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메대.바사)>(헬라)>(로마)의 흥망성쇠를 알고싶습니다error7021 2003.07.15 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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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고대문명, 또는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
바빌론 제1왕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BC 4000년대 말 이곳 남부에 세운 수메르인(人)의 도시국가에서,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가 된 수준 높은 도시문명이 피어났다. BC 2350년 무렵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가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181년 동안의 아카드시대에 수메르의 문화는 셈족화되어 오리엔트의 각 지방에 전파되었다. 그 뒤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다가, BC 2050년 무렵 수메르인의 우르나무가 우르 제3왕조를 창시하고, 이 왕조는 5대 107년 만에 엘람인(人)에게 멸망된다.
BC 1830년경 이신 ·라르사와, 아모리인(人)의 수무아붐(재위 BC 1831~BC 1817)이 개창한 바빌론 제1왕조가 패권을 다투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는 숙적인 이신 ·라르사를 토벌하고 가까운 이웃을 평정,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고,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각지의 신전을 재흥하여 마르두크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재편성, 신상(神像)을 안치하였다. 운하를 파고 도로도 정비하여 무역을 융성하게 하였으므로 국력이 충실해져서,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또 법전(法典)을 반포하고 역(曆)을 통일하였으며, 아카드어(語)를 국어로 정하여 그 보급에 노력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바빌로니아의 세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 삼수일루나(재위 BC 1686~BC 1648) 때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차로 쇠약해져, BC 1530년 무렵 히타이트인(人)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를 나타내는 유적 ·유물은, 그 중심이 되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시대에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외로 적다. 마리 ·우르 등 도시유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마리에서 발견된 왕궁터와 2만 수천 매의 점토판(粘土板)은 매우 귀중하다.
조각으로는 수사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비(法典碑) 상부의 부조(浮彫), 함무라비왕 두상(頭像), 마리에서 출토된 노래하는 여인의 좌상이, 벽화로는 마리 왕궁의 프레스코화 등이 꼽힌다. 바빌론 제1왕조 멸망 뒤의 바빌로니아는 끊임없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으로, 왕조 ·민족이 분립(分立)하여 항쟁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아시리아제국의 지배 후에 신바빌로니아(칼데아)시대가 성립하여 번영을 되찾았으나 그 존속은 1세기도 채 못되어, BC 538년 페르시아제국에 멸망되었다.
페르시아(메대, 바사는 페르시아의 히브리어 표기인듯 함)
이란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오리엔트의 대제국(BC 550~BC 330).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F嚆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가 수장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지방을 영유(領有)하여 안샨왕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현손 키루스 2세(재위 BC 559∼BC 529)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전조영(神殿造營)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그의 원정 중 마기승(僧) 가우마타는 그의 동생 바르디아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왕이 되고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였다. 캄비세스는 이 변고(變故)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도중 시리아에서 실의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캄비세스가 죽은 뒤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같은 일족(一族)인 다리우스 1세가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는 가우마타를 죽여 국내 여러 지방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하고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전국토를 20수주(數州)로 나눈 행정구획을 실시하여 각 주마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장관을 두었으며, 징세(徵稅)와 병역(兵役)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다. 이 사트라프제는 그 후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에서 답습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造營)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 km의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시(戰時)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諸國)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왕년의 지휘관 마르도니우스는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국세의 쇠미(衰微)가 뚜렷이 드러났다.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제위(帝位)를 빼앗으려 진공(進攻)해 왔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東進)하였다.
요원(燎原)의 불길과 같은 이 세력은 도처에서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으며, 다음해 다리우스는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제국의 멸망을 고하였다. 이 싸움 이후로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그리스(헬라)
'그리스'는 그리스어로는 헬라스 또는 엘라스, 라틴어로는 그라이키아(Graecia), 영어로는 그리스라고 한다. '희랍(希臘)'은 헬라스의 한역(漢譯)으로서 한국에서는 차자(借字)로 쓰였다. 고대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 ·종교 ·관습을 가진 민족으로서 자신들을 헬렌(그리스 민족의 先祖)의 자손이라 하여 헬레네스라 자칭하였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헬라스라고 불렀으며, 이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 하여 자신들과 구별하였다.
그리스인의 역사는 약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장구한 기간 중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고전고대로 총칭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초기에 속하는 BC 8~BC 4세기이다. 서양문화의 근간(根幹)의 하나인 그리스 문화가 독창적으로 크게 융성하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즉 세계 고대사 중에서도 예외적인 자유시민이 발생하여 그들의 자유로운 사색활동에 따라 독창력 발휘를 가능하게 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유시민의 활동도 그리스인 특유의 공동체적 소국가인 폴리스(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바랄 수 없던 일이었다.
오늘날 고대사 연구가 크게 진전됨에 따라 그리스에서도 폴리스 사회는 원시사회에서 직접 탄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전에도 고대 오리엔트 사회와 유사점이 있는 왕국의 병립시대(竝立時代)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오리엔트형의 고대관료제왕국(古代官僚制王國)의 탄생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그것이 멸망한 후에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무수한 폴리스의 병립시대가 나타났다.
그리스의 지형은 80% 이상이 산지여서 가경지(可耕地)라고는 산과 산 사이의 분지(盆地)가 고작이었고, 그 위에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중앙산맥이 다시 동서로 무수한 군소지맥(群小支脈)을 거느려 그야말로 각 지역간의 교통이 종횡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천연적인 강우에 의지하여 농사와 목축을 행한 지역으로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이나 중국의 황허강[黃河]유역처럼 치수(治水)와 관개사업(灌漑事業)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오리엔트형 통일국가의 성장은 당초부터 크게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수많은 소규모의 고립사회를 형성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립사회(孤立社會)의 형성은 육상활동 무대와 인구의 수용능력을 크게 제한하게 됨으로써 그리스인의 활동방향을 자연히 해상으로 돌려놓았다. 더욱이 그리스는 육로교통이 지극히 불편하였던 반면에, 해안선의 발달과 에게해(海)에서의 해상교통은 크게 발달하였다. BC 8∼BC 6세기에 걸쳐 활발하게 식민활동을 전개하여 지중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
로마사는 너무 방대해서 다 설명 할 수가 없네요..-_-;;
요약하자면.. 처음에는 초대 왕 로물루스와 그 뒤를 이어서 6명의왕(모두7명)이 다스리다가..
마지막 왕을 �아낸 후로 공화정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고요..
제정시대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네로, 칼리굴라 오현제등등의 황제가 있었죠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의 암살을 계기로 군인 황제가
난립하다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많이 난립 해있던 황제를 제거해 로마를 다시 재건해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죠
그후에 로마를 중심으로 하든 서로마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로 갈라지는데요
서로마는 멸망하고 동로마는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하고...
