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유친
이은영/최대웅 극본
나오는 사람 :
아버지, 맏아들, 둘째아들, 카세트(장사하는 아저씨), 구두(닦는 소년), 남자, 여자
제1장
막이 열리면 둘째아들(이하 아들), 아버지에게 조르며 나온다.
아 들 : 아버지, 아버지. (세게) 아빠!
아버지 : 아따, 그놈 되게 시끄럽네. 밥만 먹고 소리통만 키웠냐?
아 들 : 아버지 배가 내 배보다 더 나왔는데요, 뭐. (아버지 배를 만지려 한다)<
아버지 : (황급히) 이 짜슥이 어델 터치하고 이래. 아까 하고 싶다는 얘기나 해 봐라.
아 들 : (아버지 배를 흘끔 훔쳐보며 자신의 배를 만져 보며) 이야 (말을 잊지 못하고 시늉만 하며) 끝내준다. 완전 보물섬이네.
아버지 : 이 녀석이, 아버지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임마, 내가 그래도 요새 운동을 해서 벨트 구멍이 두 구멍이나 줄었다.
아 들 : 에이, 숨 안 쉰다고 있던 배가 꺼지나, 운동은 무슨, 숨쉬기 운동이라면 모를까. (아버지 손을 잡으며) 이제 가실 때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 배에 근육 좀 붙은 거 같고 그러세요. 숨쉬세요 쉬어. 그저 가시기 전에 드시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하시고 싶은 거원 없이 실컷 하고 가셔야…
아버지 : (꿀밤을 쥐어박으며) 아예 앰뷸런스를 부르지 그러냐? 너, 가만 보니까 취중 진담이요 언중유골이라. 이 애비가 빨리 (목치는 시하며) 갔으면 하는 거 아니냐?
아 들 : (놀란 표정으로) 어머나, 어떻게 아셨어요? 용하다.
아버지 : (목 뒤를 만지며) 어이그, 혈압 올라. 그저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 것이… 이러다 빨리 죽지.
아 들 : 지금 돌아가시게요? 안돼요, 돌아갈 때 돌아가시더라도 제 말을 듣고 돌아가셔야죠. (청심원과 물들고 온다) 이러실 줄 알고 제가 미리 알아서 준비하지 않았겠어요? 자, 드세요.
아버지 : 이게 뭐야?
아 들 : 좋은 거니까 일단 드시구요. (약을 먹인다) 놀라지 마시고, 제 말 잘 들으세요.
아버지 : (긴장하며) 알았다.
아 들 : 잘 들으셔야 돼요?
아버지 : (긴장해서) 아, 알았다니까.
아 들 :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요……정말 잘 들으셔야 돼요?
아버지 : (아들 뒤통수를 치며) 됐어, 임마. 듣기도 전에 숨 넘어가겠다.
아 들 : (엄숙히 어조를 바꿔서) 소자가 지금부터 드리고자 하는 얘기는 소자에게는 아주 중대하고 결정적인 문제이옵니다, 허나, 혈압이 높으신 아바마마께서 충격 받으실까 저어하여 말로는 감당 할 수 없어. (결재용 서류철을 가지고 온다) 이렇게 문서로 작정하였사옵니다. 아바마마, (무릎 꿇으며) 결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 (붙들어 세우며 같은 어조로) 그만 하게. (원래 어조로) 하나도 안 어울린다, 이놈아. (서류철 받아 들며) 일 년 내내 숙제도 안 하던 애가 별 걸 다 만들어 와요. 어디 보자. 『아름다우시고 고귀하시며 언제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 흘러 넘치시며 인자하심이 무궁무진하신 아버지께』 내가 무슨 어버이 수령이라고 참……(입이 찢어지게 좋아한다) 말은 다 맞는 말이네. 맞는 말이야.(훑어 보다 놀라서)응? 이게 뭐야? 여러모로 따져 볼 때 투자 가치와 수익성이 높은 둘째 아들에게 상기의 돈을 지불하심이 가한 줄 사려되옵니다? 너 무리했다? 웬 문자를 이렇게… (다시 서류 보며) 무슨 말이야 이게? 결국 돈 달란 말 아냐?
아 들 : 아버진 역시 신세대야. 어쩜 그렇게 척 보고 핵심을 잘 파악하세요?
아버지 : 척하면 딱이지 이놈아. 그런데, (심각하게) 아들아…
아 들 : 왜 그러세요.
