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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회의 선교역사

은바리라이프 2009. 7. 17. 14:58

한국 개신교회의 선교역사
                                   
                                          황홍렬 목사(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연구실장)

1. 들어가는 말
    선교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면 선교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선교가 이뤄져야할 지역 상황에 대한 이해에 좌우된다. 서구 선교는 18세기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선교 목표를 영혼구원으로 이해했고 20세기 중반까지는 교회개척이라는 이해가 추가되었다. 1952년 빌링겐 선교대회이후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가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초래했다. 선교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해가 이뤄진 샬롬이다. 그리고 구속론 중심의 선교학도 창조론의 보완을 통해 지평을 넓혀야 한다. 생태계의 위기 속에서 사는 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이처럼 피조물의 구원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선교는 지역상황에 대한 이해에 좌우된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구 기독교의 선교는 불행하게도 식민주의, 제국주의와 결합되어 선교지 주민들을 ‘이교도’로 보고 이들의 종교와 문화를 악마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인종말살, 문명파괴라는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선교는 지역의 문화, 정치, 경제, 사회,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정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교회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다. 빛은 어두움을 비출 때, 소금은 음식으로 녹아들어 갈 때 제 구실을 한다. 즉 교회는 교회다움을 유지해야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교회는 빛을 세상에 비추고 세상 속으로 경계를 넘어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처럼 보일 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 역사를 보면 교회의 선교활동 방식은 십자가를 지는 방식과는 반대로 타자에게 십자가를 강요하는, 십자군의 방식으로 선교하는 사례들을 더 많이 본다. 때로는 복음의 수용을 위해 폭력을, 돈을 사용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방식의 선교가 그리스도의 선교 방식이요, 십자군의 선교방식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한다.
    세계 선교에 대한 양 극단적 태도가 있다. 하나는 선교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동안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해외선교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양극단을 피하고 한국교회가 어떻게 국내에서 또 국외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 왔는가를 간략히 그 흐름을 개관하고자 한다.


2. 복음의 수용 시기 (구한말-1910)
    의사 자격으로 알렌이 1884년 10월에 입국하고, 목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사 신분으로 1885년 4월 입국했다. 그들은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에 주력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입국 이전에 만주에서는 매킨타이어와 로스의 선교를 통해 한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한인들과 함께 성서 번역을 시작했다. 1879년에는 백홍준과 이응찬 등 네 명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개화파 양반학자인 이수정이 1883년에 세례를 받고 성서 번역과 한인교회설립에 기여했다. 황해도 소래에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인 소래 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졌다.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와 그들과 만났던 한국인들 뿐 아니라 이름 없는 숱한 교인들, 매서인, 전도인, 전도부인들의 눈부신 활동, 때로는 목숨을 건 전도 활동 때문에 우리나라는 복음을 빠르게 널리 받아들이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 무렵은 씨를 널리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 수용시기 한국교회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적극적인 도입과 능동적인 복음 수용이었다.
    의료 선교는 양반, 민중을 구분하지 않고 치료함으로써 신분 계층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렸고 민중들이 기독교를 접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당시 조정과 민중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교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교육선교는 봉건사회에서 소외된 민중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성경을 배우게 함으로써 근대교육의 틀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복음화의 중요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특히 기독학교에서 자란 한인들이 민족운동의 선구자가 된 것은 세계 선교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다.
