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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창세기 10-11장 바멜탑과 니므롯 / 창세기 12장 / 아브라함의 소명

은바리라이프 2008. 7. 16. 15:01
    니므롯은 인류 역사의 첫 영걸로서 첫 제국을 건설한 첫 임금이기도 하다. 그가 건설한 첫 나라는 바벨론의 앗수르를 합친 큰 제국이었다(창10:10-12). 또 그는 니느웨의 큰 성을 건축한 사람이기도 하다(창10:11). 그 뿐만 아니 라 유명한 바벨탑도 그가 중심이 되어 그의 명령과 지휘로 건설된 것임이 분명하다(창10:10과 11:1-6참조). 이제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또 그가 건 설한 바벨탑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지를 창세기 10장과 11장에서 생각해 보자.

    1. 그는 인류 역사상 첫 영웅이었다

    창 10:89에 "함의 아들......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하였다.여기 영걸이란 히브리 원어(끼뽀르)는 힘이 강한 자란 뜻이 다. 그러므로 영문성경(King James)에는 그저 강한 사람(mighty man) 이라고번역되어 있음을 본다. 그처럼 힘이 세고보니 자연히 들짐승을 사냥하는 사냥하는 사냥군이 되었다.
    창세기 10:9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라고 했음을 보는데 여기서 특이한 사냥군이란 과거에 없었던 특별한 사냥군 이란 말이다. 후세에 흔히 말하는 사냥군이란 말이다. 후세에 흔히 말하는 사냥군과는 다르다. 그때는 벌써 황무한 땅에 들짐승들이 번성해서 사람과 가축을 해치던 때였다. 그러므로 짐승을 사냥한다는 것은 자연히 사람들과 가축들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출23:29,레26:22 참고). 그러 므로 니므롯은 자연히 유명해졌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얻었을 것이다.물론 영웅도 되었다. 사람이 한번 영걸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 그것으로 끝 나지 않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나라를 세워 저들을 다스리는 권력자가 되고 왕이 되는 것은 자연적은 순서일지 모른다.니므롯은 왕이 되었다.

