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와 공동체: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사회적 삼위일체론 연구
장경철, "삼위일체와 공동체: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사회적 삼위일체론 연구", 인문대학논총 1. 서울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5. 325-347.
1. 서론
성서를 통하여 증언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인 동시에 한 분인 하나님이다. 많은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적 신앙의 사변성에 대해서 고민하며, 많은 물음을 던진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곧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 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수수께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타당한 물음들이기에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번째 길은 하나님에 대하여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고찰한 뒤에 이것을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와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렴풋이 나마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표상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에 근거하여, 철학이나 신학의 논리의 도움을 빌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정교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두번째 길은 하나님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생각한 뒤에 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가운데 계시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귀납적으로 그 현실에 기초한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첫번째 길이 아니라 두번째 길을 따름으로써 얻어진 결론이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인간의 경험이나 사변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한 계시의 현실(the reality of revelation)에서부터 비롯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이 경험하였고 증거하였던 새로운 역사 창조 운동의 일부분이 되었던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와 함께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였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누구인가? 지금도 교회와 이 세계 속에서 인간과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그 영은 과연 누구인가?"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질문들을 숙고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분, 그리고 교회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이며 구원자로 증거하는 분, 이 세 분이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이며 서로 다른 하나님이 아님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를 이해하고자 하는 한 시도로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삼위일체론 이해를 고찰하고자 한다. 삼위일체론은 몰트만의 신학적 작업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요소를 드러내 준다. 삼위일체론은 신앙을 불신앙으로부터 구분할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비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로부터도 기독교 신앙을 구분한다. 기독교 신앙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살아 있고 역동적인 관계를 부정하는 추상적 일신론에 대항하여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구분과 관계를 보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며, 이러한 자신의 이해를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이 논문은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 이해를 고찰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는다.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 이해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 무엇인가? 몰트만이 제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어떤 것인가? 몰트만이 전개하는 하나님의 위격과 관계 이해는 어떠한가? 몰트만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함에 있어서 어떻게 삼신론의 위협에 빠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하나됨을 보존하는가?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우리의 실천에 있어서 어떤 함의(含意)를 지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서 답변을 시도하는 가운데 이 논문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몰트만의 위격과 순환적 통일성의 개념,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실천적 의의 등을 다룰 것이며, 이 과정에서 몰트만이 제시하는 삼위일체 이해의 문제점도 아울러 지적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구원의 역사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몰트만은 구원의 역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로 이해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해할 때에 삼위일체론적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
만일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건, 곧 예수와 그의 하나님이었던 성부 사이의 사건으로서 이해된다면, 우리는 성자, 성부, 성령에 관해서 삼위일체론적 용어로 설명해야만 한다. 그러한 경우에 삼위일체론은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한, 궤변적이고 비현실적인 사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 이야기에 대한 요약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하나의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에 대한 요약으로 간주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성서 이야기에 덧붙여진 철학적 사변이기보다는, 복음서 이야기에 이미 내재해 있던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삼위일체론은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론은 우리를 넘어서 있는 어떤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근거한 구원 사건에 대한 가장 요약적인 진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한 복판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몰트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역사와 경륜 속에서만 우연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계는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 속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몰트만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강조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자신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참된 하나님 이해는 십자가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얻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사건은 아니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자의 십자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그 인상을 남기듯이, 성령의 역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을 형성한다. 즉, 자유케 된 피조물이 하나님과 연합될 때, 그 피조물의 기쁨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도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 중요한 쟁점은 몰트만이 경륜적 삼위일체(the economic Trinity)와 내재적 삼위일체(the immanent Trinity)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몰트만은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견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역사를 오직 구원의 경륜 속에서만 경험할 뿐이지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 속에서는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몰트만은 구원의 경륜 속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서 핵심적이며 구성적인 실마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이제 삼위일체론을 십자가 이야기의 요약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물을 구원하는 전 역사의 요약으로 간주하고 있다.