    초기에는 주로 선교부들이 연합활동을 펼치며 협력하고 1905년에는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통해 하나의 개신 교회를 지향했으나 실패했다. 또 선교지역 분할 정책과 네비어스 선교 정책을 통해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 낭비를 줄이며, 민중 계층에 집중 전도하고 교회 조직이나 운영면에서 효과적이어서 초대교회 성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은 교파교회로의 고착, 선교부에 의해 통제받는 교회, 교역자의 수준문제, 그리고 개교회주의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통해 성경공부와 기도에 열심이고 새벽기도회 등 한국교회의 주요한 특징들이 나타났고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비정치화시키고 몰역사적 성격을 갖게 한 것은 문제였다. 그 결과 적지 않은 민족 지도자들,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다.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에 비밀리에 조직된 신민회의 발기인 가운데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가 포함되었으며 발기인들은 직간접으로 상동교회 청년학원과 관련을 맺었다. 또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한 항일 의병운동 등의 흐름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한국교회 대부분이 사회적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만, 상동교회처럼 민중을 섬기고 민족운동에까지 신앙활동의 지평을 넓힌 교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3. 일제하 한국교회의 선교 (1910-1945)
    복음의 수용기에 우리 교회는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고 교파교회로 고착되었고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 민족교회로, 민족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나가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비정치화 되어갔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한국교회는 시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 갔다. 일제는 한일 ‘합방’ 후 국내의 애국인사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대규모 항일민족 탄압사건인 105인 사건을 날조했다. 결과는 오히려 1905년 이후 민족운동 진영과 선교사 사이에 야기되었던 불신과 괴리현상이 크게 회복되었고, 다소 열악했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양시킴으로써 이후 기독교 민족운동을 강화시켰다. 이 사건 연루자 가운데 상당수가 후에 3.1운동이나 해외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기독교가 주도하고 불교와 천도교가 함께 했던 3.1 운동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이라는 민족의 십자가를 교회가 지고 나가며 가장 심한 탄압을 받았지만 이를 통해 기독교는 외래종교가 아니라 민족의 종교로 거듭났고 신속히 교세를 만회하게 되었다. 1920년 선교사 무어는 “독립운동, 그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은 조선 민중의 마음과 심정을 열어 주었다. 지난 50년의 평범한 날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한 셈이다. 새 날이 다가왔다.”고 했다. 그러나 3.1 운동 직후의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역량을 향상시키고자 농촌 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절제운동, 야학운동, 여성운동 등을 펼치는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운동이 20-30년대에 나타났다. 한편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의 만남은 기독교의 사회적인 측면을 강화시키기보다는 기독교의 반공주의적 태도를 강화시켰다.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면서 7인의 목사 가운데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처음에는 제주도 선교를 해외선교로 이해했다가 산동 반도에 선교사를 보내면서 국내선교로 이해하게 되었다. 1915년에 제주도에는 “두 명의 안수 받은 목사들과 일곱 명의 안수 받지 않은 남녀 사역자들이 있었다.” 1909년에는 최관홀 목사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한석진 목사를 일본으로 파송했다. 감리교회는 1910년에 손정도 목사를 중국에 파송했고, 침례교에서는 1906년에 한태영 외 네 사람을 간도에 파송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조직 교회가 되는 과정에서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하면서 외국선교를 하기로 하고 산동을 정해 선교 답사를 실시한 후 1913년 3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총회는 “지나에 파송하는 선교사는 자유교회를 설립하지 말고 그 땅 장로회와 연합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협조하에 중화 화북대회 산하 산동 장로회에 속해 사역했다. 1937년 산동 선교에 합류한 방지일 선교사에 의하면 “한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40개의 교회들은 중화 기독교회 산동대회 산하에 있는 래양노회에 속하였다.”고 했다. 이처럼 한국 초대교회 해외선교의 특징은 한국의 교파 이식이 아니라 파송된 지역교회에 소속되어 사역한 것과 협력선교였다. 국권을 상실한 한국교회의 선교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 권력이나 경제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 교인들, 온 교회가 자기 교파 이식이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는 선교를 했기 때문이었다. 1902년 하와이 농업이민 이후 시작된 미주 한인선교나 특히 만주 선교를 통한 한인교회는 구한말부터 민족운동의 주요 거점이었고, 3.1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계속적인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으로 기여했다.
    신사참배에 대해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했으나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인정하는 교파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장로교 총회가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한국교회는 점차 부일협력에 깊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들과 총회, 기독교 기관들이 친일적 행위를 보여준 반면에 소수 목사들, 교회 지도자들,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이는 대략 2,000 여명에 달하고 200 여 교회가 폐쇄되고 주기철 목사 등 50여명이 순교했다. 


4.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선교 (1945-1960)
    해방 후 우리 민족의 과제는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미소에 분할 점령된 남북을 새로운 근대국가로 세우는 것이었다. 교회의 과제는 이런 민족의 과제에 동참하는 것이며 동시에 교회의 친일잔재를 청산하여 회개와 갱신을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생길 여러 갈등을 최소화시키는 화해와 일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3년간의 미군정기 (1945-8) 동안 주목되는 것은 우선 선교사와 미군정 사이의 관계다. “미군정하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사 이전에 군정 관료로서 입국했고, 선교활동을 재개한 후에도 미군정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군정과 선교사와의 관계는 교회로 하여금 국가와의 교류와 통합을 당연시하게 했다. 또 군정에 가장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집단이 개신교 신자들이고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미군정에 깊이 참여했다.
