리스도교 문화사업으로 거론한다. 이를 위해 참고자료도 풍부히 인용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교 문화 운동을 주로 다루면서도 문화라는 것이 한 사회의 다수가 공유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한 듯 싶다. 그리스도교 문화를 한국문화 전반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화가 반드시 한국문화에 긍정적으로 공헌한 것만은 아닐진대, 이러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역기능에 대한 분석도 결핍되어 있다는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안고 있다. 그리스도교 문화와 한국 문화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논했어야 참으로 <한국> 그리스도교문화운동사가 되었을 것이다.

 

(3) 민경배의 {한국 기독교사회운동사}

세 번째로, 민경배의 {한국 기독교사회운동사}(1987)를 보자. 사회 운동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연구서로는 최초의 작품이다. 그리스도교의 사회 운동이 지닌 신학적 이념과 운동,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한 자료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한국 그리스도교 사회 운동의 핵심적 동인을 '복음의 역동성'에서 찾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처한 사회적 상황을 신앙적으로 적극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리스도교야말로 개화추진 세력이 될 수 있었고, 근대화의 현실적 통로였으며, 반일(反日) 민족주의적 행동을 보여주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사회 운동을 벌이게 해준 그리스도교적 이념이나 사상의 측면을 주로 강조하다보니, 정작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운동을 벌였는지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 사회 운동의 주체가 그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장로교나 감리교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YMCA같은 그리스도교 단체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운동을 이끌어간 주동 세력에 대한 세세한 연구가 절실하다. 그럴 때에만 '사회 운동'의 본질이 밝혀지겠기 때문이다.

 

(4) 송길섭의 {한국신학사상사}

마지막으로 송길섭의 {한국신학사상사연구}(1987)가 있다. 송길섭은 이른바 '포괄적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1980년대까지의 한국신학의 사상적 전개를 다룬다. 포괄적 민족사관은 '한국 기독교의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하면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신앙·신학적 유산'을 검토하려는 관점이다. 민경배 등에 의해 민족사관이 강조된 이래 종종 민족과 민중을 구분하는 입장도 생겨났으나, 송길섭은 이들을 한꺼번에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는 민족적 위기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한국 그리스도교회는 민족이라는 큰 단위 위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입장이다. 한국 민족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의 세력 앞에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을 받던 '민중'이 된다는 시각에서 이 글을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송길섭은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의 고삐도 당긴다. 한국 신학 안에는 '민족 구원 신앙'과 '개인 구원 신앙'이라는 두 갈래가 있다고 그는 본다. 이 가운데 민족 구원 신앙에는 '현실 긍정적이고 현세 지향적 신앙 형태'가 있었지만, 선교사들의 정교(政敎)분리 원칙에 따라 형성된 개인 구원 신앙은 '현실 부정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보수 신앙 형태'로 흘러가 버렸다고 본다.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교권을 쥐었던 선교사들의 개인 구원 신앙은 주체적 한국 신학의 성립은 거부하고 미국 교회의 신학적 유산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이와 함께 선교사 중심의 초기 한국 교회는 우리의 오랜 정신 문화를 무시하고 단죄하는 '문화적 우월주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이 책의 그리스도교 비판정신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천주교 신학 사상과의 관련을 도외시한다. 애당초 개신교 신학사상을 다루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교회 제도나 문화와 관련된 것이 아닌, 신학과 사상이라는 무형(無形)의 것에 천주교나 개신교라는 종파간 구분을 확연히 하기는 곤란한 노릇이다. 천주교와의 관계 속에서 다루었거나, 적어도 종종 언급이라도 하는 수고를 곁들였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리고 박형룡, 정경옥 등의 신학은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도, 송창근이나 김재준 같은 이들의 신학 사상을 그만큼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은 의아스럽다. 이와 함께 '포괄적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한국의 신학 사상을 다루려고 했다면, 3·1 운동 이후 신사참배와 같은 친일적 행동을 한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도 있게 등장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송길섭의 {한국신학사상사}를 포함하여, 『한국기독교백년사대계』는 무엇보다 한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정착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출판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을 하나하나 보면 문제점들이 없지 않지만, 전체적인 기획으로 보면, 이 저술들로 인해 한국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과거를 회고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힘을 축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작업이 그 동안 추구해왔던 민족주의적 시각을 든든히 하고 그 위에서 세계 그리스도교를 향해서 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대작인 셈이다.