그 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로마는 너무 거두절미 해버렸네요..^^;;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고대문명, 또는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
바빌론 제1왕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BC 4000년대 말 이곳 남부에 세운 수메르인(人)의 도시국가에서,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가 된 수준 높은 도시문명이 피어났다. BC 2350년 무렵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가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181년 동안의 아카드시대에 수메르의 문화는 셈족화되어 오리엔트의 각 지방에 전파되었다. 그 뒤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다가, BC 2050년 무렵 수메르인의 우르나무가 우르 제3왕조를 창시하고, 이 왕조는 5대 107년 만에 엘람인(人)에게 멸망된다.
BC 1830년경 이신 ·라르사와, 아모리인(人)의 수무아붐(재위 BC 1831~BC 1817)이 개창한 바빌론 제1왕조가 패권을 다투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는 숙적인 이신 ·라르사를 토벌하고 가까운 이웃을 평정,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고,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각지의 신전을 재흥하여 마르두크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재편성, 신상(神像)을 안치하였다. 운하를 파고 도로도 정비하여 무역을 융성하게 하였으므로 국력이 충실해져서,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또 법전(法典)을 반포하고 역(曆)을 통일하였으며, 아카드어(語)를 국어로 정하여 그 보급에 노력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바빌로니아의 세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 삼수일루나(재위 BC 1686~BC 1648) 때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차로 쇠약해져, BC 1530년 무렵 히타이트인(人)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를 나타내는 유적 ·유물은, 그 중심이 되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시대에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외로 적다. 마리 ·우르 등 도시유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마리에서 발견된 왕궁터와 2만 수천 매의 점토판(粘土板)은 매우 귀중하다.
조각으로는 수사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비(法典碑) 상부의 부조(浮彫), 함무라비왕 두상(頭像), 마리에서 출토된 노래하는 여인의 좌상이, 벽화로는 마리 왕궁의 프레스코화 등이 꼽힌다. 바빌론 제1왕조 멸망 뒤의 바빌로니아는 끊임없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으로, 왕조 ·민족이 분립(分立)하여 항쟁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아시리아제국의 지배 후에 신바빌로니아(칼데아)시대가 성립하여 번영을 되찾았으나 그 존속은 1세기도 채 못되어, BC 538년 페르시아제국에 멸망되었다.
페르시아(메대, 바사는 페르시아의 히브리어 표기인듯 함)
이란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오리엔트의 대제국(BC 550~BC 330).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F嚆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가 수장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지방을 영유(領有)하여 안샨왕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현손 키루스 2세(재위 BC 559∼BC 529)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전조영(神殿造營)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그의 원정 중 마기승(僧) 가우마타는 그의 동생 바르디아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왕이 되고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였다. 캄비세스는 이 변고(變故)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도중 시리아에서 실의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캄비세스가 죽은 뒤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같은 일족(一族)인 다리우스 1세가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는 가우마타를 죽여 국내 여러 지방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하고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전국토를 20수주(數州)로 나눈 행정구획을 실시하여 각 주마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장관을 두었으며, 징세(徵稅)와 병역(兵役)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다. 이 사트라프제는 그 후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에서 답습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造營)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 km의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시(戰時)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諸國)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왕년의 지휘관 마르도니우스는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국세의 쇠미(衰微)가 뚜렷이 드러났다.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제위(帝位)를 빼앗으려 진공(進攻)해 왔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東進)하였다.
요원(燎原)의 불길과 같은 이 세력은 도처에서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으며, 다음해 다리우스는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제국의 멸망을 고하였다. 이 싸움 이후로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그리스(헬라)
'그리스'는 그리스어로는 헬라스 또는 엘라스, 라틴어로는 그라이키아(Graecia), 영어로는 그리스라고 한다. '희랍(希臘)'은 헬라스의 한역(漢譯)으로서 한국에서는 차자(借字)로 쓰였다. 고대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 ·종교 ·관습을 가진 민족으로서 자신들을 헬렌(그리스 민족의 先祖)의 자손이라 하여 헬레네스라 자칭하였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헬라스라고 불렀으며, 이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 하여 자신들과 구별하였다.
그리스인의 역사는 약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장구한 기간 중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고전고대로 총칭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초기에 속하는 BC 8~BC 4세기이다. 서양문화의 근간(根幹)의 하나인 그리스 문화가 독창적으로 크게 융성하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즉 세계 고대사 중에서도 예외적인 자유시민이 발생하여 그들의 자유로운 사색활동에 따라 독창력 발휘를 가능하게 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유시민의 활동도 그리스인 특유의 공동체적 소국가인 폴리스(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바랄 수 없던 일이었다.
오늘날 고대사 연구가 크게 진전됨에 따라 그리스에서도 폴리스 사회는 원시사회에서 직접 탄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전에도 고대 오리엔트 사회와 유사점이 있는 왕국의 병립시대(竝立時代)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오리엔트형의 고대관료제왕국(古代官僚制王國)의 탄생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그것이 멸망한 후에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무수한 폴리스의 병립시대가 나타났다.
그리스의 지형은 80% 이상이 산지여서 가경지(可耕地)라고는 산과 산 사이의 분지(盆地)가 고작이었고, 그 위에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중앙산맥이 다시 동서로 무수한 군소지맥(群小支脈)을 거느려 그야말로 각 지역간의 교통이 종횡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천연적인 강우에 의지하여 농사와 목축을 행한 지역으로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이나 중국의 황허강[黃河]유역처럼 치수(治水)와 관개사업(灌漑事業)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오리엔트형 통일국가의 성장은 당초부터 크게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수많은 소규모의 고립사회를 형성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립사회(孤立社會)의 형성은 육상활동 무대와 인구의 수용능력을 크게 제한하게 됨으로써 그리스인의 활동방향을 자연히 해상으로 돌려놓았다. 더욱이 그리스는 육로교통이 지극히 불편하였던 반면에, 해안선의 발달과 에게해(海)에서의 해상교통은 크게 발달하였다. BC 8∼BC 6세기에 걸쳐 활발하게 식민활동을 전개하여 지중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
로마사는 너무 방대해서 다 설명 할 수가 없네요..-_-;;
요약하자면.. 처음에는 초대 왕 로물루스와 그 뒤를 이어서 6명의왕(모두7명)이 다스리다가..
마지막 왕을 �아낸 후로 공화정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고요..
제정시대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네로, 칼리굴라 오현제등등의 황제가 있었죠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의 암살을 계기로 군인 황제가
난립하다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많이 난립 해있던 황제를 제거해 로마를 다시 재건해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죠
그후에 로마를 중심으로 하든 서로마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로 갈라지는데요
서로마는 멸망하고 동로마는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하고...