    미군정기에 이룩된 국가와 교회 사이의 통합적인 관계가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지속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형목 제도, 군종 제도, 경목 제도, 중앙방송을 통한 전도, 일요일의 공휴일화, 주일선거의 반대 수용 등 기독교회에 특혜적인 지원과 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대해 교회는 이승만 정권을 선거에서 적극 지지, 교회 지도자들과 국가 고위 관료, 정치인과의 교류, 개신교 신자들의 정부 내 기구 다수 진출 등을 통해 국가 정당화에 기여했다. 한편 이념 갈등에 대해 교회는 우익세력과의 연대와 통합을 통해 친미 반공적인 이승만의 단독정부와 정권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반공 투사로, 건국 주역으로 행사함으로써 교회와 민족의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과제는 이뤄지지 못했다. 또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반공분단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권위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북에서는 교회라는 존재를, 남에서는 공산주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교회는 교육, 의료, 여성, 사회복지 분야에서 두드러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언론, 경제, 예술 분야에서도 비교적 강력한 연계망을 구축하여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반면에 교회의 재건 과정에서의 교단의 계속되는 분열과 신흥종파로의 교인 이탈 등은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실추시켰다. 특히 교회연합운동의 중요한 두 축이 반공, 단정 수립과 이승만 정권지지운동이 되어 이런 경향을 강화시켰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정치화, 즉 선교사, 목사, 기독교인들의 미군정 참여, 목사, 장로, 교인들의 이승만 정권에의 참여를 통해 일제시대에 선교사들이 내세웠던 정교분리 원칙을 폐기하고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친미 반공 보수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지지하며 분단 고착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시켰지만 사회적 공신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 시기는 한국교회가 가히 ‘기독교왕국’ (Christendom)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의 설교에서 한경직 목사는 초창기의 교세는 약했으나 애국운동, 문화운동, 사회운동, 사회봉사 등 모든 방면에서 사회에 앞서 나갔지만, 해방 후 한국교회는 사회봉사, 문화방면 등에서 뒤떨어지기 시작했음을 지적했다. 그 이유를 기독교의 정치화, 기독교국가화를 통해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다. 
   

5. 군부독재, 민주화 운동과 한국교회의 선교 (1961-1987)
    4.19 이후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체제를 향한 기회를 맞았으나 5.16 쿠테타는 군부독재의 사회를 초래했다. 박정희 정권은 정당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를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했다. 교회는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했지만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서나 삼선개헌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일인장기독재체제로 민주화 운동과 민중운동을 긴급조치로 억누르고 사회 전체를 준전시체제로 만들었다. 한편 청계천 피복노조의 전태일의 분신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은 그의 분신을 통해 민중이 역사 변혁의 주체됨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민중의 발견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60년대 민주화 운동과 구별되었다. 한국기독학생운동총연맹은 학생사회봉사개발단을 통해 민중지향성을 갖게 되고, 사회구조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3년 인권을 주요 관심사로 활동했고 1974년에는 인권위원회를 조직했으며 목요기도회를 통해 고난당하는 자들의 소리를 듣고 기도했다.