 

 

4. 신학사상사 연구 및 천주교·개신교 비교연구의 등장: 1980-90년대

1980년대에 주목할 또 다른 그리스도교 연구의 특징은 송길섭의 {한국신학사상사}가 그랬듯이 한국신학사상사적 연구서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80년대에는 60년대 시작된 윤성범의 {기독교와 한국 사상}(1964), 유동식의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에서 부각된 토착화 논의, 한국적 신학 논의가 정착되고, 그것을 신학사상사적 차원에서 전개할 수 있게 된 때이다.

1) 천주교권의 한국신학사상사 연구

그렇지만 이 신학사상사 차원에서의 연구는 대부분 개신교 신학자들의 연구들이다. 1980년대에 들어 천주교권의 토착화 신학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으나, 아직 신학 자체에 대한 논의에 머물고 있을 뿐, 그 동안 한국 안에서 전개된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로까지 이어지고 있지는 못한 형편이다. 토착화 논의 가운데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산하 사목연구소에서 정기 발표회 자료들을 단행본으로 묶어낸 '사목연구총서 시리즈' 중 『전례·영성의 토착화』(5권), 『교회교육·복음선교의 토착화』(6권), 『신관의 토착화』(7권), 『인간관의 토착화』(8권)가 있으며, 그 밖의 단행본으로는 황종렬의 『한국 토착화신학의 구조』(국태원, 1996)가 눈에 띤다. 기타 한국 천주교회 토착화를 전반적으로 다룬 논문들로는 김승혜, "한국교회 토착화의 오늘과 내일"(1985), 윤이흠, "천주교회는 한국 종교가 되어야 한다"(1985), 이순성,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토착화 양상"(1982), 함세웅, "천주교의 수용과정과 토착화의 문제"(1985), "한국천주교에서 한국과 가톨릭의 의미"(1994) 등을 거론할 수 있다.

 

(1) 황종렬의 『한국 토착화신학의 구조』(1996)

이 가운데 한국 황종렬의 책은 토착화신학과 관련하여 천주교와 개신교의 자료들을 두루 다루고 있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서남동과 안병무 류의 '민중신학적 토종론', 변선환의 '다원적 종교해방신학론',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의 '육화토착론', '적응·대화론' 등을 중심으로 한국 토착화신학의 주요 종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다스림' 자체가 일차적 토착화이며,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은 토착화의 결과라는 시각을 견지한다. 인간은 이러한 하느님에 의한 일차적 토착화를 드러내야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고 그는 본다. 이것은 한국 민족과 문화를 그리스도교 중심적 토착화의 한 대상이나 객체로 보는 방식을 벗어날 때에야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미 우리의 민족과 문화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하느님의 숨결에 우리가 '가 닿는' 데서 하느님에 의한 일차적 토착화가 구체화한다는 입장이다. 이미 하느님에 의해 토착되어 있는 그곳에 이르려는 우리의 노력이 이차적 토착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토착화신학은 단군신화를 중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을 암묵적으로 견지하고자 한다. 이 책의 문제점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리스도교 중심적이고 한국문화 객체적이었던 그 동안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개관하고, 우리의 종교와 문화를 하느님에 의한 토착활동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진일보한 시각을 견지한다. 천주교권의 연구자이면서도 개신교 자료까지 공히 다루고 있는 데다가, 토착화 신학 자체만을 다루는데 머물고 있는 한국 천주교 연구의 실정에 비추어보면 분명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교와 우리 종교문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한국의 종교문화가 하느님에 의한 일차적 토착하의 산물이라면 한국의 종교문화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말인지 전체적으로 모호하게 들린다. 한국 토착화신학 전체의 구조를 분석한 책이라기보다는 민중신학, 종교해방신학, 200주년 기념사목회의 및 심상태의 입장 정도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정도에 머문다는 점에서 종합적인 연구서는 되지 못한다.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한 한국 천주교 신학사상사를 산출해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2) 개신교권의 한국 신학사상 연구

