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기다리는사람들

누가의 성탄 이야기

은바리라이프 2008. 8. 2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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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행전 강해
누가의 성탄 이야기
(1:5-2:40)
정용성
들어가는 말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聖誕節)이다. 올해도 주인공이 없는 생일 잔치가 얼마나 벌어
질지 조바심이 난다. 스코틀랜드에서 6년을 보내면서, 매년 성탄절이면 교회에서 성탄 연극
을 주일학교 중심으로 연출하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이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여 각기 주어
진 역할을 연기한다. 우리 집의 아이들도 때로는 동방 박사로, 때로는 요셉과 마리아로, 때
로는 천사로, 때로는 목자들로 분장하여, 작품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가 각기 독특한데, 비빔밥처럼 섞어서 이야기를 연출하는 것을 본다. 이렇게 생
각함은 분명히 성서학도의 직업병 증후군일 것이다.
누가의 성탄 기사는 그레코-로망 세계를 무대로 예수 탄생 이전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산모의 산고(産苦)의 역사이며,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이 그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사랑과 평화와 의의 구원을 가져오시는 자로서 예수를 통해 방문하
셨다고 소개한다. 이로 인하여 하늘의 천사들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역사적 드라마에 참여
하는 배역들이 구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누가는
묘사하고 있다.
본 논고에서 우리는 누가가 어떤 자료를 통해서 성탄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어
떤 목적과 취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으뜸으로 마태 기사와의 비교를 통해, 버금으로, 탄생
기사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역사-사회적 맥락(historical, social context)을 그 배경으로 놓고,
딸림으로는 누가 기사의 구조와 특징의 파악을 통해서, 특히 네 곡의 찬양시에 초점을 모으
며, 누가의 성탄 메시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1)
1. 마태와 누가의 탄생 기사 대조
1) 본인이 알고 있는 한, 지금까지 누가의 성탄 기사(Infancy Narrative)에 대한 최선의, 최고의 철
저한 연구는 Brown(1993)의 작품이다. 그리고 누가의 찬송시들에 관한 연구는 Farris(1985)이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더 진척하고 싶은 분은 이들 책에 있는 도서 목록과 더불어 최근의
누가 복음 주석서들(Green, 1997; Nolland, 199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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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은 단순한 탄생 기사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마태 공동체의 선포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반대 질문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다.
2)
1.1-17은
예수의 신원에 대하여 “누구?”(Quis)의 문제를, 1:18-25는 “어떻게(Quomodo)?”의 문제를, 그리
고 2.1-12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에 관한 “어디서(Ubi)?”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예수의 신원
이 다윗의 아들임을 강조하였고, 그 이후 2:13-23은 예수의 운명에 관하여 “무슨 까닭으
로?”(Unde)의 문제가 헤롯과 유대 권세자들의 적대적인 반응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여 다뤄
지고 있다(Stendahl 1995). 1장에서 예수가 다윗의 아들을 확증하기 위하여 족보를 이중적으
로 사용한다. 먼저 아브라함-다윗-요셉으로 이어지는 계통을 증명하여 예수가 다윗의 아들임
을 나타낸다.
3)
두 번째로, 족보에는 네 명의 여인들(다말, 라합, 룻, 바세바)이 등장하는데,
이들 여인들의 역할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져 온 죄인의 대표 또는 이방인의 대표로서 그리
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 아니다(Stanton 1995:8). 이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후
손들은 규칙적이지 않고 비규칙적인 혈통 잇기를 통하여 이어져 왔음을 나타낸다. 이는 마
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뒷받침하기 위한 기법이다. 즉, 아브라함-다윗-예수의 혈통은 신적인
개입을 통해서 이어져 온 혈통이며, 예수의 탄생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개입의 절정
이자 절대적인 예이다. 이에 따라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 7:14를 마태
에 특수한 인용 형식문을 사용하여 해석하고 있다.
마 2장은 왜 다윗의 아들이 베들레헴 출신이 아니고 나사렛 출신인지에 대한 당시
의 의문에 답하고 있다.
4)
먼저 1장에 등장하지 않던 지명을 사용하여 갈릴리-베들레헴-애굽-
나사렛으로의 유랑 생활과 나사렛 정착을 일종의 구약 예언의 성취(사 11.1)라고 주장한다.
마태는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민 24.17의 별(ב כּוֹ)을 인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도
누락시키고, 오히려 나사렛을 사 11.1의 이새의 ‘가지’(ר )에서 파생시켜 증명하는, 당시 유
대교에서 유례가 없는 해석방식을 채택한다. 이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가 왜 예측하였던 대
로 베들레헴 출신이 아니고(참고. 미 5:2),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나사렛 출신인지를 설명하
기 위한 시도임을 나타낸다. 두 번째로 마태는 출애굽 모형론을 사용하여, 예수-모세, 바로-
헤롯, 애굽-당시 이스라엘 땅, 대학살을 연결시킨다. 이는 예수가 새로운 모세이자, 예수는
새 출애굽을 이루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태의 탄생 기사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기
독론을 변증하기 위한 목적이 주도하고 있다.
누가 1-2장은 마태와 같이 뚜렷한 신학적 동기가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나머지 누
가-행전 전체에 대한 윈도우 역할을 한다. 마태와 비교하여 볼 때에, 누가는 족보를 모두(冒
2) ‘다윗의 아들’(ov ui`o.j Daui.d)이란 칭호는 예수와 관련하여,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개념상의 차이
가 없이, 마가와 누가에는 4번, 마태에는 10번(1.1; 9.27; 12.23; 15.22; 20.30, 31; 21.9, 15; 22.42,
45) 등장한다. 누가는 마가의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마태는 마가에서 3번만을 취하
고 다른 7번을 독특하게 사용하고 있음으로, 이 칭호는 마태가 명확하게 강조하는 칭호임이
틀림없다.
3) 구약에 언급된 세 명의 왕들(아시야, 요아스, 아마샤)를 누락시키고, 세 번째 부분에서는 너무
적은 세대수를 명백하게 배열하였는데, 이는 전체 족보의 이름들을 다윗(דוד)의 이름을 사용
한 게마트리아 방식으로 암기하기 쉽게 유대 미드라쉬 해석방법을 동원하였다(cf. Davies &
Allison 1988:163-165).