몰트만이 전개하는 삼위일체론은 구체적으로 어디로부터 출발하는가?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은 신약성서의 구체적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신약성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 속에서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는 곧 교제의 관계이며 이 세계를 향하여 열려져 있는 관계이다.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변화하는 관계 가운데 계신 세 분의 독특한 위격으로서 묘사되고 있는데, 이를 몰트만은 교제의 관계라고 명명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구원의 역사는 하나의 신적인 주체에 의하여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 가운데 행동하시는 세 분의 구분되는 주체들에 의하여 시행되는 것이다.
성서 이야기의 증언을 따라갈 때, 우리는 한 가지 형태의 삼위일체만 발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삼위일체를 발견한다. 여기서도 몰트만은 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에 집중된 한 가지 유형의 삼위일체론적 형태에 주목하는 서구의 전통적인 견해로부터 이탈한다. 서구의 전통적인 삼위일체 이해에 따르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산출(generatio)되었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출(spiratio)되었다. 이러한 한 가지 유형에 대항하여 몰트만은 세 종류의 유형을 제시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과 부활 사건에 있어서 우리는 성부-성령-성자의 유형이 나타난다. 둘째,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령의 파송에 있어서는 성부-성자-성령의 유형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완성과 영광화의 과정에서는 성령-성자-성부의 유형이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다양한 관계가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렇게 다양한 형태를 띈다면,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주는 주제는 무엇인가? 몰트만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 찾는다. "성서의 증언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로 지칭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역시 하나의 주체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삼위일체적 협력에 의하여 성취된다. 몰트만이 이렇게 삼위일체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몰트만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관념적인 이해로부터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풀어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세 분의 구분되는 주체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후에 그는 이러한 세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며, 또 그들 사이의 하나됨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러한 몰트만의 접근 방법은 하나님의 하나됨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뒤에 하나님의 세 분이심에 관해서 물었던 전통적인 방법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몰트만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분되는 위격에 주목한 뒤에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해석될 때,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은 세 위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되며, 몰트만은 이러한 자신의 삼위일체 이해를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명명한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몰트만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에 충실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서술하려고 시도한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는 하나님을 세 위격 사이의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삶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이제 사회적이며 관계적인 특성을 지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서술하기 위하여 몰트만은 공동체를 그 유비로 사용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한다.
3. 하나님의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3-1. 사회적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하여 기독교 신학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유비를 사용해 왔다. 하나는 개인적 인격의 유비를 사용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유비를 사용한 것이다. 첫번째 개인적 인격의 유비는 심리적 삼위일체론을 낳았고, 두번째 공동체적 유비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낳았다. 심리적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심리적 행위의 역동적 통일성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하나이심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는데, 인간 존재의 영적인 특성을 그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반면에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삶의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관계 가운데 있는 인간의 공동체를 그 실마리로 삼는다. 심리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통일성에 주목한다면,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삼위성(三位性)에 주목한다.
서구의 신학적 전통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오랫 동안 사회적 삼위일체론보다는 심리적 삼위일체론을 선호해 왔다. 그러나 몰트만은 구원의 역사에 근거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더욱 선호한다. 몰트만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구분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가운데 본질의 삼위일체론과 절대적 주체의 삼위일체론을 거부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실체의 삼위일체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동일한 본질에서 찾으려는 고대의 삼위일체론을 의미한다. 반면에, 절대적 주체의 삼위일체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절대 주체인 하나님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 몰트만은 이 두 가지 시도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을 추상적인 일신론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비판한다. 본질적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의 동질적인 신적인 본질로 환원시킨다면, 절대 주체의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로 환원시킨다. 이 두 주장은 모두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를 소홀히 다루기에,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해야 한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몰트만이 말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신적인 위격 사이의 구분을 강조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하나님은 독특한 공동체 안에서 변화하는 관계 속에 계신 세 분의 구분되는 위격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 안에서 계신 관계적 공동체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은 본질이나 주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이해된다.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인간의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몰트만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공동체는 모든 측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인 삶에 상응하게 되며, 상응할 수 있다."