아버지 : 이리 가까이 와라.
아 들 : (떨며) 왜,…그러세요? 난 아버지가 그렇게 심각하게 부르기만 하면 (몸을 꼬면서) 괜히 떨린단 말예요.
아버지 : 별 걱정을. 이 애비가 널 잡아먹겠니, 어쩌겠니
아 들 : (눈치 보며) 화…나셨어요?
아버지 :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전에 연극할 때 별별 협박을 다 하더니 이번엔 이렇게 부드럽게 나오니까, 감격해서 눈물이 다 나온다.
아 들 : 사실은 이 연극할 때마다 맨날 깡패같이 나와서 저도 이번엔 이미지 관리에 신경 좀 썼어요.
아버지 : 근데, 니가 나보다 돈이 많은데 무슨 돈을 줘? 저번에 내가 너한테 차비 5,000원 빌린 것도 아직 못 갚았는데, 내가 무슨 돈이 있겠니.
아 들 : 에이, 아버지 저 다 알아요. 지하실에 있는 거.
아버지 : (큰 소리로) 얘가 사람잡네. 임마, 지하실에 있긴 뭐가 있어?
아 들 : 제가 뭐 그런 거 모를 줄 아세요? 그 왜 사과상자……
아버지 : (놀라며) 너…어떻게 알았니?
아 들 : 알죠. 딴 사람한테 말 안 할 테니까요. 거기서 딱 삼분의 일만 (몸짓한다) 저 주세요.
아버지 : 그거 가지고 뭐하게?
아 들 : 저도 제 인생을 찾겠어요. 제 꿈을 마음껏 펼치겠어요. 제 잘생긴 미모와 눈부신 재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재력이 필요하다구요.
아버지 : 그래, 네가 날 닮아서 잘 생기긴 했지. 그건 맞는 말이다 (심각하게) 그런데 사과는 스무 개씩 뭐하게?
아 들 : 에이, 아버지두. 농담도 잘 하셔.
아버지 : 농담 아닌데. (사이) 그렇게 떠나고 싶니?
아 들 : (고개 끄덕인다)
아버지 :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내어 손에 쥐어 주며)옜다, 받아라. 네가 크면 장가보내려고 모아 뒀던 돈인데…음악 잠시 커졌다 작아지며(어버이 은혜 같이 감동적인 노래로)
아 들 : 아버지…엉, 엉, 엉. 아버지가 이거 안 주시면 어떡하나 무지 걱정했어요. 고마워요, 아버지.
아버지 : 그렇게 고마워 할 것 없다. 빈 통장이니까, 네가 앞으로 채워
아 들 : (놀라서 가슴 움켜쥐고 막 넘어가려고 한다)
아버지 : (아들 붙들며) 조크였어. 심장이 그렇게 약해서 걱정된다, 걱정돼. 자, 기왕에 뜻을 펼치기로 작정했으면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어서 떠나거라.
아 들 : 아버지 (아버지를 붙잡는다)
아버지 :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니까. 이거 놔…어서…. 어서 가라니까. 정말 못 놔?
아 들 : …비밀번호를 알아야 돈을 찾죠.
아버지 : 그 말 왜 안 하나 했지. 자식 키우면 뭘하나 (큰소리로) 따라와, 임마!
제2장
구두닦이, 카세트 장수 등 두 사람이 나와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는 정지 동작을 취하고 앉는다. 적당한 소도구가 없다면 상징적인 물건 한 두 가지만 준비하거나, 팻말을 써서 목에 걸어 놓는 방법도 있다. 기타 소도구와 관련된 동작들도 소도구가 없을 경우도, 마임으로 처리할 수 있다. 흥겨운 음악이 시작되면서 정지 상태에서 카세트 장수는 먼지떨이로 카세트 먼지를 털고 구두닦이는 구두를 닦으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구 두 : (보이지 않는 구두 닦으며) 오늘 날씨 너무 좋다.
카세트 : 날씨? (심술이 나서) 그래, 좋네. 우중충하고 찜찜한 기.오늘 소나기도 한 판 온다 카던데. 장사 잘 돼가? 기분 째지겠네? 누구는 맨날 수억 버는데, 누구는 맨날 공치고, 에이 (툴툴거린다)
구 두 : (웃으며) 누가 수억을 벌어요? 참, 아저씨두.
카세트 : 참, 가는 요새 와 안 보이노? 돼지 레스토랑 종업원 한다 카는 아. 또 소주 마시고 우나?