아무래도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 사상사적 연구는 주로 개신교권의 신학자들에게서 드러난다. 그 예들로, 앞서 보았던 송길섭 외에 유동식, 주재용의 연구를 거론할 수 있겠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마도 유동식을 꼽아야 할 것이다.

(1) 유동식의 {한국신학의 광맥}(1982)

유동식은 1968년 {기독교사상}에 "한국신학의 광맥"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 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14년 후 과거의 글들을 묶고 다시 써 {한국신학의 광맥}(1982)을 단행본으로 내놓았다. 이 책은 주체적이고 토착적인 시각에서 신학자들을 인물별로 유형화하고, 1900년 이후 발간된 신학잡지들을 중심으로 한국 신학의 발전 단계를 나누는, 비교적 독창적인 접근법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이 책의 의의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특수성을 중시하는 가운데 한국 신학 사상을 한국사상사의 맥락에서 다루고자 한다는 데 있다. "한국사상사를 일관해오고 있는 기초 이념이 한국 그리스도교 100년사를 통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상사의 기초 이념을 '풍류'(風流)에서 찾는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이 "풍류"라는 개념을 '한 멋진 삶'이란 말로 풀면서 신학 안으로 가져온다.

'한'·'멋'·'삶'은 한국 신학 안에서 각각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의 세 양식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본다. 이 가운데서 그는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을 중시하면서 문화적 자유주의의 틀 위에서 '한국적 신학'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이에 따라 때로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과 같은 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지만, 이 세 조류는 결국 상호 보완하면서 한국 신학이라는 하나의 큰 전체, 광맥을 형성해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유동식은 한국의 신학적 흐름을 전체적으로 포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세 조류가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지만, 결국 그 자신이 진보적 사회 참여의 신학을 존중하는 가운데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을 얼마나 조화시키며 볼 수 있는지는 의문시된다. 그렇더라도 그가 "한국 교회가 지닌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형성된 개성 있는 신학," 즉 '한국적 신학'의 윤곽을 중시하는 가운데 한국 신학 사상사를 '한국 사상사'라는 토양에 어울리게 만들어놓으려는 작업을 하는 것은, 풍류가 과연 한국사상의 기초 이념인가라는 문제를 떠나, 그리스도교를 한국적인 것 위에 정초 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의 발로이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를 염두에 두고서 "한·멋·삶"은 "삼일적(三一的) 구조"를 지닌다 말하고, 한국 신학을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세 조류로 구분하면서 이들을 그리스도교의 '삼위'(三位) 개념에 대응시키면서 지나치게 '셋'이라는 숫자에 집착할 때는 과연 그가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특수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적 구조로 새로 틀 지으려는, 다분히 그리스도교 중심적 시도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동식의 이 연구는 한국 신학 사상을 한국 사상과의 관계 속에서 논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 한국적인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신학사상사'의 선구자격이다.

 

(2) 주재용의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1998)

앞에서 보았던 송길섭의 {한국신학사상사}가 1987년도 작품이고, 유동식의 {한국신학의 광맥}이 1982년도 작품이니, 1998년에 나온 주재용의 이 책은 한국 신학 사상사의 최신판이다. 주재용은 한편에서 신학을 "교회가 역사 속에서 하는 모든 선교적 활동을 학문적으로 반성하여 교회 선교의 목표와 그 성격을 규정하는 일"로 정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신학 역시 "일종의 신념 체계로서 한 사회의 권력 구조를 이끄는 주도적 세속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면서 나름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학관은 신학도 여러 학문들 가운데 하나이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다소 융통성 있는 자세이다. 선교사(宣敎史)라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소명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보려는 자세인 것이다.