인간의 공동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함으로써, 몰트만은 삼위일체가 닫혀진 원이 아니라 열려진 과정임을 또한 강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열려진 존재로서 이해되어야 함을 몰트만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삼위일체는 열려진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를 '닫혀진 원'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고 몰트만은 강조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늘에 외톨이로 존재하는 닫혀진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지상에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열려진 종말론적 과정이다.
만일 구원의 완성이 분리되고 소외된 피조물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통일성을 열려진 통일성, 초대하는 통일성, 연합하는 통일성, 그리하여 통합하는 통일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서, 몰트만은 "신적인 위격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도 넓어서, 모든 세계가 그 속에 다 포함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3-2. 위격과 관계
만일 몰트만이 하나님을 신적인 위격의 공동체로서 이해한다면, 그는 어떻게 삼신론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하나님이 세 분이 되는 것은 아닌가? 몰트만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양태론적 일신론을 거부한다. 하지만 몰트만 자신은 어떻게 하나님의 세 위격과 통일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의 위격 개념과 관계 이해를 고찰해야만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즉, 하나님의 위격 사이의 관계가 곧 하나님의 위격을 구성한다. 몰트만은 관계적인 위격(인격) 이해를 전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세 위격은 서로 서로를 향한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특정하고도 독특한 성품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존재하며, 하나님의 세 위격은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결정된다.
몰트만에 따르면 인격의 존재(Personsein)라는 것은 곧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이해를 전개하는데, 이에 따르면 하나님의 각 위격의 인격성은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몰트만은 하나님의 위격(인격)을 관계로 환원시키는 것이 양태론의 이단에 빠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양태론의 이단에 따르면 하나님의 위격은 하나님의 삼중적인 자기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자신의 관계적 위격 이해를 인격에 대한 실체적 이해와 결합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실체적 인격 이해가 하나님의 세 위격의 정체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몰트만은 관계적 인격 이해가 실체적 인격 이해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만일 관계적 인격 이해가 없다면, 자신의 실체를 가진 하나님의 위격은 세 분의 실체가 될 것이며, 이는 곧 삼신론으로 연결될 것이다. 관계론적 인격 이해와 실체론적 인격 이해를 모두 보존하려고 노력하면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위격과 관계는 상호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관계 없이는 인격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격이 없이는 또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몰트만에게 있어서 인격과 관계는 발생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고 함께 생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과 관계 이해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은 단지 신적인 위격으로서 서로 구분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안에서 또한 연합되어 있다. 이는 인격(개인)적 특성과 사회적 특성이 결국은 동일한 것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격(인격)의 개념은 그 자신 안에서 하나됨(Einigkeit)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역으로 하나님의 하나됨의 개념이 그 자신 안에 세 위격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음과 마찬가지이다.
3-3. 하나님의 순환적(Perichoretic) 통일성
이제 우리는 몰트만의 위격과 관계 이해를 살펴보았으므로, 몰트만이 구체적으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통일성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몰트만에 따르면, 신학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사고하는 두 종류의 흐름과 모형이 있어 왔다. 첫번째 유형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를 따르는 전통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강조하는 전통이다. 이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로서 이해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하나의 동질적인 신적 본질 속에서 발견된다. 터툴리안(Tertullian)의 유명한 표현, "하나의 본질 - 세 위격"(una substantia - tres personae)은 이러한 이해에 기초한 표현이다. 그러나 몰트만에 따르면, 여기에서 확보되는 신적인 통일성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위격적 차이와 구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두번째 견해는 헤겔(Hegel)의 철학에서 발견되는 절대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삼위일체 이해이다. 헤겔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절대 주체로 이해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한 분이며 동일한 신적 주체 속에서 발견된다. 근대 철학과 신학의 삼위일체론에서 자주 발견되는 공식인 "하나의 신적 주체 - 세 존재 양식"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삼위일체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속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세 분 되심은 제대로 인정되지 못한다.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의 방향으로 흘러가며,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위격은 한 주체의 변형으로 해체되어 버린다고 몰트만은 지적한다.