4)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요 1.46);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
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
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7.52; 참조.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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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에 두지 않고, 예수의 우주적 메시아 대관식인 세례 때에 공포된 메시아적 신원과 사명
을 밝히기 위한 자료로 제시한다. 다음으로 성탄 이야기에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가 주요 배
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세례 요한과 예수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병행 관계를 이루
고 있으나, 결국은 요한이 예수의 길을 인도하는 자로서 묘사되어서, 예수의 우월성을 확증
하고 있다. 이러한 골격 속에 담고 있는 네 가지 찬송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져 있는 메
시지(단락 3을 보라)는 눈에 띄도록, 누가가 왜 그렇게 세심하게 예수의 탄생 무대를 설정하
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오래 전이지만, 폴 미니어(Paul S. Minear)가 제시한 누가판 성탄 장면의 세 가
지 초점은 여전히 고려하기에 유용하다(1966:127-28):
5)
첫째 초점은 천사를 포함한 등장 인
물들(dramatis personae)의 대화 속에 구체화된 메시지의 본질적인 내용이고, 둘째는 각 등장
인물들이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이며, 셋째는
이스라엘 공동적인 인고(忍苦)와 기대감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게 복종하
는지 아니면 의심을 드러내는 불신앙으로 반응하는지를 대변하는 일종의 전형(典型)으로 각
인물들을 묘사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누가는 탄생 기사를 통하여, 이들 세 가지에 초점을 맞
추어서, 주인공인 예수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그리고 그의 사역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
할지를 미리 엿 볼 수 있도록, 일종의 서막 형식으로 독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에 덧붙이자면, 누가는 예수 탄생을 성전이라는 무대에서 시작하여, 대표적인 등
장 인물들은 모두 다 성전 공간 구조와 함께 당대 유대교의 경건과 깊이 관련되어져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스가랴는 성전 내부와 제사장의 뜰,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뜰, 안나는
여인들의 뜰을 대변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의 대표자들이다. 그러나 누가가 제시하고
자 하는 효과는 성전에 대한 충실함이 아니라, 이들이 성전에서 예배와 경건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의 구속을 대망하고 있는지를 부각시킴으로, 예수의 탄생이
가지는 구속사적 의의는 성전이 충족시키기에 역부족인 것을 충족시키는 사건임을 나타내고
있다.
누가는 탄생 무대를 설정하면서 이들 초점과 더불어, 마태의 유대 토속적인 배경과
는 달리, 헤롯왕(1.5)뿐 아니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2.1-2)를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 인물들은 예수의 탄생이 전 세계와 관련되어져 있음을 알리는 역할
을 한다(참조. 눅 3.1-2). 마치 카메라 기자가 줌(zoom)을 사용하듯이, 전체 로마 제국에서 시
작하여 시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과 작은 고을들을 왔다갔다하며, 이 일이 세상
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이 아니라, 전체 세계에 의미있는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연출하여, 역사 드라마의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종교와 사회, 정
치, 경제가 서로 깊숙이 관련되어져 있는 고대 사회에, 이러한 무대 설정은 이 무대 안에서
한 적은 고을의 제사장과 그의 아내, 시골 처녀, 두 명의 예루살렘 노인네가 당시 유대교의
경건 생활을 하면서 신적인 개입과 구출을 위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누가는
클로즈업하고 있다.
5)
미니어는 성탄 기사를 전체 누가-행전에 낯선 자료가 아니라, 오히려 이 둘의 관계 속에서 관
찰될 때에만이 그 의미가 더욱 정확하고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입장에서, 어휘와 주제들의 상
호 연계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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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의 성탄 이야기의 구조와 특징
누가는 1:5 - 2:52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을 다음과 같은 구조로 거
의 병행(竝行) 관계로 다루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주인공
요한
예수
(a) 부모의 소개 1.5-7(스가랴엘리사벳)
1.26-27(마리아와 요셉)
(b) 수태고지
1.8-18
1.28-38
(c) 부모의 반응 1.19-22(스가랴 - 불신앙)
1.24-25(엘리사벳의 찬가)
1.39-56(마리아-찬가)
(d) 탄생
1.57-58
2.1-7
(e) 복음과 경배 (천사들의 찬송과 목자들의 경배) 2.8-20(천상의 찬양)
(f) 할례와 이름짓기 1.59-66
2.21-24
(g) 예언적 반응 1.67-79(스가랴의 찬가)
2.25-39(시므온과 안나)
(h) 아이의 성장 1.80
2.40-52
이러한 병행 관계에 서로 얽혀있는 모티브는 약속과 성취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으
로 찬양이다. 따라서 네 가지 찬송시들은 탄생 기사의 의의를 밝히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서술된 사건들의 의미를 사려 깊게 숙고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속을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갈구하던 기대가 약속을 통하여 성취될 것임
을 예고한다; 이들의 기대가 어떻게 성취되어져 가는지를 마음으로 준비하며 읽어 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반응에 같이 동참하여, 그 의미와 의의를 숙고하도록 만든다; 사가랴의 의심
섞인 반응에 안타까움과 동시에 독자 자신도 그렇게 답변할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시인하
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신앙으로 반응한 인물들의 찬양에 참여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
는지 하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동시에 찬양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찬양으로 승화시
키도록 요청한다.
