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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

은바리라이프 2008. 8. 2. 16:20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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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
본문: 사도행전 12 장


I. 신약성서에서 "헤롯"(Herod)으로 소개되는 인물은 세 명이다. 아르켈라우스 (마 2,22), 북동부 요르단 지역을 통치했던 분봉왕 빌립, 아그립바 (행 25-26 장) 등을 포함하면 남자만 해도 6 명이나 되는 헤롯 일가가 신약성서에 언급되고 있다.

이들 중 헤롯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자들을 보면, 먼저 마 2 장에 나오는 헤롯 왕을 들 수 있다. 이 헤롯은 소위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으로 알려진 자로 헤롯 가문의 그 누구보다도 넓은 영토와 강한 권력을 소유했었으며, 또한 성전(주전 20 - 주후 63)을 건축한 인물이다. 눅 21,5의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진 성전"은 바로 이 헤롯 대왕이 시작한 건축물이다.

주전 4 년에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 그의 세 아들에게 영토가 분할 통치되는데 위에 언급된 아르켈라우스와 빌립, 그리고 또 다른 헤롯이 그 계승자였다. 이 헤롯은 복음서들 가운데 "헤롯"이란 이름으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로 헤롯 대왕 사후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임명된 안티파스(Antipas)이다. 예수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갈릴리 지역의 통치자이자 세례 요한을 죽였던 안티파스는 헤롯 가문의 일원 중 신약성서에서 가장 부정적 이미지로 묘사된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2 장에 등장하는 "헤롯" 왕의 이름은 아그립바(Agrippa)로 헤롯 대왕의 손자이다. 헤롯 대왕은 열 명의 아내를 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그립바는 그 중 마리암메 1 세와 헤롯 대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이 아그립바의 아들이 행 25-26 장에서 바울과 만나고 있는 同名의 아그립바이다. 따라서 행 12 장의 헤롯은 "아그립바 1 세"로, 행 25-26 장의 아그립바는 "아그립바 2 세"로 구분한다.

예루살렘이 위치한 유대 지역은 주후 6 년 아르켈라우스의 실각 이후 유대-로마 전쟁 발발이 있기까지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를 받았는데, 이 기간 중 단 한 번의 짧은 기간 동안 헤롯 가문이 유대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 인물이 바로 이 아그립바 1 세이다. 이 때가 주후 41-44 년이므로 행 12 장의 사건들은 이 기간 안에 벌어진 일들이다.


II. 행 12 장은 <(1) 아그립바 1 세의 박해 (사도 야고보의 처형 + 베드로의 투옥) (2) 위기의 극복 (베드로의 탈옥), (3) 아그립바 1 세의 죽음>의 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아그립바 1 세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한 자로 등장한다. 공관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 이후 처음으로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야고보와 몇몇 신자들은 아그립바 1 세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이를 계기로 베드로까지도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죽음은 신약성서 안에서 사도의 죽음에 관해 보도되고 있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도행전 기자가 이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던 이유에서였는지, 혹은 (무력하게 죽음을 당한 이야기보다는) 위기가 극복된 베드로의 경우를 강조하고 싶어서였는지는 확정지을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최초의 사도 순교 사건은 매우 짧게 언급되며 지나가고 있다.

아그립바 1 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풀려나게 되며, 이 사실을 주의 형제인 야고보에게 알리라고 명한다 (행 12,17은 사도행전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구절이다). 이 사건 이후 아그립바 1 세는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지내다가 행 12,20-23에 묘사되듯이 급작스런 죽음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 행 12 장에 묘사된 아그립바 1 세 단락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유대고대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아그립바 1 세의 죽음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요세푸스의 본문은 사도행전 본문과는 약간 다른 강조점을 갖고 있지만 아그립바 1 세가 갑자기 죽게 된 경위를 아래와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아그립바는 전 유대를 3 년간 통치한 후에 전에는 스트라토의 망대로 불려졌던 가이사랴로 왔다. 여기서 왕은 가이사의 행복을 위한 일종의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가이사의 영예를 기념하는 축제를 거행했다. 이 때 그 나라에서 직책을 가졌거나 상당한 지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축제의 두 번째 날에, 아그립바 왕은 순은으로 짜여진 참으로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으로 들어갔다. 태양 빛이 찬란하게 비치자 은으로 짜여진 그 옷은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아첨꾼들은 왕에게는 유익하지 않았지만 아그립바 왕을 신이라고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이어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가 지금까지는 한 인간으로서 당신을 존경해 왔으나 앞으로는 당신이 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왕은 그들을 꾸짖지도 않았고 그들의 아첨을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일 직후에 왕은 고개를 쳐들고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줄 위에 올빼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아그립바 왕은 올빼미가 전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 왔었으나 이번에는 재난의 전조임을 인식하면서, 마음 속에 비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 잡았다. (중략) 왕은 높은 침상에 누워서 엎드려 있는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5일간의 복통으로 탈진한 왕은 나이 54세에 즉위한지 7년째가 되는 때에 세상을 떠났다 (이하 생략)". (Josephus, ant 19,343-352).


III. 초기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을 통치자 아그립바 1 세와의 관계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 기자는, 위기의 상황이 궁극적으로 "극복"된다는 점을 밝혀줌과 동시에 이러한 위기 극복은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극적으로 행해짐을 그려주고 있다. 반면 신자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오로지 간절한 기도뿐이었다 (행 12,16).

한 편, 위기 극복의 결과는 사실상 신자들의 안녕과는 무관하다. 그 결과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지 (행 12,24), 선교 활동에 따르는 외적 위협은 행 13 장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렇게 사도행전 기자는 위협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공적으로 전파되며 확장되는 신앙의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본문 말씀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초기 기독교 역사가 박해와 순교로 점철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가 막강한 위력을 떨치고 있는 현대에 이러한 고난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부적합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세계의 적지 않은 곳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신앙인들의 家庭 및 여타 여건에 따라 핍박의 상황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요, 또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데 따르는 적지 않은 유혹들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갈등, 핍박 등의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에 대한 어떤 물리적 저항이 아니라는 것과, 또한 이를 극복하는 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점을 이 본문이 밝혀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아그립바 1 세의 죽음은 인간의 신격화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임이 자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이 그 죽음의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하느냐이다. 즉 아그립바 1 세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 12,2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투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앙인의 삶에서 추구되어야 할 모든 일들은 그 결과의 선함과 유익함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에 따르는 모든 자랑과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한 행 12 장의 강력한 경고는 이렇다.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