그 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로마는 너무 거두절미 해버렸네요..^^;;
출처 : 야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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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바빌로니아)>(메대.바사)>(헬라)>(로마)의 흥망성쇠를 알고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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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고대문명, 또는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
바빌론 제1왕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BC 4000년대 말 이곳 남부에 세운 수메르인(人)의 도시국가에서,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가 된 수준 높은 도시문명이 피어났다. BC 2350년 무렵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가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181년 동안의 아카드시대에 수메르의 문화는 셈족화되어 오리엔트의 각 지방에 전파되었다. 그 뒤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다가, BC 2050년 무렵 수메르인의 우르나무가 우르 제3왕조를 창시하고, 이 왕조는 5대 107년 만에 엘람인(人)에게 멸망된다.
BC 1830년경 이신 ·라르사와, 아모리인(人)의 수무아붐(재위 BC 1831~BC 1817)이 개창한 바빌론 제1왕조가 패권을 다투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는 숙적인 이신 ·라르사를 토벌하고 가까운 이웃을 평정,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고,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각지의 신전을 재흥하여 마르두크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재편성, 신상(神像)을 안치하였다. 운하를 파고 도로도 정비하여 무역을 융성하게 하였으므로 국력이 충실해져서,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또 법전(法典)을 반포하고 역(曆)을 통일하였으며, 아카드어(語)를 국어로 정하여 그 보급에 노력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바빌로니아의 세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 삼수일루나(재위 BC 1686~BC 1648) 때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차로 쇠약해져, BC 1530년 무렵 히타이트인(人)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를 나타내는 유적 ·유물은, 그 중심이 되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시대에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외로 적다. 마리 ·우르 등 도시유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마리에서 발견된 왕궁터와 2만 수천 매의 점토판(粘土板)은 매우 귀중하다.
조각으로는 수사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비(法典碑) 상부의 부조(浮彫), 함무라비왕 두상(頭像), 마리에서 출토된 노래하는 여인의 좌상이, 벽화로는 마리 왕궁의 프레스코화 등이 꼽힌다. 바빌론 제1왕조 멸망 뒤의 바빌로니아는 끊임없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으로, 왕조 ·민족이 분립(分立)하여 항쟁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아시리아제국의 지배 후에 신바빌로니아(칼데아)시대가 성립하여 번영을 되찾았으나 그 존속은 1세기도 채 못되어, BC 538년 페르시아제국에 멸망되었다.
페르시아(메대, 바사는 페르시아의 히브리어 표기인듯 함)
이란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오리엔트의 대제국(BC 550~BC 330).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F嚆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가 수장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지방을 영유(領有)하여 안샨왕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현손 키루스 2세(재위 BC 559∼BC 529)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전조영(神殿造營)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그의 원정 중 마기승(僧) 가우마타는 그의 동생 바르디아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왕이 되고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였다. 캄비세스는 이 변고(變故)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도중 시리아에서 실의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캄비세스가 죽은 뒤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같은 일족(一族)인 다리우스 1세가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는 가우마타를 죽여 국내 여러 지방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하고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전국토를 20수주(數州)로 나눈 행정구획을 실시하여 각 주마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장관을 두었으며, 징세(徵稅)와 병역(兵役)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다. 이 사트라프제는 그 후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에서 답습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造營)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 km의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시(戰時)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諸國)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왕년의 지휘관 마르도니우스는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국세의 쇠미(衰微)가 뚜렷이 드러났다.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제위(帝位)를 빼앗으려 진공(進攻)해 왔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東進)하였다.
요원(燎原)의 불길과 같은 이 세력은 도처에서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으며, 다음해 다리우스는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제국의 멸망을 고하였다. 이 싸움 이후로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그리스(헬라)
'그리스'는 그리스어로는 헬라스 또는 엘라스, 라틴어로는 그라이키아(Graecia), 영어로는 그리스라고 한다. '희랍(希臘)'은 헬라스의 한역(漢譯)으로서 한국에서는 차자(借字)로 쓰였다. 고대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 ·종교 ·관습을 가진 민족으로서 자신들을 헬렌(그리스 민족의 先祖)의 자손이라 하여 헬레네스라 자칭하였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헬라스라고 불렀으며, 이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 하여 자신들과 구별하였다.
그리스인의 역사는 약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장구한 기간 중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고전고대로 총칭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초기에 속하는 BC 8~BC 4세기이다. 서양문화의 근간(根幹)의 하나인 그리스 문화가 독창적으로 크게 융성하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즉 세계 고대사 중에서도 예외적인 자유시민이 발생하여 그들의 자유로운 사색활동에 따라 독창력 발휘를 가능하게 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유시민의 활동도 그리스인 특유의 공동체적 소국가인 폴리스(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바랄 수 없던 일이었다.
오늘날 고대사 연구가 크게 진전됨에 따라 그리스에서도 폴리스 사회는 원시사회에서 직접 탄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전에도 고대 오리엔트 사회와 유사점이 있는 왕국의 병립시대(竝立時代)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오리엔트형의 고대관료제왕국(古代官僚制王國)의 탄생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그것이 멸망한 후에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무수한 폴리스의 병립시대가 나타났다.
그리스의 지형은 80% 이상이 산지여서 가경지(可耕地)라고는 산과 산 사이의 분지(盆地)가 고작이었고, 그 위에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중앙산맥이 다시 동서로 무수한 군소지맥(群小支脈)을 거느려 그야말로 각 지역간의 교통이 종횡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천연적인 강우에 의지하여 농사와 목축을 행한 지역으로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이나 중국의 황허강[黃河]유역처럼 치수(治水)와 관개사업(灌漑事業)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오리엔트형 통일국가의 성장은 당초부터 크게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수많은 소규모의 고립사회를 형성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립사회(孤立社會)의 형성은 육상활동 무대와 인구의 수용능력을 크게 제한하게 됨으로써 그리스인의 활동방향을 자연히 해상으로 돌려놓았다. 더욱이 그리스는 육로교통이 지극히 불편하였던 반면에, 해안선의 발달과 에게해(海)에서의 해상교통은 크게 발달하였다. BC 8∼BC 6세기에 걸쳐 활발하게 식민활동을 전개하여 지중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
로마사는 너무 방대해서 다 설명 할 수가 없네요..-_-;;
요약하자면.. 처음에는 초대 왕 로물루스와 그 뒤를 이어서 6명의왕(모두7명)이 다스리다가..
마지막 왕을 �아낸 후로 공화정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고요..
제정시대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네로, 칼리굴라 오현제등등의 황제가 있었죠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의 암살을 계기로 군인 황제가
난립하다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많이 난립 해있던 황제를 제거해 로마를 다시 재건해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죠
그후에 로마를 중심으로 하든 서로마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로 갈라지는데요
서로마는 멸망하고 동로마는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하고...
