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결혼 십자가 처형의 실상 7) 예수는 처형되기 전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았을지 모른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 자손이 더 늘어났을 수도 있다. 예수가 정말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는가. 또 십자가 처형 자체가 사기였다는 증거는 있는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주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적(敵)은 예루살렘에서 상당 수준의 기반을 닦은 유대인들이다. 그러나 그런 계층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들은 로마를 개입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이 예수를 투석처형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로마 당국과 싸운 일도 없고, 그 법을 위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로마의 법과 절차에 따라 십자가 처형의 처벌을 받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 당국에 도전하는 어떤 일을 했을 것이다.
예수가 로마의 비위를 어떻게 건드렸든 그의 십자가 처형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대목이 있다. 복음서에 적힌 대로 예수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믿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 처형은 매우 치밀한 절차에 따라 집행되었다. 판결을 내리면 사형수는 우선 매질을 당한다. 그러면 그는 많은 피를 흘리고 탈진된다. 사형수의 축 늘어진 양팔은 보통 가죽끈으로 묶어나, 때로는 못질하여 무거운 나무 기둥에 묶어 그 나무를 목과 어깨 위에 지운다. 이 나무를 지고 사형수는 형장으로 끌려간다.
처형장에 이르면 사형수가 어깨에 매고 있는 나무를 거기 수직으로 서 있는 말뚝 또는 기둥에 옆으로 부착하여 십자가 모양을 만든 후 형을 집행한다. 이때 건강한 사람이면 그 상태로 하루 또는 이틀 동안 버틸 수 있다. 어떤 때는 사형수가 탈진, 또는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 질 때까지 일주일이나 걸릴 때도 있다. 또 발에 못을 박았을 때는 출혈로 죽는 수도 있다. 이때 사형수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다리나 무릎을 부러뜨리는데, 그건 사형수가 더 빨리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예수의 처형 장면에 대해서는 <제 4복음서>에 한 목격자의 얘기가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예수의 발은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나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다. 또 그의 다리는 부러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최소한 2∼3일을 족히 살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지 몇 시간만에 사망한다. 복음서에는 심지어 빌라도마저 너무 빠른 죽음에 놀란 것으로 되어 있다. (마가복음 15장 44절)
그렇다면 예수의 사인(死因)은 무엇인가? 로마 군졸이 찌른 창의 상처 때문은 아니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창에 찔리기 전에 죽어 있었다. 또한 로마 군졸이 찌른 곳은 심장이 아니라 오른 쪽 가슴이었다.(요한복음 19장 33절)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예수가 탈진과 피로와 허약체질과 그리고 채찍질로 인한 후유증 등의 복합적 원인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을 감안하더라도 예수가 그처럼 빨리 운명한 상황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물론 사람이란 대단찮은 타격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에는 뭔가 석연찮은데가 있다. <제 4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처형자들은 그의 죽음을 촉진키 위해 다리를 꺾을려고 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그 순간에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다리 꺾이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예수는 구약의 예언대로 죽어갈 수 있었다. 예수는 '메시아'의 재림을 주장하는 예언들의 방식대로 죽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개선하기 위해 나귀를 빌린 일이라든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광경 등은 모두 구약의 예언대로다.
예수가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운명했다는 건 아무래도 의심이 간다. <제 4복음>에 의하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목이 마르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 식초에 적신 스폰지가 주어진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식초(또는 시어진 포도주)는 일시적 자극제로서 그 효과는 소금과는 다르다. 그것은 채찍을 맞고 실신한 노예들을 되살아나게 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상처를 입고 기진맥진한 사람에게는 잠깐의 식초 냄새가 원기를 회복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에는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그는 식초 냄새를 맡자마자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식초 냄새를 맡고 나타났다는 이 같은 반응은 생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가 보인 반응은 식초가 아니라 일종의 마취제를 맡았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중동에서는 그런 마취약이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왜 마취약을 주었을까? 그것이 십자가 처형의 여러 가지 요건 상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약을 줄 필요가 없다. 그건 어쩌면 예수의 생명을 구하여 예언을 실행토록 하려는 하나의 책략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수의 처형에 이와 같은 책략이 게재되었음을 암시하는 또 다른 모순적 상황도 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해골의 장소>라는 골고다에서 처형되었다. 후세의 전설들은 골고다란 곳이 해골 모양의 불모의 언덕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제 4복음서>가 정확하게 적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요한복음 19장 41절)
그렇다면 예수는 해골 모양의 언덕이나, 공중 사형장에서 처형되지 않았다. 그는 개인 무덤이 있는 정원 가까운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마태복음> 27장 26절에 의하면 이 무덤과 정원은 아리마테아의 요셉의 개인 재산이었다. 네 복음서에 의하면 요셉은 부자였고, 예수의 비밀 제자였다.