    산업선교는 1957년 예장 총회 전도부 산하에 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감리교는 1961년 인천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전도 중심적이고, 개인구원 중심적이고, 교단 중심적인, 대상만 지역주민에게서 공장 노동자로 바뀐 산업전도를 했다. 10년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방법이 노동자와 현장에 잘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1968년부터 도시산업선교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노동자의 권리 보호와 이익에 관심을 갖는 것이 선교 목표에 통합되었으며 하나님의 선교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신구교 선교 단체들이 전태일의 분신에 자극을 받아 1971년 1월에 한국산업문제협의회를 조직했다가 9월 크리스챤 행동협의체를 창립했다. 유신정권은 노조를 지원하는 도시산업선교를 탄압했고 노총과 언론도 이에 가세해 산업선교 실무자들을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산업선교 수호위원회를 조직하고 1978년 ‘산업선교신학 선언’을 했다. 예장과 감리교회는 산업선교를 교단의 공식적인 선교활동으로 인정하면서 공식적으로 방어했다. 산업선교신학은 산업선교를 신학화한 것으로 민중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도시산업선교는 한국교회나 교인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는 그 재정을 서구 교회나 선교회에 의존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우리 사회는 60년대에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면서 도시, 특히 서울에 도시빈민이 급증했다. 이들의 삶에 대해 박형규 목사는 “중노동, 질병, 좌절, 무기력, 불평불만, 불화, 퇴폐, 그리고 한 맺힌 죽음”이라고 했다. 1968년 미국연합장로교회 후원으로 세워진 연세대학교 부설 도시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도시빈민선교 실무자 훈련을 시켰다. 1971년 3,000명의 시민아파트 주민들의 6월 시청 앞 시위와 8월 광주 대단지 (현재 성남) 폭동을 계기로 이 훈련과정에 참여한 자들이 1971년 9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조직했다. 선교 현장이 수도권에 7군데 있었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선포로 이들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정치적 민주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주민조직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빈민선교 참여자들은 주민조직가에서 예언자로 바뀌었다. 그들의 예언자적 행동은 유신정권으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유신정권과의 투쟁을 겪으면서 그들의 교회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초창기에는 주민조직만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기치를 보다 높이 쳐들지 않으면, 그리고 기성교회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히 하지 않으면 빈민선교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뚫고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한 빈민선교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고백과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 의 관계와 주민교회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는 것이 과제로 남겨졌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군부독재가 연장되고 반미운동이 일어났으며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가 부활되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영향이 70년대 민중선교와 80년대 민중선교를 구분지었다. 그런데 80년대 민중선교는 상당 부분 민중교회를 통해 이뤄졌다. 이는 70년대 민중선교가 교회를 통한 선교로 귀결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민중교회는 복음대화, 밥상공동체, 민중선교활동을 중요시했다. 야학, 문화교실 등의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 한글을 가르치는 어머니 교실, 노동교실, 건강교실 등 주민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주민 권익을 위한 탁아소, 공부방, 진료 프로그램이 대표적이었다. 또 민중운동을 지원하거나 군부정권에 투쟁하거나 교회갱신을 위한 시위 참여, 기도회, 성명서 발표 등 예언자적 활동도 했다. 80년대 민중교회는 “지역노동운동의 외곽적 역할”을 했으며, 신앙에 대한 강조가 없다보니 민중교회가 “교회인지 교회간판을 내걸은 운동단체인지 모르겠다”라는 자기비판이 나왔다. 그리고 민중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민중은 스스로 교회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어긋남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세계선교는 장로교 총회가 1956년에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했고, 한국교회는 대만, 브라질, 인도네시아, 일본 등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60년대까지의 해외선교는 대부분 현지교회와 연합해 사역했으나 한국교회의 재정적 지원이 충분치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선교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에 정착했다. 70년대 초에는 김활란이 이끄는 이화여자대학교, 조동진의 국제선교 협력기구, 강원균의 베트남 선교회 등을 통해 파키스탄, 홍콩, 베트남 등에 3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교단보다는 개교회나 선교단체가 중심이 되고 일부에서는 선교사를 훈련시켜 파송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다시 교단중심의 해외선교가 이뤄졌으며, 국제선교단체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해서 선교 지역 광역화에 기여했다.
   
6. 냉전 종식 이후 한국교회의 선교 (1988- )
    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 군부독재가 무너졌으나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노 정권은 두 국민전략으로 중간층 중심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을 분리시켜 전자를 지원하고 후자를 탄압했다. 소연방 해체와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는 민중운동과 민중선교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무너뜨렸고, 문민정부의 출범과 개혁은 그 사회학적 근거를 약화시켰다. 한국교회는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평등화, 사회의 복지화, 문화의 성숙화, 평화통일을 통한 민족공동체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한 선교과제였다.