구 두 : 걔가 무슨 돈이 있어서 술을 마셔요. 저번에 보니까 돼지 레스토랑에서도 짤렸던데.
카세트 : 와, 무슨 일 쳤나?
구 두 : 손님이 먹다 남긴 밥 먹다가 들켰대요.
카세트 : 먹다 남긴 밥 먹는데 와 짤리?
구 두 : 레스토랑 주인집 강아지 챙겨 줄 건데 먹었대나 봐요. 저도 잘 몰라요.<br>카세트 : 세상 참 더럽네. 사람이 우예 개보다 못하노.
구 두 : 요새 다들 먹고살기 힘드니까 인심들이 더 고약해진 것 같아요.
카세트 : 아따 죽었다 깨어나도 양반은 못 되겠네. 저 봐라, 말 띠기가 무섭네. 한쪽에서 아들, 들어온다. 한쪽어깨에 넝마 자루 걸쳤다.
구 두 : 업종을 그걸로 바꿨냐? 그건 좀 먹고 살 만해?
아 들 : (머리 가로젓는다)
카세트 : 쯧쯧쯧, 니 올해 나이가 몇 살이고?
아 들 : 스물 넷이요.
카세트 : 부모님은 돌아가싰나?
아 들 : (고개 가로젓는다)
카세트 : 아파가 자리보전하고 누우셨나? 그래가, 니가 약값 대야 되나?
아 들 : (고개 가로젓는다)
구 두 : 양부모님이시니?
아 들 : (고개 가로젓는다)
구 두 : 부모님하고 싸우고 집 쫓겨났구나.
아 들 : 아냐.
카세트 : 가만 보이 참말로 웃기는 놈이네. 부모님 살아 계시고, 건강하시고, 양부모도 아니고, 싸워서 내쫓긴 것도 아닌데, 니는 여서 뭐하는 기고?
아 들 : 묻지 마세요. 괴로우니까, 남녀 한 쌍, 팔짱끼고 걸어온다
여 자 : (남자 팔에 매달리며) 달링, 나 사랑해?
남 자 : 그럼. 자기 그말 오십 번만 더 하면 백 번이다.
여 자 : 달링, 쫀쫀하게 뭐 그런 걸 다 세고 있었어?
남 자 : 난 자기 속셈을 다 아니까. 저번에 그 오백만원인가 하는 스포츠센터 회원권 사달라고 그러는 거지?
여 자 : 달링한테 숨길 수가 없어. 자긴 어쩜 내 맘을 그렇게 잘 알어?
남 자 : 그런데 말이야. 자기가 자꾸 그런 말 할 때마다 난 그런 생각이 든다.
여 자 : 어떤 생각?
남 자 : 자기하고 여기서 그만 찢어지고, 저번에 만났던 미스 홍이랑 새로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 미스 홍은 이백만원 짜리 다이아반지 하나면 된댔거든.
여 자 : 그래서, 달링 정말 그럴 생각이야?
남 자 : 글쎄, 자기가 하는 거 봐서 그래볼까 생각 중이야.
여 자 : 달링은 정말 늑대야.
남 자 : 나도 알어.
여 자 : 구렁이
남 자 : 그만해. 나도 안다니까.
여 자 : 돈만 아는 돼지.
남 자 : 뭐야? (두 사람 팔짱 풀고 눈에 핏줄 세우고 노려본다)
카세트 : 돈 있는 것들이 돈 갖고 싸울 때 보마 더하다카이.
아 들 : (고개 들어 남자 바라보는 순간, 벌떡 일어난다) 아니, 이거 김기사 아냐?
남 자 : (아들 바라보고 깜짝 놀라며 외면한다)
아 들 : 이 자식 이거, 양복에 구두에,(여자를 보면서) 여자까지. 이 나쁜 놈.(남자의 멱살을 거머쥔다) 너 내 돈 훔쳐간 거 어떡했어? 내 돈 내놔. 이 돼지 같은 놈. 돈 있다고 아부할 땐 언제고, 그걸 몽땅 사기쳐? 에라, 이 나쁜 놈아.
남 자 : 이거 왜 이래? 당신 누구야? 이거 못 놔?
여 자 : 아저씨, 왜 이래요? 우리 달링이 뭘 어쨌다구 이러는 거예요 (두 사람을 뜯어말린다)
아 들 : 니 놈 때문에 난 고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다. 이 놈아, 내 돈 내놔. 이 나쁜 놈.