민간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 처형은 원래 수천 명이 보는 가운데 집행된 대규모 공중 행사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표현한다. <마태·마가·누가복음>에 의하면 십자가 처형은 예수의 아는 자들과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자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누가복음 23장 48절) 그렇다면 예수의 처형은 공중 행사가 아니라 사적(私的) 장소에서 이루어진 사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몇몇 현대 학자들은 실제의 처형장소가 겟세마네의 정원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겟세마네가 예수의 비밀 제자의 땅이었다면, 예수가 처형되기 전 어째서 그런 장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건 말하자면 면밀하게 계획된 하나의 종교의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장을 본 목격자도 몇 사람밖에 없다. 약간의 거리를 떨어져서 그 광경을 본 대중들은 그것이 그냥 십자가 처형이려니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며, 누가 처형을 받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연극을 하는 데는 빌라도 또는 로마 행정당국의 고위층의 묵인 내지 협력이 있어야 했을 것이고, 또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빌라도는 잔혹하고 포악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부패되고 뇌물에 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복음서에 표현된 것과는 달리 상당한 뇌물이나, 더 이상 정치적 선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교환하여 예수를 살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 빌라도는 예수 처형에 깊이 관련됐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는 <유대의 왕>이라는 예수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는 또 예수가 예상보다 빨리 죽었다는 말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혹은 놀라는 척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테아의 요셉에게 돌려주도록 허용한 일이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시체는 매장될 수 없었다. 군인들이 처형장을 감시하면서 가족이나 친지가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런 규정을 깨고 예수의 시체를 요셉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빌라도가 어떤 음모에 협력했다는 얘기이다.
영어판 <마가복음>에는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빌라도는 예수가 죽었다는 보고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백부장을 불러 사실을 확인한 다음 요셉의 요구대로 예수의 시체를 내주었다. 이 얘기는 얼핏 보기에는 사실 같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된 <마가복음>에 보면 그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르면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을 때 "소마(SOMA)"란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은 살아있는 육신을 부를 때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런데 빌라도는 요셉의 요구를 수락하고 시체를 돌려주라고 할 때 <시체>를 뜻하는 "프토마(PTOMA)"란 말을 사용했다. 이렇게 보면 요셉은 분명히 살아 있는 육신을 달라고 했고, 빌라도는 자기 생각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시체를 되돌려주도록 명령했다.
십자가에서 처형된 시체의 매장을 금지한 규정을 고려할 때 요셉이 시체를 되돌려 받았다는 자체도 그 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무슨 근거로 그는 시체를 받을 수 있었는가? 만약 그가 비밀 제자였다면 그는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는 시체를 요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빌라도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 과정에 뭔가 음모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요셉이 다짜고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복음서에는 그가 예수의 비밀 제자이고 산헤드린(로마 당국의 감독하에 있는 유대사회 통치기구)에 속해 있다고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요셉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이 사실은 빌라도를 상대한 그의 태도나 그가 묘지까지 갖춘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입증이 된다.