이 병행 구조가 내비치는 또 다른 의미는, 요한과 예수의 탄생이 모두 다 신적인
개입이 이뤄진 사건들이지만, 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는 요한과는 구별되는 더
탁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의 탄생에 할애하고 있는 공간이 요한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깝게 많이 배려되었음에서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f) 천사들의 복음 선포와 경
배가 예수에게만 이뤄지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요한의 탄생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이
“이 아이가 어찌 될꼬?”하고 두려움으로 마음에 새기고 있지만(1:65-66), 예수의 탄생에 대하
여는 천사들과 목자들이 경배하고, 경건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시므온과 안나가 신앙적으
로 응답한다. 또한 목자들과 안나는 최초의 복음 전도자들로 묘사되어져서, 사도 행전의 복
음 전도자들의 삶을 미리 엿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요한이 비록 종말론적
인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가 될 것이지만(1:76), 예수
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다(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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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요한의 탄생 기사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징은 일종의 성경 학교라는 점에
있다. 이는 누가가 소개하고자 하는 탄생 이야기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들이 아니다. 오히
려 철저히 성스러운 과거, 즉 하나님이 과거에 자신의 백성을 다루신 구속 역사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예언과 성취의 연속선 상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는
절정에 이르렀음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먼저 이들 기사들은 철저하게 구약에 나타
난 특별한 사역자들의 탄생 기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창세기에 묘사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들(11-22장)이 매우 밀접한 병행점들을 이루고 있으며(Green 1997:53-55), 삼손과 사무
엘의 탄생과의 유사성도 나타내고 있다(참조. 나실인 규정). 두 번째로 구약을 풍부하고 밀
도있게 인유, 암시하여 이미 칠십인경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의 성경적 상상력을 돋구고 있
다. 전반적으로 단 7-10장, 창 27-43장의 메시지가 탄생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눅 1:26-33에는 슥 3:14-17, 1:32-33에는 삼하 7:12-16, 2:1-14에는 미 4:7-5:5
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든다. 이렇게 탄생 이야기를 구약 성경의 옷을 입혀서 묘사
함으로써, 옛날옛적부터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특별한 인물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출현시키
시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향하여 끈질기게 보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
제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도 드러났음을 메아리쳐 울리게 한다.
두 번째 특징은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탄생 기사의 곳곳에 넌지시 언급되어져 있다
는 점이다. 이들 등장 인물들과 그 이름의 어원, 그리고 인유된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Farris 1985:42-44).
1. 예수
ישע구원하다
2.11; 1.47, 69, 71; 2.30; 2.30
2. 요한
חנן
힘센 자
1.17, 35, 49, 59.
4. 사가랴
זכר기억하다
1.72, 54.
5. 엘리사벳
שבע맹서하다
1.73, 54.
6. 마리아
רום높이다
1.69, 46, 54, 78.
특히 마리아의 찬가는 “내 영혼이 주를 높이나이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시편에는
이들 이름들이 결합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89장은 엘리사벳, 스
가랴의 결합과 예수, 마리아의 결합을 기지고 있는데, 이들 시들은 이러한 누가 탄생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원론적인 결합을 통하여 넌지시 암시하고자 하는 찬송시들(시 63, 89,
132)로 볼 수도 있다.
시 89. 48
זכר사가랴
49
גבור가브리엘
50
חסד(חנן이나 헬라어 e'leoj는 חנן 로도 번역 가능)
요한
50
נשבעת엘리사벳
51
זכר스가랴
그리고 이 시편 전체를 통하여 רום(마리아)이 4번, ישע(예수)가 1번(27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마리아와 예수에 대한 인유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편은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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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기사의 주요 등장 인물들이 다 출현한다. 따라서 눅 1-2장은 시 89장에 대한 인유(引
喩)로 볼 수 있다.
3. 성탄 기사의 사회적 세계(the Social World of the Infancy Narrative)
우리는 성탄 기사에 들어가는 출입문으로서, 당시의 사회, 정치, 종교적인 맥락을
파악하여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 정초(定礎)하지 않는 누가의 성탄 기사는 로맨틱한
이야기 또는 산타크루즈와 캐롤송, 성탄 츄리와 카드로 난무하는 현대판 크리스마스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꼴이 되고야 만다.
첫 번째 문은 정치적인 정황이다. 1:5의 “유대왕 헤롯의 때에”와 2.1-2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의 통치 시기는 단순한 연대기적 표시가 아니라, 이
성탄 사건은 발생한 시기가 어떠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일어났는지를 독자들에
게 상기시켜주며, 이 사건은 권력 투쟁의 일종임을 암시하여 준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강력
한 반이두매인 정서와 유대 지도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로마와의 거래를 통하여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그의 통치는 로마에는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권모 술수와 권력 유지를 위한 독재자의 압제, 폭력, 착취로 일관되었다. 더욱이 아우구스투
스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 온 신적 구원자”로 경배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평화를 가져 온
자가 아니라 인구 조사 명령을 내린 자로 묘사되어져 있다. 고대 로마에서 인구 조사는 곧
인두세, 또는 징병의 자원 확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국주의적 수탈을 위한 통치 수
단이었다. 혹자는 로마의 평화 속에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신적인 목적의 일환
이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누가는 이들 정치 권력들을 자신의 무대 설정을 위한 자료로 활용
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정황 속에 가브리엘이 수태고지를 하러 오는 장면을 누가는 설정한
다. 가브리엘은 신적 용사(Divine Warrior)이자 종말적 해석자이다. 가브리엘은 당시 유대교
에서 사악한 자들을 파멸시키는 자로 알려져 있다(에녹 1서 9:9-10; 54:6; 1QM 9:14-16;
15:14; Bede, Homilies 1:20). 그는 또한 종말론적 메신저이다(단 8:16026; 9:21-27). 이와 더불
어 세례 요한과 엘리아가 결합된 이미지(1:16-17; 76)는 말 3:1-2, 4:5-6의 종말론적 예언의 성
취를 연상시키며, 성령에 대한 연이은 언급(1.15, 35, 41, 67; 2.25, 26, 27)도 이사야(44: 3-5)
와 에스겔(26:24-32)과 요엘(2:28-32)의 예언이 성취되는 징조이다.
