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성령과 악령

사탄을 이기는 길

은바리라이프 2008. 10. 27. 19:42



사탄을 이기는 길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산다.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여전히 우리 육신 가운데는 죄와 사망의 법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육신 안에 거하는 죄와의 싸움을 계속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영이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받는 날 내 영은 이미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 육신에는 여전히 죄(마귀)의 법이 나를 잡아오는 것을
오랜 기간 동안 보아 왔다. 우리는 우리 육신이 죽는 그날 까지 죄(마귀)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 육신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 받는 그날까지 구원을 이루어 가야만 한다.

뒤돌아보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나는 여전히 죄와의 계속적인 싸움이 있었다.

기회만 나면 사탄은 내게 달콤한 말로 세상을 얘기하고 세상 속으로 나를 이끌고 다녔던 것을 기억한다.

 

사탄은 내가 어둠에 빠질 때를 결코 놓친 적이 없다. 금세 내 마음 깊숙이에 들어와서 구원받은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 라고 참소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나를 하나님 앞으로 돌아설 수 없을 만큼 양심에 송사하는 일은 보통이다. 마귀의 능력은 놀랍다. 마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대적하며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적한다.

 

사탄이란 말이 대적자, 원수라는 뜻처럼 우리의 대적이고 원수이다.  구원받은 이후 주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귀의 대적에 넘어지거나 죄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마귀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가 하면 오랜 세월동안 마귀의 송사에 시달리며 즐거운 교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분들도 보았다. 마귀는 기회다 싶으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한다.

구원받은 이후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귀를 물리치는 지혜를 하나님께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는 것인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그리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주님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Ⅰ . 사탄의 역사

가. 생각 속에 역사

그럼 먼저 사탄은 사람을 어떻게 공격하는지 알아보자.
많은 경우 사탄은 각종 환상으로 사람들을 포위한다.

사람들은 이런 환상들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의 생각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이 만든 견고한 진일 줄 모른다.

사탄이 우리 머리 속에 넣어 준 환상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면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 환상에서 온 것들이다.

많은 죄들도, 나와 형제자매들 사이의 어려움 중 많은 것들도
환상으로부터 온 것이지 사실이 아니다.

많은 때 사탄이 우리에게 아주 큰 환상을 주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받아드리면 그의 역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사상을 거절하면 그의 역사를 거절하게 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계략)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며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4-5)

고린도 후서 10장 4-5절은 사탄이 각종 계략을 견고한 진으로 삼아
사람들의 생각을 둘러싼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주님은 사람을 얻기 위해 먼저 사탄의 견고한 진을 다 파하신다.
그런 다음에야 사람의 생각을 뚫고 사로잡게 된다.

계략은 무엇인가? “계략”이라는 용어는 헬라어에서
‘이유’, ‘환상’ 혹은 ‘사상’의 뜻으로 번역된다.

많은 사상들은 우리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에게 준 것들이다.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온 이런 사상을 거절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탄의 시험은 대개 사람의 생각 속에 있다.

사탄은 자기가 당당하게 공격하면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단호히 일어나서 그를 대적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마귀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 부지불식간에
어떤 사상을 우리 머리 속에 넣어 준다.

우리로 그런 사상을 갖게 한 다음 이어서 그런 사상을 생각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생각할수록 그 일이 일리가 있고 옳다고 생각된다면
이미 그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그 사상은 바로 사탄이 준 시험이다.
우리가 생각 안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면 사탄은 우리를
시험할 수 있는, 공격하기 가장 쉬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많은 어려움은 사실적인 면의 어려움이 아니라
사상적인 면의 어려움이다. 때로 어느 형제나 자매를 볼 때
그가 나와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나와 매우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로인해 나와 그 사이에 간격이 생기는데 실지로는 그런 일이 없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조종하고
그 형제 혹은 자매의 생각 속에서 조종하는 것이다.

결국 여러분 사이에 문제가 발생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돌연히 임하는 사상과 느낌을 거절하고
생각 속에서 사탄에게 여지를 남겨 주지 말아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그리고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온 사상을 지나치게 주의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사탄이 수입한 사상을
전혀 주의하지 않는 극단에 빠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탄이 주입한 사상을 지나치게 주의하는 극단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사탄으로부터 온 사상을 조금도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속고
사탄의 사상을 계속 주의하는 사람은 정신이 쉽게 병든다.

