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의 가시

은바리라이프 2008. 8. 25. 20:49

바울의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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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바울의 육신의 가시에 대해 많은 이론이 있다.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을 했지만 바울은 그것에 대해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밝히지 않는게 당연한 것이다. 견문생심(見聞生心)이라고 몰랐던 사람이 알면 말만 많아진다. 자녀가 부모님에게 약점이 있는걸 알지만 그 약점이 무엇인지 알지 않는 것이 좋은 것과 마찬가지다. 바울이 자신의 가시에 대해 밝히지 않은 것은 지도자로서 지혜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가시가 사람들에게 해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을 꺼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도행전 9장 16절을 보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에게 비추어 “사울아 사울아 나를 왜 핍박하는냐”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가 말에서 떨어져 주는 뉘이시니이까”묻자 주께서 “너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셔서 그가 극적으로 회심하고 금식을 하게 되는데 이때 주님이 또한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찾아가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 이사람은 나를 위해 택함받은 그릇이라. 그가 나를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바울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100% 옳을 수 만은 없었다. 믿음의 조상들도 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100% 옳지 않았다 그랬기에 우리가 배울것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다 들어내지 않았다. 우리 또한 100% 옳을때가 별로 없다. 인간의 삶의 모든 문제들이 내가 피해자라 하더라도 나에게도 일부분의 책임이 있을때가 있다. 장차 바울이 몸담게 될 교계는 질시와 암투가 많은 세계였다. 남을 눌러야 자기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편과 저쪽편을 분명하게 그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을 욕하기 위해선 욕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에게서 책 잡힐 만한 근거가 없었다. 그럼에도 온갖 거짓말로 책잡아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인간인 우리에게는 오죽 책 잡힐것이 많지 않겠는가?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해를 맏았겠는가? 바울의 가시가 사람들에게 책 잡힐만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그 가시가 간질병과 같은 질병이라고 하나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질병보다는 도덕적 성격을 가진 것 같다. 사람들이 질병만으로 책 잡을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흠 잡을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문제를 , 이 가시를 해결해 주시지 않았는가? 그 가시를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내 이름을 위해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 는 말씀은 다름아닌 사람들에게서 해를 받는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에 영웅대접을 받고 복음을 전한 첫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으며 나중 로마의 최초의 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첫 순간부터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계속 핍박을 받았다. 불가피하게 주의 종으로 받는 핍박일 수도 있었겠으나 그의 육체의 가시로 인함일 가능성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릴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순수하게 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삶에 근본적 문제에 대해 질문하게 하심을 통해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이루는 것이 아닌 인생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어떤 맘을 가지고 사느냐에 그 순수함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많이 들어도 순수한 사람은 이런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하셨을까? 내 형을 더 사랑하셨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누구인가..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지극히 근본적이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사도바울은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을 정립한 사람이지만,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시를 주셨는지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물으며 솔직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와 인자하심의 증거가 어디 있는지 묻는 일은 늘 우리가 하나님을 갈급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고린도 후서는 사도 바울의 자서전적인 고백이 많은 서신이다. 그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었고 그 신앙과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섰는지 알면 그 말씀을 이해하기가 더 쉽다. 12장 7절을 보면 “ 여러 계시를 받은것이 지극히 큼으로 내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를 (주님이) 주셨으니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마울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는 자고할 수 있다는 암시다. 사람이 완전히 자고하지 않는 것이 참 어렵다. 그러나 너무 자고하고 교만한것을 주님이 싫어하신다.

우리는 우리 삶의 시련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마귀가 준 것이면 거부하고 몰아내야 하며, 내 실수이면 내 실수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주님이 주신 것이면 그것은 수용하고 그 이유를 알아서 아멘으로 화답할때 은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떠나가게 하기 위해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주님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 (주님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내 여러 약한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 그러므로 이 가시는 결국 바울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 교만해 지면 결국 바울자신이 실족하게 됬을 것이며 주님은 그것을 막기 위해 가시를 주신것이다.

실족이라는 것은 참 슬픈일이다. 사울왕이 교만했기 때문에 실족했고 사탄이 교만했기 떄문에 타락했다. 하나님은 교만을 참 싫어하셔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셨다. 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사용받고 나서 타락하는가? 교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을 행함 후에 넘어지지 않고 서기 위함이다.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바울에게 또 우리에게 가시를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늘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정금같이 순전한 그의 삶과 인격과 믿음이 일치되게 하신다. 경력이 쌓아질 수록 가식, 허위가 하나님앞에서도 많아질 수 있다. 사람은 잘 속고 속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자식, 형제, 연인에게 속는다. 순전한 사람은 사람들앞에 보이는 가식이 적이 미련하게 보일 수 있고 약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인간의 약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 지기에 능욕, 궁핍, 핍박, 곤란을 기뻐했다. 왜냐면 내가 약한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인간에게 속한 모든것 -성품, 감정, 건강) 연약하더라도 영적으로 강하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수가 있다. 이 약함으로 나를 지탱하는 것이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증거할 것이다. “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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