남 자 : 이 아저씨가 정말 실성을 했나. 이거 놔요! (아들을 확 밀쳐 버린다)
아 들 : 어이구 (하면서 나뒹군다)
여 자 : (호들갑스럽게) 어머, 달링,달링,달링,달링!(손수건으로 남자의 이마 닦아주며) 이걸 어떡해? 안 다쳤어? (아들 보며) 나쁜 놈!
아 들 : 다친 건 난데.
남 자 : (아들 향해) 야, 임마. 촌놈이 도박판에서 잃었으면 반성하고 시골에나 내려갈 일이지 왜 얼쩡거려? 너 한번만 내 눈에 띄었다 간 죽을 줄 알어! (여자를 향해 어조를 바꿔) 자기, 나 여기 다쳤다. 자기야 호오 해줘.
여 자 : 달링은 꼭 아기 같아. 알았어 (남자 이마에다) 호오.<p>그러면서 둘 퇴장한다.
카세트 : (흉내내며) 달링은 꼭 아기 같아. (본래 어조로) 하이고, 마 그 알라 기운 한번 세네.
구 두 : (아들 일으켜 앉히며) 괜찮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카세트 : 저 무식하게 생긴 놈은 도대체 누구고? 마, 카세트 장사 이십 년에 이래 답답해 뿌기는 첨이네.
아 들 : 제가 나쁜 놈이에요. 제가 죽일 놈이라구요. 아이구, 아버지! (엉엉 운다)
카세트 : 니 집 나왔나? 그렇재?
아 들 : (고개 끄덕인다)
카세트 : 봐라봐라, 내가 이래봬도 마 왕년에 경찰서… (수그러들며)에서 카세트 팔고 단속 한번 안 걸린 몸이라. 니 관상을 보이 마 얼굴에 집 나왔다고 딱 써있구마.
구 두 : 너 정말 집 나온 거니? 왜?
아 들 : 자초지공을 얘기하자면 복잡해. 그냥 집에서…(손짓하며)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해서 나왔어. 엉…엉, 훌쩍.
구 두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구나.
카세트 :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구마
아 들 : 다 내 잘못이야.
카세트 : 그래, 니 잘못 맞다.(구두 옆에서 찌르면) 마,진실은 밝히야 되는 기다.뚫린 입 놀리면 뭐하노? 입은 삐딱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구 두 : 그럼, 아버지는 아직도 집에서 기다리시겠네?
한쪽 구석에 아버지 나와 서서 멀리 바라보는 시늉
아 들 : 모르겠어. 유명한 사람이 돼서 돌아가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고 왔는데 이 꼴로 어떻게… 아버지 볼 낯이 없다.
카세트 : 봐라봐라. 그래도 부모 마음은 그런기 아이다.부모 마음에는 자식 객지에 보내 놓고 구들장지고 누웠는기 못할 짓이라카이. 이제나저제나 올까 싶어가 문도 열어 놓고 기다리실 끼다.
구 두 : 아저씨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카세트 : 우예 알기는, 나도 가출해 봤으이 알지마, 내가 하도 안 씻으이까 어무이가 세수하기 싫으마 나가라 카는 말을 진짠 줄 알고 나왔다가…(아들에게) 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고향으로 가야, 된대이. 알겠나?
아 들 : 아저씨 말대로 여기서 빌어먹느니 고향에 가서 아버지한테 머슴으로라도 써달라고 해야겠어요.
구 두 : 그래, 그래도 넌 좋겠다. 돌아갈 고향도 있고. 난 부모님도 안 계시고.<
아 들 : 너도 나하고 같이 가자.
구 두 : 뭐?
아 들 : 가서 같이 머슴으로 써 달라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보자.
구 두 : 그래도 될까? 쫓겨나면 어쩌지?
아 들 : 그래도 한번 해 보는 거야.
카세트 :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럼, 돌아가기고 결심했으니까 어디 여서 아버지예 하고 크게 한번 불러봐라, 마.
아들, 구두 : (같이 고개 끄덕이며) 아버지~이!
대사와 동시에 음악(어버이 은혜) 노래 흐르는 동안, 세 사람 퇴장.
제3장
아버지, 한 쪽 구석에서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계속 살피다 한숨쉰다.
아버지 : 이 놈아 서울 간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소식이 없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원. 큰아들 등장한다
아버지 : 그래, 무슨 소식 있었냐?
