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족장(아담,가인과 아벨, 에녹 니므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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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아담과 하와 <창세기 1-3장> 1. 아담의 창조 우리가 인류의 창조를 생각할 때에 중요한 말은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사실과 또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기에 그 이름을 아담 이라고 했다. 아담이란 그 말의 본 뜻은 [붉은 것]이란 뜻과 동시에 [흙](땅)이란 뜻이 있다. 이처럼 사람은 흙으로 되었고 그 빛갈이 붉기 때문에 아담이라고 부르게 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같이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그릇에 불과 하지만 다른 피조물과 달리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다른 생물들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차이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을 창조하실 때는 오직 [말씀으로] 하셨다(창1:24). 그러나 아담을 창조하실 때는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담 그 한사람을 상대로 하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그 개인을 상대로 했으나 다른 동물들은 그 전체의 종족을 상대로 했다. 인간이 받은 그 생기는 곧 인간의 영혼이다 혹 어떤 사람은 묻기를 "하와는 하나님의 생기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의 기록대로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지어졌을 뿐이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영혼이 빠진 것은 아니다. 하와의 영혼은 아담의 영혼에 포함이 된다. 고전 11:8에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하와의 영혼이 아담의 영혼에 포함됨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의 영혼이 그에게 포함되어 있음과 같다. 2. 아담의 타락 그처럼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지어진 아담은 타락하게 되었다. "나의 깨달은 것은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7:29) 하신 말씀과 같이 아담과 하와는 정직하게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그만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타락의 동기가 무엇인가?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창2:17) 하신 말씀 보다는 오히려 뱀의 간사한 말,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창3:4)는 그것을 더 믿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는 인간들의 큰 비극의 근원이 되고 만 것이었다. (2) 교만한 마음이 싹트게 되었다. 하나님을 우러러 사모하며 예배할 생각 보다는 하나님과 동등히 되기를 원했다. 무서운 교만이다. (3) 만족함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창1:29,30). 그러나 오직 하나만을 금했다.(창2:17).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까지 탐냈으니 이 어찌 슬픈일이 아니겠는가. 마침 그들의 탐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죄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그의 후손된 인간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하바국 3:2)는 말씀 그대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3. 하나님의 긍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베풀은 긍휼은 무엇이며 은혜는 무엇인가.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1) 범죄한 저들을 찾아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8, 21). 그 가죽 옷은 피흘린 구속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이다. 그 피흘린 제물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피흘린 제물은 곧 오실 그리 스도의 예표이다. 범죄한 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속 죄를 통하여 구원하여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였다. (2)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받게 되었으나 자식을 낳게된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창3:16). 더구나 그는 "모든 신자의 어미가 되리라"(창3:20)고 했으니 범죄한 여성을 특별히 권고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3) 또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3:23)하셨다는데 비록 그들이 에덴에서는 쫓겨 났으나 땅을 갈아 지상의 문화를 건설하게 되었으니 모든 문화는 하나님 께서 우리 인류에게 허락하여 주신 은혜이다. (4) 마침내 마귀를 이기고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약속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리라"(창3:15)하심은 장차 나타날 그리 스도를 통하여 마귀를 이김으로 영생에 이르는 것을 약속하신 말씀이다. 범죄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에서 쫓겨났지 만은 그의 후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내모든 죄악과 마귀의 권세 를 이기고 더 좋은 에덴인 하늘에 있는 천국을 상속으로 받는 그 길을 열 어 주신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의 범죄를 가르쳤고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준 성경이지마는 그와 동시에 범죄한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 의 긍휼과 은혜와 축복을 보여준 말씀이기도 하다. 제 2 장 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 전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았다. 범죄한 저들 일찌라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던가를 더듬어 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불러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찾으신 것도 범죄한 인간에게 베 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죄 값으로 첫 여성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받게 되었으나 자식을 낳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더구나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니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했다. 