사탄의 시험을 지나치게 주의하는 사람은 그 사상이 혼미케 되면서
쉽게 사탄의 궤계에 넘어간다.
이는 사람의 눈이 주님을 앙망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면으로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한 면으로
그 공격을 다만 거절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그를 완전히 상관하지 않게 하거나 지나치게 주의하게 한다.
우리의 눈이 계속 그를 주의할 때
사탄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쓸모없게 하고 하루 종일 그의 사상을 주의하게 한다.
어떤 형제자매를 막론하고 자신의 사상을 지나치게 주의하는 사람은
이미 속임을 당한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계속 사탄으로부터 온 사상을 주의한다면,
이것은 사탄이 자기 속에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행을 유지해야 한다. 결코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된다.

 

나. 육체 안에 역사

성경에서 많은 육체적인 질병은
사탄의 공격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사탄의 공격에 속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눅 4:39).

주 예수님은 인격 있는 어떤 존재를 꾸짖으신 것이다.
찻잔이나 테이블을 꾸짖을 수 없다.
열병은 일종의 증세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은 병의 증세를 꾸짖지 않고 증세 배후의 사탄
곧 인격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 열병을 꾸짖으실 때
열이 가라앉았다.

마가복음 9장에는 한 벙어리 되고 귀먹은 아이가 있다.
사람이 볼 때는 귀먹은 것과 벙어리는 다 병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면서 벙어리 되고
귀 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어린아이의 듣지 못함과 말하지 못함은 귀신 들린 현상이지
일반적인 질병이 아니다.

의학적인 질병이 있는 반면에 마귀의 공격에 속한 질병도 많다.
성경은 이에 대해 병을 고쳤다고 하지 않고
주님이 꾸짖으셨다고 말한다.

욥의 온 몸에 난 종기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다.
이것은 의학상의 질병이 아니라 마귀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이를 처리해야만 이런 질병을 처리할 방법이 나온다.
이런 질병은 항상 갑작스럽게 왔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지는데
일반적인 질병이 아니라 사탄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에 있다.
즉 사탄은 자기가 사람에게 준 질병이 우리에게 폭로되고 알려질까 하여
천연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귀로 천연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게 한다면
그 질병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꿰뚫고 마귀를 꾸짖는다면
그 질병에서 나음을 얻을 수 있다.

한 번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열이 높고 아주 고통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후에 이것이 사탄의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 주께 기도했는데
이튿날 그의 열이 가라앉았다.

만일 그 질병이 합당한 이유가 없고
사탄의 공격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면 사탄을 대적하고 거절해야 한다.

육체 안에서의 사탄의 역사는 사람을 병들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을 죽인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인 것같이 처음부터 살인자이다(요 8:44).
우리는 마귀가 준 질병을 대적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마귀의 살인을 대적해야 한다.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과 「죽어 버리자」는 생각은
모두 사탄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욥에게 있었던 사탄의 역사는 바로 그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향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자살하려는 생각과 일찍 죽으려는 생각은 다
사탄이 사람에게 준 시험이다.

마귀는 죄를 범하도록 사람을 시험하고 또한 죽을 생각을 갖도록
사람을 시험한다.

여행할 때 위험을 당하리라는 생각조차도 사탄의 시험이다.
언제든지 이런 사상이 들어올 때
우리는 일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다. 양심 안에 역사

계시록 12장 10절은, 사탄을 가리켜『‥‥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고 말한다.

사람의 양심 안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참소를 볼 수 있다.
사람은 구원받은 이후 앙심이 살아나서
죄가 무엇인지를 느끼기 시작한다.

사탄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양심의 죄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여 용서를 구하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가장하여 우리의 양심에서 사탄의 참소를 받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탄의 매우 보편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매우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이 성령의 책망이고
무엇이 사탄의 참소인지를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참소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사탄으로 하여금 참소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본래 하나님의 손에서
유용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양심 속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고 끊임없이 참소를 받아 자신에게
이런저런 죄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들의 양심은 극도록 약해지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일어서지 못하여
결국 영적으로 종신토록 불구자가 된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나서 성령의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사탄의 참소를 대적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책망과 사탄의 참소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책망들이 가장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그것들은 모두 사탄의 참소이다.