아울러 마리아, 스가랴, 시므온, 안나는 각기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즉 이스라엘의 회복과
위로를 고대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분위기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져 올 평화와 의가
종교적이고 영적으로만 채색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정치, 사회적인 어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눅 1:68과 2:38에는 종말론적인 신적 방문이 언급되어져 있다. 따라서
성탄 기사는 강한 종말론적 기대를 바탕 색조로 깔고 있다. 그 기대는 이스라엘에 대한 로
마와 헤롯의 통치가 종식되고 의와 평화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갈망이다. 이러
한 정치적 상황 속에 요한과 예수의 탄생이 언급되어 있다. 예수는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사악한 통치를 결정적으로 뒤엎고, 의와 평강으로 다스리는 혁명적 사건을 가져오시는 분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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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기사의 두 번째 문은 사회적 정황이다. 신약 성경 중에 사회적 신분과 계층의
이슈가 무엇보다도 부각되어 있는 곳이 누가 복음이라면, 그 중에서도 성탄 기사는 언덕 위
의 횃불처럼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마리아 찬가는 사회적 신분의 반전을 가져 온 사
건이 바로 예수의 탄생이라고 선언한다. 고대 사회에 신분과 지위는 현대 사회에서와 같이,
생산의 수단이나 상대적인 수입과 생활 수준에 달려 있지 않다. 특히 명예와 수치를 지고의
사회적 가치로 여기는 지중해권 문화에서, 한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그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하여 있는냐?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종교, 가문, 토지 소유, 직업, 인종, 성, 나이 등등
이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들이다. 산업 혁명 이전의 집단 중심의
사회에서 한 사람은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되고 대우를 받는다. 따라서 후견인-예속인
제도가 전체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주요 운용방식(modus operandi)이다. 불과 5% 이
내의 통치자 집단(헤롯 가문과 대제사장 가문)이 거의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되어져 있는 나
머지 집단의 노동과 봉사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비둘기 한 쌍으
로 장님 예수를 봉헌하려는 요셉과 마리아, 가난한 시골의 제사장 집안의 스가랴와 엘리사
벳,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경건을 위해 헌신한 시므온과 안나 등은 지배 계급이 아니다. 반면
에 헤롯과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이다. 이들 뚜렷이 대조되
는 두 집단의 신분적 반전이 성탄 기사의 주요 테마 중에 하나이다. 이제 신분이 결정되는
기준이 예수의 탄생을 통해 재정의 될 것이다.
성탄 기사의 세 번째 문은 종교적인 정황이다. 성탄 기사는 성전에서 시작하여 성
전에서 마무리된다. 고대 사회에서 성전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중심지이다. 율법에 의
해 정당화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영적 교차로요, 성전 공간이
상징하는 거룩과 정결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을 구별짓는 잣대요, 제사를 통해 죄와 부정한
것이 치유되는 곳이며, 계시가 전달되며 공식적인 율법 해석이 이뤄지며, 시온을 향한 종말
론적인 열망이 집중된 곳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제사장 스가랴가 누가-행전의 웅장한 드라
마의 막을 여는 역할을 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전체 제사장들은 24 반차에 따라 나눠져서,
일년에 두 주간 성전에서 봉사하게 되어 있다. 특별한 축제를 제외하고, 제사장들은 일반 제
사와 더불어 매일 두 차례 드리는 타미드 제사에 봉사하였다(출 30:7-8). 이 시간이 되면 성
전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 회당에도 백성들이 모여서 성전을 향하여 예배를 드렸
다. 특히 반차를 따라 성전 봉사를 하는 제사장이 속한 회당의 대표들도 제물을 봉헌하며
성전 제사에 참여하였다. 분향하는 제사는 특히 기도와 관계되어 있어서, 온 백성이 밖에서
함께 기도를 드린다. 따라서 성전과 회당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미쉬나에 따르면,
다섯명의 제사장이 특별히 선별되었는데(m.tamid 5-7), 이는 제비뽑기를 통해서이다. 제사장
으로 이 타미드에 선별되는 것은 일생에 한번 돌아 올까말까하는 영예로운 기회이다.
그레코-로망 사회에서 제비뽑기는 인간의 의지를 피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 신적인 선택을
상징하므로, 스가랴가 선별된 것은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상
징한다. 분향을 드리고 난 이후에, 참여한 제사장들은 성전 현관 사이에 서서 민 6:24-26의
축복문으로 백성들을 축복하게 되어 있다. 스가랴에게 ‘네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가브리엘의
말은 스가랴가 자식을 낳게 하여 달라는 간구를 하였다 함이 이니라, 백성을 대표하여 이스
라엘의 소원을 간구하였음을 의미한다. 엘리사벳의 수태를 고지할 때에, 스가랴가 놀라며 믿
지 않은 것은 스가랴가 후손의 출생을 포기하였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태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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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셔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보이셨듯이, 스가랴에게
아들을 약속하셨다. 스가랴에게 불가능 한 것을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시며, 이스라엘이 절망
하는 것에 소망을 불어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스가랴가 경건한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등장하듯이, 아들 요한은 옛 예언의 성취이자 경건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하나님은 경건한 이스라엘이 절망하고 있는 중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후의(厚意)를 보이시며(요한), 이스라엘의 회복의 소망의 불길을 지피신다.
아울러 시므온과 안나는 스가랴와 더불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의 경건한 자
들을 대변한다. 스가랴는 제사장의 뜰에 속한 자의 대표요,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뜰에 속한
자들을 대표하며 안나는 여인들의 뜰에 속한 자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다 성전에
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망하고 있다는 점은 당시의 성전의 무력함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성령과 영광의 상징인 쉐끼나가 성전을 떠났다는 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생명과
소망을 잉태하지 못하는 성전을 무대로 이제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 요한과 예수는 성전에
종속된 사역자들이 아니라 성전의 무능함과 불모성을 대체하는 새로운 성전을 통해 아브라
함과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요
한)이자 구원(예수)이다.
이들 대표적인 세 가지 문을 주의 깊게 살피고 체감하게 되면, 독자는 전체 건물과
연결되어 있으나, 독특하게 그 풍채를 자랑하는 성탄 기사라는 전시장에 들어서게 된다. 이
전시장은 대체로 두 개의 구별된 방이 서로 연관되어서 관람객을 인도하는데, 요한과 예수
에 관한 방들이다. 눈을 흘기듯이 거쳐가면, 피상적으로 감동을 느끼고 감탄하겠지만, 둘 다
굉장한 위인들이라는 인상만 받고 나올 것이다. 그래서 요한을 추종하는 것도 예수를 추종
하는 것에 못지 않는 삶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예. 눅 5:33; 7:29; 행 19:1-3). 전시장
을 설계한 누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사려 깊은 관람객은 두 번 정도 왔다갔다하
여야 그 진면목을 알고 감탄과 더불어 경배하고자 하는 자세가 마음에서 우러나올 것이다.