    민중교회는 80년대 말부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여 “해방의 영성”등 영성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90년대 중반에는 생명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일어나서 1997년에 기장 민중교회운동연합은 생명, 선교, 연대로 이름을 바꿨다. 즉 대안으로서 민중보다 폭넓은 생명을 제시했다. 생명은 환경운동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관, 그리고 생명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 도시중심의 민중선교가 농민선교와 연결되면서 확대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민중선교는 장애인 선교, 청소년 선교, 여성민중선교, 환경선교, 외국인 이주노동자 선교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이런 흐름은 기존의 다양한 한국교회의 선교와 만나게 되었다. 한편 민중선교의 주요 프로그램이었던 탁아소나 공부방이 90년대에 국가의 사회복지 제도로 정착되기도 했다. 민중선교는 그 영향력은 감소했지만 다양화, 전문화 되어가고 있다.
    평화와 통일이라는 선교과제는 한국기독교협의회에 의해 80년대 초부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추진되다가 1988년 한국기독교협회 총회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채택했다. 그리고 해방과 분단 50년인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희년신학을 전개하며 여러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95년 이후 희년에 대한 관심이 줄고 북한의 식량난에 대응해 한국교회와 단체들이 ‘북한돕기운동’을 벌였는데, 희년신학이나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의 신학적 토대에서 이뤄지기보다는 흡수통일 맥락에서 이뤄졌다. 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 위기와 예언자적 역할 상실과도 관련이 있다. 또 한국교회는 기독교환경운동연대와 같은 단체를 중심으로 적극 환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 다양한 선교 현장에 여성들의 참여가 활발한데, 이는 한국교회의 선교에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라는 교회갱신과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1997년말 외환 위기로 인해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기업은 인수합병과 ‘구조조정’ 미명하에 대량의 해고자와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가정이 해체되었고 거리에 노숙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실직노숙인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경제와 사회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 때부터 경제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문제제기하고 다루기 시작했다.
    대중화된 인터넷과 디지털 세대의 등장은 21세기 선교가 20세기 선교와 다르게 전개될 것을 예고한다. 2002년 월드컵 경기와 대선 결과는 정보사회가 우리 사회의 한 실재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하게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은 NGO가 우리 시대 중요한 운동의 주체일 뿐 아니라 교회의 조직이나 의사결정방식, 의사소통방식 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회 역시 느슨한 그물망 형태로 하의상달, 쌍방 통행식 의사결정으로 나아가도록 도전을 받고 있다.     
    세계선교는 80년대 후반 교회성장, 무역수지 흑자, 해외여행 자유화, 해외송금 자유화 등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한 통계에 의하면 해외선교사의 수는 1982년 323명, 1986년 511명, 1990년 1645명, 1994년 3272명, 1998년 5948명이다. 이 통계는 2년 미만의 단기 선교사를 제외했기에 단기 선교사를 포함하면 2000년 현재 해외선교사는 대략 7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한다. 선교 대상국은 145개국이며, 대륙별로는 아시아 (41.6%), 유라시아 (11%), 유럽 (9.5%), 중남미 (8.8%), 아프리카 (8.5%), 중동 (4.5%)이다. 국가별로는 필리핀 (521명), 중국 (492명), 일본 (387명), 러시아 (346명), 인도네시아 (173명), 독일 (158명), 태국 (149명)의 순이다.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단체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751명), 예장합동세계선교회(730명), 예장통합세계선교부(492명), 기독교감리회선교국(447명), 기독교하나님의 성회(290명), 한국해외선교회(266명), 기독교한국침례회(241명), 한국대학생선교회(193명), 예장고신(186명), 예장청담개혁(181명) 순이다. 한국교회의 세계선교는 양적인 면에서는 세계 4위에 해당하며 이는 한국교회 성장과 한국경제 성장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계선교의 성장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의 이면에는 한국교회 세계선교에 대한 상당한 비판이 있다.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 복음은 전하지 아니하였고, 교회 성장만을 전파했다.”는 외국의 젊은 신학자의 비판으로부터 선교 프로젝트나 교회 숫자나 업적이 성숙의 결실로서가 아니라 성숙을 대치할 때 “이것은 참 의미로서의 선교가 아니라 선교를 위장한 사업”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서구교회와 제3세계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한국교회는 돈 선교를 한다는 비난을 받고”, “공산권 국가의 교회로부터 한국교회는 너무 자본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호주 신학교 협의회의 총무이자 신학교 학장은 “한국교회가 근대에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좋았으나 제 자신이 볼 때는 그들이 세계에서 제일 나쁜 식민지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고 혹평했다. 