그 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고대문명, 또는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
바빌론 제1왕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BC 4000년대 말 이곳 남부에 세운 수메르인(人)의 도시국가에서,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가 된 수준 높은 도시문명이 피어났다. BC 2350년 무렵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가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181년 동안의 아카드시대에 수메르의 문화는 셈족화되어 오리엔트의 각 지방에 전파되었다. 그 뒤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다가, BC 2050년 무렵 수메르인의 우르나무가 우르 제3왕조를 창시하고, 이 왕조는 5대 107년 만에 엘람인(人)에게 멸망된다.
BC 1830년경 이신 ·라르사와, 아모리인(人)의 수무아붐(재위 BC 1831~BC 1817)이 개창한 바빌론 제1왕조가 패권을 다투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는 숙적인 이신 ·라르사를 토벌하고 가까운 이웃을 평정,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고,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각지의 신전을 재흥하여 마르두크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재편성, 신상(神像)을 안치하였다. 운하를 파고 도로도 정비하여 무역을 융성하게 하였으므로 국력이 충실해져서,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또 법전(法典)을 반포하고 역(曆)을 통일하였으며, 아카드어(語)를 국어로 정하여 그 보급에 노력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바빌로니아의 세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 삼수일루나(재위 BC 1686~BC 1648) 때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차로 쇠약해져, BC 1530년 무렵 히타이트인(人)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를 나타내는 유적 ·유물은, 그 중심이 되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시대에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외로 적다. 마리 ·우르 등 도시유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마리에서 발견된 왕궁터와 2만 수천 매의 점토판(粘土板)은 매우 귀중하다.
조각으로는 수사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비(法典碑) 상부의 부조(浮彫), 함무라비왕 두상(頭像), 마리에서 출토된 노래하는 여인의 좌상이, 벽화로는 마리 왕궁의 프레스코화 등이 꼽힌다. 바빌론 제1왕조 멸망 뒤의 바빌로니아는 끊임없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으로, 왕조 ·민족이 분립(分立)하여 항쟁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아시리아제국의 지배 후에 신바빌로니아(칼데아)시대가 성립하여 번영을 되찾았으나 그 존속은 1세기도 채 못되어, BC 538년 페르시아제국에 멸망되었다.
페르시아(메대, 바사는 페르시아의 히브리어 표기인듯 함)
이란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오리엔트의 대제국(BC 550~BC 330).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F嚆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가 수장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지방을 영유(領有)하여 안샨왕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현손 키루스 2세(재위 BC 559∼BC 529)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전조영(神殿造營)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그의 원정 중 마기승(僧) 가우마타는 그의 동생 바르디아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왕이 되고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였다. 캄비세스는 이 변고(變故)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도중 시리아에서 실의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캄비세스가 죽은 뒤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같은 일족(一族)인 다리우스 1세가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는 가우마타를 죽여 국내 여러 지방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하고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전국토를 20수주(數州)로 나눈 행정구획을 실시하여 각 주마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장관을 두었으며, 징세(徵稅)와 병역(兵役)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다. 이 사트라프제는 그 후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에서 답습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造營)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 km의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시(戰時)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諸國)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왕년의 지휘관 마르도니우스는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국세의 쇠미(衰微)가 뚜렷이 드러났다.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제위(帝位)를 빼앗으려 진공(進攻)해 왔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東進)하였다.
요원(燎原)의 불길과 같은 이 세력은 도처에서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으며, 다음해 다리우스는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제국의 멸망을 고하였다. 이 싸움 이후로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그리스(헬라)
'그리스'는 그리스어로는 헬라스 또는 엘라스, 라틴어로는 그라이키아(Graecia), 영어로는 그리스라고 한다. '희랍(希臘)'은 헬라스의 한역(漢譯)으로서 한국에서는 차자(借字)로 쓰였다. 고대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 ·종교 ·관습을 가진 민족으로서 자신들을 헬렌(그리스 민족의 先祖)의 자손이라 하여 헬레네스라 자칭하였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헬라스라고 불렀으며, 이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 하여 자신들과 구별하였다.
그리스인의 역사는 약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장구한 기간 중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고전고대로 총칭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초기에 속하는 BC 8~BC 4세기이다. 서양문화의 근간(根幹)의 하나인 그리스 문화가 독창적으로 크게 융성하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즉 세계 고대사 중에서도 예외적인 자유시민이 발생하여 그들의 자유로운 사색활동에 따라 독창력 발휘를 가능하게 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유시민의 활동도 그리스인 특유의 공동체적 소국가인 폴리스(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바랄 수 없던 일이었다.
오늘날 고대사 연구가 크게 진전됨에 따라 그리스에서도 폴리스 사회는 원시사회에서 직접 탄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전에도 고대 오리엔트 사회와 유사점이 있는 왕국의 병립시대(竝立時代)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오리엔트형의 고대관료제왕국(古代官僚制王國)의 탄생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그것이 멸망한 후에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무수한 폴리스의 병립시대가 나타났다.
그리스의 지형은 80% 이상이 산지여서 가경지(可耕地)라고는 산과 산 사이의 분지(盆地)가 고작이었고, 그 위에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중앙산맥이 다시 동서로 무수한 군소지맥(群小支脈)을 거느려 그야말로 각 지역간의 교통이 종횡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천연적인 강우에 의지하여 농사와 목축을 행한 지역으로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이나 중국의 황허강[黃河]유역처럼 치수(治水)와 관개사업(灌漑事業)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오리엔트형 통일국가의 성장은 당초부터 크게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수많은 소규모의 고립사회를 형성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립사회(孤立社會)의 형성은 육상활동 무대와 인구의 수용능력을 크게 제한하게 됨으로써 그리스인의 활동방향을 자연히 해상으로 돌려놓았다. 더욱이 그리스는 육로교통이 지극히 불편하였던 반면에, 해안선의 발달과 에게해(海)에서의 해상교통은 크게 발달하였다. BC 8∼BC 6세기에 걸쳐 활발하게 식민활동을 전개하여 지중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
로마사는 너무 방대해서 다 설명 할 수가 없네요..-_-;;
요약하자면.. 처음에는 초대 왕 로물루스와 그 뒤를 이어서 6명의왕(모두7명)이 다스리다가..
마지막 왕을 �아낸 후로 공화정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고요..
제정시대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네로, 칼리굴라 오현제등등의 황제가 있었죠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의 암살을 계기로 군인 황제가
난립하다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많이 난립 해있던 황제를 제거해 로마를 다시 재건해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죠
그후에 로마를 중심으로 하든 서로마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로 갈라지는데요
서로마는 멸망하고 동로마는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하고...
그 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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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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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제국
하늘까지 닿으려던 탑과 영원한 번영을 꿈꾸던 황금성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일찍이 세계 4대 문명의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기원전 4천 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고 우르, 우르크, 라가시, 키시 등의 도시를 건설하여 도시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리던 사람들이다.
