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철, "부활신앙의 신학적 의미" 「교육교회」 1995.4. 14-20.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인간 삶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죽음은 인간에게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게 마련이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실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는 모습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낯선 자세이다. 기독교 신앙은 또한 죽음이 던지우는 그림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오직 생물학적인 단계의 마지막에만 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은 죽음의 다양한 세력과 그림자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심지어는 종교적 영역에서도 죽음은 아직도 자신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죽음의 현실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 근본에 있어서 부활 신앙이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또한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부활 항목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부활 신앙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한 것임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 신앙이 곧 부활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신학자들은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고, 당시에 불트만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부활에 관한 논의가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한 긍정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있을까?" 불트만에 따르면, "부활에 대한 신앙이란 단지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일 뿐이다. ... 부활 그 자체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오직 제자들의 부활 신앙만이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트만에 반대하여 우리의 신앙이 부활의 기초가 아니라, 역으로 부활이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됨을 지적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역사적 행위 속에 기초한 신앙임을 말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현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은 누구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가? 부활하신 분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분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내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은 부활 사건이 예수의 구속(救贖)의 십자가의 맥락 안에서, 곧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살펴져야 할 것임을 뜻한다. 예수는 죄와 죽음과 율법의 세계에 대항하여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준 것을 의미한다.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부활의 일차적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과 관련하여 살펴질 때 그 뜻이 분명히 밝혀지는데, 그 세력은 곧 죄와 죽음과 율법의 세력이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적하는 세력은 언제나 다음의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도전한다: 죄, 율법, 죽음. 하나님 없는 인간은 죄 가운데 살며, 율법 아래 놓여 있고, 죽음의 세력 아래서 신음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바울은 죄의 댓가로서 죽음이 찾아왔음을 지적하면서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33)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건 간에, 결국에는 사망의 피고용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또는 어떤 것을 성취하건 간에 결국에는 사망의 세력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일이 끝날 때,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사망은 우리에게 우리의 봉급을 나누어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 있는 사람들과 피조물을 향한 구원론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정당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뜻하는 사건이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였음을 또한 말한다. 이 "사흘"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여호와께서 ...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고 선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전체를 흐르는 구원사의 사건 속에 살펴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사흘만에"라는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하나의 사건의 두 측면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무리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삼일간의 간격이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은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는 독립된 구체적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구체적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활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양 극단의 부활 이해를 거부해야 한다. 한 편으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부활은 하나의 실존주의 신앙의 사후(事後) 반성과 성찰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건이 아니다. 부활 사건이 주관적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객관적 사건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또한 역사 실증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역사적 실증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부활 사건의 정당성 여부를 걸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변호함에 있어서 은밀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부활 사건의 종말론적 새로움을 무의식적으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게 되는 유혹이다. 우리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방법에 의하여 부활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부활 사건은 예수의 지상의 삶의 단순한 환원이 아니며 시체의 본래대로의 환원도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은 궁극이전의(penultimate) 삶의 연장이 아니라 궁극적인(ultimate) 삶과 세계의 도래이다. 궁극적인 세계와 삶의 도래는 궁극 이전의 물음과 범주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바울이 부활 사건의 의미 맥락을 증명과 실증에 두지 아니하고, "전파"와 "신앙"에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부활 사건의 적합한 맥락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전파와 신앙"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와 신앙"이 헛된 것임을 말하면서,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전파와 신앙"이 살아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전 15:14) 바울은 왜 실증과 증명이 아니라, 전파와 신앙을 부활 사건 이해의 올바른 맥락으로 제시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건이며, 지금 세계의 연장이 아닌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의 모든 범주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부활 사건의 전적인 새로움에 대한 반증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이 세계 안에서 증명가능한 사건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이 세계의 일부분의 사건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는 사건이기에, 그것의 전체 의미 맥락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이해되어야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대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부활이란 이전의 삶의 소생이거나 이전 세계의 단순한 연장(延長)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 신앙을 실존적 차원으로만 축소해서는 곤란하다. 