중세의 전설들에는 요셉이 성배의 관리자로 그려져 있다. 그 후의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어떤 면으로든 예수와 예수 가족의 혈통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렇지 않고는 빌라도가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시신을 제 3자에게 주었을 까닭이 없다. 요셉이 예수의 친척이라면 빌라도는 뇌물을 받고 그에게 시체를 줄 만도 하다. 만약 부자이고 산헤드린 위원인 요셉이 예수의 혈족이었다면 예수의 귀족적 계보에 대한 내력도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가 성배의 관리자라는 얘기도 더욱 그럴 듯 해진다
예수의 결혼 시나리오 예수가 신권제왕(귀족이며 합법적 왕위 계승권자)이었다는 건 갈수록 분명해진다. 그는 합법적 유산을 찾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어쩌면 로마 제국에 대한 반대세력의 온상지 갈릴리 태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어느 곳에서나 귀족, 부자, 권력자 등 각계에 걸쳐 많은 지지자를 포섭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지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산헤드린의 강력한 위원이자 그의 혈족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베다니에는 그의 아내와 가족이 있었을지 모른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 바로 거기서 살았다. 거기서 그는 그의 불가사의한 숭배의식의 본거지를 만들어 놓고 여러 가지 의식을 거행하여 추종자들을 규합했을 것이다.
그의 존재는 일부 계층, 특히 로마 당국의 비호를 받는 유대인 부유층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반대에 부딪쳤을 것이다. 이 계층의 하나 또는 둘 모두가 어쩌면 예수의 왕위 계승권 실현 노력을 저지하려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제거 작전에서 희망한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가 고위층에 친구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 친구들이 빌라도와의 은밀한 공모하에 예수에 대한 가짜 처형극을 연출했다. 그 장소로는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개인 정원을 택했다. 일반인들이 먼 거리에서 보는 가운데 십자가 처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엔 예수 대신 다른 사람이 못 박혔다. 그러니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해가 넘어가자 더욱 시계(視界)가 나빠진 가운데 몸뚱이 하나가 인근 무덤으로 옮겨졌고, 2∼3일 후에 기적적으로 사라졌다.
시나리오가 정확하다면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 일부 회교 및 인도 전설에 따르면 예수는 훨씬 늙어서 동방(어쩌면 캐시미르)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한편 호주의 한 기자에 의하면 예수는 기원 74년 마사다 요새가 로마에 함락되었을 때 거기서 80세에 죽었다고도 한다
예수의 결혼 교회가 금지한 비밀 기독교의 가르침이란 것이 수 세기를 전해내려 오는 동안 삭제되고 편집, 수정되어 특정 이익집단(이 일에 중요한 이해가 걸려 있는 단체와 개인들)의 필요에 맞게 예수와 그 시대를 그려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익집단을 곤란케 만드는 모든 것(예를 들면 <비밀복음> <마가복음>)들은 신약에서 삭제되었다. 너무 많이 삭제되는 바람에 일종의 공백마저 생겼다. 이 공백을 상상이 메워 정당화되고 또 불가결해졌다.
만일 예수가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라면 그가 적어도 초기에는 소수의 민중(갈릴리에서 온 가족, 그 자신의 귀족 계층, 유데아와 예루살렘의 소수 고관)으로 부터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지원으로는 왕위를 계승하는데는 여건이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계층에서 더 많은 추종세력을 규합해야 했을 것이다.
다수의 추종세력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 십중팔구 사람들의 충성과 지지를 끌어내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방법이 적합했을 것인데 아마도 매우 고상하고, 불타는 이상주의를 갖춘 훌륭한 신앙의 형태로 선포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바로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가난한 사람들, 피해를 입는 사람들, 약탈당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에게 그는 희망을 주었으며, 동시에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색채도 띠고 있었고, 그 메시지는 언제나 가난한 피압박 민중 속에서 메아리쳤기 때문에 수 많은 추종자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예수의 메시지는 완전히 새로운 것도, 유별난 것도 아니다. 예수 자신이 바리새인(人)이어서 그의 가르침에 여러 가지 바리새적 교리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자신은 무한히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그는 어쩌면 병의 치료나 기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것이며, 신기하고 생생한 우화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전파하는 천부의 재능을 가졌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그의 가족과 귀족, 부자, 그 밖의 영향력 있는 핵심 지지자들이 이미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예수 왕국을 건설한다는 정치적 목적에 있어서는 이해가 일치되었으나 그 동기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그 과업이 실패하자 메시지를 중시하는 세력과 왕통을 찾으려는 세력 간의 불안한 동맹은 붕괴되었으며, 조직의 붕괴와 학살에 직면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갔다. 왕통복위론자들은 그들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보존하려는 혈통을 위해 망명을 작정했다. 그러나 메시지에 매혹된 사람들에겐 혈통의 장래 같은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엔 혈통은 2차적 문제였으며 그들에게 꿈과 약속을 심어준 메시지의 전파가 목전의 과제였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이들 메시지 신봉자들의 덕분에 수많은 세월을 거쳐 오늘에 이른 셈이다. 성 바오로 때 <메시지>는 이미 집약되었으며, 종교의 기본적 골격이 완성되었다.
