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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증거: 종말 때의 공동체 삶의 방식

은바리라이프 2008. 8. 2. 15:12
회개의 증거: 종말 때의 공동체 삶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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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의 증거: 종말 때의 공동체 삶의 방식

눅 3:10-14

1. 본문 연구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모두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 중 눅 3,10-14에서 나타나는 구체적 윤리의 가르침은 오직 누가에서만 볼 수 있다.
본문의 앞 단락을 보면, 세례 요한은 임박한 심판을 면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선포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보증이 될 수도 없다 (3,8). 심판의 때를 준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회개일 뿐인데, 이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3,3)를 받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마태의 병행 단락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마태의 본문과 비교하여 하나의 특기할 만한 점은, 마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karpon aksion, 마 3:8)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이를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karpous aksious, 눅 3:8)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열매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통하여 회개에 적합한 구체적인 선행을 보일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복수 형태로의 전환을 통해 누가는 이어 나오는 3,10-14의 구체적 윤리와의 연결점을 찾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서에서는 "합당한 열매들을 맺는 것"은 의식의 전환이나 마음을 고치는 정도만으로는 불충분하고, 회개는 오직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증거들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눅 3:10-14에는 세 번에 걸친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과 세례 요한의 <대답>의 형식이 반복되어 있다. 질문자들은 곧 닥칠 심판에 대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들에 대해 세례 요한은 준엄한 심판 설교자에서 철학적 교사와도 같은 모습으로 전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일상의 도를 벗어난 윤리적 급진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반대로 평범한 일상 범주에서 실행될 수 있는 가르침을 주는 듯이 보인다. 마치 심판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평범한 현실을 영위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혹은 조금 전에 했던 심판의 선포를 없었던 말로 해달라는 듯이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눅 3,10-14의 본문은 앞 단락과 모순되는가, 혹은 누가의 세례 요한 선포들은 논리적 구성이 결여된 본문일까?

무리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변은 이러하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3:11). 자기 소유를 나누어주라는 이 말씀은 부유한 자들을 향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옷"을 가리키는 희랍어는 chiton으로, 외투와는 다르다. 외투를 의미하는 어휘는 himation으로, 눅 6:29; 행 9:39 등에서는 옷을 나타내는 이 두 종류의 어휘가 함께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3:11의 옷"은 외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겉옷 아래 입는 "속옷"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옷도 두 벌 씩은 가지고 떠나지 말 것을 명령한 말씀
에서도 이와 동일한 chiton이라는 희랍어가 사용된다 (눅 9,3). 곧 여기서 말하는 의복은 사람의 의복 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옷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옷 두 벌을 가진 자"는 최소한의 여벌을 지닌 가난한 자로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한 벌의 예비용 옷을 남에게 주었을 때 자신 역시 단벌의 처지가 되고, 그 남은 옷마저 잃을 경우 가진 옷이 전혀 없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는 자이다. 즉 그는 결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가 아니다.
또한 "먹을 것이 있는 자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서 이 "먹을 것"도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음식인 broma를 말한다 (마 14,15; 막 7,19; 눅 9,13; 요 4,34 등을 참조하라). 이 단어는 잔치를 위한 특별한 음식을 가리키는 deipnon과는 다르다 (마 23,6; 막 6,21; 눅 14,12.16; 요 12,2; 고전 11,20 등을 참조하라). "먹을 것"을 뜻하는 broma는 주기도문에서 생명 유지를 위한 일용할 양식을 말하는 artos와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지 (마 6:11; 눅 11:3 등을 보라), 풍성한 잔칫상의 요리로 이해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첫 번째 대답은 衣食 생활에 여유가 있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요한은 부유한 자의 자선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저 생활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의 윤리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임박한 심판 앞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나눔의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보다 여유 있는 처지가 될 날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선포하는 심판은 내일이나 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이라도 임할 시급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옷 두 벌", "먹을 것"으로 극단화되어 표현되었듯이 지금 처한 상황, 그 자리에서 당장 나눔의 윤리를 실천해야만 이 임박한 심판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곤궁한 가운데 상호 부조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누가 공동체의 현실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몇몇 소수의 부유층 인사들만의 기부를 통해서만 공동체가 유지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원조에 의한 부의 분배는 한시적이다. 반면 빈자들의 수평적인 부조는 이러한 제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면에서 공동체 유지의 매우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세리들과 군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3,13, 對 세리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3,14, 對 군인들).