불트만이 지적하고 있듯이, 부활 사건은 분명히 우리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새로운 지평은 인간의 실존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실존의 포괄적 틀이 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를 선포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로 옮기셨음을 말한다. 성경은 신앙의 단순한 실존주의적 주관화에 반대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분명히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이미 결정적으로 선취된(anticipated)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음"(고후 5:17)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 것을 단지 실존의 영역에만 국한해서는 안된다. 죽음의 세력의 영역이 포괄적이듯이, 부활의 생명이 다스리는 영역도 포괄적이기에 개인의 차원이나 영혼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역사의 종말에 우리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고백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 믿사옵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피조물의 역사에 있어서 유래가 없는 첫 사건이었으나, 그것이 마지막 사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부활 장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모든 인간, 아니 모든 피조물의 미래가 선취되어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 가운데 부활한 것과 같이, 모든 성도도 육체 가운데 부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의 상태가 단순한 영혼주의적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하늘과 땅 사이의 이원론은 기독교 신앙의 부활 이해에서 정면으로 거부된다. 성도의 최종적 완성은 육체를 벗고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함에 있어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의 측면을 간과한다면, 부활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축소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중심으로 부활 신앙의 신학적 의미를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부활 이해는 오늘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가? 우리는 부활 신앙의 실천적 의미를 "죄악된 세계 아래 있는 운명론에의 도전" 속에서 찾는다. 부활 사건은 이 세계가 폐쇄된 세계이며 이제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다는 운명론적인 선언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 있는 차원은 부활 신앙의 변혁적인 차원이다. 이제 참 물음은 부활을 인식적으로 믿느냐, 아니냐의 지적인 차원만의 물음이 아니다. 참 물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와 현실에 들어섬으로써 새 역사의 변혁 속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분리되어 있어서 여전히 죄, 사망, 율법 가운데 있느냐의 실존과 역사 변혁의 물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파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도피하는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 죽음의 실재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죽음의 실재에 대해서 도피하는 소극적 자세만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부활 사건에 기초한 부활 신앙 가운데 죽음의 실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저항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선취적으로 참여한다. 우리는 죽음과 죽음의 세력이 마지막이라고 외치는 모든 죽음의 운명론에 대항하여 부활 사건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예기적으로 참여한다. 우리는 서론에서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 죽음의 실재를 진지하게 대면함을 지적하였다. 이제 우리는 여기 결론에서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는 부활의 현실과 실재를 더욱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과, 그리하여 죽음을 모든 삶의 궁극적인 실재로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두 장면의 회상(回想)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50년 전, 4월 9일 (부활절 즈음하여) 독일의 플로센부르그의 한 감옥에서 본회퍼라는 젊은 목사가 교수형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 독일을 장악하고 있던 제3제국의 전제적 통치에 대항하여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가 투옥되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교수형을 앞두고 있었다. 그와 마지막 주간을 보낸 영국인 장교 페인 베스트는 본회퍼 목사의 마지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본회퍼 목사는 짤막한 예배를 인도하였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와 닿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했다. ... 그가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마자 문이 열렸고, 사복을 입은 인상이 나쁜 두 사람이 들어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수 본회퍼! 우리와 가도록 준비하라." 이 말은 거기에 있던 모든 죄수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교수형을 뜻했다. 우리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때 그는 나를 끌어 다니며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삶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부활 신앙을 몸소 실천한 본회퍼는 자신의 미완성 작품인 "윤리학"에서 죽음의 우상화를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적은 현재 우리 가운데 횡행하고 있는 죽음의 우상화를 뿌리째 뒤흔든다. 죽음이 최후의 것이라면, 지상의 삶은 모든 것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약 1900년 전 고대 근동의 한 동네에서 한 사람이 로마 제국의 세력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그를 따르던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팔았으며, 나머지 제자들은 그의 체포와 죽음의 사건 가운데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장면을 보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였다: '그것이 그들이 지녔던 실낱같은 희망의 마지막이라고'. 그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만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새 역사를 향한 새로운 행진은 시작되었고, 오늘도 그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발 아래 짓밟히고 살해당한 모든 것의 부활을 믿는다. ...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열린 무덤의 틈새를 통하여, 부활과 생명의 끝없는 흐름이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바로 그것이 부활절이며, 바로 그것이 부활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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