그러면 사탄의 참소와 성령의 책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첫째, 성령으로부터 온 책망은 처음에는 우리 속에
미약한 느낌으로 존재하지만. 나중에는 속에서 갈수록 밝아짐으로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사탄으로부터 온 참소는 우리 속에서 쉬지 않고 계속된다.

성령의 책망은 우리 속에서 계속 자라나는 것 같은 반면에
사탄으로부터 온 참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변함이 없다.

사람 속에서 성령의 느낌은 낮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라 점점 높은 곳으로 향하고,
사탄의 참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적으로 속에서 사람을 괴롭힌다.

둘째, 성령으로부터 온 책망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그 책망에 순종한다면
다시 책망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 몸에 있는 그 죄의 능력은 쇠약해진다.

성령의 책망을 받을 때마다 그 죄의 능력이 쇠약해지기 때문에
성령의 책망은 능히 죄를 위축되게 하며
죄의 능력을 갈수록 약해지게 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는 이와 달리 다음에 임하는
범죄의 능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셋째. 성령의 책망의 결과는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이끌지만
사탄의 참소는 우리를 낙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에게 성령의 책망이 있을수록 우리 속은 점점 강해지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처리할 것을 깨끗이 처리하게 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는 우리로 하여금
「그만두자」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성령의 책망은 우리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사탄의 참소는 우리로 자신을 살피게 하고 낙심케 한다.

넷째, 만일 성령의 책망이라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잘못을 시인한 후에
기쁨은 없을지라도 최소한 평강은 있다.
때로는 기쁨이 있고 때로는 기쁨이 없겠지만 최소한 평강은 갖게 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당신이 잘못을 시인할지라도 기쁨도 없고 평강도 없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큰 병을 앓거나 어떤 연기를 하는 것같이
아무런 결과도 없이 그냥 지나가게 된다.

성령의 책망에는 결과가 있다. 기쁨은 없을지라도 평강은 있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에는 아무런 결과도 없다.

다섯째, 성령의 책망은 주님의 보혈이 생각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는 당신에게 보혈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너는 별로 쓸모없다.
아마 주님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성령의 책망은
우리로 주님의 보혈을 믿고 의뢰하도록 인도 하지만,
사탄의 참소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보혈을 믿고 의뢰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한 느낌이 있을 때 주님의 보혈이 생각나는가,
아니면 주님의 보혈을 점점 멀리하게 되는가에서
성령의 책망인지 사탄의 참소인지를 알 수 있다.

여섯째, 성령의 책망이 지나간 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강건케 하고,
소생할 때 전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한다.

또 우리로 더욱 열심을 갖고 전진하게 하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더욱 그분을 신뢰하게 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의 결과는 우리의 양심을 약하게 하고
우리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주님도 믿지 못한다.
성령의 책망은 우리를 굴복케 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하며
우리로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는 이와 달리 마비된 사람처럼
자신도 믿지 않고 주님도 믿지 못하게 한다.

 

라. 환경 안에서 역사

우리의 환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 것이다.
그러나 많은 환경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지만
그 안에서 직접적으로 능동적으로 역사하는 자는 사탄이다.

욥의 경우처럼 생축이 사로잡히고 집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깔려 죽는 등의 이러한 환경들은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지만
사탄이 직접적으로 하는 일들이다.

베드로의 실족은 절반은 자신 때문에 넘어진 것이고
절반은 사탄이 환경 안에서 공격한 것이다.

주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눅 22: 3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넘어짐은 사탄이 능동적으로 한 일이고
주님은 단지 허락하셨을 뿐이다.

바울의 그 가시의 경우도 분명히 사탄의 역사이다.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고후 12:7)라고 말했다.
이것 또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사탄의 역사이다.

마태복음 8장에서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을 때의 경우는 더 분명하다.