기독교는 1차적으로 로마인 또는 로마화 된 청중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신(神)으로 모시는 데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시저(케사르)를 신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도 신격화돼야 했다.
기독교가 팔레스타인에서 시리아, 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로마,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성공리에 전파되기까지는 그 지역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끔 만들어져야 했으며, 기존 신(神)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력, 장엄함, 기적의 시행 등 여러 분야에서 타 종교와 필적할 만해야 했다.
시리아, 포에네시아, 이집트 등의 '메시아'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현신 할 신(神)이 돼야 했으며, <부활>의 중요성을 띠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를 타무스, 아도니스, 아티스오시리스 같은 신(神)과 동격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함이었다. 똑같은 이유로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얘기도 널리 선포되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극복하는 부활절도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봄 의식에 때를 맞추었다.
하나님의 종교를 전파하는 필요성에 밀려 현실의 왕족 혈통과 그에 따른 정치적 왕조적 요인들은 2차적 일로 밀려났다. 그런 방향으로의 관심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해 예수의 경력에서 정치적이고 왕조적인 요인들은 제거되었다. 또한 제알롯과 에세네 교리에 관한 흔적도 철저히 말살되었다. 신(神)은 애당초 정치적 음모 따위에는 관련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결국 복음서에는 신화 같은 얘기, 로마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우연히 일어난 전설 같은 내용만이 수록되었다.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 <메시지>신봉자들에게는 이들 예수 후손의 존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 존재가 언젠가는 상당한 위험 요인으로 등장할지 몰랐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증언자인 그 가족은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진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작된 신화쯤은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예수의 혈통에 관한 무서운 비밀을 보존하기 위해, <메시지 신봉자>들과 새로운 신화의 포교자 들은 유대인을 책망하고 로마인을 면책해줌으로써 사실상 이중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들은 신화와 <메시지>를 로마 청중에게 솔깃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가족의 신뢰를 헐뜯었다. 그래서 그들이 조장한 반 유대 감정은 갈수록 깊어갔다.
로마 청중의 비위를 맞추고 예수를 신격화하며 유대인을 속죄양으로 이용함으로써 뒤에 정통 기독교가 된 새 신화의 전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정교의 입장은 2세기에, 특히 기원 180년 경 리용의 주교 이레나에우스에 의해 스스로의 터전을 확정적으로 굳혔다.
초기 기독교에서 옆길로 간 여러 가지 형태의 교파 가운데 그노시스파가 있다. 이 교파는 이레나에우스의 분노를 가장 극심하게 자아냈다. 그노시스 교리는 개인적 경험, 개인과 신과의 연합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레나에우스가 볼 때 이 교리는 사제와 주교들의 권위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일체성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그노시스 교리를 탄압했다.
이레나에우스는 개인적 경험과 그노시스 교리에 대항하여 사도적 기반과 계승에 입각한 단일 <카톨릭>(우주적인) 교회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더러는 빼고 더러는 삽입하면서 신약의 기초가 된 성전을 최초로 저술하였다. 그 후 콘스탄틴 치하에서 로마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 콘스탄틴은 「로마 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바꾼」사람으로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실제로 콘스탄틴은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의「개종」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교인 것 같다. 당시 그의 군대를 수행한 목격자에 의하면 그가 본 환영은 태양신이었다. 콘스탄틴은 계시를 받기 전「솔 인빅투스(보이지 않는 태양)」숭배에 가입했다는 증거가 있다. 로마 원로원은 원형경기장에 전쟁승리의 아치를 세웠다. 그 아치에는 <콘스탄틴의 승리는「신의 덕택」>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신은 예수가 아니며 이교도들이 받드는 태양신이었다.