큰아들 : 신문, TV 컴퓨터 통신 모두 다 광고를 냈지만, 아직 연락이 없어요.
아버지 : 인터넷으로도 해 봐. 걔가 해외로 날랐을지도 모르니까.
큰아들 : 아버지, 이렇게 머리에서 김나도록 찾지 않아도 때 되면 알아서 들어올 텐데…
아버지 : 그때까지 애비란 사람이 손놓고 기다리고만 있으란 말이냐? (사이) 그거말곤 할 일도 없다.
큰아들 : ……
아버지 : 수고했다. 가서 돼지 밥주던 거 마저 줘라. 큰아들 퇴장한다.
아버지 : 이 녀석이, 어디서 굶지나 않는지 원. 서울은 일어서면 바지 벗겨 가는 곳이라던데… 아버지, 무대 왼쪽에서 관객을 바라본다. 거지꼴을 한 아들과 구두, 무대 오른쪽에 나타난다.
아 들 : 어서 와, 이제 다 왔어.
구 두 : 아이고, 힘들어. 좀 쉬었다 가자 (헉헉거린다) 야, 그런데 있잖아. 우리 아무리 거지라지만 의상이 너무 빈약한 거 아니야? 아버지가 너 못 알아보시면 어떡하니?
아 들 : 임마, 우리한테 이 이상 좋은 옷이 어딨냐? 이게 최고 좋은 옷인데.
구 두 : 그건 그래. (사이) 하지만, 모처럼 오는 고향인데 뭐 좀 사 가지고 와야 되는 거 아니냐?
아 들 : 너 자꾸 그럴래? 내가 돈이 어디 있냐? (주저앉으며) 그건 그렇고, 나도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어째 발이 자꾸 안 떨어진다.
구 두 : 니가 그러면 어떡하냐? 나 여기까지 오라고 꼬신 게 누군데?
아 들 : 그건 혼자 가기 쪽팔리니까 그랬던 거지. 뭐 너하고 가고 싶어서 그런 거냐?
구 두 : (벌떡 일어나며) 뭐야?
카세트 : (갑자가 나타나며) 야들이, 여까지 와가 이래 싸우면 우야겠단 말이고, 그저 맴을 잘 단도리해가 묵고 서로 도와야 된다꼬 그래 얘길 해도 몬 알아묵노.
아 들 : (당황해서) 아저씨, 아저씬 서울에 있는 걸로 돼 있는데, 이 장면에 나오시면 어떡해요.
구 두 : 저기 뒤에 가서 가만히 앉아 계시라니까요. 아저씨 장면은 끝났잖아요.
카세트 : 연극인데 어떻노. 내가 연기를 너무 잘해가 관객들이 내 한번 더 나오라꼬 텔레파시를 자꾸 보내 쌌는데 우예 안 나오겠노.
아 들 : 이거 이제 끝날 때 다 됐는데, 아저씨 땜에 길어졌잖아요. 빨리 들어가세요. 빨리요.
카세트 : 마, 인자 싸우면 안 된대이.
구 두 : 대본에 더 싸우는 걸로 돼 있는데, 아저씨 땜에 대사 다 짤렸잖아요?
정말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카세트 : 알았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할게.
아 들 : 뭔데요?
카세트 : 나 간다이. 카세트 퇴장. 구두와 아들 한 숨 쉰다.
아 들 : 얘, 안되겠다. 구두 한숨쉬며 따라간다. 두 사람 걸어서 무대 한 바퀴 돈다. 제자리걸음하며
구 두 : 얘, 아직 멀었니?
아 들 : 응, 다 왔어. 야, 너 정말 잘 걷는다. 10키로 걷는 데 10초밖에 안 걸렸어. 이제 다 왔어. 저기 저 언덕 위에 하얀 집 있지? 정원도 넓고 대문도 크고…
구 두 : 어디? 아, 저 집? 저기가 네 집이니?
아 들 : 아니. 거긴 정신병원이야. 그 앞에 말이야. 좀 작고 파란 기와집 있지? 대문이 황금빛인 집.
구 두 : 으응. 거기가 네 집이구나.
아 들 : 아니, 거긴 우리 마을 동장님 집이야.
구 두 : (아들 등을 치며) 너 지금 나 갖고 노는 거지? 고향에 왔으면 다야? 아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다.