주님은 바다 건너편에 가서 무서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주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오르자 돌연히 바다에 강풍이 일어나
심지어 배가 파도에 잠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때 주님은 마침 잠드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면서 말하기를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고기잡이 출신으로서 풍부한 항해의 경험이 있었지만,
이번 풍랑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적음을 책망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
인격이 없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은 바람과 바다 배후에 귀신이 있고
사탄이 거기서 풍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2. 사탄을 대적하는 길

가. 사탄으로부터 온 사상을 거절하는 길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사탄으로부터 온 사상을 거절할 수 있는가?
사탄으로부터 온 사상을 거절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각은 우리의 것이지 사탄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을 사용할 권한은 우리에게만 있을 뿐 사탄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으면 된다.

사탄은 오직 속이는 방법으로 우리의 생각을 사용할 수 있다.
사탄은 어떤 사상을 주면서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상은 사탄의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상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사탄은 항상 떳떳하지 못하고
남몰래 속임수로 사람을 시험하고 공격한다.

사탄은 “내가 왔다”고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며
항상 거짓말과 가장된 방법으로 속인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이 사탄의 공격인 줄 알고 그의 진상을 인식하며
그의 허위를 꿰뚫었다면, 매우 쉽게 그를 대적할 것이다.

주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진상을 알 때 자유함을 얻게 된다.

사탄의 능력은 그의 속임수에 있다.
그가 속이지 못할 때에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사건의 진상이 사탄의 공격임을 깨달을 때 자유하게 된다.
어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입으로 사탄을 대적한다고 말했지만
실지로는 사탄의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사탄을 대적하지 못한다.
참으로 사탄의 역사인 것을 알았을 때 대적하는 즉시 승리하게 된다.

대적한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탄이 어떤 사상을 줄 때 「나는 거절 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대적하는 것」이다.

사탄이 이런 것을 줄 때 「나는 거절한다」고 말하고 저런 것을 줄 때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도리가 없다.

어느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새가 당신의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저지할 수 없지만
최소한 새로 당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만들지 못하게 할 수 있다. 』
이것은 매우 귀중한 말씀이다.

사탄이 시험하러 올 때 우리는 그것을 저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로 둥지를 만들지 못하게 할 수 있고
그에게 설 땅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사상이 우리 속에 들어오든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은 필히 멈추게 된다.

또 한 면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사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게으르기 때문에 사탄이 매우 쉽게
어떤 사상을 그의 속에 주입한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생각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생각이 항상 죄악의 일에 기울게 되면
사탄은 아주 용이하게 그의 사상을 그 속에 집어넣게 된다.

이는 그의 사상이 사탄의 사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영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사탄은 우리 속에
그의 사상을 주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이 피동적이고 할 일이 없거나 부정한 것들을 생각하고
자기와 무관한 일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탄이 그들 속에
그의 사상을 주입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생각이 사탄의 사상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 속에서 사탄의 사상을 좋아한다.
다른 형제의 영적 상태가 좋다는 소식을 들으면 별로 취미가 없고
누가 이집 저집의 험담을 하면 오히려 듣기를 좋아한다.

이런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이기 때문에
결코 사탄의 공격을 거절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미워해야 사탄의 사상을 거절할 수 있다.

모든 더러운 사상과 주 안의 교통을 해치는 사상과
주 안의 사랑을 해치는 사상은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것들을 싫어한다면 이런 사상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것들에 귀 기울인다면 이 사상들이 쉽게 임한다.
그러므로 사탄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거절하기를 배워야한다.

특히 모든 부정한 사상을 거절해야 한다.
왕왕 사탄은 사람에게 부정한 사상을 주입하여 죄에 빠지도록 유혹 한다.
시작은 부정한 사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용납 한다면 죄를 낳게 된다.

여기에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즉 갖지 말아야 할 사상을 대적해도 사라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갖지 말아야 할 사상을 한 번 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적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고 두 번이 필요하지 않다.

야고보서 4장 7절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마귀를 대적할 때 도망친다고 말한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도망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귀가 여전히 남아 있을까 두려워서
또 대적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성경은 대적하면 도망친다고 말했고
우리 속에서는 대적해도 도망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사탄이 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탄의 말을 믿고서 손해를 입었다.

우리가 대적했다면
『나는 이미 마귀를 대적했고 그는 이미 도망갔다!』고 선포해야 한다.