이후 북서쪽에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들이 들어와 통일국가를 건설했다가 수메르인들과 아카드인, 아모리인들의 왕국이 등장하며 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에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 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1왕조를 열면서부터였다. ‘고(古) 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이 왕국은 기원전 1600년경까지 남으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전체와 북으로 앗시리아를 포함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일대의 정치,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고 바빌로니아는 제6대 함무라비 왕(B.C.1792∼B.C.1750) 때 전성기를 맞는다. 함무라비 왕은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과학과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았고, 역법(曆法)을 통일시키는 한편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불리는 282조로 구성된 법전을 정비하여 바빌론을 명실상부한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바빌론의 수호신이었던 마르두크(Marduk) 신을 주신으로 하고 이슈타르(Ishtar) 여신과 탐무즈(Tammus)신을 섬기는 종교를 확립했으며 각지에 이들의 신전을 세워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마르두크는 수메르 신들 중에 주신(主神)의 자리를 획득하여 ‘벨(바알) 마르두크’라 불리는 국가적인 숭배 대상이 되었다.
함무라비 왕이 죽은 후 고 바빌로니아는 쇠퇴하여 기원전 1531년경 히타이트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이후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은 동북부 산악지대를 차지한 카사이트족에게 넘어간다. 400여 년간의 카사이트 지배 후 도시국가 가운데 아시리아가 점점 세력을 얻는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220년경, 바빌론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점점 판도를 확장해갔다. 강성하고도 잔학하기로 유명했던 아시리아는 군사력을 길러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가 자립하여 제국으로 발전했다. 강대한 아시리아는 니네베(Nineveh)를 수도로 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고 한때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까지 함락시켰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에서 임명한 부왕(副王)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신 바빌로니아
기원전 626년,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아람계 칼데아 부족의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론에 입성하여 바빌로니아 왕조를 열었다. 역사에서는 이 왕조를 고 바빌로니아와 구분하여 신 바빌로니아라고 하며, 칼데아 부족이 세웠으므로 칼데아 왕조라고도 한다. 나보폴라사르는 메디아와 연합하여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철저히 파괴해 버린다. 나보폴라사르의 후계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B.C.605∼562, 개역성서의 ‘느부갓네살’)의 치세는 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였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을 바빌론에 유폐시켰다. 고대 함무라비 왕 이래 몰락했던 바빌론은 다시 부흥하여 명실공히 세계 상업의 중심도시로서 성장, 유래 없는 번영을 누린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 성을 중건하였다. 왕은 수도 바빌론에 주신(主神) 마르두크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의 신전과 제단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당시 문서와 바빌론 성 발굴 결과를 종합해 보면 바빌론 안에는 주신 마르두크 신전 55개를 포함하여 일천 개가 넘는 신전이 있었고, 이슈타르 여신을 위한 제단만도 180개가 있었다. 마르두크 신전을 지을 때 그에 딸린 거대한 지구라트도 함께 만들어졌다. 바빌론 시의 중심부에 있는 마르두크 신의 성역 안에 화려한 청색 벽돌을 구워 탑을 쌓아올렸는데, 고대 전설 속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이 ‘바벨탑’은 수세기 전 아시리아인들이 파손한 것을 신 바빌로니아 왕조를 개창한 나보폴라사르 왕이 기초를 쌓고, 그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가 완성하여 재건한 것이다. 탑은 약 90미터의 높이로 장려하게 건립되었지만 현재 지상에 그 토대의 윤곽만 남아 있다. 또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컫는 ‘공중정원’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번영을 구가하던 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사후 급속도로 몰락한다. 이후 3대째까지 왕들은 짧은 치세 후 암살되고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 성을 함락시킨다. 신 바빌로니아의 1세기도 채 되지 못한 짧은 기간의 번영은 이로써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페르시아 제국 초기만 하더라도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서 번영을 이었으나 기원전 482년,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성채와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을 복구하고 대제국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진행했으나 8년 후, 알렉산더 대왕이 네부카드네자르의 궁에서 사망함으로써 계획은 무산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바빌론은 1896년 로베르트 콜데바이 등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까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다.
바빌로니아의 유적
<바벨탑>
성서에서는 바벨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바벨탑의 상상도 (바빌론 박물관 소장)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장 1~9절)
역사학자들은 성서 속의 바벨탑을 지구라트의 하나로 보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일대와 현재 이란 땅에 속하는 엘람 지역에는 ‘지구라트’(ziggurat)라는 거대한 탑이 도시마다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시대부터 기원전 500년경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지구라트가 세워졌다. 지구라트는 이 지역의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수호신들을 위해 지구라트를 최소 하나씩은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지구라트 가운데 ‘하늘에 닿을 만큼’의 높이로 쌓아올린 최고의 탑은 신 바빌로니아 때 재건된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라 일컫는 탑이다. 이 탑은 과거 몇 차례에 걸쳐서 지어졌다가 무너지고, 최종적으로는 나보폴라사르와 그 아들 네부카드네자르가 쌓아올렸다.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는 실제로 주신 마르두크를 위해 “하늘 끝까지”, “하늘과 그 크기를 겨룰 때까지” 높이 쌓겠다고 호언했다. 이를 위해 불에 구운 벽돌 8500만 개가 건축에 사용되었다. 문헌과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탑의 정사각형 기저층은 가로 세로 90미터 가량이었으며 탑의 전체 높이도 90미터 가량이었다. 제1층은 높이 33미터, 2층은 18미터, 3∼6층은 각기 6미터였고 탑의 꼭대기에는 15미터 높이의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의 벽은 황금으로 꾸며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꼭대기의 신전은 마르두크를 위한 것으로 마르두크가 쉬어 가는 장소로 생각되어 여사제 한 명만에 그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 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에도 마르두크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는 순금의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이 탑을 재건하기 위해 제국 안의 온갖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했으나 신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1세기도 못 되어 끝나버렸으므로,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성역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반란으로 인해 바빌론의 탑과 성채, 신전은 벽돌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 때 금으로 만든 마르두크 신상도 녹아 없어졌다.
