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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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 본문: 막 14,3-9 (마 26,6-13; 요 12,1-8; cf. 눅 7,38-50) 박 찬 웅 본문의 일화는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베다니라는 곳은 감람산 동쪽 비탈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동쪽 방향으로 3 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막 11 장에서 예수는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예루살렘 근방에 있던 이 베다니라는 마을로 잠시 나오셨다. 본문의 구조를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마가 기자는 14,3에서 이 날 일어났던 사건을 단 한 줄로 압축하여 적고 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 여인의 정체를 마가 기자는 익명으로 남겨 두었다. 한 편 히말라야 등의 인도 북부 산간지방에서 자라는 나드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짜낸 값진 기름로 알려져 있던 나드 향유는 보통의 경우 몇 방울만 떨어뜨려도 진한 향기를 낼 수 있었다. 아마도 나환자 시몬의 집안은 깨뜨려진 옥합에서 흘러나오는 향으로 가득 찼을 것이었다.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은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의 비난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14,4-5). 이 여인을 나무랐 던 "몇몇 사람들"이 누구인지 마가 기자는 밝히지 않고 있다 (마태 26 장의 병행 단락은 이들의 정체를 "제자들"로 언급한다). 이들이 향유 한 옥합에 300 데나리온의 값어치를 매긴 것은 과장법이라고 보지 않아도 된다. 가령 플리니우스 2 세가 400 데나리온 상당의 향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시대에 이 정도 귀한 향유는 더러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본문의 세 번째 부분(14,6-9)은 이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좋은 (or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구조를 지닌 본문은 종종 "자선행위보다도 신앙의 우위"를 시사하고 있다고 설명된다. 즉 신앙의 대상인 예수에 대한 사랑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보다 더 우선한다고 가르친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 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는 마치 예수와 가난한 자들을 대립적 혹은 경쟁적 관계로 볼 수 있게끔 한다는 점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는 예수 자신이 그토록 역설한 부분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이를 유보하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예수 사랑과 가난한 자 사랑을 대조시키는 비교 우위의 설명 방식은 명확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본문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자. 막 14,1-2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음모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막 14,10이하에서부터 시작해서 15 장까지의 기록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극적인 이야기들이다. 즉 한 익명의 여인이 예수께 기름을 부은 이 일화는 수난 이야기의 대단원의 제일 첫 머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일화들은 가룟 유다의 배신, 마지막 만찬, 겟세마네에서의 고뇌에 찬 기도, 그리고 예수에 대한 체포와 베드로의 부인, 의회와 로마 총독 앞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죽음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내용들이다. 따라서 이 여인의 행동이 좋은 일로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상황이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자선)행위를 결코 경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구제행위는 언제나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다!" 반면에 이 여인이 행한 좋은 일은 항상 가능한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시점에서 가장 적합한 행위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이 시점은, 예수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날은 이제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때였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 이후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장례 의식이 오늘 이 장면에서 미리 치루어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 여인의 행동은 <좋은 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최후를 맞는 예수의 심정과 그의 비장한 고난의 길을 (본문의 시점에서) 이해한 자는 마가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이 여인 한 사람일 것이다. 예수를 잡아 로마에 넘긴 유대 지도자들, 바라바가 아닌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친 백성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차례나 부인하고, 잡혀가는 예수의 뒤를 몰래 따르던 한 젊은이도 체포의 위험이 다가오자 알몸으로 달아나고 만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오직 이 향유를 부은 여인만이 주님의 수난을 정확히 이해했던 자로 묘사되고 있다. 덧붙여 지적할 점은, 이 여인은 가져온 옥합을 <깨뜨려> (zerbrechen) 향유를 부었다는 점이다. 마태 26 장이나 요한 12 장의 병행 단락에서와는 달리 마가는 "깨뜨린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가의 본문은 이 장면을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가의 이 여인은 옥합을 열어서 향유를 적당히 부은 것이 아니라 옥합을 깨뜨려 귀중한 향유를 모두 부었을 것이다. 깨뜨려진 옥합에는 더 이상 향유가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깨어진 옥합은 전적인 자기 헌신의 상징이 아닐까? 주님이 자기 몸을 온전히 바쳐 십자가에 달린 모습, 그의 스스로를 부수어 (깨뜨려) 희생한 모습과 버금가는 것은 마가 에서 오로지 이 여인의 깨뜨려진 옥합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늘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전해지리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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