「그가 아직 여기 있다」는 느낌은 거짓된 것이고 사실이 아니요
주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다. 첫 번째로 대적한 것은 옳은 것이며
두 번째로 대적한 것은 틀렸다.

첫 번째로 대적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두 번째로 대적한 것 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잘못은 첫 번째로 대적한 뒤에 「마귀가 떠났는가!」하며
느낌을 묻는데 있다.

느낌 안에서 마귀가 안 갔다고 답하면 다시 대적한다.
두 번째의 대적함이 있을 때 세 번, 네 번, 백 번,
천 번째의 대적함이 있게 되어 결국은 처리할 방법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만일 첫 번째로 대적하고도 두 번째에는
그런 느낌을 상관하지도 않으면 승리하게 된다.

사실상 마귀를 대적할 때 그는 도망갔다.
대적하였는데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은 느낌의 허망함이다.

그런 느낌을 믿는다면 마귀는 다시 찾아온다.
이미 대적했다면 두 번 다시 대적할 필요가 없다.

 

나. 사탄의 참소를 이기는 길

계시록 12장 11절은.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저」는 형제를 참소하는 사탄을 가리킨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탄을 이길 수 있는가?

첫째,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였다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해야 하고, 또 한 면으로는 사탄에게
『너의 참소가 필요치 않다. 오늘 나는 주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사탄의 참소를 이기려면 우리는 자신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사함 받은 자임을 사탄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죄가
이미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사하여졌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사함을 받는 근거이자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근거이다.

우리는 결코 자신이 선하다고만 느낄 정도로 강퍅하지 말아야 하고
하루내 자신이 약하다고만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사람이 교만한 것도 어리석지만
계속 자신만 바라보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리석지만
그를 구원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어리석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만을 믿는 것도 어리석지만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도 어리석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케 하였고
사탄의 모든 참소보다 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사탄에게, 『너는 나를 방해하지 말라!
내 죄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증거 하는 말은 영적인 사실과 주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사용하여 예수가 주이심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소리를 발하여 이 증거의 말을 사탄에게 들려 줘야 한다.
마음속으로 믿을 뿐 아니라 사탄을 향하여 선포하는 이것이
곧 자기 입의 증거하는 말이다.

셋째,『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는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의 태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사탄이 어떻게 역사하든, 그가 우리를 죽이려 할지라도,
우리는 변함없이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고 그에게 주님의 승리를 선포하리라!』
만일 우리가 계속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사탄의 참소는 그치게 될 것이고
사탄이 우리를 이길 수 없으며 도리어 우리가 그를 이길 것이다.

때로 어떤 형제자매들은
사탄의 참소와 성령의 책망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사탄의 참소를 너무 많이 받는다.

이러한 사람은 잠시 그의 죄를 자백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가 엉뚱하게 무엇을 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저에게 죄가 있고 저의 죄를 자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제가 사탄의 참소를 받고 있으니 저의 모든 죄를 가려 주소서.
앞으로 죄에 속한 것이든 아니든 저에게 있는 이 모든 것을
당신의 보혈 아래 둘 뿐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

이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한동안 「상관하지 않는」 기간을 가져야만,
사탄의 참소가 무엇이고 성령의 책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다. 환경 안에서 사탄의 공격을 대적하는 길

환경 안에서의 사탄의 공격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 순복해야 한다.
야고보서 4장과 베드로 전서 5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사탄을 대적하라고 하는 동시에 또한 순복을 요구한다.

사탄이 환경 안에서 공격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다면 결코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서
마귀를 대적할 때 우리의 양심에는 즉시 문제가 생긴다.

둘째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환경 가운데서 아무 이유나 연고 없이
사건이 발생할 때 만일 그것이 사탄의 공격임을 분명히 안다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대적하기만 하면 사건은 지나간다.
한 면에서 하나님의 손에 순복해야 하지만 또 한 면에서는
환경 안에서의 사탄의 역사를 대적해야 한다.

이렇게 순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태도가 분명할 때,
하나님은 어떤 일이 사탄의 역사이며 하나님이 시킨 일이 아닌가를
보게 하실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안배와 사탄의 공격을 구별하게 된다.
이것을 알고 대적할 때 일은 지나가게 된다.