또 저들이 에덴에서 쫓겨 났지만 하나님께서 저들로 땅을 갈게 함으로 지 상의 문화를 건설케 하셨으니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더구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리라"(창3:15)는 약속과 저들에게 자죽옷을 지어 입 히신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어떠하며 그 은혜가 어떠한가를 보여주 고 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후 두 아들을 낳았다. 이름지어 가인과 아벨이라 했다. 가인이란 히브리 말의 원뜻은 [얻었다]란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아담 과 하와의 기쁨을 표시한 말일 것이다. 그들의 기쁜 마음으로 "아! 아들을 얻었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줄 안다. 본래 아담은 이름을 짓는데도 명수였 다(창2:19). 아담은 그의 둘째 아들을 아벨이라고 불렀다.그 뜻은 [허무하다]이다. 이로 써 우리는 둘째 아들을 얻었을 때에는 기쁨보다 오히려 인생의 허무를 느꼈 던 듯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만일에 장차 다가올 아벨의 운명을 그가 예감한 때문이었다면 그는 또한 얼마나 깊은 영감 소유자 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아담의 예감은 그대로 적중되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 범죄한 아들의 자식들은 그처럼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살인으로 시작했다. 왜 아벨 은 죽임을 당했던가. 한 마디로 그는 더 나은 제사를 드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히11:4). 여기서 우리는 태초부터 의인이 죽임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그런 불함 리한 현실에 부딪친다. 아벨은 자기의 이름 그대로 허무하게도 악인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결단코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으셨 다. 아벨의 죽음은 결코 허무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서 11:4 에는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오히려(살아서)말하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믿음 ! 이것은 모든 허무한 것을 허무치 않게 만드는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방법이 다. 아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서 참 삶의 길이 무엇임을 천추만대 에 전하고 있다. 가인은 아벨의 영혼까지 죽일 수 없었다. 상상컨대 아벨은 부모에게서 들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들은 바를 믿음으로 실천했다 (롬10:14,17 참고). 또 히브리 11:4에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 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였다. 그는 그 믿음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 거를 얻었고 이로써 의인의 조상이 되었다. 가인은 아벨보다 좀 더 장수했으 나 그것이 무슨 유익함이 있었던가. 이사야57:21에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 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하신 말씀 그대로 가인에게는 평강이 없었다 창세기 4:14에서 가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는 다 나를 죽이겠나이다"하 고 애절하게 호소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이 다 무서워졌다. 인간의 마음에 공포심이 깃든 것은 그때 부터였다. 그는 한 평생을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그는 자기 아들 에녹과 함께 성을 쌓은 것도(창4:17) 결국은 공포 때문에 사람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저주를 받아 유리하는 사람이 되었다(창4:11,12). 그러나 가인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는 가인에게 표를 주어 죽음을 면케 하셨 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그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셨다면 이 얼마나 큰 긍휼이며 사랑인가. 또한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을 통하여 세상의 물질문명을 발전케 했다. 이것 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창세기 4:20에 보면 그의 6대손 야발은 육축을 치는 조상이 되었고, 그 아 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날카로운 기 계를 만드는 자가 되었으니 가인의 후예들을 통하여 목축과, 음악과, 공업과 성을 쌓는 건축까지도 발달하게 하셨다. 이러한 문화 건설은 하나님께서 저 들에게 배풀어 주신 자연 은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땅히 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돌아왔어야 했을 터인데 슬프게도 그들은 오히려 더 멀리 떨어져 갔다. 창세기 4:23-24 에 보면 그들의 대표적인 인물 라멕은 소위 검가, 곧 살인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다. 여러 첩을 얻고 그들에게 그의 검가를 들려 주면서,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네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로다" 고 했다. 그들의 배운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향락과 살인과 권력을 자랑하는 무서운 죄악을 인함이었다. 이러한 가인의 후손들에게 물들 어 아벨의 대를 계승해야 할 셋의 후손까지도 타락하게 되었다(창6:1-3).그리 하여 이 땅은 홍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 3 장 에 녹 <창세기 5장> 창세기 5:21,히브리서11:5참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으며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자라 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 할 때 오직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한분은 노아요, 한분은 에녹이었다. 창 6:9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하였다. 이처럼 완전한 의인이라고 한 노아와 더불어 에녹은 3 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 육신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도 오직 두 사람뿐, 한분은 엘리야와 다른 한분은 에녹이었다. 그러나 3 백 년이라는 긴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증거를 받은 자는 오직 에녹 뿐이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렇듯 의롭게, 경건하게, 온전하게 산 사람을 달리 찾아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에녹은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을까?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그의 행적을 밝힌 곳이 별로 없다. 유다서 1:14에 잠깐 그가 심판을 예언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나 성경에 그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다. 그의 업적이란 3 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직 자녀를 낳았 다는 말뿐이다. 이로 보건대 3 백면 동안의 그의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음 이 분명하다. 