 

그는 '민중적 민족신학'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이러한 신학의 역사적 추이를 살펴본다. '오늘 여기',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신학, '신학의 한국적 상황'을 중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그의 표현대로 "사건과 사실 나열의 역사가 아니라 해석사이고 이념사"이다. 그러나 과연 민중적 민족신학의 차원에서 충실히 해석해내고 있는지는 아직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아직 민족·민중과 신학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신학의 보편성과 민족·민중이라는 특수성은 어떻게 조화하는지 그 고리를 분명히 드러내줄 때 민중적 민족신학의 의미, 신학과 한국적 상황의 관계가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그리스도교신학사}라는 이름 하에 여느 책들처럼 개신교 신학사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여전히 불만이다. 천주교의 신학 사상사적 상황을 간혹이라도 덧붙였더라면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신학사상사로서의 가치가 더욱 높여졌을 터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체성을 한국의 민중적 현실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사를 한국정치·문화사의 일부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고 있다는데 기본적인 의의가 있다.

 

(3) 심일섭의 『한국 토착화신학 형성사 논구』(1995)

또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책 중의 하나가 심일섭의 『한국 토착화신학 형성사 논구』(1995)이다. 이 책은 신학을 한국 안에 뿌리내리려는 의도 하에 그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으며, 그 동안 전개되어온 주요 토착적 신학의 사례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국문화의 원류를 중시하는 가운데 한국 신학사상 형성의 선구자들 16명의 사상을 간단히 개관한 뒤, 한국 기독교 최초의 호교론자 정하상, 최초의 변증론자 최병헌, 초대교회의 개척자 한석진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토착화 신학의 선구적 모형으로 이용도, 김교신, 유영모, 이호빈 등의 생애와 사상을 선교신학적 차원에서 정리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해나간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의 신학 혹은 한국적 기독교를 중시한 다양한 사람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평면적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는 까닭에 토착화신학 형성사에 담긴 역사적 굴곡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민족 전통문화를 중시한다면서도 단군신화류의 '원형'만을 강조하다보니, 그리스도교를 맞아들였던 조선시대를 민족문화의 단절기, 암흑기로 간단히 치부해버리는 모순을 범한다는 데에 있다. 심일섭은 조선시대를 "경직된 유교문화의 병폐가 극에 달한" 시기로서 "민족문화가 말살되고 민족전통이 질식되는 반역의 암흑기"라고 극단적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교가 조선시대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중시할 필요는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한국문화의 관계를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단군신화에서 우리 민족의 이념적 원형을 찾고 그리스도교는 단군신화의 정신과 묘합(妙合)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일면 타당하다. 진정한 한국신학은 한국적인 것과, 특히 그 원형과 조화할 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단군신화에만 우리 민족의 원형이 담겨있는가? 단군신화가 아직도 우리 정신사에 그만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 민족 정신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한 시대(조선)를 완전히 삭제해버리고서 과연 '한국신학'이라는 것을 총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삭제한다고 해서 삭제되기나 하는 것일까? 심일섭의 극단적인 입장은 그 자신이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콜링우드의 '역사적 지식'론과도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정리하고 있는 한국신학자들의 상당수가 조선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세례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도 모순된다. 한국 토착화신학 전체를 자칫 단군신화적 조명 수준에 머물게 할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 그 밖의 연구자료들