<바빌론 성과 공중정원>
바빌론 성은 무너지고 황폐해진 상태로 이천여 년을 지내왔다. 1899년부터 1917년까지 이를 복원하여 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역사를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콜데바이를 비롯한 독일 고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도시 바빌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 성곽 중 외곽 성벽은 양변이 1800미터와 1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헤로도투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했는데 콜데바이의 발굴로 이 사실은 곧 입증되었다. 7미터 두께의 진흙 벽돌 성벽이 발굴되자 곧 바깥쪽으로 12미터 가량 바깥에 7.8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발굴되었다. 그 바깥에는 다시 3.3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의 바깥으로는 도랑(호)이 파여 있어서 유사시에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27미터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벽과 벽 사이는 정상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어 실제로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바깥쪽 성벽은 전체 길이가 18킬로미터나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에 인접하였다. 강에는 120미터 길이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콜데바이 일행은 ‘행진 대로’라고 이름 붙인 폭 20미터 정도의 넓은 포장도로도 발굴했다. 이 길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위대한 마르두크 신의 행렬을 위해 바빌론의 도로를 포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푸른 타일을 붙인 벽이 있었고 그 벽면에는 2미터 길이의 사자 120마리가 새겨진 부조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 사자는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어 수많은 사자상이 남아 있다. ‘행진 대로’는 도시의 외곽 성벽에서부터 내성 입구인 ‘이슈타르의 문’까지 이어지며 용과 기괴한 짐승으로 장식된 이슈타르의 문을 빠져나가면 ‘에사길라’라는 마르두크의 성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성역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중건한 마르두크의 사원과 ‘에테메난키’로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었던 것이다.
에사길라의 북쪽에는 왕궁이 있었고, 왕궁의 동북쪽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있었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던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던 지구라트의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평방미터에 불과했으나 전체 높이는 105미터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였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 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놓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원에서는 펌프를 이용하여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도록 아치형의 두꺼운 천장을 가진 방을 많이 만들었으며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궁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가진 방을 두꺼운 벽으로 갈라 일곱 개씩 두 줄로 줄짓게 하고 그 옥상의 테라스를 안뜰 모양으로 둘러쌌으며 테라스 위에 계단 모양으로 흙을 북돋아 여러 가지 초목을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중정원은 일명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불리는데, 전설적인 여왕 세미라미스가 만들었다는 일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이세가 메디아에서 시집온 왕비 아미티스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메디아의 산을 연상시키는 공중정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발굴된 성벽과 자료들은 바빌론이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였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입증한다. 이 바빌론 성은 지구상에 알려진 고대의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장려한 성이었다. 헤로도투스는 바빌론을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도시’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 난공불락의 요새도 내란에는 견디지 못하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바빌로니아의 오늘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이 지역은 그후 11세기에 걸쳐 페르시아와 그리스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서기 637년, 회교도로 개종한 아라비아인들이 조로아스터 교도인 페르시아 통치자들을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몰아내었는데 이 전투를 '카디시야트 전투'라고 한다. 이후 이슬람 정권은 모하메드 사후 승계 문제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열하여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694년, 우마이야 왕조가 임명한 알 하자드 총독의 철권통치로 평화가 깃든다.
이후 맞이한 아바시드 칼리프 시대(750∼1258년)는 회교문화의 절정기였다. 그후 9세기 말에 튀르크(터키)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몽고가 중원을 차지한 이후에는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가 이끄는 몽고군이 바그다드를 침공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16세기에 들어 다시 오스만 튀르크 정권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들 터키인들의 통치는 1917년까지 계속된다.
1917년, 1차대전의 전승국인 영국이 이 지역을 위임통치 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영국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21년, 메카 하심 가(家)의 파이잘을 초대 국왕으로 임명하여 ‘이라크 왕국’이라는 입헌군주국을 탄생시켰다. 이라크 왕국은 1932년 영국의 간섭을 떨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파이잘 국왕의 사후,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1936년 시드키 장군에 의해 아랍 역사상 첫 번째 쿠데타가 이라크 왕국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1958년,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이라크 왕정은 무너지고 ‘이라크 공화국’이 성립했다. 그러나 5년 후인 1963년, 카심 정권은 아마드 하산 알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 같은 바트당(아랍어로 ‘부흥’을 뜻하는 사회주의 정당) 소속 장교들에 의해 다시 무너진다.
현재의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는 사담 후세인은 1970년대에 들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장기집권의 독재자다. 그는 1979년,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미 그 전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후세인이 가장 존경하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네부카드네자르 이세. 1978년부터 후세인은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재건하려는 포부를 갖고 수백만 장의 벽돌을 구웠다. 벽돌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론이 사담 후세인의 시대에 재현되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후세인은 “나는 국민에게 과거의 영광을 돌려주기 위해 바빌론을 다시 건설하고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건립했던 궁전의 벽돌을 다시 쌓았다”고 자부했다. 바빌론 유적지는 이라크 최대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후세인은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돌려주기 위해 무력도 불사했다. 그는 집권 직후 이라크 내 소수민족인 쿠르드족들과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1974년 쿠르드족 과격파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 이후 쿠르드족들을 철저하게 탄압, 소탕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쿠르드족들이 이란 등 인근 국가로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다. 쿠르드족들은 현재까지도 이라크에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1980년, 이란과 시작한 전쟁은 후세인의 야망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다. 후세인은 대(對) 이란 전쟁을 아랍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낸 ‘카디시야트’ 전투에 비유했다. 후세인은 범아랍주의를 표방하면서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로니아 제국처럼 바빌로니아의 옛 영토에 단일국가 세우기를 바랐던 것이다.
승자 없는 지루한 이란-이라크 전쟁은 양국이 유엔의 중재를 받아들인 1988년에 휴전하여 1990년의 평화협상으로 겨우 끝났다. 오랜 전쟁으로 이라크 인구 가운데 12만 명 가량이 사망하고 30만 명 가량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휴전 직후 이라크는 내부의 쿠르드족과도 강도 높은 내전을 치렀다. 게다가 전쟁 말기에 이라크는 700억 달러 가량의 외채를 지고 있었다. 경제난은 가중되는 반면 국제 원유가가 하락하여 경제부흥이 지연되자 후세인은 인근의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국가에 부채를 탕감해 줄 것과 원유 생산을 줄여 유가를 안정시킬 것을 요구했다.
요구가 수락되지 않자 1990년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을 시작했다. 전쟁의 명분은 역사적으로 쿠웨이트가 이라크 영토였으므로 1962년 영국이 석유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쿠웨이트를 분리, 독립시킨 것은 부당했다는 것과, 이라크와의 접경 지역에서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석유를 빼돌렸으며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정한 쿼터량을 초과하여 원유를 생산했다는 것이었다. ‘걸프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는 미국·영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이 유엔의 지원을 받아 참전하였다. 이라크의 군사 시설, 경제 시설은 다국적군의 공중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1991년 2월에 다국적군은 지상군을 투입하여 쿠웨이트를 수복했다. 걸프전에서 완패한 이라크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경제제재로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현재 후세인 정권은 점차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고 있으며 미국을 제외한 서방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랜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이 과연 그가 꿈꾸던 바빌로니아 제국을 진정으로 잊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이라크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영토가 아니라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해제되는 것이다. 화려하기 그지 없던 ‘황금성’ 바빌론이 현재는 경제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
(가져온 곳 : http://www.magazinegv.com/)
하늘까지 닿으려던 탑과 영원한 번영을 꿈꾸던 황금성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일찍이 세계 4대 문명의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기원전 4천 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고 우르, 우르크, 라가시, 키시 등의 도시를 건설하여 도시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리던 사람들이다.