전설과는 달리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다. 콘스탄틴 자신은 전 생애를 통해 이 이교의 사제로 봉사했다. 그의 왕국은 「태양 제국」으로 불려졌으며, 「솔 인빅투스」라는 제국의 깃발과 동전 등 도처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는 임종의 침상에 누워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는 그의 상태가 너무 쇠잔하여 세례에 대해 「항의」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또 한 군대에 '그리스도' 문장을 휴대케 한 것도 그가 아니었다. 폼페이의 무덤에서 이 문장이 새겨진 명각이 나왔는데, 그건 2세기 반 전에 만들어 진 것이었다.
솔 인빅투스교의 가장 중요한 날은 12월 25일 이었다. 이 날은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기점으로 <태양의 생일>로 기념되었다. 이런 점에서도 기독교는 정부 및 기존 국교와 제휴한 셈이다.
기원 303년 우상숭배자인 디오클레티아 황제는 모든 기독교 서적을 파괴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기독교 서적들, 특히 로마에 있던 서적들은 거의 없어졌다. 콘스탄틴이 새로운 성경의 작성을 지시하자 정교 관계자들은 그들의 교리에 맞게 성경 내용을 수정·편집·가필했다. 신약 내용에 결정적 변경이 생기고 예수가 지금과 같은 별난 지위를 갖게 된 건 바로 이때부터였다.
콘스탄틴이 취한 조처의 중요성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초기의 신약성서 5천부 가운데 4세기 전에 나온 건 한 권도 없다. 오늘날 존재하는 신약은 본질적으로 4세기 때 편집자와 저자들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교의 관리자인 동시에 이른바 <메시지 신봉자>들로서 예수의 실상에 대해 숨겨야 할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예수의 결혼 베드로복음서 <베드로복음서>의 사본은 1886년 나일 상류의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는 기원 180년 안티오치 주교가 만든 것인데, 이 복음서에 의하면 아리마테아의 요셉은 본디오 빌라도의 가까운 친구라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공모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 복음서는 또한 예수가 묻힌 무덤은 <요셉의 정원>이라 불리는 곳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마지막 말도 놀랍다.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기예수 복음서 또 하나의 재미있는 경외성서는 <아기예수 복음서>이다. 이것은 2세기 또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예수는 탁월하지만 다분히 인간적인 어린이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예수는 너무 인간적이어서 난폭하고 무례하며, 충동적으로 화를 내는가 하면 자신의 권능을 무책임하게 행사한다. 한번은 예수가 그를 거역하는 아이를 때려 죽게 했는가 하면 또 한번은 귀족 스승을 구타한 일도 있었다.
<아기예수 성서>에는 어린 예수의 말썽스런 행동 외에도 매우 흥미롭고 어쩌면 중요한 한 대목이 있다. 예수가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몸에서 떼어낸 포피는 한 늙은 여자가 가져갔다. 이 여자는 그것을 향유로 담을 때 쓰는 설화석고(雪花石膏)에 보관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바로 그 통에서 향유를 꺼내 예수의 머리와 발에 발라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부모가 아들의 소중한 살점을 맨 처음 요구한 늙은 여자에게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따라서 그 늙은 여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예수의 부모님과 막역한 처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막달라가 그 별난 물건 혹은 그것을 담은 용기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그녀와 늙은 여자 간의 관계를 암시한다
예수의 결혼 제알롯(열광신자) 예수와 제알롯의 관계가 어떤 것이든 예수가 별도의 죄인으로서 처형되었다는 데는 의문이 없다.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을 '레스타이'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제알롯을 호칭하는 말이다. 예수 자신이 제알롯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는 복음서의 여러 대목에서 제알롯과 유사한 도전적 호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 대목에서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누가복음>에서 그는 아직 칼을 갖지 않은 제자들에게 하나씩 사라고 지시한다. (누가 복음 22장 36절)
<제 4복음서>에는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칼을 휴대하고 다니는 광경이 나온다. 이런 일들은 온화하고 평화주의적인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평화로 사랑하는 구세주가 어찌하여 제자의 무장을 승인할 수 있는가?
예수와 바라바의 관계를 말해주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 바라바도 '레스타이'로 표현되어 있다. 야고보·요한·시몬 베드로 등도 모두 제알롯에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그 동정자임을 암시하는 자취를 가지고 있다. 현대학자들에 의하면 유다 이스카리오트란 이름은 <유다 시카리>에서 유래했다는데, <시카리>는 제알롯의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호칭이다. 사실 <시카리>는 제알롯 조직 내에서 암살을 전담한 정예 신분이었다. 시몬이란 제자를 살펴보자.