    2. 그는 인류 역사상 첫 왕이었다

    창10:10에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에서 시작되었으며....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레센(이는 큰 성이라)를 건축하였으며...."라고 했다. 여기에 "그의 나라"라고 했으니 벌써 그는 나라를 조직한 임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큰 성을 건축했다. 특별히 니느웨 성을 건축했는데 [니느웨]란 그 말은 니너스(Ninus)의 성이란 뜻이다. 고대 앗수르의 신화에 의하면 [니너스]는 니므롯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들은 말하기를 [니느웨]란 그 도성은 니므롯이 그것을 건설한 후에 자기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의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 뿐만 아니다. 니므롯은 자기와 자기 아들들을 신 의 화신이라고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케 했다고 한다. 앗수르의 신화에 의하면,자기는 하늘의 월신의 화신이요, 자기의 아들들은 별신들의 화신이요,자 기의 아들들은 별신들의 화신이라고 했다. 사막과 광야에 사는 저들에게 있어서 낮의 뜨거운 해는 사람을 해치는 악신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어두운 밤을 밝히는 달과 별들은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니므롯은 자기와 자기 아들들은 백성을 보호하는 선신이라면 서 자기를 섬기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류 역사상에 맨 처음 우상 숭배를 강요한 자가 되었다. 또 그때 이후 바벨론과 앗수르에는 달과 별을 숭배하는 우상종교가 시작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니므롯의 이러한 반역행위는 드디어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그러면 이제 그 바벨탑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첫째,바벨탑과 인간의 반역:니므롯은 영걸이 되었고 나라를 세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더욱 망령되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치 않았고 모든 사람들로 자기를 섬기게 했다. 바벨론의 신화와 또는 고고학적 재료에 의하면 바벨탑의 맨 꼭대기 정상에는 월신,소위[NANA신] 섬기는 제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 앗수르의 많은 탑들은 소위[지그랏]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뜻은 거룩한 성이란 말이다. 그것들 위에는 4각형의 제단이 있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지그랏이라는 탑들의 원형이 곧 바벨탑일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생각할 때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은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월신의 화신이라고 지칭하는 자기와 자기 아들들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노아 홍수 후에 생겨진 무서운 인간들의 반역행위가 아닐 수 없다.
    둘째, 바벨탑과 인간의 교만: 창11:4에 보면 "탑을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니므롯의 교만한 얼 굴을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흔히 어떤 업적을 텅하여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 했다. 사람들로 자기를 찬양케 했고 우상으로 숭배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공든 탑을 무너뜨림으로써 그의 교만을 심판했던 것이다.
    셋째, 바벨탑과 인간의 정책:창11:4을 다시 보면 "자 성과 대를 높이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다.여기에서 보는대로 니므롯과 그 일당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사람들을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썼다. 생각컨대 그것은 멀리 탑이 바라 보일 수 있는 한계에서만 사람들이 살도록 제한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로 흩어지지 못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그처럼 그들의 발을 묶어 놓으로써 백성 들의 분산을 막으려 했다.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자기들의 통치밑에 두려는 정책을 썼다. 이러한 니므롯과 그 일당의 야심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기는 반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 9:1에 보면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며 번성하며 편만하여 그 중에 번성하라" 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로 온땅에 편만하여 번성하기를 원하였고 또 그렇게 축복하셨다. 그러나 니므롯과 그 일당은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을 어겨 사람들로 온 지면에 흩어져 충만하며 번성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사람들 을 한곳에 묶어두고 그들을 통치하려 했다. 억지로 자기의 통치 밑에 저들을 통일시키려 했다. 인류는 본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과 서로 사랑하는 형제 애로써 서로 연합하여 단결하기를 원했으나 니므롯과 그 부하들은 그러한 영적 연합이 저들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함을 알았음인지 외형적인 수단과 인간의 정 책적인 방법으로써 단결과 연합을 유지하려했고, 통일 보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를 섬기게 함으로써 단결시켜 보려 했다. 그러한 정책은 드디어 바발탑을 쌓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높은 성과 탑을 건축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쌓게 된 동기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간의 교만이었음으로 악한 정책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빼앗아 인간의 힘에 굴복케 했고,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을 돌이켜 인간을 우상으로 숭배케 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연합 하고 서로 사랑하는 그것으로 단결해야 할 인간들을 자기의 힘과 정책으로 묶어 인간의 단체를 조직하고 단결케 하려 했던 그것은 참으로 악한 계획이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니므롯이 자기와 자기의 아들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영원히 다스리는 통치자로 군림하려 했던 것은 얼마나 참람한 일어 었던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장난을 심판 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사람들을 흩어버리셨다. 그때 이후 인간들을의 언어는 혼잡되어 서로 알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바벨탑의 심판은 한마디로 인간들의 그 끝없는 교만과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보아 좋다.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 
     
    1.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
    2. 신학의 문제
    한 차례의 대홍수 혹은 여러 차례의 홍수에 대한 기억들이 세계 도처에 퍼져 있다. 과연 그 기억들은 동물들을 싣고 배로 피하였다가 한 높은 봉우리에 내렸다는 내용의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바벨론만 큼은 우리에게 창세기에 아주 가까운 이야기를 제공해 주고 있어서 그것을 빌려왔는지 아니면 직접 영향을 받았는지의 문제가 신중히 검토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한 세기 동안이나 걸려서 토판 11의 길가메쉬의 서사시(Epic of Gilganses)에서 알아 내었다. 그 주제는 곧 인간은 불멸의 소망을 가질 수 없고 그것을 얻은 유일의 인물은 바벨론 사람 노아였 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다 오래된 작품인 아트라카시스 서사시(P.129의"그 밖의 창조설화들"을 보라) 에서 길가메쉬 씨리즈에 도입된 주제였다. 여기서는 그것이 인간의 역사를 창세기에서처럼 창조부터 다룬 보다 긴 설명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