이후 북서쪽에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들이 들어와 통일국가를 건설했다가 수메르인들과 아카드인, 아모리인들의 왕국이 등장하며 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에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 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1왕조를 열면서부터였다. ‘고(古) 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이 왕국은 기원전 1600년경까지 남으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전체와 북으로 앗시리아를 포함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일대의 정치,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고 바빌로니아는 제6대 함무라비 왕(B.C.1792∼B.C.1750) 때 전성기를 맞는다. 함무라비 왕은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과학과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았고, 역법(曆法)을 통일시키는 한편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불리는 282조로 구성된 법전을 정비하여 바빌론을 명실상부한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바빌론의 수호신이었던 마르두크(Marduk) 신을 주신으로 하고 이슈타르(Ishtar) 여신과 탐무즈(Tammus)신을 섬기는 종교를 확립했으며 각지에 이들의 신전을 세워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마르두크는 수메르 신들 중에 주신(主神)의 자리를 획득하여 ‘벨(바알) 마르두크’라 불리는 국가적인 숭배 대상이 되었다.
함무라비 왕이 죽은 후 고 바빌로니아는 쇠퇴하여 기원전 1531년경 히타이트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이후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은 동북부 산악지대를 차지한 카사이트족에게 넘어간다. 400여 년간의 카사이트 지배 후 도시국가 가운데 아시리아가 점점 세력을 얻는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220년경, 바빌론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점점 판도를 확장해갔다. 강성하고도 잔학하기로 유명했던 아시리아는 군사력을 길러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가 자립하여 제국으로 발전했다. 강대한 아시리아는 니네베(Nineveh)를 수도로 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고 한때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까지 함락시켰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에서 임명한 부왕(副王)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신 바빌로니아
기원전 626년,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아람계 칼데아 부족의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론에 입성하여 바빌로니아 왕조를 열었다. 역사에서는 이 왕조를 고 바빌로니아와 구분하여 신 바빌로니아라고 하며, 칼데아 부족이 세웠으므로 칼데아 왕조라고도 한다. 나보폴라사르는 메디아와 연합하여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철저히 파괴해 버린다. 나보폴라사르의 후계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B.C.605∼562, 개역성서의 ‘느부갓네살’)의 치세는 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였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을 바빌론에 유폐시켰다. 고대 함무라비 왕 이래 몰락했던 바빌론은 다시 부흥하여 명실공히 세계 상업의 중심도시로서 성장, 유래 없는 번영을 누린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 성을 중건하였다. 왕은 수도 바빌론에 주신(主神) 마르두크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의 신전과 제단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당시 문서와 바빌론 성 발굴 결과를 종합해 보면 바빌론 안에는 주신 마르두크 신전 55개를 포함하여 일천 개가 넘는 신전이 있었고, 이슈타르 여신을 위한 제단만도 180개가 있었다. 마르두크 신전을 지을 때 그에 딸린 거대한 지구라트도 함께 만들어졌다. 바빌론 시의 중심부에 있는 마르두크 신의 성역 안에 화려한 청색 벽돌을 구워 탑을 쌓아올렸는데, 고대 전설 속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이 ‘바벨탑’은 수세기 전 아시리아인들이 파손한 것을 신 바빌로니아 왕조를 개창한 나보폴라사르 왕이 기초를 쌓고, 그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가 완성하여 재건한 것이다. 탑은 약 90미터의 높이로 장려하게 건립되었지만 현재 지상에 그 토대의 윤곽만 남아 있다. 또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컫는 ‘공중정원’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번영을 구가하던 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사후 급속도로 몰락한다. 이후 3대째까지 왕들은 짧은 치세 후 암살되고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 성을 함락시킨다. 신 바빌로니아의 1세기도 채 되지 못한 짧은 기간의 번영은 이로써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페르시아 제국 초기만 하더라도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서 번영을 이었으나 기원전 482년,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성채와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을 복구하고 대제국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진행했으나 8년 후, 알렉산더 대왕이 네부카드네자르의 궁에서 사망함으로써 계획은 무산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바빌론은 1896년 로베르트 콜데바이 등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까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다.
바빌로니아의 유적
<바벨탑>
성서에서는 바벨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바벨탑의 상상도 (바빌론 박물관 소장)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장 1~9절)
역사학자들은 성서 속의 바벨탑을 지구라트의 하나로 보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일대와 현재 이란 땅에 속하는 엘람 지역에는 ‘지구라트’(ziggurat)라는 거대한 탑이 도시마다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시대부터 기원전 500년경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지구라트가 세워졌다. 지구라트는 이 지역의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수호신들을 위해 지구라트를 최소 하나씩은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지구라트 가운데 ‘하늘에 닿을 만큼’의 높이로 쌓아올린 최고의 탑은 신 바빌로니아 때 재건된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라 일컫는 탑이다. 이 탑은 과거 몇 차례에 걸쳐서 지어졌다가 무너지고, 최종적으로는 나보폴라사르와 그 아들 네부카드네자르가 쌓아올렸다.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는 실제로 주신 마르두크를 위해 “하늘 끝까지”, “하늘과 그 크기를 겨룰 때까지” 높이 쌓겠다고 호언했다. 이를 위해 불에 구운 벽돌 8500만 개가 건축에 사용되었다. 문헌과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탑의 정사각형 기저층은 가로 세로 90미터 가량이었으며 탑의 전체 높이도 90미터 가량이었다. 제1층은 높이 33미터, 2층은 18미터, 3∼6층은 각기 6미터였고 탑의 꼭대기에는 15미터 높이의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의 벽은 황금으로 꾸며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꼭대기의 신전은 마르두크를 위한 것으로 마르두크가 쉬어 가는 장소로 생각되어 여사제 한 명만에 그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 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에도 마르두크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는 순금의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이 탑을 재건하기 위해 제국 안의 온갖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했으나 신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1세기도 못 되어 끝나버렸으므로,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성역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반란으로 인해 바빌론의 탑과 성채, 신전은 벽돌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 때 금으로 만든 마르두크 신상도 녹아 없어졌다.