그리스어(語)로 된 <마가복음>에서는 시몬이 '카나나이오스'로 불린다. 이것은 제알롯의 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야고보 왕의 성서에서는 '카나나이오스'가 오역되어 시몬은 <가나 사람 시몬>으로 나온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시몬은 제알롯으로 확인되어 있으며, 심지어 <야고보 왕 성서>에서는 그를 <제알롯의 시몬>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예수의 추종자 가운데는 최소한 한 사람의 제알롯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예수의 결혼 그노시스의 저술 1945년 12월 나일 강 상류의 나그함마디 마을에서 땅을 파던 한 농부가 붉은 질그릇 항아리 하나를 발굴했다. 거기에는 13개의 두루마리로 된 사본이 가죽에 묶여 들어 있었다. 그 농부와 가족들은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본의 일부를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그러나 남은 것들이 드디어 전문가들의 눈에 띄었다. 그 중 하나가 이집트에서 유출되어 암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C.G.융 재단이 사들인 그 중의 한 사본이 오늘날 그 유명한 <토마스(도마) 복음서>다. 한 편 이집트 정부는 1952년 남은 사본들을 국유화했다. 국제적인 전문가 팀이 그 사본들을 복사하고 번역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은 1961년에 와서였다. 1972년 최초의 사진 복사판이 나왔다. 그리고 1977년에는 사본 전집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나그함마디 두루마리는 성경 사본집으로서 본질적으로 그노시스 성격을 띠고 있으며,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 때의 것으로 보인다. 이 두루마리들은 사본이며 그 원본은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일부, 예를 들면 <토마스복음>, <진리복음>, <이집트복음> 같은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레나에우스, 오리젠 같은 초기 교회 창시자들에 의해 기재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그 사본의 일부가 늦어도 기원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나그함마디 선집은 현재의 복음서와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문헌들은 특이한 정확도를 자랑하고 있다. 첫째 이 문서들은 로마 정교회의 검열을 받지 않았다. 둘째 이것들은 로마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로마인의 비위에 맞게 왜곡되거나 편집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서들은 직접적인 소스 또는 목격자의 진술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엔 성지에서 피난 온 유대인의 진술도 담겼을 것이고 예수를 잘 아는 사람, 또는 측근의 얘기도 수록됐을 것이다. 현대의 복음서에는 전술한 바와 같은 내용이 없다. 이들 두루마리에는 정교회나 <메시지 신봉자>들이 보면 경악할 내용들이 많이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연대가 적히지 않은 한 사본에는 바실리데스 이단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예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즉 대리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뒤 현장에서 도망친 예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들이 계획한 대로 굴복하지 않았다.......그리고 난 실제로 죽지 않았고 죽는 척했다. 그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한 나의 죽음은 실은 그들의 과오와 무지 속에서 그들 자신에게 일어났다.......쓸개즙과 식초를 마신 건 다른 사람, 그들의 아버지였다. 나는 아니었다.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진 건 다른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이 면류관을 씌운 건 다른 사람이었다.......그리고 나는 그들의 무지를 비웃고 있었다."
나그함마디 두루마리의 다른 사본에는 베드로와 막달라가 불화에 관한 목격자 얘기가 적혀 있다. 그와 같은 불화는 <메시지 신봉자>와 <혈통 신봉자>들 간의 내분을 반영하는 듯하다.
<마리아복음>에서 베드로는 막달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이여, 우리는 구세주께서 다른 여자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걸 알고 있다. 당신이 기억하는 구세주의 말을 얘기하라---그건 당신은 알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잠시 후 베드로는 격분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묻는다. "주께서 한 여자와 은밀히 얘기하고 우리에겐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인가? 우리 모두가 그 여자를 향하여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주께서는 우리보다 그 여자를 더 좋아했는가?" 다시 잠시 후 한 제자가 대답한다. "확실히 주께서는 그 여자를 매우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우리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했다."
