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양심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두렵습니까?"
1980년 광주라는 공간에서 진압군이 들어오기 전날 저녁 한 청년의 고백이라고 알려진 말이다. 결국 그 청년은 다음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우리 세대는 광주라는 공간과 1980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다. 어찌보면 역사라는 미명아래 윗세대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과 같이...
내가 광주를 기억한다고 하는 것이 어찌보면 참으로 우스운 것이 될 수 있다. 체험이라는 것이 배제된 채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부분 제약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그리스도인(아닐수도 있지만)의 고백만큼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해석학의 주장처럼 1980년대의 지평과 2007년의 지평이 융해되는 순간이다. 바로 지금이 새롭게 광주가 해석되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을 하였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넉넉한 중에서 헌금을 하였지만, 과부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 즉 생활에 필요한 돈 전부를 바쳤다."
왜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생활에 필요한 돈 전부인 두 렙돈을 넣었을까? 광주의 한 그리스도인은 왜 그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이 그 청년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 곳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행위들을 가지고 남들이 비판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선택을 내리게 하였을까?
아마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내면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보고 그 음성에 따른 결단과 행동이 아니였을까?
나는 기독교가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상식적으로 행동해도 이렇게 욕을 먹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의 과부와 한 청년 그리스도인처럼 기독교적인 비상식 역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하는 것. 나 자신의 안전과 풍족만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고 포기하는 것. 물론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다른 말이다.
과부와 청년의 미래는 어찌 되었나? 과부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아마도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활비 전부를 바쳤기때문에 당장은 먹을 것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부는 물질을 포기함으로써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작은 물질이지만 하나님께 드렸다는 생각이 그 과부를 참된 기쁨으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음날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성경적인 비상식을 실천한다 할지라도 이 세상의 보상은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미련하다고 핀잔을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거기에 길들여지면 안된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주신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만 한다. 그 양심의 잣대로 남을 평가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나님이 주신 음성에 반응한다는 것은 참 두려운 일일 때가 많을 것이다. 외면하기는 쉽지만 순종하기는 어려운....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을 가지고 두려워하며 고민하는 것. 어찌보면 이게 내가 공부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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