한번은 양쪽 방을 이러 저리 안내선을 따라 다녀보는 것이요, 다음은 요한과 예수의 방을
각기 따로 관람하는 것이다. 비록 예수의 방이 나타내는 색조는 요한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뼈대있는 집안의 품위가 드러나지 않지만 천하고 평범한 소재들이 조화를 이루어 더 장엄하
고 광채가 빛나며 두 배로 더 크다.
들어가는 문은 요한의 방에 있지만, 나오는 문은 예수에게 있다. 모든 구조가 예수를 향하여
설계되어져 있다. 독자들이 누가-행전이라는 전체 건물을 둘러보면 곧 알게 되겠지만, 건물
의 중심은 예수이고, 다른 소재들과 사이사이의 방향들이 그를 향하여 있고, 또 그를 통하여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 방들을 다 둘러보고 감상할 만한 공간적 여유가 없다. 하지만 실망하
지 않아도 된다. 이 전시장의 진수가 맛 볼 수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 나머지 복도
나 간이 의자에서 앉아서 관람하며 체득할 수 있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음악이 있는 방이다. 헨델이나, 바흐, 모차르트, 부르흐와 같은 서양 음악의 거장들이 다녀갔
고, 멈춰 서서 선율을 떠올리며 때로는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더 웅장한 오라토리오와 같이
합주로, 또는 파이프오르간 독주나 아리아와 같은 독창으로 연주를 한 곳이다. 우리는 그들
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감상할 수도 있지만, 우리 나름대로 원래 시인들이 불렀던 곡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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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흥얼거릴 수 있으면 더 좋다. 더욱이 한국 고유의 악기들을 가지고 연주하고픈 마당놀
이의 광대들이나 춤사위 꾼들을 이 전시장은 기다리고 있다. 팝이면 어떻고, 헤비 메탈이면
어떠랴. 트로트면 어떻고 요즈음 젊은 세대가 주절거리며 부르는 힙합이면 어떠랴. 감흥을
느끼고, 같이 흥겨워 춤을 곁들여서 경배할 수 있으면 동서고금의 무엇이든지 좋다. 이제 곡
조있는 전시장으로 들어 가보자.
3. 성탄 찬양시
누가는 예수의 탄생 기사를 무대에 올리면서, 예수의 탄생이 의미하는 메시지를 찬
송시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찬송시가 실제 등장 인물들의 찬송인지, 누가의 창작인지,
아니면 초대 교회의 예배 중에 불려졌던 찬송인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6)
찬송시가
어떻게 기원이 되었든지, 누가가 이들 찬송시를 사용한 의도와 의의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
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찬송시들이 어떤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지는 우리의 목적에 중요하
다.
앞의 구조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가는 예수와 요한의 탄생에 대한 등장 인물들의 신
앙적 반응을 이들 찬송시들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는 마리아 찬가(the Magnificat)이
고, 다음은 스가랴의 찬송(the Benedictus)이며, 세 번째는 천사들의 찬송(the Gloria in
excelsis),
7)
다음으로는 시므온의 찬송(the Nunc Dinittis)이다.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연루되어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들 찬송시에 함축되어져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의 탄생에 의의를 부여하였는지를 이들 찬송시들을 통해서 엿
볼 수 있다. 따라서 2000년 전에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여, 영감받은 크리스마스 캐롤송을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의미를 살펴 볼 필
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면의 제한으로 인하여 첫 두 번째 찬송시만을 살펴 볼 것이다.
6)
호기심이 있는 독자는 Farris 1985: 14-98을 보라. Farris는 이들 찬송시들이 셈어로 된 원작을 번
역한 것으로, 어쩌면 주후 70년 이전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작곡한 것으로 간주한다. 셈어적
인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 있다. 비록 이러한 흔적을 누가의 칠십인경 사용에서 찾을 수 있는
듯 하지만, 그 언어적 특성들이 누가-행전의 나머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으로 보아서, 누가의
작품은 아닌 듯하다. 칠십인경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인용하고 사용한 구약이다. 따라서
초대 기독교에서 사용된 이들 찬송시들을 누가판 족보와 같이 누가가 채택하여 자신의 목적
에 맞게끔 활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7)
The Gloria in Excelsis는 대구(對句) 병행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두 행이 서로를 해석하여 준
다.
영광!
하나님께
지극히 높은 하늘에는
평화!
후의를 입은 자들 중에
땅에는.
첫 번째 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렬에 참여하라는 초청장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탄
생이라는 결실을 본 신적인 행위는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땅위의 평화는 의와 평강으로 다
스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산물이다. 이는 이사야 52.7의 우주적인 치유와 관련되어져 있다. 샬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이유도 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에는 샬롬이 있다. 잊
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천상의 찬양을 목자들도 반복하고 있다(2.20)는 점에서, 이 찬송시는
우주적인 합창을 통해 영광과 샬롬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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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들 시들이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장르는 오랫동안
축적된 공동체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특정한 장르는 특정한 메시지를 묶음
으로 전달하는 의사 소통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Bailey 1995). 이들 시는 분명히 찬송시이다.
찬송시라는 말은 여러 말로 정의 될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는 노래라는 폭
넓은 범위로 정의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의 찬송시는 일반적인 찬송들과는 두 가
지 측면에서 다르다. 하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는 측면에서 신앙 고백이나
헌신, 결단, 감사, 복음 전파의 내용을 포괄하는 복음송과는 다르다. 이 찬양은 하나님이 행
하셨던 바를 찬양하는 선언적 요소(declarative praise)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이
신지를 밝히는 서술적인 요소(descriptive)를 포괄하고 있다. 두 번째로 누가의 찬송시는 서정
적인 운율과 시적인 형태, 특히 히브리시의 병행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일련의 시편이다. 선
언적인 찬양시의 특성을 살려서 한 문장으로 구성된 ‘절규’가 핵심을 찬양시 전체를 선도하
고, 이 신앙적인 절규를 핵으로 삼아서 정교하고 숙련된 예술적 창작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
에서, 산문적 특성이 지배적인 찬송들과는 사뭇 다르다(Westermann 1966:22 f.). 장르적인 측
면에서, 이들 찬송시들은 히브리 시편들이 전달하고자하는 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
신 구속의 사건들에 대한 공동체의 신앙적인 반응을, 이제 예수와 요한의 탄생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바 놀라운 일들을 찬양의 시편이란 형식을 통하여 전하고자 한다. 따라서
유대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하여 이들 시들을 살펴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을 위한 열쇠 중에
하나이다.