이렇게 비판받고 있는 한국교회 세계선교의 태도는 한국초대교회의 산동 선교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한국교회의 세계선교가 비판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교회는 교회성장의 한 프로그램으로 해외선교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함으로써 교회가 된다는 자세보다는 교회성장의 새로운 항목으로서 해외선교가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교회성장의 한 도구로써 선교를 이용했다. 이것은 교회존재 이유가 뒤바뀐 것, 목적과 수단이 바뀐 현상이다. 그리고 해외선교 정책이나 행정, 전략 수립, 선교사 선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해외선교에 대한 평가는 “선교사들을 평가하는 문제보다 선교사들을 파송한 기관이나 단체의 정책적, 전략적 접근이 절실히 재고되어져야” 하며 선교사를 “준비된 자로 생각하는 것보다 준비되어 가는 자들로 받아들여져야”한다. 또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교회의 거품부흥 현상과 영적 자원의 고갈의 문제다.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질적 성숙으로 이어졌는가 하는 것에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대형교회 ‘목회자 세습 문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교회의 양적 성장이 선교, 교육, 봉사의 질로 전환되어야 하며 그 뿌리가 예배, 기도와 성경공부, 사귐, 영성훈련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 한국교회 세계선교의 문제는 한국교회 자체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맺는 말
    한국교회의 선교는 한국교회가 교회다움을 간직하느냐 하는데 달려있다. 서구교회의 선교가 쇠퇴한 주요 원인의 하나는“전 유럽에 반기독교적 풍토가 범람할 때”“몰락과정의 서구 기독교의 탈출구”로서“세계 선교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서구교회는 서구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구실을 하지 못하면서 세계선교를 했기 때문에 서구의 선교는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결합되었고 이것이 제3세계에서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1974년에는 약 33개 국가가 기독교 선교를 거부했으나 1989년에는 그 수가 86개국으로 늘어났다. 소위 미전도종족의 95% 이상은 이란, 터키,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이라크 등과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서구 기독교에 대해 직접, 간접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했던 국가들이고 케냐의 마사이족과 같은 소위 토착 원주민 부족은 5% 미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된 세계선교 여건에 대한 대응이 전문인 선교일 수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질적 성숙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선교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다음 몇 가지이다. 첫째 3.1 운동처럼 교회가 민족의 십자가를 질 때 교회는 박해를 받고 없어질 것 같지만 고난 속에서 신앙이 성숙해지며 교회가 오히려 성장한다는 것이다. 둘째 신사참배나, 미군정기, 이승만 정권기처럼 교회가 정권에 밀착할 때에 교회는 힘이 있는 것 같고 잘 보존될 것 같지만 교회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70년대,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선교에 참여한 교단들도 이승만 정권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고 일제 시대 항일운동에 반대한 교단들도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에 적극 협력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권력에 대해 예언자적 태도를 견지할 때 유지할 수 있다. 셋째 교회의 분열은 민주화 운동이나 민중선교나 세계선교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분열된 교회로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없다.
    지역사회에서의 교회의 사회봉사, 사회복지에의 참여, 지자제에의 기여, 시민사회 운동을 통해 지구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것, 평화와 통일 등 다양한 도전을 21세기 한국교회는 받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선교하는 교회의 자세는 우선 겸손과 희망이다. “우리가 심은 씨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이 이 씨를 살리시고 그것에 적절한 몸을 입히실 것을 우리는 기대하기 때문에 희망해야 한다.” 이처럼 선교는 선전자 자신을 복사하는 선전 (propaganda)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둘째 선교는 교회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이 만남에서 타자는 메시지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이며 우리는 타자의 얼굴 뒤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사나 교회는 고넬료와 만난 베드로처럼 (사도행전 10장) 선교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 셋째 한국초대교회의 산동 선교처럼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고린도전서 1, 27).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이런 역전이 일어난다. 영적 각성으로 새로워진 한국교회는 이런 자세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출처 : [기타] http://www.inbora.com/ez2k/ezboard.cgi?db=board3&action=read&dbf=1706&page=59&depth=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