아 들 : 얘, 구두야. 저기, 저어기
구 두 : 인제 안 속는다, 안 속아. 또 뭐 엉뚱한 집이나 가르쳐 줄려고 그러지?
아 들 : 그게 아니고, 저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들어, 가슴에 품는다)
아버지 : (멀리서 부르듯 소리내지 않고 입 모양만) 얘, 둘째야!
아 들 : 아버지! 두 사람, 슬로우 모션으로 10여초간 뛰어가는 동작. 만나서 춤을 춘다. 분위기 있는 음악 켜졌다 작아지며
아 들 : (땅에 꿇어앉아서)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뵐 낯이 없어요. 절 머슴으로 써 주세요.
아버지 : 얘야, 그게 무슨 소리냐. 너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광고비 수억 깨졌어, 임마.
아 들 : 아버지, 다시는 쓸데없이 집 나가지 않을께요. 저 아버지, 선물은 못 사오고 대신… (구두를 데리고 온다) 머슴 한 명 더 데리고 왔어요.
아버지 : 머슴이라니 무슨 소리야. 내 아들이 데리고 왔으면 우리 집 손님이지. 자,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잔치를 벌이자. 거 왜 파리(party)라는 거 나도 좀 해 보자. 농악대도 부르고, 돼지도 잡고.
아들, 구두 : (동시에) 돼지?
아버지 : 왜 돼지 싫냐?
아 들 : (손 내저으며) 아니에요. 아버지. 사실 전 아버지가 절 내쫓지 않으실까하고 걱정했는데,… 고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 임마, 내가 그 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이 배 들어간 거 봐라. 자, 이거 다시 보충하려면 많이 먹어야지. 어서 들어가자. 아버지와 아들, 구두 퇴장하려는데 맏아들 등장한다.
맏아들 : (비장한 표정으로) 잠깐!
아 들 : 형!
맏아들 : 건방진 자식, 형이라고? 아버지, 방금 제가 머리에 김나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맞습니까?
아버지 : 또 뭐가 김이 나?
맏아들 : 이 서울서 흥청망청 돈이나 쓰고 돌아다닌 불한당 같은 놈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돼지를 잡으시고,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잔치를 여신다면서요?
아버지 : 소문 한번 빠르다. 반지 끼우는 건 대사에도 없는데 어떻게 벌써 아니, 넌?
맏아들 : 성경에 다 나와 있는데요, 뭘. 아버지,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는 아버지 말씀대로 성경도 꼬박꼬박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원에도 잘 다니고, 농사일도 거들고, 돼지 밥도 주고,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은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다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빨을 으드득 간다) 말하는 동안, 옆에서 구두와 아들 감탄한 표정으로 입벌린다.
아버지 : 알지, 그럼. 그런데, 이빨 다 부서지겠다. 너 무섭게 왜 그러니?
아들 : 그런데! 그런데, 저한테는 프라이드 치킨 한 마리 아니, 달걀 프라이 한 번 해 준 적이 없으시면서, (둘째 아들을 무섭게 노려보며) 좋은 옷? 반지? 돼지? 잔치?
아버지 : 얘야, 아니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넌 네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기쁘지도 않냐?
맏아들 : 아버진 맨날 나만 미워하시죠 (맏아들 으앙 하고 울어 버린다)
아버지 : 얘는 내가 널 언제 미워했다고 그러니? (맏아들 부드럽게 달랜다) 자자, 오늘같이 기쁘고 좋은날 서로 싸우면 되겠니? 울지 마 (맏아들 더 크게 운다) 울지 말라니까 (맏아들 더 크게 운다. 아버지이번엔 큰 소리로) 이놈아, 뚝 그쳐! (맏아들 갑자기 뚝 그친다) 애비 노릇하기 힘들어서 참. 자 둘이 서로 화해해라. 둘째 너 없을 동안 형이 고생 많이 했으니까, 자 서로 악수하고 (둘 서로 악수한다)
아 들 : 형,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형 말 잘 들을께 울지 마, 응? 맏아들, 받아들일까 말까 갈등하다가 둘이 서로 껴안고 운다.
아버지 : 자, 이럴 때 손뼉 쳐야지 뭐합니까.
관객들 손뼉 치면 음악, 큐!(흥겨운 국악, 혹은 가스펠송)
음악 나오면, 모두들 덩실덩실 춤춘다. 등장 인물들 모두 나와 춤추다가 음악 줄어들면서 함께 인사한다.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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