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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네오가 네오인 이유랄까..?

은바리라이프 2008. 10. 20. 21:16

(저는 ‘이동진의 시네마레터’라는 칼럼을 10년 넘게 써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상황에서, 예전에 썼던 수백편의 시네마레터들 중 독자들의 호응이 가장 컸던 글 다섯 편을 이곳에 올립니다. 새로 쓰게 될 시네마레터 칼럼은 앞으로 계속 이곳에 실릴 예정입니다.)

‘매트릭스’는 감독을 맡은 워쇼스키 형제의 재능이 잘 발휘된 SF 수작입니다. 빼어난 스타일과 액션 연출로 관객을 사로잡는 워쇼스키 형제는 신화에서 가상현실까지 갖가지 요소들을 종횡무진 연결하며 영화를 ‘읽는’ 재미까지 던져줍니다. 이 영화는 무척 복잡하고 모호한 듯한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사실 등장 인물들 이름에 감춰진 의미로 내용을 풀어가면 재미있는 독법이 가능해집니다. 이름만으로 이야기 진행 상황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거지요.

우선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이름만으로 불리는 데 비해, 키애누 리브스가 연기한 주인공은 토머스 앤더슨과 네오, 이렇게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그가 영화 속 가상현실과 진짜 세계의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각각 하나의 세계 속에만 살고 있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그는 각각의 세상을 상징하는 이름 두 개를 갖고 있기에 그렇게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서서 마침내 새 역사를 이룩해낼 수 있는 겁니다. 가상현실의 안온함을 박차고 나와 진실의 편에 서기로 결심하게 될 때 그의 마음은 그가 토머스 앤더슨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거부하고 네오라는 이름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하는 데서 잘 드러나지요.

네오(Neo)가 새로움을 뜻하는 그리스어 ‘neos’에서 파생된 접두어라는 것도 많은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그가 인류에 신기원을 가져다 줄 사람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지요. 접두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다른 어근을 이끌며 의미를 파생시키는 특성을 갖지요. 여기서 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유아독존형 액션영웅이라기보다는 다른 동료들의 지원에 힘입어 제대로 실력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셈입니다. 서양 문화권에서 토마스가 예수를 의심했던 제자인 ‘도마’로부터 비롯한 이름이라는 것은 그가 자신이 속한 가상현실 세계에 대해 회의하게 될 인물임을 뜻하는 것이고요.

네오를 이끌며 저항군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모퍼스(Morpheus)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꿈의 신이지요. 그의 이름은 영화 속 현실이 사실 컴퓨터가 빚은 허상이고, 네오가 언뜻언뜻 빠져들었던 꿈이 오히려 진실의 일부라는 것을 함축합니다. 모퍼스의 어원이 어둠을 뜻하는 그리스어 ‘morphnos’라는 데 이르면, 왜 극중 모퍼스의 패션이 온통 검은 색 일색인가 하는 점까지 이해됩니다.

여주인공 이름이 기독교에서 삼위일체를 뜻하는 트리니티(Trinity)라는 것에서는 결국 세 명의 주요 인물이 힘을 합쳐 승리를 이끌어내리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신성(神性)을 함유하는 그 말의 속성상 그들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지요.

이들에 맞서는 세 비밀요원 이름은 각각 스미스, 브라운, 존스입니다. 이처럼 미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들을 비밀요원에 붙인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진실에 눈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 체제의 편재성(遍在性)을 은유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배신자 사이퍼(Cypher)의 이름은 숫자를 뜻하지요. 이를 감안하면 그가 비록 영화 중반까지 가상체제에 맞서는 전사로서 활약하지만, 결국은 숫자의 효율을 숭상하는 그 디지털 세계를 그리워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이름이 제로(zero)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그의 배반이 실패하고 무(無)로 소멸되도록 운명지워졌음을 깨달을 수 있지요.

그리고 매트릭스란 말은 자궁을 의미하면서 수학에서 행렬을 뜻하기도 하지요. 이런 독법에 따르면 매트릭스는 거대한 가상현실을 잉태하고 있는 자궁 같은 폐쇄공간이면서, 숫자들의 나열로 상징되는 디지털 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운명은 극중에서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자 오러클의 입에 놓여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작명법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