어찌되었든 이상의 연구들은 주체적인 한국신학을 이루기 위한 시도들의 일부이다. 이러한 시도에서 우리는 '종교해석학'을 본다. 종교 자체는 물론 그 연구도 시대와 장소를 거부할 수 없는 것임을 충분히 숙지하고서, 그러한 사실을 충실히 반영해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들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가 서구의 냄새를 줄이고 한국적 향기를 더욱 풍김으로써 한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하고, 또 그리스도교 연구를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종교연구의 일부가 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들인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경재의 『해석학과 종교신학 - 복음과 한국종교의 만남』(1994)은 그리스도교도 한국의 종교문화와 '지평융합'을 이루어 가는 하나의 종교일 수밖에 없음을 해석학적 방법론과 함께 적절히 지적하고 있는 저서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안에 한국의 문화, 한국적 주체성을 더 담아내려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인 노력은 70-80년대를 풍미한 민중적 그리스도교 연구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서남동, 안병무 등에 의한 민중신학은 가장 극단적인 한국적 신학의 결과이다. 신학과 신앙의 주체를 전적으로 한국의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보고자 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은 더 이상 서구 신학의 연장이기를 거부한다. 무엇보다 "민중신학은 한국 사회 및 한국인 자신의 문제를 신학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 기독교계에 처음으로 열어주었다는, 다시 말하면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상황과 문제, 고민과 의식을 스스로의 땀과 고통을 통해 신학으로 형상화시켰다고 최초로 내세울 수 있을" 신학이라는 데 '한국신학'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 민중신학으로 인해 한국의 그리스도교 연구는 서구에서도 조명을 받게 된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에서 나온 Minjung Theology(1981)와 이것의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을 {민중과 한국신학}(1982)이 그 대표적인 책이다. 이 책의 필자 중 한사람인 주재용은 민중이 주체자의 위치에 있을 때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명이 완수될 것이며, 개신교 초기 접촉사도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하는 민중에 의해 수용된 역사라고 보았다.

 

물론 이러한 민중적 입장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아직 정작 민중적 사관에 근거해 한국 그리스도교를 전체적으로 개관한 연구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 신학에서 지향하는 민중의 당파성 때문에 그것이 자칫 한국인 전체가 공감하지 못한 채, 한 시대를 풍미한 운동의 하나로 머물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민중이라는 말로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의 본류를 충실히 담아낼 수 있을 때, 민중적 사관은 더욱 보편적인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민중적 그리스도교사관은 "그 동안 교회사 서술에서 소외되어 왔던 교회 여성과 평신도, 지방 교회와 군소 교파 교회의 역할과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자료로서 특정 이념이나 정신보다는 한국의 신학 사조를 주제별로 개관하고 있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편 『한국기독교사상』(1998)이 있다. 전반적인 주요 신학 사조를 근본주의, 오순절운동, 자유주의, 경건주의, 신정통주의, 청교도주의로 구분하고서, 이러한 사조를 세계교회사적 입장과 한국교회사적 입장에서 각각 나누어 12명의 교회사학자들이 집필한 연구논문집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사상을 세계 교회사적 맥락에서 볼?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은 좋으나, 각각의 사조에 대한 세계 교회사적 입장과 한국 교회사적 입장이 상당 부부 중복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한국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어떤 사조가 더 영향력 있고 더 중요했는지, 한국 사회문화와 주고받은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종합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 논문모음집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3) 천주교와 개신교의 비교연구

이와 함께 한국 천주교 200주년, 한국 개신교 100주년이 되던 1984년을 전후해서 교회사나 신학적 관점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를 비교하는 논문이 본격 등장하기도 하다. 이 가운데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역사적 관계를 다룬 연구 결과들을 먼저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최석우,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화"(1982); 윤경로, "초기 한국 개신교 측의 천주교관"(1982), "신구교 관계의 역사적 고찰: 개신교 선교사들의 견해를 중심으로"(1984); 오경환, "개항기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1983); 김승혜,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의 2백년·1백년의 시점에 서서"(1984); 이원순,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앙 도입전개의 比較史論"(1984),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비교사적 一考"(1985); 최석우, "개화기의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1991); 정양모,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과 대화"(1992).