셋째는 두려움을 거절해야한다.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역사할 때에는 항상 먼저 틈을 찾는다.

사탄은 어떤 틈이 없이는 역사하지 못한다.
첫 번째 시험은 바로 틈을 얻는 것이다.

그런 다음 틈을 통해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승리이다.

사탄이 일할 수 있는 가장 큰 여지는 바로 두려움이다.
사탄은 우리로 어떤 일을 당하게 할 때 항상 우리를 두렵게 한다.

두려움을 받아들일 때 사탄은 들어오게 되고
거절할 때 사탄은 들어오지 못한다.

두려운 사상은 모두 사탄의 시험이다.
그 두려움을 받아들일 때 그 경우를 당하게 된다.

욥은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욥의 이런 환경들은
모두 그의 두려워하던 것임을 볼 수 있다.

환경 속에서의 사탄의 공격은 거의가 두려움에서 온 것이다.
만일 그 두려움을 대적한다면 그런 일이 없을 것이지만
그 두려움을 간직하면 사탄에게 역사할 기회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탄의 역사를 대적하려면
먼저 어떤 두려움이든 반드시 대적해야 한다.

이것도 “주님이 나로 당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면
절대 받지 않겠노라! “고 말해야 한다.

일단 사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곧 사탄의 환경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바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이다.(엡 4 :27).

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 속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기 때문이다(요일 4:4).

만일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3. 믿음으로 사탄을 대적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이 믿음에 달렸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믿음이 없이는 사탄을 대적할 길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어떻게 믿음을 사용하여 사탄을 대적해야 하는가?


가. 마귀를 멸하기 위해 주님이 오셨다.

첫째로, 우리는 주님께서 마귀를 멸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이 땅에 오시고 나타나셨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마귀의 역사를 만날 때마다
그것을 모두 파하셨다.

때로 사탄은 공개적으로 역사하지 않고 천연적인 사물 뒤에 숨어 있었지만
주 예수님은 한 번도 꾸짖지 않으신 적이 없다.

그분이 베드로의 말을 꾸짖으시고(마 16:22-23)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셨으며 풍랑을 꾸짖으실 때
확실히 사탄을 꾸짖으신 것이다.

마귀가 많은 천연적인 일의 배후에 숨어 있을지라도
주 예수님은 항상 그를 쫓아내셨다.
그분이 가신 곳에는 마귀의 능력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사탄이 쫓겨나는 곳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곳이다.
주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사탄이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나타나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주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을 때 마귀의 일을 멸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도록 제자들에게 권세도 주셨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눅 10:19)라고 하셨다.

승천 후 그분은 또한 그분의 교회로 하여금
이 땅 위의 그분의 역사를 지속하도록 그분의 이름을 교회에게 주셨다.

주님은 이 땅 위에서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셨고
또한 이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다.

우리는 반드시 마귀가 가지고 있는 것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차이점을 구분해야 한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능력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권세이다.

사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능력이지만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탄의 모든 능력을 이길 수 있는 권세이다.

능력은 영원히 권세를 따라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권세를 우리 손에 맡기셨기 때문에 사탄은 결국 실패한다.

우리는 하나의 비유로 권세가 능력보다 승하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예를 들어 교통순경이 사거리에서 교통질서를 통제하는
신호등의 신호를 적색으로 바꿀 때 행인과 차량들은 모두 정지해야 하고
어느 누구도 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다.

능력으로 말한다면 행인과 차량이 빨간 신호등보다 훨씬 강하지만,
권세로 말한다면 행인과 차량은 감히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권세가 능력을 제압하는 것이다.

권세가 능력을 제압하는 것은
우주 가운데 하나님이 안배하신 기본 원칙이다.
사탄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무론하고
주 예수님은 이미 그분의 이름을 교회에게 주셨다.

이름은 권세를 대표하기 때문에 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사탄의 능력을 처리할 수 있다.
주의 이름이 대표하는 권세는 능히 사탄의 모든 능력을 이길 수 있다.

