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강좌> 수메르 문명(2) | |||||||
김종도 교수 | |||||||
토지는 주로 신전이나 왕궁이 소유했으나 이외에도 부자들이나 세력가들은 토지를 소유했다. 귀족들로부터 왕은 자문관을 뽑았으며 농부들은 규칙적인 식량공급을 책임졌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목수일, 무두질, 빵굽기, 맥주 생산, 도자기 작업, 벽돌굽기, 옷 제조 등에 종사하였다. 예술가들은 조각과 회화를 발전시켰고 유리세공은 기원전 2500년경에 이루어졌다. 강을 따라 사람들은 많게는 100000명 정도가 살았고 하수처리시설이나 쓰레기 처리장은 없었다. 평민들은 단층자리 진흙 벽돌집에 살았고 부유층은 손님용 응접실, 부엌, 목욕탕을 갖춘 2층집을 소유하였으며 2층은 가족용으로 사용하였다. 때로는 따로 떨어진 하인집, 워크숍, 창고등을 1층에 갖추기도 하였다. 뜨거운 여름에는 지붕에서 잤다는 기록이 있는데 필자가 수단(열대지방)에 살면서 대부분 밖에서 자 보았는데 밤 10시 되면서 느껴지는 공기의 그 신선함은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정도였다. 오늘날 이라크의 시골 진흙집들은 수메르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 공공장소는 전문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장소였고 레슬링, 전차경주가 오락거리였다. 수메르인들은 인류 최초(아직 까진 더 오래된 문명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의 수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만약 학교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모든 이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기원전 2500년경에 수메르는 여러 곳에 학교를 세워 전문인 양성을 하였는데 바로 서기의 양성이었다. 서기는 왕궁과 신전을 비롯한 각급 행정기관의 업무를 기록하였고 이들이 있었기에 당시의 수많은 일들이 점토판에 새겨져 후손들이 그들의 삶의 자취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손에 굳은 살이 박히고 피가 나도록 점토판에 문자를 새겼다. 자연적으로 학교는 학문과 문화의 센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학문적 성과는 점토판에 새겨졌다. 서기는 잘랴기 보장된 직업이라 고관대작들의 아들들이나 부유층 자제들만 다녔고 여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수메를 학교의 장은 움미야(교수나 전문가라는 의미)라고 또는 학교아버지라고도 불렸다. 조교수는 큰형제라고 불렀으며 학생은 학교아들이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수메르어 책임자와 그림 담당자가 있었고 출석반장 그리고 규율반장도 있었다. 교수들은 학부모들부터 등록금을 받아 생활하였다. 옛날부터 배움에는 공짜가 없었던 모양이다. 큰 형제인 조교수는 학생들이 준비해간 새 점토판에 전날 배운 것을 오로지 베끼도록 하였고 그것을 암기토록 하였다. 암기교육의 효과는 아마 이때부터도 인기가 있었나 보다. 이들이 배우는 교과과정은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면과 문학적이고 창조적인 면이 있었다. 이런 열정과 수고로 삼라만상의 이름들과 동물학적, 식물학적, 광물학적, 수학적인 지식들을 축적했으며 문학적인 면에서는 수메르신들과 영웅들의 찬미가와 수메르 도시멸망에 대한 애도,우화등이 다채롭게 구성되어있었다. 학교생활을 유추해보면 상당히 엄한 규율속에서 학생들은 생활했으며 회초리도 상당히 위력을 발휘했으리라고 본다. 수업시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고 길었다. 서구의 민주주주의가 최초라고 떠들고 있지만 사실 일찍이 수메르에서 민주주의가 싹이 텃다. 미국이 행하고 있는 양원제 처럼 이들에게도 양원제가 있었다. 수메르의 도시국가중에 키시와 우루크는 앙숙관계로 키시왕 아가가 우루크인 길가메시에게 소국이 될 것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길가메시는 연장자층의 상원과 젊은 층의 하원을 통하여 이 문제를 논의에 붙였다. 상원은 무조건 항복하고 평하롭게 지금처럼 살자는 주장을 하였고 하원은 죽더라도 항전태세로 나가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길가메시가 전쟁을 택하자 키시군은 우루크를 에워쌓으나 풀려나 아가와의 친선을 도모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길가메시의 우루크가 같은 사안을 놓고 양원의 의견을 듣고 민주적인 결정을 고려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대에 씌여지지 않았고 1000여년 후에 새겨졌다고 보고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수메르인들의 삶과 지혜가 담긴 속담을 살펴보자. 수메르인들은 사회적으로 불평이 많고 적응을 잘 못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격언을 남겼다. ‘너가 물에 들어가면 흙탕물이 되고 과수원에 들어가면 과일들이 썩기 시작한다’. 불평불만이 많은 자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독버섯과 같은 존재로 본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죽기로 작정한다면 낭비하라. 오래 살려면 절약하라.’라는 속담을 가지고 있는데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낭비가 심하면 패가망신을 하게 됨을 상기시켜주는 금언이다. 최근 카드 빚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을 보면 무분별한 낭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짐작케 한다. 우리 속담에 ‘짚신 장수 헌신 신는다’라는 말이 있다. 수메르의 장인들도 자신이 만든 것을 가질 수 없었고 ‘세탁하는 자의 옷은 항상 더럽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이 있는데 당시의 속담에도 ‘쾌락을 위해 결혼, 사색을 위해서는 이혼’이라는 말이 있다. 당시에 남자들이 결혼을 후회했던 것 같다. 왜냐면 결혼을 하는 순간에 찢어질듯한 가슴을 안게 되는 신랑이라는 표현을 보면 짐작이 간다. 세리는 어느 시대나 무서운 존재다.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기쁘게 찬양할 사람 없다. 수메르 시대에도 ‘가장 무서워해야 할 것은 세리다’라는 속담을 보면 혹시 중과세로 사람들이 주눅이 들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자못 봄을 맞으면서도 왜 이리 기분이 착잡한지 |
'신학 > 성경배경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레셋philistine 과 팔레스타인palestine (0) | 2009.04.13 |
---|---|
블레셋 족속 (0) | 2009.04.13 |
페니키아 (0) | 2008.05.02 |
메소포타미아 문명 (0) | 2008.05.02 |
메디아 [Media, 메대(Mede)]/ 메디아의 歷代王 世界 歷史 (0) | 2008.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