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11. 멜리데 섬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

은바리라이프 2008. 8. 26. 22:03

11. 멜리데 섬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

 

풍랑을 만난 배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이 죄인 된 몸으로 로마의 셋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까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죄인 된 몸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을 만나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한 섬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쫓겨다닐 때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고, 또 한 섬을 만나 그 곳에 내렸지만 그 섬이 어느 섬인지도 몰랐다. 사도행전 28장 1절에 보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고 되어 있듯이, 섬에 상륙한 후에야 그 섬이 멜리데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우리가 당하는 어떤 일들에 대해, ‘이 일이 무슨 일이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또 ‘무엇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모르고 지낼 때가 있다. 그러다가 일들이 지난 후에야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이런 목적으로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때가 참 많다.

사도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는 것은 로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었다. 바울은 죄인의 몸으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아야 했는데, 그는 그때를 가이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그냥 로마로 보내기를 원치 아니하셨다. 로마로 가는 길에, 멜리데라는 작은 섬 안에 있는 죽어 가는 수많은 심령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원하셨고,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그들에게도 베풀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그 섬에 도착시키기 위해, 풍랑을 일으켜 원래 그들이 원했던 뱃길과는 상관없이 배를 이끌어 멜리데 섬 가까이 오게 하셨다. 그리고는 배를 어디엔가 부딪히게 하신 후, 큰 물결로 배를 때려 배가 깨지게 하셨다. 결국 배는 깨져버렸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헤엄을 쳐서 겨우 섬에 도착했다.

만일 배가 그대로 있었다면, 며칠 후 풍랑이 잔잔해지고 난 뒤 그들은 바로 로마를 향해 갔을 텐데, 배가 깨져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없이 그 섬에 머물러야 했고, 그러는 동안 바울은 섬 주민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사도 바울이 탄 배로 풍랑을 만나게 하셨고, 그 섬에 이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섬에 이르기까지는 ‘왜 풍랑을 만났는지, 왜 배가 깨어졌는지’ 알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섬에 도착해서야 ‘우리가 머문 이 섬은 멜리데라는 섬이다.’는 사실 정도를 알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나 뜻을 몰라 고통하거나 괴로워할 때가 참 많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죽음의 참뜻을 몰라 죄에 매여 고통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우리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죄 아래 매여 죄의 종 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시려고 죽으신 것은 정말 아니었다. 예수님의 죽음의 참된 의미는,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죄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 죄를 다 씻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놓으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죄를 자신이 짊어진 채 괴로워하면서 죄 때문에 늘 울부짖고 있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죄와 씨름하며 죄 아래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그 마음에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마음이 눌리거나 늘 죄와 씨름하면서도 죄에 이끌리는 사람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뜻과 그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비록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알 지는 몰라도, 그 능력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떤 흉악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능히 죄에서 해방시키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놓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스스로 죄를 씻으려고 애쓰며, 스스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신이 죄를 씻으려고 애쓰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씻어 놓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고,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 또한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악된 삶을 계속 사는 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각오나 결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완벽하게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모르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로마서 6장에, “그러면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죄 속에서 살 수 없도록 해놓으셨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해 사람들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각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오늘날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을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빠져 지낸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우리 마음으로 알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서만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세계를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세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의 참뜻을 아는 사람들도 흔치 않지만, 부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몰라, 예수님과 같이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슬퍼하겠는가? 물론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어려운 일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

사도 바울이 멜리데 섬에 도착했을 때, 그 섬에 사는 토인들에게 바로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가? 배에 탔던 사람들이 바다에서 헤엄쳐나왔을 때, 날씨가 너무 추웠기에 그 섬 토인들이 불을 피워서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때 바울이 나무 한 더미를 거두어 불 위에 놓았는데, 그 나무 틈에 있던 독사가 뜨거움을 인해 기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고 늘어졌다. 그것을 보고 많은 토인들이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뱀에 물리면 몸이 금방 붓든지 쓰러져 죽기 때문에, 바울이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바울이 태연하게 자신의 손을 물고 매달려 있는 뱀을 불에 떨어뜨린 후,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너무 놀랬다.

참 이상한 것은, 뱀은 사람을 문 후 바로 도망가는데 바울을 물었던 뱀은 손을 물고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보기 어려운 광경으로, 만일 그 뱀이 바울의 손을 물고는 바로 도망갔다면 사람들은 누구도 바울이 그 뱀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뱀에 물려 가지고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섬 사람들이 바울을 물고 매달려 있는 뱀을 분명히 보았고, 그런데도 바울이 죽지 않고 태연히 있자, 바울을 살인한 자라고 했던 데서 생각을 돌려 “이는 신이라.” 하면서 바울에게 마음을 열었다. 또 바울이 추장 아버지의 병을 고쳐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욱 마음을 열고 바울의 말씀을 들었고, 섬의 많은 병자들도 나음을 입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우리는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서 볼 수 있다.

그 일들을 다 겪고 난 뒤에, 바울과 그 일행은 배가 풍랑을 만나 멜리데 섬에 도착한 이유와 배가 깨어진 이유, 그리고 독사가 바울을 물었던 이유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의 자녀들에게 작은 일 하나라도 아무 의미없이 행치 않으신다. 우리에게 슬픔이 오고 아픔이 오고 고통이 온다면, 그것은 단순한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좋은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나도 구원을 받고 지난 30여 년 동안 살아 오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런 아픔과 고통을 주시는지,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지’를 정말 몰라 하나님께 울부짖고 구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작은 일 하나도 이유없이 당케 아니하셨고, 그 모든 일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나를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 주었는지 알게 되며, 주님이 부활하셔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어려움과 고통스런 문제를 당해도 전처럼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런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뜻을 이루실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난 일이나 배가 파선되어 다시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일, 그리고 멜리데 섬에 내린 후 독사에게 물려서 사람들에게 살인한 자라는 말을 들었던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은 멜리데 섬에 있는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로마로 가는 바울의 여정을 통해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나타내기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당신의 구원과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기 위하여 계속해서 일을 이루고 계신다. 구속함을 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통하여 그 일들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 좋은 일만을 바라다가, 생각지 못한 일들을 당했을 때 슬퍼하고 괴로워하거나 낙담해 버린다. 그러나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아무 뜻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왜 풍랑을 만나고 왜 독사에게 물렸는지 몰랐던 것처럼,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문제들을 당할 때 문제만 보이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아 염려하고 낙심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것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발버둥치고, 우리 자신이 원하는 일을 구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실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해 주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롬 8:32)

이 약속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 가운데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슬픔과 괴로움을 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것들의 참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이전  |  다음 >>

'성경 > 바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멜리데 섬을 거쳐 로마로(사도행전 28:1-15) -   (0) 2008.08.26
멜리데 선교 사역 (행27:1-28:10)   (0) 2008.08.26
멜리데(Melita)  (0) 2008.08.26
놀라운 말타의 동굴인들   (0) 2008.08.26
용서   (0) 2008.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