그는 성년이 되매 장가를 들어 하나의 평범한 남편이요 가장으 로서는 자녀를 낳아 저들을 기르며 저들을 먹여 살리기에 골몰한 나날을 보 냈을 것이다. 경건한 수도사들 처럼 집을 떠나 수도에만 전념한 그런 사람도 물론 아니었다. 그는 오늘날 많은 자녀를 거느린 모든 가장들이 당하는 그 수 고와 그 시험을 같이 당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밤과 낮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피곤하게 수고로이 일해야 했던 한 가정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렇다. 참 신앙이란 특별한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평범한 생활 중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때때로 경건하고도 엄숙한 형식이 필요하지만 그어떤 의식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우 리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에녹의 모범은 바로 여 기에 있다. 어린 자녀들에게 먹을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작은 일을 통해서도 우 리는 결코 자녀들만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그것을 받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어린 소자에게 도 냉수 한 그릇 나누어 주는 그 작은 일 속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있다. 또한 에녹의 생활은 이처럼 평범했을 뿐 아니라 지극히 미미했음을 본다. 창세기 4:16절 이하에 보면 가인의 아들인 에녹은(동명 2인) 큰 성을 쌓아서 그것을 에녹 성이라 하여 자기 이름을 남겼고 야발은 큰 장막을 치고 많은 육 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에녹에게는 이렇다 할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 는 아브라함과 같이 재단을 쌓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고 이삭과 같이 우물 을 남기지도 못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에녹의 일생이란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인생을 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가장 큰 칭찬과 더불어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 그처럼 기쁘 시 게 한 자라는 증거를 받은 자가 에녹밖에 누구이며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감 을 받은 자가 엘리여와 에녹 외에 또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머리는 좋고 꼬리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이다. 비록 남의 눈에 나타나지 않는 미말에 속하여 있다 할 지라 도 우리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머리가 되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자 보다 꼬리가 되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 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값 있는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큰 업적을 남길 수 만 있다면야 얼 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하여 낙심치 말자. 믿음으로 마치는 깨 끗한 생애를 남길 수 있다면 이에서 더 큰 성공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에녹 은 신앙의 승리자 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신앙이 어떠함을 알기 위해 그가 살던 시대가 얼마나 악한 시대였는가를 알아 봄이 좋겠다. 그는 세상이 악하 다고 그 세상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악한 세상을 믿음으로 이겼다. 그 것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한 것인 줄 안다. 그 시대는 악한 자가 뽐내는 시대였다. 창세기 4:23에 "내 아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의기양 양하여 자기의 권세를 뽐내는 노래였다. 그처럼 악한 자가 득세하여 하나님을 비웃는 그런 시대에 살았던 에녹은 그 시대상을 슬퍼한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 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걍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 죄하려 하심이라"(유다서1:14-15). 이것이 바로 악한 시대를 향하여 외친 심판의 예언이었다. 그가 산 시대는 이제 머지 않아 곧 물로 심판을 받아야 했던 노아 시대 바로 직전이었다. 에 녹은 그 시대의 빛이 되어 썩어져가는 세상의 소금이 되었다. 그것을 하나님 께서는 기뻐하셨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신앙이란 어떤 것인 지 우리는 에녹을 통하여 배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의인을 악한 세상에 더 남겨 둠을 원치 않으셨다. 그 를 부르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 지 라도 그 의인이 화액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깨닫는 자가 없도다"(이사야57:1) 함과 같이 에녹이 높이 들려 취하여 감은 하나님께서 그로하여금 화액(심판) 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시던가 생각 된다(참고, 벧후2:5-9). (*) 제 4 장 바벨탑과 니므롯 <창세기 10-11장 참조> 니므롯은 인류 역사의 첫 영걸로서 첫 제국을 건설한 첫 임금이기도 하다. 그가 건설한 첫 나라는 바벨론의 앗수르를 합친 큰 제국이었다(창10:10-12). 또 그는 니느웨의 큰 성을 건축한 사람이기도 하다(창10:11). 그 뿐만 아니 라 유명한 바벨탑도 그가 중심이 되어 그의 명령과 지휘로 건설된 것임이 분 명하다(창10:10과 11:1-6참조). 이제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또 그가 건 설한 바벨탑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지를 창세기 10장과 11장에서 생각해 보자. 1. 그는 인류 역사상 첫 영웅이었다 창 10:8,9에 "함의 아들......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하였다.여기 영걸이란 히브리 원어(끼뽀르)는 힘이 강한 자란 뜻이 다. 그러므로 영문성경(King James)에는 그저 강한 사람(mighty man) 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을 본다. 그처럼 힘이 세고보니 자연히 들짐승을 사냥하는 사 냥하는 사냥군이 되었다. 창세기 10:9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라고 했음을 보는데 여기서 특이한 사냥군이란 과거에 없었던 특별한 사냥군 이란 말이다. 후세에 흔히 말하는 사냥군이란 말이다. 후세에 흔히 말하는 사냥군과는 다르다. 그때는 벌써 황무한 땅에 들짐승들이 번성해서 사람과 가축을 해치던 때였다. 그러므로 짐승을 사냥한다는 것은 자연히 사람들과 가 축들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출23:29,레26:22 참고). 그러 므로 니므롯은 자연히 유명해졌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얻었을 것이 다.물론 영웅도 되었다. 사람이 한번 영걸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 그것으로 끝 나지 않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나라를 세워 저들을 다스리는 권력자가 되고 왕 이 되는 것은 자연적은 순서일지 모른다.니므롯은 왕이 되었다. 2. 