 

그리고 이러한 교회사적 관점의 비교 연구는 1990년대로 들어가면서 신학적 성격의 비교연구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가운데 1960년대에 이루어진 연구결과들을 포함하여 대표적인 논문들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민경배, "신교와 구교의 신학교육 비교연구"(1966),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과의 대화"(1967), "신교와 구교"(1971); 김균진,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적 차이"(1979); 정양모, "하나인 믿음"(1979); 이장식, "개신교에서 본 로마 카톨릭 교회"(1988); 이형기, "가톨릭과 개신교, 무엇이 같고 다른가"(1989); 김규진, "특별 사제직과 만인 사제직의 문제"(1994),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교회관"(1995); 김광식,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회징표론에 대한 비교 연구"(1992); 김명용. "오늘에 있어서의 개신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논쟁점"(1994).

 

무엇보다 종교학적 시각을 가지고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를 비교한 연구 결과로는 1990년대 말에 등장한 신광철의 『천주교와 개신교: 만남과 갈등의 역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가 돋보인다. 이 분야에 처음 등장한 단행본으로서, 이 책에서는 "한말·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 및 상호 이해의 내용과 성격을 한국종교사의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서구 그리스도교사에 나타난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 유형을 정리한 뒤, 한말, 일제시기에 발간된 다양한 자료들을 이용해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호 관계가 지니는 종교사적 의미를 비교적 성실하게 고찰하고 있다. 비록 연구의 시대가 일제시대까지로 제한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개항기로부터 한말에 이르는 기간에 나타난 천주교회와 개신교의 역사적 관계만 집중적으로 살펴본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 분야의 연구 결과들이 대부분 소규모 논문의 형태이며, 그것도 교회사나 신학상의 비교에 머물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학적 시각을 견지한 신광철의 단행본이 지닌 의미는 적지 않다 하겠다.

 

 

5. 다양해진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 1990년대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적 연구

이와 함께 1990년대 역사학과 사회학적 차원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서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그 대표적인 것들에 이원규, 『한국교회의 사회학적 이해』(성서연구사, 1992); 노치준, 『한국교회의 사회학적 이해』(성서연구사, 1992); 노치준, 『일제하 한국 기독교민족운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강인철,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한국기독교연사연구소, 1996)이 있고, 해외 연구로는 Wells, Kenneth M., New God, New Nation: Protestants and 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 in Korea 1986-1960(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가 돋보인다. 그리고 역사학 분야의 연구서들 가운데는, 강재언의 『조선의 서학사』(민음사, 1990), 윤경로, 『한국 근대사의 기독교적 이해』(역민사, 1992), 한규무, 『일제하 한국 기독교농촌운동 1925-1937』(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등이 두드러진다.

 