제자들이 밖으로 나아갈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는데
돌아올 때에는 아주 기이히 느끼며 주님에게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주님의 이름이 곧 권세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곧 그분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이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탄을 대적하는 길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주 예수의 권세가 사탄의 능력과 다르다는 것과
사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주님의 권세가 능히 그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 주님의 죽으심이 마귀를 폐하게 했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폐하셨음을 믿어야 한다(히 2:14).

주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마귀의 일을 폐하였고
주 예수의 죽으심은 마귀 자신을 폐하였다.

십자가상의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옛 창조 전체를 포함하여 우리의 옛사람을 이미 그분과 함께 못 박았다.

사탄이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다스릴 수 있지만,
그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밖에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통해 다스릴수록 난처해진다.

우리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는 더 이상 우리를 물지 못하고
사탄도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목적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이미 먹었고
죄를 범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범죄한 결과가 죽음인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 안에 구원의 길이 있다.

즉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때
이미 옛 창조와 옛사람을 포함하심으로써
사탄의 모든 권세가 죽음에까지만 미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그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죽은 사람인 것으로 인하여
주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나는 이미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미 죽었으므로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수 없다.
그의 세력은 죽음에까지밖에 미칠 수 없다.

주님과 함께 죽은 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완성된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추구하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이미 죽은 것을 보여 준다.

여전히 함께 죽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신 죽은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듯
「함께 죽은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사람이 함께 죽기를 추구하는 것은 육체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육체의 위치에 서 있을 때 사탄은 그 사람 위에 세력을 얻게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을 믿으며
우리가 그분 안에서 이미 죽은 것을 안다.

이 두 가지는 믿어야 하는 것들이지 추구해야 할 것 들이 아니다.
이것들을 추구할 때 사탄은 즉시 공격한다.
그러므로 완성한 사실을 붙잡고 『내가 이미 죽었음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고 주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이미 완성된 사실로서
사탄이 우리를 다룰 방법이 없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죽지 않은 사람만을 다룰 수 있고 오직 얼굴을 사망으로 향하고
사망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만을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망을 향해 등을 돌린 사람이다.
그는 우리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한 면으로
주 예수의 나타나심이 권세의 나타나심임을 알아야 하고,
또 한 면으로는 십자가상의 주 예수님의 역사가
사탄의 수하의 모든 사람을 해방한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이미 우리 몸에서 권세가 없고 우리는 그를 초월한 사람이요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사망에 이를 때 사탄의 길은 단절되었고 `
그는 더 이상 갈 길이 없게 되었다.

 

다. 주님의 부활이 사탄을 부끄럽게 하였다

셋째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사탄으로 부끄러움을 당케 하고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 것을 믿어야 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 12)

여기서는 죽음도 말하고 부활도 말한다.
이어서 13절은 우리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부활했는가를 말한다.

14절은 주 예수님이 죽으실 때 이루신 역사를 말한다.
15절은 주 예수님이 원수를 사로잡아
『(모든 이에게)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말한다.

20절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 3장 1절,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 구절들의 앞뒤 문장은 부활을 말하고
중간 부분은 십자가로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위치에 서서 십자가로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연고인가?
이는 주님이 이미 죽으셨고 우리도 그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옛사람을 다스렸던 사탄은 십자가에까지밖에 따라오지 못한다.
부활 이쪽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다.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 계실 때
사탄이 그분 안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듯이(요 14:30)
오늘 부활 안에서도 사탄은 그분 안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이는 새 생명 안에서 사탄에게는 아무런 지위가 없고
아무 권세도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의 새 생명을 공격하지 못한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천만의 귀신들이
십자가 주위를 포위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죽였으니
이것은 우리의 최대의 승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죽음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이길 줄이야!

주 예수님이 죽음에서 나오신 것은 영광스런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과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사망을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부활의 생명은 곧 사망이 이기지 못하는 생명이요
사망을 초월하는 생명으로서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나 죽음에서 나왔으며,
사망이 억류시킬 수 없다.

사탄의 능력은 사망에까지만 미칠 뿐이다.
주 예수님은 부활로써 사탄의 능력을 파하는 그분의 생명 능력이
심히 크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특별히 「부활의 권능」(빌 3:10)이라고 칭했다.
이 부활의 권능이 우리 속에서 나올 때
사탄에 속한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우리가 사탄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생명이
사탄과 무관한 부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명이자 죽음에서 나온 생명이다.
사탄의 능력은 단지 죽음에까지만 미칠 뿐이다.