<필립복음서>에는 이 불화의 원인이 확실히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거기엔 신부방의 이미지를 거듭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주는 만사를 행하셨다. 세례도, 성유식도, 성찬식도, 구원도, 그리고 신부방도......" 얼핏 보기에 신부방은 뭔가를 상징적으로 또는 풍자적으로 말한 것 같다. <필립복음서>는 이에 대해 더욱 명백히 하고 있다. "언제나 주와 함께 걸어 다니는 세 사람이 있었다. 주의 어머니 마리아, 그녀의 동생, 그리고 주의 친구라는 막달라 이렇게 셋이다."
한 학자에 의하면 <친구>라는 말은 <배우자>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립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만하다. "그런데 구세주의 친구는 마리아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제자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했고 툭하면 그 여자의 입에 키스하곤 했다." 다른 제자들은 언짢아져서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왜 당신은 우리 모두들 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하나요?" 구세주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왜 내가 그 여자처럼 너희를 사랑하지 않을까?"
<필립복음서>는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나체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그것을 두려워하면 그것이 너희를 지배할 것이요, 그것을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를 삼켜 파멸시킬 것이다."
다른 구절에서 이 대목은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참으로 위대한 건 결혼의 신비이다. 그게 없이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세상의 존재는 사람에게 달렸고 사람의 존재는 결혼에 달렸다." 그리고 이 복음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사람의 아들이 있고 사람의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는 사람의 아들이고 사람의 아들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을 통해 창조된 자이다
예수의 결혼 마니 교(敎) 나그함마디 두루마리만을 근거로 하더라도 예수의 직계혈통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한 십자가에 누군가가 대신 못 박혔다는 것, 베드로와 막달라 사이에는 끊임없이 불화가 있었다는 것, 막달라와 예수가 결혼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 등의 주장은 아무리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 묵과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진실은 역사이지 신학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시대에도 역사란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단 종교들은 대부분이 본질적으로 그노시스적이거나 그노시스적 영향을 받았고, 그들 대부분은 예수가 자연적인 잉태의 과정을 통해 태어난 인간이며, 신성한 영감을 받았을지는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결코 신성하지 않은 예언자라고 본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단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과격했던 것은 마니키아니즘(마니 敎)이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초기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의 영어명. BC 7C 말에서 BC 6C 초, 20살 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살 경에 아후라 마즈다신(神)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를 창시하였다고 한다.)교와 미드래스교 전통이 가미된 그노시스 기독교였다. 그것은 페르시아 왕가와 연결이 되는 어떤 바그다드 근처의 가정에서 서기 214년에 태어난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다. 젊은 시절 마니는 그의 아버지를 통해 무엇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어떤 신비적 교단(그노시스 파일 가능성이 있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교단은 금욕과 독신생활을 중요 시 했으며, 흰 도포를 착용했다. 서기 240년경 마니는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예수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통한 치료와 구마(驅魔)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새로운 예수>라고 선언했으며, 심지어는 그가 동정녀로부터 태어났다고 까지 주장했다. 동정녀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있어 신성(神性)의 필요조건이었다. 그는 <구세주>, <사도>, <계도자>, <주(主)>, <죽은자를 살리는 분>, <항해사>, <조타수> 등으로도 알려졌었다. 그런데 마지막의 명칭 2개, 즉 <항해사>와 <조타수>는 특히 암시적이다. 그것은 시온 소수도원의 단장들이 공식적인 직함 <항해사>(Nautonnier : 노토니에르)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후 아랍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마니는 많은 책을 펴냈었고, 그 책을 통해 자신이, 예수가 애매하게만 언급했던 비밀들을 털어놓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짜라투스트라, 석가, 그리고 예수를 자신의 선구자로 보았으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본질적으로 똑같은 출처로부터 똑같은 개명(開明)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르침은 위압적이면서도 정교한 우주론적 체계를 갖춘 그노시스적 2원론으로 이루어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빛과 어둠의 우주적 충돌이었으며, 그 두 가지 반대된 본질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곳은 인간의 영혼이었다. 그리고 마니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죽었다고 주장했다.
