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이슬람 강좌> 수메르 문명

은바리라이프 2008. 7. 18. 13:56

<이슬람 강좌> 수메르 문명(1)
김종도 교수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공격으로 힘의 논리인지 대의명분을 위해서인지 많은 인명의 죽어나가고 있다. 공격명분은 이라크의 화학무기 보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것이나 아직 증거가 없으니 앞으로 전개될 전후 문제도 복잡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는 인류문명의 산실이었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전쟁으로 이 유물들이 파괴되고 있으니 마음 아플 뿐이다. 신록의 푸르름만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진리를 갈구한다면 어찌 전쟁이 일어나겠는가? 그래도 우린 이라크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너무나 몰랐던 그곳의 문명을 좀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이 또한 이슬람 문명의 자양분 구실을 한 것이기도 하다.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1992년)을 심사받을 때 심사위원이 시리아교수였는데 그는 수메르인들은 동방에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국내에도 이를 입증하는 서적이 한 권 나와있지만 아직 학계에서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이것은 아마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전무한 상황이라 더욱 그런가 싶다. 더 많은 검증이 있어야겠지만 수메르인이 이곳의 원주민이 아니라 타지에서 흘러 들어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유적지를 탐사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한 문명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수메르 문명이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에 많게는 수백 개의 방이 있는가 하면 광범위하게 군집하여 살았다는 사실이다.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의 거소를 방문해보니 방이 수십개였다. 그 집안에는 이미 우물이 있었다. 수메르인 당시에 도자기를 구워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구비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뒤의 신화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수메르를 알면 사실 다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토양 위에서 유지 발전된 문명이기 때문이다. 수메르 인들이 이룩한 업적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으나 재미있는 이야기만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이라크 역사 이전에 뿌려진  수메르 문명의 씨앗은 핫수나, 할라프, 우바이드, 우룩, 젬다트 나스르 시대 동안에 발아되어 기원 전 3천년 도시국가로 꽃을 피웠다. 그 가운데는 싶파르, 키쉬, 아크샤크, 라라크, 닢푸르, 아답, 움마, 라가쉬, 우룩, 라스라, 우르, 에리두드 등의 도시가 있다. 도시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비옥한 유역에 단순한 농업 정착 형태를 띠었다. 도시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변의 비옥한 땅에 농업정착지 형태로서 시작되었다. 농산물 생산이 미미하면 그들은 물고기나 새들을 먹을 것으로 대용하기도 하였고 홍수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에 관개수로 건설과 신에게 기도와 제물바치는 일에 의지하게 되었다. 만약 관개시설에 대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영원히 출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홍수로 인해 지친 삶을 영위해야 했기에 홍수의 신인 니누르타(Ninurta)를 악마로 간주하였다. 주위가 탁 트인 곳이다 보니 지형지물을 이용한 방어진지나 요새건설은 불가능하기에 수많은 민족들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홍수는 예기치 못하며 건축 자재는 수입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주민들은 3가지와 싸워야만 했다. 자연과의 투쟁, 영역을 넓히려는 다른 도시들과의 전쟁, 외세 침입자들과의 전쟁. 엄청난 팽창 후에  제국은 내분으로 홍역을 겪게되며 때로는 이웃들과 죽음의 펀치를 교환하여야만 했다. 몇몇 정복자들은 피정복민의 지혜와 문화에 동화되기도 하였고 또는 어떤 정복자들은 단지 약탈과 파괴에만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소포타미아에는 자연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이 없었다. 그들은 신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였다. 그러기에 수많은 신들을 모신 만신전이 있어 여기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들은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순종을 택할 도리밖에 없었다. 기원전 2500년경에는 많은 토지들이 신전들의 소유였으며 농부와  상인, 장인들은 신전을 위해 봉사하였다. 수메르인들은 기록 기술을 남겨 수메르 쐐기문자를 남겼다.
인간과 같이 취급된 신들은 규칙적으로 성찬식과 세정식을 받았고 정교한 의식으로 영광을 받았다. 신의 형상들은 승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조그마한 방에 안치되어있었고 가끔 신이 계시를 줄 것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신상 옆에서 자기도 하였다. 그 꿈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연약한 인간들의 심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메소포미아 사회는 귀족, 시민,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상이 모두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 신이나 길거리의 조그만 신전에서도 섬길 수 있는 신들을 섬겼다. 위기가 닥쳐오면  신들은 영적인 최고위치에서 사제들의 기도와 중재, 또는 개인적인 특별한 종교의식으로 접촉할 수 있었다. 정점에 있는 신들 가운데는 달의 신 난나(Nanna), 전쟁의 신 니누르타(Ninurta), 대지의 신인 닌후르삭(Ninhursag), 사랑의 신 이난나(Inanna) 등이 있었다. 왕은 최고신의 부름에 응답하여야 했기에 커다란 신전들을 지음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키고 또 신에게 경배를 드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Ur)는 달의 신과 그의 부인을 위하여 봉헌된 진흙 벽돌로 지구라트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신전과 지구라트 건설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주요한 임무였다. 맥주는 신전에서보다 즐거운 생활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제조되었는데 노동자들은 큰 신전을 짓는 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의 약 40%가 맥주제조에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포도주도 이들은 즐겨 마셨다고 한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맥주에 관한 조항이 네 개나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맥주 값 대신 곡물을 받는다던가, 양을 속여 판 술집 주인을 물 속에 던진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슬람 강좌> 수메르 문명(2)