몰트만은 이상의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거부하는데, 이는 두 가지가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구분되는 위격에 대한 성서의 성서의 강조와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묘사되는 하나님은 본질로서의 하나님도 아니고 절대 주체로서의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의 하나됨을 숫자의 하나됨으로 이해하는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몰트만은 거부한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일신론으로 환원하는 주장을 부인한다.
만약에 몰트만이 본질의 개념뿐만 아니라 절대 주체의 개념도 부인한다면, 몰트만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통일성은 어떤 모습을 띠는가? 몰트만의 답변은 하나님의 세 인격 사이의 순환(Perichoresis)에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안에서 세 분 하나님은 함께 사역한다. 만일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이야기가 성부, 성자, 성령의 협력에 의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일성은 수적으로 하나인 통일성이 될 수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독특한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 있다.
만일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곧 타자를 자신과 연합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증언에 상응하는 통일성의 개념을 찾는다면, 우리는 하나의 본질과 동일한 주체의 개념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세 위격이 서로 연합하는 하나됨(Einigkeit)이며, 이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Einigkeit)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서로의 관계 속에서 거하는 세 위격의 연합(Vereinigung)과 교제(Gemeinschaft) 속에서 발견한다. 변화하는 관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순환의 사랑(perichoretic love)을 통하여 자신의 동일성을 완성하는데, 순환의 사랑은 동일성(identity)의 특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교제의 특징을 가진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신적인 세 위격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동질적인 본질에 있지도 않고, 하나의 절대적인 주체에 있지도 않으며, 구원의 공동 사역 가운데 삼위일체적 공동의 관계 속에 있는 역사 속에 있다는 것이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의 제안을 따라서 몰트만은 순환(perichoresis)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의 순환(perichoresis) 속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위격은 서로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가 된다. 그들의 순환(perichoresis) 속에서 각각의 위격을 구분하는 개별적 특성들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특성이 된다. 그들의 순환(perichoresis) 속에서 삼위일체적 위격들은 세 분의 서로 다른 개체들로 이해될 수 없으며, 오직 신적인 삶의 순환(circulation) 속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독특한 공동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몰트만은 주장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 속에서 정교한 형태의 삼신론이 숨어 있음을 지적하는 주장들이 있다. 예를 들어, 몰트만이 성부, 성자, 성령을 세 분의 구분되며 상이한 주체로서 강조하는 것은 삼신론의 위험 아래 떨어진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으로 공격받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답변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이 되는 것은 위격(인격) 개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이미 존재한 이후에 다른 존재와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이해될 때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삼신론의 주장은 오직 개인주의적인 인격 이해에 바탕을 둔 경우에만 적용되는데, 자신의 삼위일체론은 그러한 개인주의적 인격 이해를 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환(perichoresis)의 교리는 셋의 구분과 하나됨을 뛰어난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다. 셋의 구분을 하나됨으로 축소시키지도 않고, 하나됨을 셋으로 분해시키지도 않으면 순환의 교리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한다.
삼신론에 대해서 응답하는 몰트만의 논지 속에 타당한 부분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만일 인격에 대한 개인주의적 이해가 제거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순환(perichoresis) 개념이 충분히 전개된다면, 삼신론의 위험은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말하는 연합(Vereinigung)과 본질 또는 주체의 개념에서 사용되는 통일성(Einheit)의 개념은 서로 다른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합(Vereinigung)의 개념은 통일성(Einheit)의 개념과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의 문제는 존재론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종말론적인 문제로 남겨진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 제기하는 진짜 문제점은 그의 논증이 전개되는 다른 측면에 있다. 하나님의 통일성을 언급하면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구성(constitution)과 삼위일체의 내적인 삶(inner life)을 구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순환적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서, 몰트만은 이미 관계적이며 순환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성을 도입하는 점에 있어서 몰트만의 순환적 이해는 이제 현저히 약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몰트만은 말한다:
삼위일체의 구성에 있어서, 성부는 신성의 '기원이 없는 기원'(origin-without-origin)이다. ... 그러므로 신성의 구성에 있어서, 성부는 삼위일체의 '군주적인'(monarchical) 통일성을 형성한다.