<바빌론 성과 공중정원>
바빌론 성은 무너지고 황폐해진 상태로 이천여 년을 지내왔다. 1899년부터 1917년까지 이를 복원하여 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역사를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콜데바이를 비롯한 독일 고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도시 바빌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 성곽 중 외곽 성벽은 양변이 1800미터와 1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헤로도투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했는데 콜데바이의 발굴로 이 사실은 곧 입증되었다. 7미터 두께의 진흙 벽돌 성벽이 발굴되자 곧 바깥쪽으로 12미터 가량 바깥에 7.8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발굴되었다. 그 바깥에는 다시 3.3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의 바깥으로는 도랑(호)이 파여 있어서 유사시에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27미터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벽과 벽 사이는 정상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어 실제로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바깥쪽 성벽은 전체 길이가 18킬로미터나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에 인접하였다. 강에는 120미터 길이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콜데바이 일행은 ‘행진 대로’라고 이름 붙인 폭 20미터 정도의 넓은 포장도로도 발굴했다. 이 길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위대한 마르두크 신의 행렬을 위해 바빌론의 도로를 포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푸른 타일을 붙인 벽이 있었고 그 벽면에는 2미터 길이의 사자 120마리가 새겨진 부조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 사자는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어 수많은 사자상이 남아 있다. ‘행진 대로’는 도시의 외곽 성벽에서부터 내성 입구인 ‘이슈타르의 문’까지 이어지며 용과 기괴한 짐승으로 장식된 이슈타르의 문을 빠져나가면 ‘에사길라’라는 마르두크의 성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성역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중건한 마르두크의 사원과 ‘에테메난키’로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었던 것이다.
에사길라의 북쪽에는 왕궁이 있었고, 왕궁의 동북쪽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있었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던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던 지구라트의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평방미터에 불과했으나 전체 높이는 105미터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였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 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놓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원에서는 펌프를 이용하여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도록 아치형의 두꺼운 천장을 가진 방을 많이 만들었으며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궁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가진 방을 두꺼운 벽으로 갈라 일곱 개씩 두 줄로 줄짓게 하고 그 옥상의 테라스를 안뜰 모양으로 둘러쌌으며 테라스 위에 계단 모양으로 흙을 북돋아 여러 가지 초목을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중정원은 일명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불리는데, 전설적인 여왕 세미라미스가 만들었다는 일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이세가 메디아에서 시집온 왕비 아미티스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메디아의 산을 연상시키는 공중정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발굴된 성벽과 자료들은 바빌론이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였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입증한다. 이 바빌론 성은 지구상에 알려진 고대의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장려한 성이었다. 헤로도투스는 바빌론을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도시’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 난공불락의 요새도 내란에는 견디지 못하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바빌로니아의 오늘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이 지역은 그후 11세기에 걸쳐 페르시아와 그리스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서기 637년, 회교도로 개종한 아라비아인들이 조로아스터 교도인 페르시아 통치자들을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몰아내었는데 이 전투를 '카디시야트 전투'라고 한다. 이후 이슬람 정권은 모하메드 사후 승계 문제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열하여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694년, 우마이야 왕조가 임명한 알 하자드 총독의 철권통치로 평화가 깃든다.
이후 맞이한 아바시드 칼리프 시대(750∼1258년)는 회교문화의 절정기였다. 그후 9세기 말에 튀르크(터키)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몽고가 중원을 차지한 이후에는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가 이끄는 몽고군이 바그다드를 침공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16세기에 들어 다시 오스만 튀르크 정권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들 터키인들의 통치는 1917년까지 계속된다.
1917년, 1차대전의 전승국인 영국이 이 지역을 위임통치 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영국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21년, 메카 하심 가(家)의 파이잘을 초대 국왕으로 임명하여 ‘이라크 왕국’이라는 입헌군주국을 탄생시켰다. 이라크 왕국은 1932년 영국의 간섭을 떨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파이잘 국왕의 사후,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1936년 시드키 장군에 의해 아랍 역사상 첫 번째 쿠데타가 이라크 왕국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1958년,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이라크 왕정은 무너지고 ‘이라크 공화국’이 성립했다. 그러나 5년 후인 1963년, 카심 정권은 아마드 하산 알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 같은 바트당(아랍어로 ‘부흥’을 뜻하는 사회주의 정당) 소속 장교들에 의해 다시 무너진다.
현재의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는 사담 후세인은 1970년대에 들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장기집권의 독재자다. 그는 1979년,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미 그 전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후세인이 가장 존경하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네부카드네자르 이세. 1978년부터 후세인은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재건하려는 포부를 갖고 수백만 장의 벽돌을 구웠다. 벽돌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론이 사담 후세인의 시대에 재현되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후세인은 “나는 국민에게 과거의 영광을 돌려주기 위해 바빌론을 다시 건설하고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건립했던 궁전의 벽돌을 다시 쌓았다”고 자부했다. 바빌론 유적지는 이라크 최대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후세인은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돌려주기 위해 무력도 불사했다. 그는 집권 직후 이라크 내 소수민족인 쿠르드족들과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1974년 쿠르드족 과격파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 이후 쿠르드족들을 철저하게 탄압, 소탕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쿠르드족들이 이란 등 인근 국가로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다. 쿠르드족들은 현재까지도 이라크에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1980년, 이란과 시작한 전쟁은 후세인의 야망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다. 후세인은 대(對) 이란 전쟁을 아랍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낸 ‘카디시야트’ 전투에 비유했다. 후세인은 범아랍주의를 표방하면서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로니아 제국처럼 바빌로니아의 옛 영토에 단일국가 세우기를 바랐던 것이다.
승자 없는 지루한 이란-이라크 전쟁은 양국이 유엔의 중재를 받아들인 1988년에 휴전하여 1990년의 평화협상으로 겨우 끝났다. 오랜 전쟁으로 이라크 인구 가운데 12만 명 가량이 사망하고 30만 명 가량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휴전 직후 이라크는 내부의 쿠르드족과도 강도 높은 내전을 치렀다. 게다가 전쟁 말기에 이라크는 700억 달러 가량의 외채를 지고 있었다. 경제난은 가중되는 반면 국제 원유가가 하락하여 경제부흥이 지연되자 후세인은 인근의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국가에 부채를 탕감해 줄 것과 원유 생산을 줄여 유가를 안정시킬 것을 요구했다.
요구가 수락되지 않자 1990년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을 시작했다. 전쟁의 명분은 역사적으로 쿠웨이트가 이라크 영토였으므로 1962년 영국이 석유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쿠웨이트를 분리, 독립시킨 것은 부당했다는 것과, 이라크와의 접경 지역에서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석유를 빼돌렸으며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정한 쿼터량을 초과하여 원유를 생산했다는 것이었다. ‘걸프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는 미국·영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이 유엔의 지원을 받아 참전하였다. 이라크의 군사 시설, 경제 시설은 다국적군의 공중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1991년 2월에 다국적군은 지상군을 투입하여 쿠웨이트를 수복했다. 걸프전에서 완패한 이라크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경제제재로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현재 후세인 정권은 점차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고 있으며 미국을 제외한 서방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랜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이 과연 그가 꿈꾸던 바빌로니아 제국을 진정으로 잊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이라크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영토가 아니라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해제되는 것이다. 화려하기 그지 없던 ‘황금성’ 바빌론이 현재는 경제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
(가져온 곳 : http://www.magazineg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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