김종도 교수

토지는 주로 신전이나 왕궁이 소유했으나 이외에도 부자들이나 세력가들은 토지를 소유했다. 귀족들로부터 왕은 자문관을 뽑았으며 농부들은 규칙적인 식량공급을 책임졌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목수일, 무두질, 빵굽기, 맥주 생산, 도자기 작업, 벽돌굽기, 옷 제조 등에 종사하였다. 예술가들은 조각과 회화를 발전시켰고 유리세공은 기원전 2500년경에 이루어졌다.   강을 따라 사람들은 많게는 100000명 정도가 살았고 하수처리시설이나 쓰레기 처리장은 없었다. 평민들은 단층자리 진흙 벽돌집에 살았고 부유층은 손님용 응접실, 부엌, 목욕탕을 갖춘 2층집을 소유하였으며 2층은 가족용으로 사용하였다. 때로는 따로 떨어진 하인집, 워크숍, 창고등을 1층에 갖추기도 하였다. 뜨거운 여름에는 지붕에서 잤다는 기록이 있는데 필자가 수단(열대지방)에 살면서 대부분 밖에서 자 보았는데 밤 10시 되면서 느껴지는 공기의 그 신선함은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정도였다. 오늘날 이라크의 시골 진흙집들은 수메르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 공공장소는 전문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장소였고 레슬링, 전차경주가 오락거리였다.    
         
수메르인들은 인류 최초(아직 까진 더 오래된 문명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의 수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만약 학교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모든 이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기원전 2500년경에 수메르는 여러 곳에 학교를 세워 전문인 양성을 하였는데 바로 서기의 양성이었다. 서기는 왕궁과 신전을 비롯한 각급 행정기관의 업무를 기록하였고 이들이 있었기에 당시의 수많은 일들이 점토판에 새겨져 후손들이 그들의 삶의 자취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손에 굳은 살이 박히고 피가 나도록 점토판에 문자를 새겼다. 자연적으로 학교는 학문과 문화의 센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학문적 성과는 점토판에 새겨졌다. 서기는 잘랴기 보장된 직업이라 고관대작들의 아들들이나 부유층 자제들만 다녔고 여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수메를 학교의 장은 움미야(교수나 전문가라는 의미)라고 또는 학교아버지라고도  불렸다. 조교수는 큰형제라고 불렀으며 학생은 학교아들이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수메르어 책임자와 그림 담당자가 있었고 출석반장 그리고 규율반장도 있었다. 교수들은 학부모들부터 등록금을 받아 생활하였다. 옛날부터 배움에는 공짜가 없었던 모양이다. 큰 형제인 조교수는 학생들이 준비해간 새 점토판에 전날 배운 것을 오로지 베끼도록 하였고 그것을 암기토록 하였다. 암기교육의 효과는 아마 이때부터도 인기가 있었나 보다. 이들이 배우는 교과과정은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면과 문학적이고 창조적인 면이 있었다. 이런 열정과 수고로 삼라만상의 이름들과 동물학적, 식물학적, 광물학적, 수학적인 지식들을 축적했으며 문학적인 면에서는 수메르신들과 영웅들의 찬미가와 수메르 도시멸망에 대한 애도,우화등이 다채롭게 구성되어있었다. 학교생활을 유추해보면 상당히 엄한 규율속에서 학생들은 생활했으며 회초리도 상당히 위력을 발휘했으리라고 본다. 수업시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고 길었다.   서구의 민주주주의가 최초라고 떠들고 있지만 사실 일찍이 수메르에서 민주주의가 싹이 텃다. 미국이 행하고 있는 양원제 처럼 이들에게도 양원제가 있었다. 수메르의 도시국가중에 키시와 우루크는 앙숙관계로 키시왕 아가가 우루크인 길가메시에게 소국이 될 것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길가메시는 연장자층의 상원과 젊은 층의 하원을 통하여 이 문제를 논의에 붙였다. 상원은 무조건 항복하고 평하롭게 지금처럼 살자는 주장을 하였고 하원은 죽더라도 항전태세로 나가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길가메시가 전쟁을 택하자 키시군은 우루크를 에워쌓으나 풀려나 아가와의 친선을 도모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길가메시의 우루크가 같은 사안을 놓고 양원의 의견을 듣고 민주적인 결정을 고려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대에 씌여지지 않았고 1000여년 후에 새겨졌다고 보고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수메르인들의 삶과 지혜가 담긴 속담을 살펴보자. 수메르인들은 사회적으로 불평이 많고 적응을 잘 못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격언을 남겼다. ‘너가 물에 들어가면 흙탕물이 되고 과수원에 들어가면 과일들이 썩기 시작한다’. 불평불만이 많은 자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독버섯과 같은 존재로 본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죽기로 작정한다면 낭비하라. 오래 살려면 절약하라.’라는 속담을 가지고 있는데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낭비가 심하면 패가망신을 하게 됨을 상기시켜주는 금언이다. 최근 카드 빚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을 보면 무분별한 낭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짐작케 한다. 우리 속담에 ‘짚신 장수 헌신 신는다’라는 말이 있다. 수메르의 장인들도 자신이 만든 것을 가질 수 없었고 ‘세탁하는 자의 옷은 항상 더럽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이 있는데 당시의 속담에도 ‘쾌락을 위해 결혼, 사색을 위해서는 이혼’이라는 말이 있다. 당시에 남자들이 결혼을 후회했던 것 같다. 왜냐면 결혼을 하는 순간에 찢어질듯한 가슴을 안게 되는 신랑이라는 표현을 보면 짐작이 간다. 세리는 어느 시대나 무서운 존재다.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기쁘게 찬양할 사람 없다. 수메르 시대에도 ‘가장 무서워해야 할 것은 세리다’라는 속담을 보면 혹시 중과세로 사람들이 주눅이 들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자못 봄을 맞으면서도 왜 이리 기분이 착잡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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