둘째로 이들 찬송시들은 예언적인 동기 부여를 통해 시각의 변화를 유도하는 종말
론적인 찬양과는 달리,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즉흥적인 기쁨을 반응하면서, 왜 하나
님이 이 일을 행하셨고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찬양하는 선언적인 찬양에 속한다. 따라서
그 기본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 찬가
스가랴 찬가
영광송 시므온 찬가
찬양의 절규
46-47
68a
2:14
2:29
찬양의 동기
48(제 1의 동기) 68b
2:30
49a(제2의 동기)
동기를 부연
49b-53
69-75
2:30-32
설명하는 진술
예언
76-77
(2:34b-35)
요약
54-55
78-79
이들 찬송시들은 생략과 연장을 통하여 그 길이는 각기 다르지만, 한 문장으로 된
찬양의 절규와 그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행하신 일을 목격한
믿음의 공동체가 그 행위에 대하여 찬양으로 절규하며 탄성을 자아내며, 동시에 이에 대한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 찬송시들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자.
A. 마리아 찬가(the Magnificat; 1.46-55)
마리아 찬가는 그 자체로 격조 높은 장엄함을 뽐낼 뿐만이 아니라, 이 찬송시를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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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위대한 신학자들이나 음악가들로 하여금 흔치 않는 시적 아름다움을 산문이나 곡조로
나마 서술하여 그 장려함을 드러내도록 자연스럽게 부추기고 있다. 누가는 왜 마리아가 이
렇게 찬미할 수밖에 없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먼저,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가브리엘은 천사인데, 당시 유대교에서는
신적인 용사로서, 종말의 해석자로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나님이 가브리엘을 통하여 야웨의
종말론적 전쟁에 참여하도록 마리아를 소집하는 행위임을 암시한다. 마리아는 처녀인데, 나
사렛의 촌뜨기이다. 나사렛은 예루살렘과 같이 영예로운 땅이 아니라, 당시에 하찮고 경멸을
당하며 부정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참조. 사 9:1; 마카비 1 서 5:15; 요 1:46; 7:41). 명예와
수치를 지고한 가치로 삼던 지중해권 문화에서 한 사람의 신분은 출신 지역, 가문에 의해서
대충 결정된다. 누가는 중요한 사람의 신분을 이런 요소들을 반영하여 등장시키는 반면에,
마리아의 가족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가족이 미천한 부류에 속하거나
가족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천사의 수태 고지는 상상할 수 없이 영예로운 사
건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처녀이다. 정혼을 말하는 헬라어 mnhsteu,w는 오늘날
의 약혼과 거리가 멀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는 최소한 10세에 정혼을 하고 12세에
결혼을 할 수 있다. 정혼을 통하여 지참금이 교환되고 법적으로 결합되었지만, 신부는 결혼
전까지는 아버지의 집에서 그의 휘하에 살게 되어 있다. 결혼 이후에 성적인 결합이 이뤄진
다. 고대 사회에 결혼은 신부와 신랑의 결합이 아니라 가문 대 가문의 결합이다. 마리아의
신분이 비천함은 요셉의 경우를 들어서도 알 수 있다.
성경에 요셉의 아버지는 두 명이다. 누가판 족보에는 헬리이고 마태판 족보에는 야곱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요셉의 아버지로 알려진 두 명은 형제로 같은 어머니의 다른 아버지
의 소생이다. 헬리는 자식이 없이 죽었고, 그의 이복 동생 야곱이 헬리의 과부와 역연혼을
하여 요셉을 낳았다. 따라서 헬리는 요셉의 법적인 아버지이고 야곱은 실제 아버지이다
(Juilus Africanus, The Letter of Aristides). 따라서 요셉은 아버지 없이 살았으므로 생활 수준
이 변변치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 자체만으로도 마리아
에게는 엄청난 은혜의 사건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마리아가 이렇게 찬양하기까지 신앙적인 변화를 겪었음을 엿볼
수 있다. 먼저 가브리엘이 나타났을 때, 마리의 반응은 “놀람”이었다(1:29). 하지만 누가-행전
에서 놀람은 신앙적인 응답이 아니라, 신적인 사건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
지만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부연 설명과 더불어 엘리사벳을 그 증거로 언급하자, 자신은 하
나님의 종임을 고백한다(1:38).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된다. 그냥 나사렛 촌구석에
앉아 있지 않고, 유대 산고을에 있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다. 한편으로는 사가랴가 벙어리
냉가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문안하지 못한 처지이지만 더욱이 늙을 때로 늙어버린 엘
리사벳이 수태를 하였다는 말도 확인해서 천사의 말이 진짜인지도 확인할 겸, 아마도 반신
반의하는 마음으로 겸사겸사 먼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문안 인사를 하
자마자 복 중의 아이가 뛰는 것이 아닌가! 엘리사벳이 성령에 감동하여 ‘믿은 여자에게 복
이 있도다!’(1:45)고 할 때에 어찌 가만히 있으랴! 성령의 영감을 받은 마리아가 갑자기 소리
쳐 외쳤다.
마리아의 찬가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구약의 선언적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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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의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내 영혼이 주를 크게 높이며, 내 영이 내 구주 하나님으로 인
하여 기뻐 날 뛸 듯 하노라.”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왜 그렇게 찬양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두 번째로 광범위한 병행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1) 46b-47, (2)
48a-49a, (3) 51a-51b, (4) 52a-52b, (5) 53a-53b, (6) 55a-55b가 병행 구절로 서로를 해석하여 주
는 역할을 한다. 특히 (4)와 (5)는 서로 대차 대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구조를 다음 같은
측면에서 살펴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세히 살펴보면, 48절부터 이어지는 찬양의 이
유는 마리아의 개인적인 이유에서부터 확대되어 이스라엘 전체를 향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Magnalia Dei)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a) 마리아
48-50
비천한 계집을 돌아보심
(b) 하나님의 놀라운 일
50-53
신분의 반전
(a') 이스라엘
54-55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고, 기억하심
따라서 마리아와 이스라엘이 먼저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놀
라운 일인 신분을 반전시킴이 그 핵을 이루고 있다. 먼저 마리아(a)와 이스라엘(a')의 관계를
살펴보면, 둘 사이에 다음과 같이 내용상의 병행구조를 이루고 있다(Green 1997: 101):
마리아
이스라엘
48절
종(dou,lh/paido,j)
54절
48, 50절
돌아보심/긍휼의 행위
54절
48절
만세(pa/j o` genea,)/영원(o` aivw,n)
55절
50절
긍휼의 영속성
55절
이러한 병행 구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공동적인 차원으로 발전된다. 마리아가 자
신이 입은 후의를 전체 이스라엘로 발전시켜서 찬송을 하고 있다는 점은 사람에 대한 인식
을 개인주의적 인격이 아닌 집단 중심의 인격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지중해권 사회의 인간관
을 반영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넓은지를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로 중간 핵심 단원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은 바로 신분의
반전(the reversal of status)임을 강조하고 있다.
