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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 칼럼/ 『목숨의 소중함과 살아있음의 아름다움』

은바리라이프 2008. 12. 30. 18:28

김태종 칼럼/ 『목숨의 소중함과 살아있음의 아름다움』

서양 사람들이 ‘거룩’이라고 부르는 말의 속뜻은 ‘나뉨’과 ‘갈림’, 곧
‘구별됨’이었다. 속된 것과 차별화된 것이 바로 거룩의 실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초월신 야훼와 맞물리게 된다. 그러나 거룩이 단지 ‘구별된
것’이라고만 말하는 논리는 곧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은 초월성으로
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월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응하는 개념이 하나님
의 내재성이다. 내재성과 초월성이 균형을 갖출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올
바르게 된다.

그렇다면 거룩함의 참된 뜻을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목숨의 소중
함’과 ‘살아있음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의 살아감이 소
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이 ‘거룩’이라는 말의 알찬 뜻이다. 목숨에 대한
믿음의 진술, 그것이 곧 거룩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존재
의 이중성이 정확하게 설명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다시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 물음은
‘그렇다면 어느 문화가 이 거룩을 추구하는 일에 더 가까우냐’는 것이다. 문화
를 묻는 것은 한 사회 구성원이 살아온 역사와 가치관, 그리고 그들의 삶을 묻
는 일이다. 따라서 거룩에 가까운 삶이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삶이고, 그런 문화
가 바람직한 문화라는 규정을 할 수 있다. 거룩을 이루어가는 시도로서의 문화
는 미국의 토착민이었던 인디언들의 가치관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서구인들이
야만스럽다고 하거나 미개하다고 한 수많은 문화들이 훨씬 서구의 문화보다 거룩
에 가깝더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한민족의 삶과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추구되어 온 흐름도 또한 거룩을 찾으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국교회사를 통해서 아주 아름답게 승화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
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신앙전통인 새벽기도이다.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참으로
한국교회가 자랑하며 전파해야 할 아주 중요한 재산이 바로 새벽기도의 전통이
다. 이것을 자랑하고 전파하기 위해서는 새벽기도의 신학화작업이 일어나야 한
다. 단순히 성서의 한 구절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고’라는 말씀을 새
벽기도의 근거라고 하는 안일한 주장으로 그쳐서는 안될 일이다.

새벽기도의 큰 배경이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독교의 기도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새벽비나리이다. 절대자에게 자신과 자신의 삶에 관계된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기도는 위대한 기독교의 재산이다. 여북하면 본래 기도라
는 개념이 없었던 불교가 이 기도를 배워서 요즘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겠느냐
는 말이다. 거기다가 한민족의 새벽비나리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또 다른 재산이다. 이른 새벽, 식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난 한
국 여성이 물동이를 이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샘에 가서 물을 길어온다. 그
리고 그 새벽의 깨끗함을 담은 물을 따로 하이얀 그릇에 담아 장독대에 올려놓
고 손을 마주 모아 비비며 몇 번이라는 규정도 없이 절을 올리던 것이 새벽비나
리였다.

선교 초기에 이 두 전통이 만나서 자연스럽게 새벽기도를 낳았다. 이 새벽기도
의 정신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김과, 살아있음에 대한 소중함이라는 두 가
지 내용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겨레가 본디 생명경외의 사상을 그 바
탕에 깔고 역사를 전개시켜온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벌레 한 마리라도 함부로 하
지 않는 정신이 그 새벽비나리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새벽기도는 한국교회
의 급성장을 이룬 매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
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새벽기도의 쇠퇴가 교회성장이 둔화되는 원인이라고
소박한 진단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벽기도는 정착시키던 토착화행위가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참으
로 안타까운 사실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는 쉽게 접근했던 초기 선교의 정
신이 거룩을 지향하던 한국인의 얼과는 연결되지 못했던 것이 매우 큰 한계로 지
적되어야 한다. 만일 한국 문화에까지 접근해서 거기서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더
라면 교세의 성장도 훨씬 활발하게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
은 그와 정반대로 진행되었지만 말이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문화흐름이 하나님
의 뜻과 어긋나는 이교도의 문화, 또는 마귀숭배의 흔적쯤으로 처리하고 말았
다. 거기서 기독교의 성장 한계와 쇠퇴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거룩의 추구라고 하는 믿음살이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소중한 종교의 재산이
다. 그것을 싸구려 축복과 맞바꿔버린 일이 한국교회의 어리석음이었다. 단기이
익을 노리고 그렇게 했다면 교회의 성장에 걸맞는 보다 깊이있는 가치관을 생산
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거룩을 추구하는 종교
의 본성을 회복하고, 그 거룩의 핵심이 목숨이라는 것을 되살려 놓을 때, 종교
의 걸음걸이가 반듯해질 수 있다. 그것은 결 고운 형태로 거룩을 추구하던 우리
옛 문화를 성서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렇
게 될 때 기독교는 귀화종교에서 ‘한국기독교’로 자리잡을 수 있는 여지가 마
련될 것이다. 서둘러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