이 가운데 노치준의 연구에서는 서양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뿌리내리는 요인 중 하나를 한국 그리스도교가 민족운동에 참여한 데서 찾는다. 개화, 근대화, 민족운동 등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한국 그리스도교는 사회에 대한 강한 책임과 사명을 역사적 전통으로 남겨 놓았다고 그는 본다. 특히 이 책에서는 구한말과 일제 초기에 활발하던 그리스도교 민족운동이 3·1운동의 실패 이후 급격히 약해진 뒤, 길선주, 이용도 등의 내세 지향적 부흥회를 도피했다고 보는 지금까지의 통설에 반대한다. 민족운동을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3·1운동 후 민족운동이 많이 약해졌다는 말도 맞지만, 사실상은 그리스도교 민족주의적 에너지가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기에 결코 민족운동 자체가 약해진 것은 아니라고 그는 본다. 김교신이나 주기철 등의 복음주의적 신앙이나 활동도 민족주의적 에너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제하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평가절하 작업에 그는 반대한다. 그러면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다루고자 하는 여타의 연구서들에 구체적인 사례, 실제적인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웰스(Kenneth M. Wells)의 연구에서는 동학운동을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예로 중시하는 가운데, 일제시대 한국 그리스도교(특히 개신교) 안에서 민족주의는 어떤 형태로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일종의 문화사적 고찰을 한다. 민경배가 한국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원동력을 '복음의 역동성'에서 찾았던 것과 유사하게, 이 책에서도 한국 개신교 민족주의 운동의 근거는 성서에 있다고 본다.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개신교의 특성을 적절히 지적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나라를 잃어가던 시절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수단이자 새로운 민족적 이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벌인 민족주의 운동, 영적 부흥과 도덕적 혁신을 통한 민주적 그리스도인 사회건설 운동 등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한국 개신교의 특징도 무난히 드러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강인철의 작품은 해방 이후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국가·사회와 맺는 관계 및 그 정치, 사회적 성격을 사회사적으로 접근한 연구서이다. 해방-분단-군정-평화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격변기에 한국 개신교회의 정치 사회적 성격을 결정지은 요소를 주로 선교국(특히 미국) 교회가 자신의 정부를 매개로 하여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한 데서 찾는다. 그럼으로써 법적으로는 정·교가 분리되었으면서도 제일공화국 시기는 '사실상의 기독교국가'로 비쳐지게 되었다고 본다. 이 시기에 미국 교회가 부모라면 한국 교회는 자녀라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파악한다. 그 결과 한국 안에 친미주의, 반공주의가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역사학적 그리스도교 연구 가운데 재일 사학자 강재언의 『조선의 서학사』(1990)는 조선의 개화사상이라는 그의 평상시 관심사가 반영되고 있는 가운데, 한역 서양서(漢譯西洋書)가 처음으로 건너온 "1603년부터 개국 전후까지를 주 내용으로 하는, 서양의 천주교와 학술과의 체계적인 교섭사이다." 특히 "17세기 초기부터 시작되는 서교(西敎)와 서학(西學)의 전래와 그에 대한 조선 지식층의 반응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서", 300여년에 걸친 서학의 역사를 서술한다. 서양 사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로 인해 조선은 점점 더 외부세계와 고립되기에 이르렀고,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80여년 동안 구미 세계의 중심인 서학을 능동적으로 수용, 연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은 일본의 무력적 협박에 대처할 수 있는 대외적인 능력도 상실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조선 서학의 명맥은 개별적인 학자의 서재 속에서나 이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서학을 수용할 수 있는 정책 부재로 인해 새로운 국제적 환경 속에서 자립자존하기 위한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과 내용으로 보면, 이 책은 조선 서학 자체의 연구서가 아니라, 조선에서 서학이 어떻게 수용되고 반발되었는지 그 과정을 다루는 조선 역사서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문물 및 사상으로서의 '서학'과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서교'를 구분해 서술함으로써, 기존의 초기 그리스도교 연구자들에 학문과 개념상의 엄밀성을 추구하라고 경종을 울리고, 연구 태도도 좀 더 정교해질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한다는 점에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 상의 의미가 있다.

 

또 한규무는 한국 개신교회가 벌인 농촌운동의 문제를 그 배경과 진행과정, 운동론과 운동의 내용, 운동을 추진한 인물과 기관 등을 다양한 자료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실증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을 일반 국사학계의 민족운동 선상으로까지 연결하려는 시도를 벌이고 있다. 종교를 잘 다루지 않으려는 사학계의 풍토를 감안한다면 그리스도교 운동을 여러 자료들을 이용해 실증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한국역사연구회의 회원이자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 공저자이기도 한 윤경로의 연구는 실증적 입장에서 교회사를 교회 안의 사건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반사로까지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6. 종교학적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시작