    사진 / 우르 : 성서에는 갈대아 우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족장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서술되고 있다(창11:283115:7).우르의 폐허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 있다. 고대 수메르의 도시로 후에는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았다. 영국인 올리(1880-1960)년경의 본격적인 발굴에 의해, 이곳에서 BC 4000년기에 우바이드 문화가 번창했으며,그 중기에 대홍수가 있었음이 2.4m에 달하는 점토층에서 나타났다. 평탄한 사막 가운데 우뚝 세워져 있는 지구랏은 신 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가 복원 건축한 것이다.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의 원형이었던 바빌로니아의 지구갓도 여기에서 그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최근에 이 지구랏의 계단이 복원되었다. 제1층만이 복원된 우르의 지구랏 정면 계단은 불에 구운 벽돌을 아스팔트로 접착한 것이다. 벽돌색은 빨강,푸른색 계통과 회색 등 여러 색을 내고 있다. 건축 당시의 벽돌이 아직도 남아 있고 우르 남무야와 증축자 나보니두스의 왕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단은 100단으로 사진 정상의 1층 상단에서 좌우의 계단이 만난다. 이 위에 3층의 건물이 있었다. 정면 계단은 신과 왕만이 사용했다.
    그것은 이렇게 전개된다. 최초의 인간들이 창조된 후에 그들이 수 많은 자녀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너무나 커져서 땅의 신이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의 소동을 진압시키기 위한 그의 계획들은 경건한 아트라카스시가 인간을 창조한 신의 도움으로 승리하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드디어 신들은 파멸적인 대홍수를 내리기로 결정하고 모두 그 계획을 비밀에 붙이기로 맹세하였다.다시 아트라카시스는 경고 를 받았다. 그의 신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배를 짓고, 그의 가족과 동물들을 태우고 난 다음,동료 인간들에게는 그같은 행동을 그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그같은 부과된 하나의 형벌이라고 설명 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모두 다 배에 오르자 홍수가 나서 온 인류가 다 휩쓸려 가 버렸다. 신들 자신도 역시 홍수의 영향을 받았다. 인간이 멸망되면서 그들은 인간이 제물로 바쳐오던 음식과 술을 잃게 되어 칠일간의 폭풍우가 끝나기까지 비참하게 하늘에 앉아 있었다. 그후에 아트라카시스는 땅 이 이전처럼 물이 감하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새들을 날려보냈고(길가메쉬 본문에만 보존되어언 한 삽화)그의 배가 머문 산에서 제사를 드렸다. 간절하던 신들은 제물의 냄새를 맡고는 "파리들처럼) 모여 들 었고 다시는 그와 같은 파멸을 초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母神은 청보석 목거리로 맹세하였다.그러나 잠을 설쳤던 신은 마음이 풀리지 않았고,무차별 형벌의 부당성이 논의된 끝에 어떤 여자들은 종교적 인 직분을 맡아서 아이 낳는 것을 피하게 하고, 또 어떤 여자들은 질병으로 어린 것들을 잃게 해서 인구수를 제한하는 하나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다.(사용된 용어들은 이것이 저작자 당시의 사회적 체계에 대 한 하나의 설명이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신학의 문제

    사진 : 길가메쉬의 서사시(Epic of Gilgamesh)앗수르판 제11토판 : 바벨론 홍수 설화를 담고 있다. B.C. 7세기.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는 비록 더 간산하기는 할지라도 사실상 동일한 내용을 들려주고 있는 수메르의 한 본문에서도 역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수메르의 많은 저작들이 먼 옛날의 홍수 혹은 이전의 홍수 를 언급한다. 창세기의 홍수기사는 메소타미아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배경을 갖고 있으며,수많은 유사점들은 성경의 기사가 바벨론의 그것과 동일한 사건을 다룬 기록이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창세기 기사의 도 덕적이며 신학적인 내용은 분명히 아주 다르다. 하나님의 계시는 사실의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사실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