서기 276년에 그는 왕명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껍질을 벗기고 사지를 절단하여 죽이는 참형을 당했다. 부활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는지 그의 절단 된 시체는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로 인해 그의 가르침은 더욱 기세를 얻었고, 놀라운 속도로 마니키아니즘은 기독교 세계에 퍼졌다. 그것을 저지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살아남았고, 그후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현재에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게 되었다
예수의 결혼 예수의 후손들 예수의 아내와 자식들은(예수는 16세나 17세부터 그가 죽었다는 시기까지 많은 아이를 잉태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성지를 도망쳐 나온 후 프랑스 남부에 피신했고, 그곳의 유대인 사회 내에서 혈통을 보존했다.
5세기 중에 이 혈통은 프랑크족 왕가와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 같으며, 그렇게 해서 메로빙 왕조가 탄생했다. 서기 496년 교회는 메로빙 왕조와 협정을 맺어 메로빙 혈통을 영원히 후원할 것을 약속했는데, 이때 교회는 메로빙 혈통의 유래를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 교회는 다고베르 2세의 암살을 공모하고, 메로빙 혈통을 배반함으로써 합리화시킬 수도, 씻어버릴 수도 없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 교회로서는 그 사건은 감출 수 밖에 없었다. 메로빙가(家)의 진짜 유래가 드러나게 되면 로마 교회의 위치가 약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필사적인 말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혈통 즉 메로빙가(家) 혈통은 보존이 되었다. 그 혈통은 부분적으로는 카롤링가(家)로 이어졌다. 카롤링가(家) 사람들은 자신들의 찬탈행위에 대해 로마 이상으로 죄의식을 느꼈고, 따라서 메로빙가(家) 왕녀들과 왕조간의 결연을 맺음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혈통이 다고베르 2세의 아들 시기스베르를 통해 이어졌다는 점이다. 시기스베르의 후손 중에는 셉티마니아 유대왕국의 통치자 귈렝 드 겔론이, 그리고 고드프리 드 부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드프리가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수의 핏줄은 그들의 합법적인 구약시대의 유산을 되찾게 된 것이었다.
십자군 운동시대에 고드프리의 진짜 태생이 로마 교회의 뜻대로 비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물론 모든 것의 주도권이 교회에 있었으므로 공공연하게 외부에 알려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문과 전설이 무수히 떠돌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라면 고드프리의 전설적인 선조 로엥그린에 대한 이야기들, 또는 성배에 관한 전설문학들이 있을 것이다. 성배는 최소한 2가지 것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첫째 그것은 예수의 혈통과 후손들, 다시 말해서 시온 소수도원에 의해 만들어진 템플 기사단이 보호할 임무를 띄고 있었던 <상랄(Sang Raal)> 즉 <진짜(Real)> 피 혹은 <왕의(Royal)> 피를 의미할 것이다. 동시에 성배는 비교적 문자 그대로 예수의 피를 받아 담고 있는 '그릇'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막달라의 자궁', 좀더 확대해 생각하면 막달라 자신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막달라 숭배가 연유 됐을 것이다. 예컨대 초기 기독교 시대에 존재했던 그 유명한 <검은 동정녀>나 <검은 마돈나>는 대다수가 동정녀 마리아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사원이었던 것이다. 또한 거대한 자궁의 모습을 한 고딕식 석조물 <노트르담> 대사원 역시 <붉은 뱀>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의 아내를 위한 사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성배는 예수의 혈통과, 그 혈통을 보존한 막달라의 자궁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 서기 70년 유대 지방에 대반란이 있었을 때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은 예루살렘 신전을 약탈했다. 약탈된 보물은 그후 피레네 산지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시온 소수도원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신전에는 티투스의 군대가 약탈해 간 보물 이외에 무엇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예수가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었다면 신전에는 그에 관한 풍부한 정보가 비치되어 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서기 70년 티투스가 예루살렘 신전을 약탈할 때 예수에 관련된 무엇을 손에 넣었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있었다면 은밀히 숨겨졌을 수도 있다. 당시 신전에 있었던 사제는 한 가지 행동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군대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그들이 탐을 낼 만한 것, 즉 금은보화는 몽땅 그들에게 내주었을 것이고, 좀더 중요한 것, 즉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왕에 관계된 물건이나 '메시아'와 왕가에 관계된 물건들은 어딘가에, 어쩌면 신전 밑에 숨겨졌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