삼위일체의 구성에 있어서, 성부는 모든 신성의 원천으로서 이해된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성부 안에서 발견한다. 몰트만은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두 수준을 구분하고 있다. 성부는 구성의 수준에서 모든 신성의 원천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수준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적인 위격들은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 서로의 원천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구성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군주론을 긍정하는 듯이 보이는데, 이는 몰트만이 그토록 반대한 것이며 그가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제창하는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성부의 군주적 우월성이 긍정된다면, 몰트만 자신이 그토록 보존하려고 애썼던 하나님의 위격 사이의 동등성은 위협받지 않을까? 삼위일체의 구성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러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남을 본다. 성부 하나님은 신성의 원천으로서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결정적인 탁월성을 향유하고 있다. 이제 다음 항목에서 보이듯이, 몰트만은 하나님에 대한 군주론적인 개념과 사회의 군주론적 구조 사이의 상응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몰트만 자신이 하나님 안의 존재론적 군주론을 긍정할 수 있을까? 삼위일체의 구성에 있어서의 성부의 군주론적 우월성에의 주장은 다른 곳에서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는 자신의 논지들과 어긋나는 듯이 보이다. 바로 이 점에서 몰트만의 신학은 내적인 일관성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 사회적 프로그램으로서의 삼위일체론
칸트에게 있어서 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신앙은 순전히 사변으로서 삶에 있어서 그 어떤 실천적인 의미도 지니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자적으로 취해진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우리는 실천적인 목적을 위한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누군가가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할지라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며, 만일 누군가가 그것(삼위일체론)은 우리의 모든 개념을 넘어서는 것임을 의식한다고 한다면, 더욱이나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몰트만은 칸트의 이러한 주장에 강력하게 반발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관한 비실제적인 사변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교리이다.
도대체 삼위일체론은 우리의 실천에 있어서 어떠한 중요성과 함의(含意)를 가지는가?
첫째, 삼위일체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개념에 있어서 일신론을 극복하게 하며, 정치적 영역에서 있어서 군주론을 비판하게 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기독교 신앙은 일신론에 근거한다는 주장을 논박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그저 하늘에 공허하게 존재하는 초월적 하나님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그리고 오늘도 지속되는 성령의 능력 속에서 함께 역사하시는 공동체 되신 하나님이다. 정치적인 영역에서, 몰트만은 일신론에 바탕을 둔 군주론을 거부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철저한 일신론은 정치적 군주론으로 연결된다. 일신론은 하나님을 절대 주권의 용어로 이해하는 가운데 지상의 왕권을 정당화하는 유혹을 받는다. 몰트만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천상의 왕, 그리고 하나의 주권적인 법과 로고스는 지상의 하나의 왕에 상응한다."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는 일신론적 하나님 이해에 대항하는 가운데 전제주의적이며 군주론적인 정치 체제를 거부하게 만든다.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 곧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는 군주론적이며 폭군적인 하나님 이해를 거부하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군주 이해의 신학적 바탕을 제공하기를 거부한다. 페터슨의 주장에 기대면서,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전제적인 정치 체계에 대한 방어막이 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는 압제적인 군주론과 절대 권력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를 거절한다. 이러한 몰트만의 견해는 타당한가? 몰트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는 정치적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 그 자체가 정치적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교리가 된다거나 오직 삼위일체론만이 정치적 군주론의 방어막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유대교적인 유일신론 안에 있는 예언적 전통도 억압적인 정치 체계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인간학의 영역에서 참된 공동체와 참된 인간성의 모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형상으로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순환(perichoresis) 가운데 발견되는 참된 교제를 실현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몰트만의 표현에 따르면, "거룩한 삼위일체는 우리의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하나님의 통일성 가운데 있는 신적인 위격의 공동체는 자신의 신적인 삶을 인간 공동체의 삶 가운데 반영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가장 상응하는 공동체이겠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인격적 독특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어떤 종류의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가장 상응하는 인간이겠는가? 그것은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는 고독한 인간도 아니며 이 세계에 대해서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절대 주체로서의 인간도 아니다. 개인적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며, 그 사회성은 개인적 정체성에 의하여 보완되는 공동체 속의 인격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가장 상응하는 인간상이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지배와 억압이 없는 공동체의 실현과 인격적 존엄성이 보장되는 인간 실현을 요청한다.