51절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52a절
권세 있는 자를 (a)
그 위에서 내리시고
52b절
비천한 자를
(b)
높이시고
53a절
가난한 자를
(b')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53b절
부자를
(a')
공수로 보내셨다
이러한 병행 구조는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밀접하게 관련되어서, 서로를 해석하
여 주는 해석적인 역할을 하며, 청중으로 하여금 사용된 은유의 깊이와 넓이를 더욱 더 확
대하여 채워 넣을 수 있는 사고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으로서, 51
절을 도덕적 혁명으로, 52절을 정치적 혁명으로, 53절을 사회적 혁명으로 보려는 시도
(Dupont 1980)는 우리의 구미를 당기는 것이지만, 고대 사회에는 전혀 없던 현대적인 개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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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으로 하여금 말하게 만드는 시대착오적인 해석이다. 이들 병행 구조들은 서로 서로를
연결하여 해석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이 핵심 부분에서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동사를 채택하여 사용하는 점이다. 이들 동사들은 51-52절에서는 목적어보다 앞에 배
치하고, 53절에서는 뒷부분에 배치하는 식으로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동사들의 주어
는 하나님이시고 그 동사들은 모두 다 예언적 부정과거형이다(Brown 1986: 667-68).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행위를 극적으로 묘사하여,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분이심을 강
조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뒷짐을 지시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의 탄생을 통하여 의
와 평강으로 다스리는 그의 통치를 위하여 결정적인 행동을 하시되, 극적으로 운용을 하시
며, 또한 인간의 일을 통제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임을 뚜렷이 돋보이게 하고 있다. 다음
으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가 모두 다 아주 구체적이고 현재 세
상의 종교, 정치, 사회적 문제에 현재-여기서 관여하시는 혁명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예수
탄생 당시에 유대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로마의 식민 통치와 그 꼭두가시들의 정치, 사회적
억압을 염두에 두고 마리아 찬가를 읽어야 한다.
누가는 하나님의 현재적 실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예. 4:21; 11:3; 23:43) 볼 때에,
마리아 찬가가 선포하고 있는 구속의 비전을 마치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실재
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먼 미래에 이뤄질 일이나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
야 할 것이다. 비록 이들 비전이 완성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
에 직접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음을 이들 동사들은 강조한다.
따라서 마리아 찬가에 구체화된 혁명은 현재를 위한 비전이다. 그러나 이 찬송시는 우리로
하여금 혁명에의 부름이나 혁명적 행위에 관여하라고 명령하는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
다. 이러한 혁명적 행위의 주체는 모든 경우마다 하나님 자신이시다. 마리아 찬가는 혁명에
로의 부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혁명적 행위에 대한 축하 찬양이다. 비록 하나님이 그 주도권
을 가지고 계시지만, 이 찬송에 동참하는 찬양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요청
하시며, 동기를 부여하시며 그 일꾼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신적인 용사(Divine Warrior)로
서 예수의 깃발 아래 야웨의 전쟁에 참여할 용사를 부르신다.
B. 사가랴의 찬송(the Benedictus; 1.68-79)
사가랴의 찬송은 요한의 탄생이 가진 의미를 드러낸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입어서 성전에서 분향하는 특권에다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받는 은총을 입었지만,
의심으로 인하여 벙어리가 되었다. 성전에서 나와서 제사장의 축복(민 6:24-26)을 해야할 시
기에 벙어리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말이 실감이 갈 것이다. 그러나 요
한의 이름을 짓고 난 이후에, 그의 입이 풀리면서, 그 속에 응축되었던 축복의 찬양이 성령
의 영감으로 폭발하였다. 찬송을 하였다. 따라서 이 찬송시는 64절에 언급된 찬송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사가랴의 찬송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예언의 형태를 띈 선언적 찬
송시로서, 시 전체를 지배하는 어조는 선포이다. 이 찬송시의 구조는 제 1 부는 축원 찬송
(Benediction; 68-75)과 제 2 부 예언(76-79)으로 나눠질 수 있는데, 제 1부에서 2부로의 전환
은 76절의 이인칭 호칭의 사용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먼저 우리는 제 1 부와 2부 사이의 주
제와 단어의 병행 구조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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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원 찬송)
2 부 예언
68
(
출애굽 모형론
)
하나님의 방문
(
빛과 어두움의 은유
) 78
69
(
다윗의 이미지
)
구원의 주체
(
요한과 결부된 자
)
77
(
사회 정치적 구출의 비전
)
구원의 내용
(
죄의 용서
)
72
자비
78
70
(
옛 선지자
)
선지자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
76
69
(
다윗은
paido.j auvtou/)
/
아이
(
요한은
paidi,on)
76
이들 병행 구조 속에서, 단어와 주제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발전을 하여 새로운 의
미를 창출하며, 이로써 상징들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사가랴가 해석하고 있는 사건들이 얼
마나 풍부하게 의의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눈에 드러나도록 부각시키고 있다.