세금징수업자나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대리자요 청부업자로 여겨졌고, 또한 지위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이들의 직업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천대받는 직업이었다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잘 증거된다. "세리와 죄인"은 종종 함께 묶여서 언급되고 (눅 5,30 등), 또 세리는 죄인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눅 15,1f.;19,7). 미쉬나에서도 "세리와 죄인"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세리와 강도", "세리와 이방인", "세리와 창녀들", "살인자와 강도와 세리" 등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바리새파의 한 일원이 세리가 된다면, 그는 바리새 공동체 일원 자격을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의 경제적 수준은 높은 편이었을 수 있지만, 이들의 직업은 천대받는 것이어서, 세리들의 사회적 신분은 일반적으로 낮은 층에 속한 자들로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이 <군인들>에게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하지 말고, 각자의 봉급에 만족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은, 이들의 직업상 부정의가 수반되는 경우가 잦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요세푸스는 고대의 군인들이 흔히 범할 수 있었던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도둑질, 강도질, 약탈, 동포를 기만하는 행위, 친지에게 해악을 입히고 이익을 취하는 행위들이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581). 이는 군인들 역시 세리와 마찬가지로 유대 사회에서는 부정적 취급을 받던 계층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세리들과 군인들은 직업의 특성상 불의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리와 군인"은 부정의를 행하기 쉬운 직업이었지만, 요한은 이들에게 직업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의 직업 활동에서 수반되는 "부정의"를 거둘 것을 명령한다. 그들의 업무상 수반되는 정의롭지 못한 일들은 "경우에 따라서 빚어질 가능성이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으리라. 오히려 자신이 가진 위치와 힘을 오용할 수 있는 유혹은 그 누구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세액을 조작하여 착복을 하는 일이 무척 용이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무기를 지니고 제복을 입고 다니는 것 자체로 이미 힘없는 백성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그런 일상을 살아왔다고 가정한다면, 이전의 그런 관성을 버리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요구는 사실상 직업 자체를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근본적이고도 힘겨운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2. 본문 해석의 확장

누가의 세례 요한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정의의 심판의 때를 현 시점에서의 정의 실천의 명령과 긴밀히 연결한다. 긴급한 심판의 선포는 일상 삶 자체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삶의 모습을 변함없이 유지할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세례자의 가르침은 각자의 삶과 생업의 바른 의미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그 돌이킴은 곤궁한 가운데에도 더 약한 이웃을 돕는 것, 그리고 직권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던 습관을 포기하는 것 등 구체적인 모습으로 요구된다. 이렇게 회개의 증거를 보이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의 윤리적 가르침은 철저히 종말의 심판사상에서 그 출발점을 갖는다. 수직적으로 내려올 심판의 촉박함은 현실 삶에서의 "철저한 회개와 철저한 정의"를 시급하게 실현하라는 절박한 동기 부여를 제공하고 있다.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혹은 종말이 지금 당장 임할 때, 외쳐야 할 것은 오늘 세례 요한의 선포처럼 이웃을 돕고 정의를 실천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이 밖에 무엇이 있으랴.
세례 요한의 심판의 선포와 구체적 윤리의 가르침은 결코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세례요한이 요구하는 일상적 삶의 윤리는 결코 종말의 시급함을 둔화시키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당장 이웃과 나누는 삶, 일상화되어버린 직업상의 부패와 부정의를 근본적으로 포기하는 삶에 대한 요구는 앞서 선포된 "심판의 임박성"으로 인해 설득되고 있다. 그러므로 심판과 윤리로 대별된 본문의 두 단락은 모순되기는커녕 철저한 논리적 일관성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윤리는 세속적 윤리와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앙인들의 정의로운 삶, 일상적인 윤리의 실천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은 피할 수도, 예외도 없다고 세례요한은 선포한다. 그러므로 심판을 준비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 요구되는 정의와 윤리는 뒤로 미루거나 변명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며, 내 삶 속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불의와 탐욕을 당장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왜곡된 관계를 바로 잡으시듯이, 우리도 현재의 삶에서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자의 선포는 예수의 선포와 가르침의 요약판이요,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은 예수와 연속선상에 있으며, 예수의 메시지는 요한의 선포에 예견되어 있다. 이로써 세례자는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이리라.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철저히 수행한 결과는 고통스런 죽음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