셋째로, 몰트만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로 나뉘어진 이 세계의 앞날에 대해서 건강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몰락해 가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전체주의는 인간의 앞날에 대해서 건강한 선택이 되지 못한다. 또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몰락은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인간상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임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에서 발견되듯이, 사회적 개인과 인격적 공동체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론에서 우리의 교훈을 삼는다면, 개인주의나 사회주의는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 오늘날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참되며 '인간적인' 사회의 방향으로 수렴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에서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론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삼위일체론은 결코 실천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몰트만의 표현을 빌자면,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5.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고찰해 보았다. 몰트만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관한 공허한 사변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복음서에 나타난 세 분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로부터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는 출발한다. 우리가 성서에 나타난 성자 하나님의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참으로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바른 성경 이해와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 신앙은 사변적인 요소가 아니라 참으로 필수적인 하나님 이해의 틀이다.
몰트만은 구원의 역사로부터 출발하여, 신적인 위격의 구분과 관계를 존중하는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는 가운데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제시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이거나 절대적인 주체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히려 순환적 통일성 속에 거하는 독특한 공동체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하나됨은 동질적인 본질이나 하나의 동일한 주체 속에 있기보다는 하나님의 위격들 사이의 순환적 교제 안에 있다. 자신의 순환적 통일성 개념과 순환적이며 관계적인 인격 이해를 통하여 몰트만은 삼신론의 비판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를 통하여 몰트만은 세 분의 구분되는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는 성서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있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 가운데 숨어 있는 일신론적 경향성을 비판한다. 하나님의 통일성과 하나됨은 숫자적인 하나됨이 아니라, 그 자신 안에 구분을 가지고 있는 통일성임을 지적한 것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몰트만 자신의 삼위일체 이해가 삼위일체의 구성(constitution)의 측면에서 자신의 관계론적 이해에 어긋나는 주장을 펼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이 전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론 논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향을 지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라칭거(Ratzing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통일성 속에서 다양성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는 원칙적으로 다양성과 통일성에 모두 동일한 중요성을 부과한다. 고대인들에게 다양성은 통일성의 파괴로서 보였던 반면에, 삼위일체론적 용어로 사고하였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다양성은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중요성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은 수적으로 단일한 통일성 속에 있지 않다. 몰트만이 잘 강조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참된 하나됨은 참된 인간의 공동체를 창조하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는 순환적(perichoretic) 공동체(community)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하나 되심은 인간의 함께-하나됨(comm-unity) 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홀로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인간의 선입견이 만들어낸 온갖 종류의 하나님 이해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셔서 그저 자족하는 가운데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무관심한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인간과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저 무자비하고 폭군적인 힘이 아니라,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는 힘임을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영광이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가운데 천상에 유아독존(唯我獨尊)하는 독재자의 영광이 아니라, 피조물과 자신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인간과 그의 세계가 가지는 아픔을 자신 안에 끌어 안으시는 참 사랑의 영광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신앙으로부터 구분해내는 중요한 하나님 이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라는 신비를 지적으로 완전히 해소시켜 버리지 않는 가운데 그 실천적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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