그는 우리 몸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밖에 역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죽음에서 나온 생명이다.
우리에게는 사탄이 결코 만지지 못하는 생명이 있다.
우리는 부활의 위치에 서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장에서 말하는 것은 부활 안에서의 승리이다.
골로새서 2장은 부활을 말하는 것이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 안에서 부활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탄을 대적할 때에는
견고한 믿음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이미 부활하였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탄아,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너의 할 수 있는 것은 죽음까지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은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
네가 이 생명을 시험해 보지 않았느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 생명은 너보다 뛰어나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사탄을 이기려면 다른 위치에 서 있어서는 안 되고
부활의 위치와, 주님의 위치에 서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기본 원칙이다.
골로새서 2장은 우리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함을 말해 준다.

우리는 사탄 앞에서 우리의 서야 할 위치와
하나님 앞에서 서야 할 위치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의의 겉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만 한다고 말하고
(사 61:10, 슥 3:4-5) 또 그리스도이심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탄 앞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찾아내지 못하고 또한 사탄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이 위치에 서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다스릴 길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완전할 뿐 아니라
사탄 앞에서도 절대 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탄의 능력을 초월한 자이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 그분은 대적을 사로잡았고
저를 공개적으로 부끄러움 당하게 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위치에 서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를 자랑한다!


라. 주님의 승천이 사탄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다

넷째로 우리는 주님의 승천이 사탄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에베소서 1장 20절부터 22절까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것은 주 예수님이 이미 하늘 위에 앉으사
사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셨음을 말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이다.
주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하늘 위에 앉으셨으며
사탄의 모든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시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부활하고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분과 함께 사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한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1-13)

2장은 우리가 주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음을 보여 주고,
6장은 우리가 굳게 서야 함을 보여 준다.

2장은 우리가 앉아야(sits) 함을 말하고,
6장은 우리가 서야(stands) 함을 말한다. 앉는다는 것은 안식,
즉 주님이 이미 승리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승리 위에 안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승리이다.
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곧 이 영적 전쟁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대적한다는 것은 공격이 아닌 방어를 한다는 뜻이다.
주 예수님이 이미 완전히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싸워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승리는 완전한 것으로서 더 이상 우리가 싸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태도,
즉 앉는 것과 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앉는다는 것은 주님에 의한 승리를 의지하는 것이고
선다는 것은 사탄이 우리의 승리를 탈취하지 못하도록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소유한 승리를 지키기 위하여
이겨 놓고 나아가 싸우는 것이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나아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겨 놓고 나아가서 싸우는 것이다.
승리는 이미 우리 손에 있다.

에베소서에서 말한 씨름은 이기는 자의 씨름이지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한 씨름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 야 한다.


마. 사탄은 어떻게 시험하는가?

사탄은 우리로 우리 위치와 승리를 잊어버리게 하거나
승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만일 이러한 시험을 받아들인다면 점점 승리가 멀리 있다고 느끼고
갈수록 승리를 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 전체가 다 포함될 정도로
주 예수님의 승리가 완전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믿을 때 즉시 승리하게 된다.

사탄은 이미 패배했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였다.
사탄은 우리의 승리 곧 우리가 이미 소유한 승리를 훔치려고 한다.
사탄의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보려고
몰래 시험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미 얻은 승리를 모른다면 우리는 실패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승리한 사실을 깨달을 때
사탄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탄의 역사를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리로 말미암아
사탄을 대적한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모든 역사 위에 서 있다.
사탄이 공격할 때 결코 승리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갖지 말라.
「나는 승리 해야겠다」는 느낌이 있을 때
잘못된 위치에 서게 됨으로 이미 실패한 것이다.

사람이 승리하려는 것과
자신이 이미 승리한 것을 알고 대적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뜻은 주님의 승리로 대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리,
이 모든 것을 분명히 알고 보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귀를 대적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는 사탄에게 「물러가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같은 믿음을 주사 사탄이
우리 몸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도록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네 가지 일을 믿으며
견고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 바란다


출처: 푸른초장으로의 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