199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특징은 그 연구 분야의 다양성에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학을 한국종교사학의 일부로서 보기 시작한 시기가 1990년대이다. 물론 그 동안 종교학적 측면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한국종교사를 구성하는 한 분과로서 다루어져 온 것들이 몇 편 있다.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앞서는 것은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1928)를 제외한다면, 1963년에 출판된 김득황의 『한국종교사』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종교사 전체 안에서 한국 개신교사를 정리했다. 비록 종교들간의 다양한 관계까지 보는 비교종교사적 시각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를 한국의 다양한 종교들의 하나로 보고서 글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와 함께 해외 연구로는 그레이슨(James Huntley Grayson)이 쓴 Korea: a Religious History(1940)가 있다. 현재 영국 쉐필드 대학 한국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그레이슨은 인류학과 신학을 함께 다루면서 구미에 한국종교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종교학자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의 종교를 선사시대 이래 성장 발전해온 한국문화의 일부로 다루면서, 각 시기에 두드러진 종교적 흐름들을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국 역사의 각 시기마다 다양한 종교들이 교리적이고 구조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아직 한국 학자들이 해내지 못한 한국종교사의 모범적인 서술 방식을 먼저 보여주었으며, 그리스도교 연구와 관련하여 보자면, 천주교든 개신교든 모두 다른 종교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 있는, 한국종교의 하나라는 시각을 갖게 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가장 최근의 작품으로 한국종교연구회에서 쓴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1998)가 있다. 이 책은 한국종교 통사(通史)는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역사적 흐름을 따르지만, 대체로 여러 연구자들이 쟁점이 되는 연구 주제들을 소화해 종합해 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 특별한 방법론이나 일정한 틀이 따로 없이, 한국종교문화사를 새롭게 써보기 위한 시험대에 머문다. 이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근·현대의 종교문화" 장(章)에서 쟁점이 되는 주제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다룬다. 그러다 보니 한국 그리스도교가 한국문화의 일부이고, 다양한 한국종교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구조적으로 보여주기는 하지만, 주제별로 접근하다보니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처한 독특한 위치는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물론 이것은 한국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 대한 서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문제점들이다.

이 밖에 『한국종교사상사』(전 4권, 연세대학교 출판부)의 일부인 유동식의 『기독교사상사』(제2권에 포함, 1986)도 있지만, "천주교 초기 100년의 사상적 특성"을 다루는 한 장을 제외하고는 앞에서 고찰해본 『한국신학의 광맥』의 기본 입장과 다르지 않다.

 

 

IV. 맺음말

지금까지 본대로 그 동안 한국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 교회사, 신학사상사의 차원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연구한다는 것을 한국 교회사나 신학사상사를 연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보는 경향도 컸다. 이것은 한편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연구가 교회사, 신학사상사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한국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에 의한 호교론적 연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대상화해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 안에 자리잡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대상화해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 안에 충분히 자리잡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 들어 시작된 종교학적 시각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적 그리스도교 연구란 그리스도교를 진정한 의미에서 대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좁게는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각각 천주교와 개신교 안에 있으면서도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틀에 매이지 않으며, 넓게는 그리스도교를 보는 주체가 그리스도교적이면서도 그리스도교에서 독립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보고자 한다면, 문자적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로부터 독립해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호교론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교를 보는 주체가 그리스도교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교를 대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 그리스도교가 제대로 보일 것이다. 그 동안은 이러한 연구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종교학적 연구로 확대되기 시작한 1990년대는 그런 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상 의미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종교학적 그리스도교 연구 역시 1997년도 한국종교학회 주최 '해방 후 50년 한국종교사연구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직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분리하여 연구하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배타적 호교론이나 극단적 종파 중심적 태도는 극복되었으나, 그리스도교를 다양한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서 서술하는 '한국 그리스도교사'는 전무한 형편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한국 수용이래, 이들은 언제나 분리 연구되어 왔고, 서로를 무시하거나 경시하기도 할만큼 시각이나 접근 방식도 상이했던 점을 염두에 두면, 이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 종교문화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기는 더욱 힘든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와 정신세계에 끼친 한국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결코 분리된 장에서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같은 경전, 교리, 세계관을 가진 천주교와 개신교에 대한 통합적 연구는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천주교와 개신교 연구자들의 본격적인 공동연구 과정을 통해,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는 그리스도교를 한국 종교문화사 내지는 사상사 안에 정초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인 것이다.

출처 : [기타] http://ccsun7.sogang.ac.kr/%7Einsrel/%C7%D1%B1%B9%20%B1%D7%B8%AE%BD%BA%B5%B5%B1%B3%20%BF%AC%B1%B8%20100%B3%E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