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도에게 불행이 다가오면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저런 재앙이 다가오나? 하나님이 저주하셨어”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상한 것은 오히려 같은 신자들끼리 이러한 판단이 더 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폭풍에서 살아남아 멜레데 섬에 도착하여 불을 피우다가 독사에게 물렸을 때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불시에 어려움을 당한 그에게 응급처치를 해주어야 할 사람들은 “그는 살인자임에 분명하다. 결국 심판 받아 죽는구나”하면서 몸이 붓던지 아니면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취중에 수치를 들어낸 채 잠자던 자신을 흉보던 자식을 저주한 노아, 구스 여인을 취한 모세를 흉보았던 미리암에게 임했던 문둥병,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였더니 암곰이 나와 그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인 사건, 모두 다 잘한 것은 아니였지만 주의 종이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편들어주신 것 같다.
법궤가 성으로 들어올 때 춤추는 다윗을 업신여기던 부인에 대해 성경은 “그러므로 (다윗의 아내가 아닌)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23)고 증언하고 있다. 이 말은 그녀의 생산기능이 그친다는 뜻도 되지만, 그 이후로 다윗이 그녀와 침상을 같이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장인에게 10여 년을 쫓겨 다니며 죽음의 고비를 숫하게 넘기며 연단 받던 일도 고통스러웠는데, 사울을 폐위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윗에 의해 종말을 맞은 것 같은 비참한 아버지만 생각했던 그 협소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왕이 된 남편을 두고도 결국 평생 수절하는 여생을 살게 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욥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자녀들이 일시에 죽고, 온 몸에는 악창까지 나서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할 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것이 그의 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들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나 그 유익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채, 눈앞에 나타난 현상으로만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자기 남편이 겪고 있는 고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 정도의 막 가는 듯 한 말이라면 부부싸움의 정도를 지나서 이젠 영적 전쟁의 단계로 접어든 상태이다.
그러한 엄청난 위기 속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그래도 자기 아내만큼은 믿었을 텐데, 그녀에게 들은 위로는커녕 그 충격적인 말, 기초까지 흔들리고 온 몸이 휘청거릴 만한 그런 극언(極言)을 들었을 때 나 같으면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다!”라고 확고하게 규정하고 “뭐 이런 여자가 있는가?”하며 난리를 피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정말로 멋진 말이다.
욥이 그 와중에도 “당신은 애당초 어리석은 여자가 아닌데, 지금 하는 말은 배우지 않은 사람의 말과 같지 않소? 당신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니… 당신답지 않구려”라고 해석할 수 있는 아주 순화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충분히 막말로 악담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저주해서 하나님 앞에서 급사 당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은, “이 모든 일(아내에게도, 하나님 앞에서도)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욥이 자기를 정죄하던 친구들을 위해서조차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다. 잃었던 욥의 재산은 배로 늘었고, 자녀들은 다시 10명으로 회복 되었으니 천국에 있는 자녀들까지 합하면 그것도 두 배가 된 셈이다.
그런데 새롭게 태어난 자녀들은 새 장가 가서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녀들이란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그 고통을 주었던 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자신을 파괴하려던 그 악착같은 마귀에게 조정 받은 부인의 그런 실수, 아니면 너무 황당하고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여자의 순간적 본성으로도 그렇게 말 수도 있었겠다고 여겨 그대로 용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욥은 역시 위대한 기독교 문화 속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김용준 목사(강북성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