제 1 부 축원 찬송은 자신의 백성을 구출시키고자 친히 방문(evpeske,yato)하신 하나
님의 과거 행위를 찬송함으로써, 하나님이 행하셨던 과거의 구출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
다. 이를 위하여 출애굽 모형론(68, 71 [참조. 시 106:10], 74; 참조. 출 4:31; 시 80:14; 106:4)
을 채택하여 하나님이 과거에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다루셨는지를 부각시키며, 동시에 다윗
적인 관점에서 구원의 주역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문을 구원의 뿔과 결합
시켜서 다윗의 이미지에 근거하여 구원의 의미를 구축하고 있다(참조. 시 89:17; 132:17). 근
동 지역에서 뿔의 이미지는 강한 힘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원수로
부터의 구출이라는 주제를 이러한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
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은 그의 자비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또한 구출의 목적 또
한 출애굽 사건에서 차용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출 7:16; 참조. 수
24:14; 출 19:4-6). 구속(lu,trwsij)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희년과 관련된 소재들(참조. 레 25:29,
48; 사 63:4)이 출애굽 모형론 속에서 메아리쳐 울리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
는 제 1 부의 중심부에 배치하여 하나님의 과거 구속 사역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
할을 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어느 때이건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근본적인 근거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배후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자비라고 확인하셨고,
또한 제자들이 윤리적인 행위를 수행하여야 할 근본적인 기준으로 제시하신다(6:36).
특히 우리는 사가랴 찬송시의 제 1 부에서, 일인칭 복수 대명사(우리)가 빈번하게
사용됨을 확인 할 수 있다(69, 71, 72, 73, 74). 이는 사가랴가 자신의 찬송에 독자로 하여금
함께 참여하여 찬송하도록 마련하는 공간이다. 사가랴의 찬송에 공감하는 독자는 이 곡조있
는 갤러리에서 함께 소리쳐 우리를 위하여 하셨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노래 할 수 있다.
이는 사가랴가 동원하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독자로 하여금 온갖 성경적 상상력을 발휘
하여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속 행위가 가진 심오함을 마음껏 누리도록 초청하기 때문이다.
제 2 부 예언은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 목적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일
을 시작하셨는지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76-77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가 펼쳐지
는 무대에 요한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며, 78-79절은 메시아 대망 사상에서 하나의 은
유(“돋아오는 새벽 여명”)를 뽑아내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실행자의 출현을 미리 지적하고
있다. 78절에서도 하나님이 방문하심을 과거 시제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예언적 부정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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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이다. 즉 요한의 공적인 예언적 사역과 이에 따른 예수의 출현을 전망하고 있다. 이는 요
한의 예언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의 실행자의 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져 있을 뿐 아니
라, 요한은 오실 이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요한은 예수에게 종속
되어 있다고 천명함으로써 그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이사야 40:3을 인유(引喩)하고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구원은 과거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를 그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언어는 새 언약과 죄 용서의 약속이 결합되어져 있으며(렘 31:31-34) 또한 계시적인 빛에 대
한 이사야의 비전(사 42:6; 49:6; 60:1, 19)을 채택하고 있다. 제 2 부에서도 긍휼히 여김은
정 중앙에 전략적으로 위치하여 있다. 76-79에는 총 53 단어가 등장하는데, spla,gcna 앞에
26 단어 그 이후에 26단어가 배치되어 있다(Menken 1988:112). 이는 하나님이 구원을 가져오
기 위하여 행하시는 바는 근본적으로 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임을
제 2 부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상은 죄용서와 구속이 서로 관련되어져 있고, 사악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구속과 자유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חסד)에 기초한다는 시 130:7-8
의 사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사가랴의 찬송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가 명백하게 드러난 사
건은 바로 메시아의 임재이다.
“돋아오는 새벽 여명”은 성경적인 은유들이 복합하게 상호 작용되어져 있다. “새
벽 여명”(avnatolh,)은 빛과 별과의 이미지(예. 사 60:1; 말 4:2)를 사용하여 구원의 임재로 간
단히 표현할 수 있지만, 몇몇 본문은 이 용어를 “가지”(Branch)로 번역하여 다윗의 보좌의
상속자를 언급하는 은유로 이해하기도 한다(렘 23:5; 슥 3:8; 6:12). 하지만 가지(צמח)가 메시
아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조명(照明)의 은유적 의미를 전달할 수 도 있다(Tg. onq.
Num 24:17; 계 22:16). 따라서 1.79의 “새벽 여명”(avnatolh,)은 메시아적 인물을 언급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새벽 여명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자로서 빛을 비추고 우리의 길을 인도한다.
빛은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출 13:21; 시 27:1; 36:9)이기도 하지만, 조명으로서 구원을 은유
적으로 표현한다(시 107:9-10; 사 2:5; 9:2; 42:7; 60:1-3; 미 7:8; 바룩 5:9). 따라서 어두움과
사망의 그림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주적 권세가 통치하는 영역으로서, 새벽 여명이 밝아
옴으로써 빛이 비취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평화의 길로 우리의 발을 인도한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공동체 내에서 샬롬
과 정의로 그 표지를 삼는 삶을 나타내는 일종의 암호이다. 이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문 목적은 변혁된 삶, 즉 의로운 행위를 기꺼이 포용하는 삶에 있다. 바로 이 변혁된 삶을
위해 요한은 부름을 받았다(참조. 3:1-14).
나오는 말
누가는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하여 놓은 로마의 평화(Pax Romanica)를 큰 무대로 설
정하여, 좀 더 카메라의 줌을 당겨서 유대 작은 고을들과 예루살렘을 무대로 예수의 탄생이
라는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주전 27년에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여, 제국의
형태로 로마의 통치를 회복한 이후에, 인간 이상의 신적인 칭호와 경배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의 통치는 진정한 평화를 가져 온 것이 아니었다. 누가는 헤롯의 통치와 인구 조사를 그의
- 16 -
통치가 직접적으로 유대에 미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무대를 바탕으로,
예수의 탄생은 먼저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하나님이 사회적 신분의 반전을 일으키는 혁명적
인 행위를 수행하시는 사건임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사가랴의 찬송을 통해 옛적에 출애굽
시와 마찬가지로, 바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방문하신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풍부한 구
약 성경과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누가는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루어 오신
언약에 신실한 구속 행위의 연장이요 또한 절정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곡
조있는 갤러리에서 함께 찬송과 춤사위를 곁들여서, 성탄을 축하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그리
고 이 초청에 응하여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은, 누가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구원 사역과
그의 제자들의 행전에 믿음으로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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