그는 인류 역사상 첫 왕이었다 창10:10에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에서 시작되었으며....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레센(이는 큰 성이라)를 건축하였으며...."라고 했다. 여기에 "그의 나라"라고 했으니 벌써 그는 나라를 조직한 임금이 아닐 수 없 다. 그는 큰 성을 건축했다. 특별히 니느웨 성을 건축했는데 [니느웨]란 그 말은 니너스(Ninus)의 성이란 뜻이다. 고대 앗수르의 신화에 의하면 [니너스] 는 니므롯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들은 말하기를 [니느웨]란 그 도성은 니므롯이 그것을 건설한 후에 자기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의 이름 을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 뿐만 아니다. 니므롯은 자기와 자기 아들들을 신 의 화신이라고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케 했다고 한다. 앗수르의 신화에 의 하면,자기는 하늘의 월신의 화신이요, 자기의 아들들은 별신들의 화신이요,자 기의 아들들은 별신들의 화신이라고 했다. 사막과 광야에 사는 저들에게 있어 서 낮의 뜨거운 해는 사람을 해치는 악신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어두운 밤을 밝히는 달과 별들은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니므롯은 자기와 자기 아들들은 백성을 보호하는 선신이라면 서 자기를 섬기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류 역사상에 맨 처음 우상 숭배를 강요한 자가 되었 다. 또 그때 이후 바벨론과 앗수르에는 달과 별을 숭배하는 우상종교가 시작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니므롯의 이러한 반역행위는 드디어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그러면 이제 그 바벨탑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첫째,바벨탑과 인간의 반역:니므롯은 영걸이 되었고 나라를 세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더욱 망령되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치 않았고 모든 사람들로 자기를 섬기게 했다. 바벨론의 신화와 또 는 고고학적 재료에 의하면 바벨탑의 맨 꼭대기 정상에는 월신,소위[NANA신] 섬기는 제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 앗수르 의 많은 탑들은 소위[지그랏]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뜻은 거룩한 성이란 말이 다. 그것들 위에는 4각형의 제단이 있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지그랏이라는 탑 들의 원형이 곧 바벨탑일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생각할 때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은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월신의 화신이라고 지칭하는 자 기와 자기 아들들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노아 홍수 후에 생겨진 무서운 인간들의 반역행위가 아닐 수 없다. 둘째, 바벨탑과 인간의 교만: 창11:4에 보면 "탑을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 게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니므롯의 교만한 얼 굴을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흔히 어떤 업적을 텅하여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 했다. 사람들로 자기를 찬양케 했고 우상으로 숭배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공든 탑을 무너뜨림으로써 그의 교만을 심판했던 것이다. 셋째, 바벨탑과 인간의 정책:창11:4을 다시 보면 "자 성과 대를 높이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다.여기에서 보는대로 니므롯과 그 일당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사람들을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썼다. 생각컨대 그것은 멀리 탑이 바라 보일 수 있는 한계에서만 사람들이 살도록 제한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로 흩어지지 못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그처럼 그들의 발을 묶어 놓으로써 백성 들의 분산을 막으려 했다.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자기들의 통치밑에 두려는 정책을 썼다. 이러한 니므롯과 그 일당의 야심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 기는 반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 9:1에 보면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며 번성하며 편만하여 그 중에 번성하 라" 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로 온땅에 편만하여 번성하기를 원하였고 또 그렇게 축복하셨다. 그러나 니므롯과 그 일당은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을 어겨 사람들로 온 지면에 흩어져 충만하며 번성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사람들 을 한곳에 묶어두고 그들을 통치하려 했다. 억지로 자기의 통치 밑에 저들을 통일시키려 했다. 인류는 본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과 서로 사랑하는 형제 애로써 서로 연합하여 단결하기를 원했으나 니므롯과 그 부하들은 그러한 영적 연합이 저들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함을 알았음인지 외형적인 수단과 인간의 정 책적인 방법으로써 단결과 연합을 유지하려했고, 통일 보려 했던 것이다. 하나 님을 섬기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를 섬기게 함으로써 단결시켜 보려 했다. 그러한 정책은 드디어 바발탑을 쌓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높은 성과 탑을 건축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쌓게 된 동기 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간의 교만이었음으로 악한 정책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빼앗아 인간의 힘에 굴복케 했고,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을 돌이켜 인간을 우상으로 숭배케 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연합 하고 서로 사랑하는 그것으로 단결해야 할 인간들을 자기의 힘과 정책으로 묶 어 인간의 단체를 조직하고 단결케 하려 했던 그것은 참으로 악한 계획이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니므롯이 자기와 자기의 아들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영원히 다스리는 통치자로 군림하려 했던 것은 얼마나 참람한 일어 었던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장난을 심판 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사람들을 흩어버리셨다. 그때 이후 인간들을의 언어는 혼잡되어 서로 알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바벨탑의 심판은 한마디로 인간들의 그 끝없는 교만과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보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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