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속의 성지순례―⑵요르단 예라시―얍복강] 찬란했던 ‘영광의 흔적’
[성경속의 성지순례―⑵요르단 예라시―얍복강] 찬란했던 ‘영광의 흔적’
기원전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아인이 이 일대를 통치,강력한 국가로 떠올랐던 요르단은 다른 중동국가들처럼 로마와 오스만 투르크의 오랜 지배를 받다 1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다. 1967년 6일전쟁으로 나라의 40%에 달하는 웨스트 뱅크(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빼앗겨 중요한 관광수입원을 잃은 요르단은 전체인구 500만 중 90% 이상이 회교도다.그나마 10%쯤이 기독교인이어서 다른 중동국가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사해가 요르단을 감싸안듯 국경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7시간쯤 늦은 이곳은 사막지대라 일교차와 계절별 날씨 차이가 심하다. 1∼3월이 우기로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가 이어진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는 “선교활동에 대한 많은 제약과 뚜렷한 열매를 원하는 국내 후원교회 사이에서 어려움이 많다”며 “신앙을 관리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며 선교는 이들과 친해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예라시=암만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로 1시간쯤 걸리는 예라시는 로마시대에 ‘게라사(거라사)’로 불렸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은 돼지떼 사건의 게라사는 이곳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10개 위성도시(Decapolis)의 하나로 보석 비단 상아 등의 교역이 활발히 이뤄진 대상들의 경유지였다.
예라시는 전체 규모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유적지로 알려지고 있다. BC 20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초를 세운 도시로 BC 63년에 로마령이 됐다. 1∼2세기가 전성기였다.
726년에 지진에 의해 폐허가 된 이래 묻혀져 있었으나 1806년 발견돼 1920년부터 활발하게 발굴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거의 원형이 복구됐다. 입구에는 12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헤드리안 장군을 기념한 13m 높이의 개선문과 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둥그런 광장,5000석 규모의 로마식 극장,대열주 도로,제우스·아르테미스 신전,비잔틴교회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도 공연이 열린다는 극장 무대에서 일행이 ‘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자 음색이 맑게 공명되며 객석으로 울려퍼졌다. 공명까지 염두에 둔 2000년 전의 건축기술이 놀랍기만 했다.
성경에 이곳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어도 6세기쯤의 14개 기독교 교회터가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융성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주도로를 중심으로 수천개의 돌기둥과 갖가지 유적이 늘어서 있어 당시의 찬란했던 문화를 웅변해주고 있다. 주도로를 걸으며 세상의 그 어떤 영화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얍복강=성경 창세기 32장 22∼32절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나루를 건널새”로 시작한다. 야곱과 천사가 씨름한 성경속의 이 사건은 설교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소재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그 간구를 뿌리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이 사건을 통해 야곱은 자아가 깨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서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이스라엘로 개명받아 인본주의적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일행이 버스로 예라시를 향하다 잠시 멈추고 바라본 얍복강은 기대와 달리 너무 초라했다. 더구나 어디서 폐수룰 뿜어냈는지 강물은 허연 거품으로 뒤덮여 흘러가고 있었다. 강줄기에 따라 폭이 변하지만 차로 옆에 손쉽게 세운 곳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굴곡이 심한 얍복강은 전장이 96㎞며 대부분 협곡을 이루어 자연경계를 만들고 길르앗을 남북으로 나눈다. 얍복강을 뒤로 하며 야곱처럼 끝까지 버티면서 씨름하는 신앙이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했다. <후원: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대한항공>
암만=김무정기자 moojeong@kmib.co.kr
<국민일보>
기원전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아인이 이 일대를 통치,강력한 국가로 떠올랐던 요르단은 다른 중동국가들처럼 로마와 오스만 투르크의 오랜 지배를 받다 1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다. 1967년 6일전쟁으로 나라의 40%에 달하는 웨스트 뱅크(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빼앗겨 중요한 관광수입원을 잃은 요르단은 전체인구 500만 중 90% 이상이 회교도다.그나마 10%쯤이 기독교인이어서 다른 중동국가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사해가 요르단을 감싸안듯 국경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7시간쯤 늦은 이곳은 사막지대라 일교차와 계절별 날씨 차이가 심하다. 1∼3월이 우기로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가 이어진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는 “선교활동에 대한 많은 제약과 뚜렷한 열매를 원하는 국내 후원교회 사이에서 어려움이 많다”며 “신앙을 관리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며 선교는 이들과 친해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예라시=암만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로 1시간쯤 걸리는 예라시는 로마시대에 ‘게라사(거라사)’로 불렸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은 돼지떼 사건의 게라사는 이곳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10개 위성도시(Decapolis)의 하나로 보석 비단 상아 등의 교역이 활발히 이뤄진 대상들의 경유지였다.
예라시는 전체 규모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유적지로 알려지고 있다. BC 20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초를 세운 도시로 BC 63년에 로마령이 됐다. 1∼2세기가 전성기였다.
726년에 지진에 의해 폐허가 된 이래 묻혀져 있었으나 1806년 발견돼 1920년부터 활발하게 발굴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거의 원형이 복구됐다. 입구에는 12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헤드리안 장군을 기념한 13m 높이의 개선문과 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둥그런 광장,5000석 규모의 로마식 극장,대열주 도로,제우스·아르테미스 신전,비잔틴교회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도 공연이 열린다는 극장 무대에서 일행이 ‘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자 음색이 맑게 공명되며 객석으로 울려퍼졌다. 공명까지 염두에 둔 2000년 전의 건축기술이 놀랍기만 했다.
성경에 이곳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어도 6세기쯤의 14개 기독교 교회터가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융성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주도로를 중심으로 수천개의 돌기둥과 갖가지 유적이 늘어서 있어 당시의 찬란했던 문화를 웅변해주고 있다. 주도로를 걸으며 세상의 그 어떤 영화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얍복강=성경 창세기 32장 22∼32절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나루를 건널새”로 시작한다. 야곱과 천사가 씨름한 성경속의 이 사건은 설교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소재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그 간구를 뿌리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이 사건을 통해 야곱은 자아가 깨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서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이스라엘로 개명받아 인본주의적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일행이 버스로 예라시를 향하다 잠시 멈추고 바라본 얍복강은 기대와 달리 너무 초라했다. 더구나 어디서 폐수룰 뿜어냈는지 강물은 허연 거품으로 뒤덮여 흘러가고 있었다. 강줄기에 따라 폭이 변하지만 차로 옆에 손쉽게 세운 곳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굴곡이 심한 얍복강은 전장이 96㎞며 대부분 협곡을 이루어 자연경계를 만들고 길르앗을 남북으로 나눈다. 얍복강을 뒤로 하며 야곱처럼 끝까지 버티면서 씨름하는 신앙이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했다. <후원: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대한항공>
암만=김무정기자 moojeong@kmib.co.kr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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